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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강
갈 2:1-10
자전적 스토리(2)
I. 여는 말
1. 이번에 갈라디아서를 매일 한번은 기본이고 간혹 두 번을 읽고, 운전하면서 오디오로 한 챕터를 집중적으로 읽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한다.
하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마음 속으로, 머리 속에서 본문을 떠 올려본다. 흐름과 순서를 내 머리 속에 자연스럽게 집어넣게 된다. 이래서 이렇고, 저래서 저렇게 되는구나, 라며 바울의 논리와 감정을 따라 읽으려고 한다. 이렇게 몇 분 정도 눈을 감고 생각하는 시간이 참 좋다.
다른 하나는 후배 목사의 제안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내가 읽었던 책과 경험을 매칭하는 것이다. 내 경험을 연결하는 것은 지난 주, 자전적 스토리(1)에서 이미 선보인 바 있지만, 좀 더 적극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신약으로 박사 공부를 한 후배 목사에게 물었다. 갈라디아서 주석으로 좀 더 추천할 게 있느냐고. 그러다가 나중에 내게 말하기를, 형님은 갈라디아서에 문자적인 세밀함 보다는 우리 시대의 갈라디아서 읽기에 집중하면 어떨까요? 머리를 툭 치는, 뭔가 눈이 반짝 뜨이는 그런 말이었다. <좀 더 부연설명>
2. 지난 주 복습을 간단히 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맥락과 문맥 속에서 본문을 읽고 이해하게 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반추하면서 복음이 무엇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자신의 복음과 권위를 방어하였다.
오늘은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과 예루살렘과의 만남을 기술한다. 이 대면 속에서 복음과 실천, 곧 교리와 윤리가 드러날 것이고, 갈라디아서의 핵심 내용도 동일하게 묻어날 것이다.
II. 본문 설명과 해석
# 1-2절
1. ‘그 다음에 십사 년이 지나서’는 지난 강론에서 다루었다. 그 다음이라고 했을 때의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인지가 이 텍스트 상으로는 불명확하다. 그리고 그것을 특정하기 위한 노력은 이 본문을 읽어내는 데 그다지 보태주는 것은 없고 괜히 헷갈리게 만든다. 다메섹 체험으로부터 14년이 지났든, 첫 예루살렘 방문으로부터 14년이 지났든, 이 본문은 상당한 시일이 지나서야 공식적인 방문과 만남이 있었다는 것, 그리하여 자신은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로부터 독립적인 존재이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다는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면 족하다.
2.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나바와 디도, 특히 디도의 존재이다. 바울의 초점도 바나바가 아니라 디도이다. 그는 ‘디도서’의 수신자인 바로 그 디도이다. 거짓말 잘 하기로 유명한 크레타 섬에서 고군분투는 그에게 바울은 사람을 세우고, 건강한 교리를 가르칠 것을 신신당부하고 격려한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디도가 헬라인이라는 것, 그리고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그를 성전 안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이 문제다. 정통파 유대인 출신이라면, 할례 받지 않은 자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온 것은 자신들의 하나님에 대한 심한 모독이다.
자, 그러니까 바울은 의도적으로 도발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할례인지 뭔지를 받아야 그리스도인이 되고, 교회 멤버십이 된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봐라, 디도를 보라. 그는 할례를 받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이다.
니체가 인용했던, 빌라도가 예수를 유대인에게 소개했던 말, ‘이 사람을 보라’를 갖다 쓴다면, 바울은 예루살렘의 정통주의자 - 어떤 이들은 속어로 꼴통이라고 할 것이다. - 들에게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거다.
3. 이해를 돕기 위해 사도행전에서 바울과 고넬료의 만남을 상기해 주고 싶다. “유대 사람으로 이방 사람과 사귀거나 가까이하는 일이 불법”(10:28)으로 여기던 사람, 베드로가 비몽사몽 중에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 속의 속된 짐승을 속되지 않다는 음성을 듣고 고넬료의 집으로 가게 된다. 예수의 복음을 청하는 그의 가족에게 베드로는 설교를 시작하고, 마칠 때 쯤, 그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한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깜짝 놀란다. 해서, 베드로가 대표하여 말한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침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10:47)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소환당한 베드로가 그 내력을 소상히 밝히며,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행 11:17)
고넬료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어떠한 조건이 필요치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매일성경>의 갈라디아서 부분의 해설을 집필하면서 몇 번이나 이 사건을 주목하도록 독자들에게 요청하였다. 갈라디아서를 수차례 읽은 이들은 성령이 이 서신에서 무지막지하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왜 3장 2절에서 율법을 행해서 성령 받았느냐, 아니면 믿음의 소식을 들어서 성령을 받았느냐는 바울의 항변은 고넬료의 회심 본문에서 성령이 어떻게, 누구에게 왔는가를 보면 단박에 안다.
4. 할례를 받아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고넬료 사건과 디도서에 나타나는 디도의 경건한 삶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더 이상 잘 말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있게 디도를 데리고 간 것이리라.
수수하고 순박한 삶을 살았지만 깔끔하고 정갈한 언어와 논리로 성경을 가르쳤던 존 스토트 할아버지는 나는 가볍게 넘어간 바나바의 존재를 디도와 같은 선상에 올려 놓는다. 그러니까 할례받은 유대인, 바나바!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디도!
나는 여기서 내친 김에 몇 발 더 나아가려 한다. 오늘 강론의 본문에 바울과 베드로의 관계가 나온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를 인정하기! 그렇다. 바울 안에 바나바와 디도는 둘이면서도 하나인 거다. 바나바는 바나바로 구원받고, 디도는 여전히 디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베드로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듯이, 각자의 삶의 이력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으면 되지, 남이 되려고 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된다.
5. 2절을 공부하자.
주시할 단어가 셋이다. 계시, 따로, 헛되지 않게, 이다.
먼저 계시라는 말의 단어적 의미에 치중하지 말고, 그것이 말하는 바를 보도록 하자.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계시, 곧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에 따른 행동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내가 즐겨 사용하는 논리는 뒤집는 것이다. 계시가 아닌 것을 생각해 보자는 말이다. 계시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이지 사람의 계시일 리 없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과 부르심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 특정해서 말하면, 하나님에 필적하는 권위를 지닌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이 불러서 간 것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들이 인간적 권위로 ‘야, 너, 바울. 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와서 말해 봐라. 소문이 흉흉하다. 내/우리가 듣고 판단하겠다. 보고서 제출해!’라고 해서 바울이 마지못해, 곧 중요하게 사용될 단어를 미리 툭 던지면, 억지로 끌려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6. 2절을 면밀하게 읽으면 바울은 자신의 복음, 이방인에게 전달했던 복음을 두 번 설명하였다. 한 번은 그들에게, 이고, 다른 한 번은 유명한 사람들이다. 이 본문 또한 학자들이 토론하는 사안인데, 앞의 그들은 교회 전체라고 보고, 공적이고 공개적으로 바울이 보고했다고 보면 되겠다.
유명하다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읽기에 따라, 은근한 비꼼의 뉘앙스가 엿보이기도 하고, 존경의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7. 바울의 성정과 스타일을 보건대, 그리고 여기서 바울이 유명하다는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내 나름 추론해 보면, 자존심에 약간 스크래치가 났을 듯 싶다. 그 자존심 쎈 바울이 대선배라는 권위를 갖고 있는 이들에게 ‘따로’ 설명했다는 것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달린 일이 헛되지 않게 하려는 고육지책이랄까, 바울의 절박감이랄까, 그의 지혜로움이랄까, 저주나 퍼붓고 폭력적 열정을 불사르던 전사적 바울과 다른 결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주 간단히 넘어가자. 바울이 달린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는 것, 신앙의 여정과 경주를 그렇게 표현을 즐겨했다는 것을 말이다.
간단하다. 자신과 사도들 사이에 쓸데없이 오해가 발생하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거짓 형제들의 농간으로 첫째, 복음이 왜곡되고, 둘째, 교회가 갈라서고, 셋째, 선교에 지장이 생기고, 넷째, 제자도와 윤리적 삶이 뒤틀린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유명하다는 이들 앞에 공손하게 자신이 그 동안 가르쳐왔던 것을 차근차근 설명할 수밖에. 12사도들이 죽 둘러 앉은 방에서 바울 홀로 서서 - 바나바와 디도가 뒤에서 시립해 있었을 수도, 아니 디도는 어쩌면 출입 자체가 거절되었을 수도, 아니 뒤의 맥락으로 보건대, 베드로와 야고보가 디도도 참여하게 했을 수도 - 몇 시간 동안 심문 같은 연달아 쏟아지는 질문을 받았으리라.
8. 바울은 참으로 희한하다. 디도를 전략적으로 데리고 가는 치밀함과 급진적 도발을 보이는 과감함을 선보이지만,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 앞에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지혜로움 혹은 겸손이 드러난다. 야곱이나 다윗이나 김기현이나 바울은 모두 이중적 인간이로구나!
# 3-5절
1. 나는 3, 4절의 억지로 강요받지 않았다는 말과 5절에 잠시도 굴복하지 않았다는 말이 이 구절의 키워드라고 본다.
2. 그 전에 억지로 강요하는 자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급선무이리라. 거짓 형제 말이다.
3. 거짓 형제가 누구인가, 를 묻기 전에 이 단어가 바울의 시선과 언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보기에 그들은 거짓, 곧 사이비 신도들이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바울의 눈을 빌리지 않고 본다면, 이들은 보통의 그리스도인 아니면 열심이 특심한 신자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1강에서 밝힌 바대로 모세의 율법 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다(행 15:1)고 주장하는 경건한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부정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예수를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방인이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 맘대로 상상해 본다면, 그들은 그들에게 너무나 상식적인 할례가 이방인들에게는, 특히 바울과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안 지켜지는 것을 보고 의아했을 것이다. 해서, 할례를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했다가 서서히 가열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처음부터 그들은 내부의 들끓는 분노를 엄숙하고도 엄정한 목소리에 묻혀서 “야, 너희들은 왜 할례를 안 받냐? 왜 무시하냐?”라고 했을까?
4. 일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바울의 글이다. 바울의 글을 바울이라는 몸을 지닌 한 인간의 글로 치부하지 않고 그를 통한 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바울의 판단이 옳다는 것을 수용하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그들을 거짓 형제라고 했을까? 이를 위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캐내어서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기 보다는 이 텍스트 내에서 거짓 형제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갈라디아서 독법으로 더 적합할 것이다.
하나 주의할 것은 이 문장을 읽는 혹은 강조점을 뭘로 볼 것이냐 따라 두 가지 독법이 가능하다. 하나는 억지로 강요하지 않았을 뿐이지 자연스럽고도 자유의지로 할례를 받게 했다, 받았다는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억지 보다는 받지 않았다, 에 방점을 찍는 독해이다. 조금 거리를 두고 앞뒤 맥락을 살피면 결국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내가 보기에 그들은 두 가지 결정적 오류를 갖고 있다. 하나는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나의 이 포인트를 보고, 지난 주 바울의 자전적 스토리가 떠올랐을 것이다. 남을 죽이면서까지 신앙적 헌신을 보여주었던 바울의 열심 말이다. 지금 이들도 할례를 폭력적으로 타인에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할례가 뭐라고?
다시 말한다. 할례를 타인의 신앙의 자유를 내 잣대와 기준, 관점으로 함부로 무시하고 내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폭력이다. 그래서 바울이 보기에, 그리고 나도 보기에 그들은 거짓 형제임에 틀림 없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운운하고, 루터와 칼빈의 칭의론을 토론함에 있어서 가장 유력한 텍스트 중 하나인 갈라디아서를 공부하는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도 당시의 교회에 저항했던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아나뱁티스트’에 상당히 경도되고 공부하는 학자인 내게, 신앙의 폭력성은 그 신앙의 칭의, 곧 정당함을 입증하는 가장 유력한 증거 중 하나이다. 신앙을 강요하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념이고 이데올로기이다.
아나뱁티스트들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특이하다 못해 기이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16세기에 1세기를 살았고, 21세기를 앞서 살아냈던 이들이다. 21세기인 지금도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을 하고 실천을 했으니 죽을 수 밖에.
아나뱁티스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슐라이타임 고백서>의 기초와 초안을 작성한 미카엘 자틀러의 순교 이야기를 보면, 이들이 얼마나 신앙의 자유를 옹호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를 기소한 이유는 9개이다. 그 마지막을 보면 충격적이다.
이교도인 터키 족이 쳐들어와도 저항도, 전쟁도 반대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가 중요한데, “나는 차라리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사형을 시키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을 향하여 전쟁을 벌이는 편이 더 낫다”고 본다. 왜 그런가? 그들이야 어차피 육에 속한 자들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경건한 신자들을 핍박하니 영적인 터키족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하고 처참하게 처형된 자틀러 사후에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주도했던 유명한 신학자가 휘브마이어이다. 그는 “이단자”라는 소책자에서 믿음은 강요당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역설했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보이는, 아니 지금도 불편하게 읽히는 그의 말은 이렇다. “비록 국가라 해도 어떤 이가 무신론자일 경우 종교적인 차이 때문에 그에 대해 무력을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에스텝의 <재침례교도의 역사>, 103쪽)
그러니까 아나뱁티스트들이 볼 때에, 왜 이단자라고 때리고 가두는지, 이교도라고 전쟁을 불사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그저 신앙이 다르고, 종교가 다를 뿐인데 말이다. 왜 신앙을 강요하느냐고 묻는다. 신앙을 살아내지 않고, 신앙의 목격자가 되지 않고, 신앙의 증인이 되기는커녕 신앙의 강요자가 되느냐고 반문한다. 신앙은 애시당초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세상에 강요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 시대의 교회들이 할례주의자에 다름 아니라는 혐의를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 내가 심한 비약을 하고 있는가?
6. 자, 그들이 거짓 형제인 두 번째 까닭은 그들이 신도의 자유를 빼앗았다는 데 있다. 사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바이다. 신앙을 강제하고 강요할 때, 그것은 타인의 자유를 빼앗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을 자유, 믿지 않을 자유.
나는 여기서 18세기의 루터란이지만, 내게는 익명의 아나뱁티스트라고 해야 할 사람, 키에르케고르를 소환하고 싶다.
“주민등록증 = 유아세례” 설명할 것.
7. 복음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자. 앞에서 말한 것으로 보자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 의미의 복음의 진리일 것이다.
보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신자가 됨에 있어서 할례와 같은 어떤 것을 조건으로 내걸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복음의 진리는.
이것을 교회론적으로 말하면,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할례와 같은 육체적 조건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 그가 유대인든, 헬라인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주인이든 노예이든 간에(3:28) 그것이 제약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 어디에 배치할지 몰라 잠정적으로 여기에 둔다.
존 스토트가 인용한 구절. “라이트푸트 감독이 적절하게 지적한 대로 바울이 양보한 대상은 ‘약한’ 형제들이었지 ‘거짓’ 형제는 아니었다.”(49쪽)
8. 3-5절의 잠정 결론
신앙은 강요할 수 없다.
강요된 신앙은 신앙이 아니다.
신앙이 신앙이기 위해서 자유가 있어야 한다.
신앙의 자유의 최소한은 선택할 자유이면서도 선택하지 않을 자유이다.
그리고 바울은, 아니 아나뱁티스들은 16세기의 바울이다. 아나뱁티스트들이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배려한 것으로 순교를 당했다면, 바울은 십자가의 고난과 예수의 흔적, 적대자들의 선동으로 고생.
# 6절 :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하나님
1. 나는 6절의 상반부에서 바울이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에게서 어떤 것도 더하지도 않았고, 뺀 것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위의 설명으로 대체하려 한다.
2.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는 가운데에 자리하는 문장을 주목한다.
3. 그런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련다.
로마서를 읽을 때이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로마서 2장 11절이다. 새번역은 그 속뜻을 좀 더 쉽게 알 수 있도록 번역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 그냥 이 구절이, 단 하나의 구절이 로마서에서 무지무지하게 중요하다는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다. 하하하.
산상수훈을 많이 읽어서일까? 5장에는 옛 사람과 예수 사이의 반제가 등장한다. 그 중 하나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인데, 그곳에서의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분이다. 하늘의 해가 이 땅을 비출 때, 저 사람은 착한 농부야, 그러니 좀 더 많은 태양빛을 주고, 저 놈은 고약해, 그러니 아예 햇빛이 들지 않도록 해야 겠다, 그러지 않는다. 내리는 비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나중에 좀 더 깊이 설명하겠지만, 내가 몇 년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있는 제자백가의 한 사람인 ‘묵가’의 책, <묵자>에서도 산상수훈과 거의 똑같은 언어와 사상을 볼 수 있다.
내 흐릿한 기억에 의하면, 로마서 구절을 보면서 갈라디아서에도 있다는 것을 떠올렸던 듯 싶다. 사람을 겉모양으로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연결해주는 핵심 고리 중 하나가 아닐까? 비전문가로 신약을 읽는 비학문적 후기요 감상일 뿐일까?
4. 아무튼 바울은 여기서 사람들이 유명하다는 이들이나 무명한 자신이나 외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한국인들의 전문가적 권위에 관해 좀 더 숙고하고 쓸 것.
청소년인문학교에서 저자, 전문가, 일일인문학캠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할 것.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리고 나의 나됨은 업적이나 지위, 가진 소유가 아니다.
5. 6절의 맥락에서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은 바울과 베드로라면, 갈라디아서 전체에서 바울의 하나님 해명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외모, 곧 출생의 조건으로 구원을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는 앞으로 바울이 말한 외모, 혹은 겉모양, 할례를 우리 시대에 의미하는 바를 탐색해보려 한다. 나의 탈콘스탄틴주의와 반기초주의 신학에 입각해서 말이다.
6. 나는 나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 하나님이 좋다.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조건으로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사회에서 갑질하는 사람들은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심판하는 하나님을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 7-9절 : 바울과 게바의 역할 분담
1. 7-8절의 내용은 바울 입장에서 보면, 자신과 자신의 복음이 예루살렘의 권위있는 사도로부터 공식적인 인정을 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외적으로는 바울과 예루살렘 사이를 이간질해서 복음을 교란하고 교회를 뒤흔드는 다른 복음과 거짓 형제의 주장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아무 근거 없는 뒤흔들기이었던 셈이다.
내적으로는 역할 분담과 협력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서로 다툼과 분열 없이 각자의 부르심과 은사와 역할에 충실한 것,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2.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 것이다. 바울은 베드로에게서, 베드로는 바울에게서 무언가를 보았다. 상대방을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이 각자의 외적 조건을 차별하지 않고, 차별 없이 사용하신다는 것을, 베드로와 바울이 차별 없듯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 없다는 것을, 목사와 교인이 차별 없다는 것을, 다만 서로 다르다는 것,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고 자유이다.
3. 9절로 가면, 기둥이 뭐냐, 세 사도의 이름 순이 왜 이렇게 되었냐를 두고 예의 학자들은 또 논란을 벌인다. 무시할 수는 없지만, “오른 손을 내밀어서 친교의 악수”를 나누었다는 주된 포인트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친교의 악수를 해명하는 것이 엄청 중요하다.
롱에네커에 따르면, 오른 손을 내미는 것은 우정을 맹세하고 서로의 합의를 승인하는 행동이란다.
나는 차라리, 나관중의 <삼국지>에서 유비와 관우, 장비가 복사꽃 핀 정원에서 도원결의를 맺는 장면을 연상하니까 더 잘 이해된다.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우리는 동일한 주님의 몸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우리는 한 몸이고, 한 형제 자매이다. 우리를 형제, 자매, 곧 한 가족으로 만드는 것은 혈연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곧 십자가이다. 십자가 아닌 것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모두 물러가라! 뭐 그러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주님이 살을 상징하는 빵을 떼고, 주님이 흘린 피를 가리키는 포도주를 마셨다고 하면 불경하고 터무니없는 상상일까?
4. 나는 여기서 우리 시대의 갈라디아서를 조심스레 말해 볼까 한다.
그 하나가 뉴스앤조이와 최병성목사이다. 간단히 설명할 것.
교회 안에 노사모 vs 박사모가 있다면?
촛불집회 vs 극우파 집회자가 있다면?
5. 다른 하나는 우리 시대의 정신과의 대결이다.
올해 초에 작고한 폴란드의 유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에 관한 책에서 그가 종교 관련 대담집 두 권을 서평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쓴 글에서
다신론 vs. 다성음 (지그문트 바우만의 <인간의 조건>)
나는 바우만의 다신론 보다는 다성음에 더 끌린다. 좀 더 보충할 것.
# 10절 : 가난한 자를 위한 연대
1. 10절은 특이하다. ‘다만’이라는 단어에서 보듯이, 읽기에 따라서 부차적이고 부대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너무 중요하기에 바울과 베드로의 합의에 그저 부속 협약으로 축소할 수 없기에 명토박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2. 그리고 이 구절의 배경을 예루살렘의 기근으로 이방인교회들의 구제 헌금과 연관지을 수도 있다. 이방 교회의 헌금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많이, 지속적으로 헌금해 달라는...
이런 해석이 나름 일리 있는 것이 로마서로 기억하는데, 그곳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영적 빚이 있고, 그 빚을 물질적 나눔으로 갚아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3. 그런데 롱에네커는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을 반드시 금전적 나눔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을 마음에 두고 깊이 간직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글쎄. 가난한 자를 마음에 두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 무슨 말인가? 저 유명한 구절, 요한일서 3장 18절을 감안한다면, 행함 없는 믿음에 대한 신랄하기 그지없는 야고보서의 엄중한 경고가 있는 한, 복음서에서 특히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를 기억한다면, 그런 해석은 물질적 부분을 비물질화한다는 혐의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를 기억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를 위한 물질적 나눔을 실천한다는 말로 해석하는 것이 성서 전체의 맥락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럴 때에 6장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목회자와 좋은 것(6절), 물질적인 것, 경제적인 것을 나누라는 말과 잘 이어지고, 믿음의 식구들에게도 선한 일을 하라는 구절(10절)과도 아귀가 맞다.
4. 이 구절에서 나는, 복음은 물질적이다! 자유의 토대는 경제적이다! 라는 공식을 제출하려 한다. 좀 더 깊게 연구해 보고 싶은데, 최소한의 경제적 소유가 없다면 그에게 자유는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남에게 내세울만한 가난을 겪어본 적은 없다. 그러나 남 못지않는 가난한 시절이 꽤 오래 동안 겪었다. 그런 내게 가난하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지, 가난하면 사람이 비루해진다는 것을 여실히 안다. 어느 가수는 사랑은 연필로 쓰라고 했다지만, 나는 사랑은 돈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책을 쓴 분이 정작 자신은 나름 부유하게 아니 가난하지 않게 살면서 애먼 사람만 가난하게 살게 만든 것은 아닐까, 그런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종작없는 생각을 하곤 한다.
5. 또 하나! 바울은 가난한 자를 위한 투쟁과 가난한 자를 위한 교회의 연대, 곧 교회의 하나됨은 무지하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교회가 동성애 문제로 인해 미국에서는 교단이 분열되고, 교인들끼리 마음이 돌아서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적어도 10년 이상, 미국과 한국에서 터지는 화산처럼 교회를 잿더미로 만들 어젠다이다.
나는 슬프다. 그리고 이 발언만으로 난타 당하지 싶다.
동성애자를 사랑하기 위한 투쟁이나 연대가 아니라 동성애를 미워하는 투쟁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서에서 고작 서너 번 언급된 동성애로 교단이 분열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합의가 안 되면 안 되는 선에서 유보하고, 성경의 절만을 차지한다는 가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를 앞서 실천해야지 않겠는가.
6. 존 요더이 <예수의 정치학>에 견줄 만큼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학>은 내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내가 20대와 30대에는 내가 단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해방신학>을 말하곤 하였다.
어찌되었건 월리스는 <하나님의 정치학>에서 참 재미나고 쓸쓸한 이야기를 한다. 성경에서 가난한 자와 정의에 관한 구절을 일일이 찾아 도려내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절반이 날아가더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했는지 궁금하지만, 너무 정색하고 절반이냐, 정확하게 50%냐고 따지는 바보가 되지 말자.
그는 어디를 가든, 그 성경책을 보여주면서 설교를 한다고 한다. 우리는 성경의 절반을 뺀 나머지를 말하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바울이 여기서 맥락없이, 뜬금없이 가난한 자를 말한 것은 아니리라.
7. 그리고 악한 세대를 말하면서, 바울의 폭력적 열정을 말하면서, 나는 복음에서 배제된 자, 맞아도 되고 때려도 되고 죽어도 마땅한 이방인이나 소외된 자를 말한 바 있다.
가난한 자도 그 맥락에서 보면, 비폭력적으로 사랑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야 말로 체계적으로 배제된 자들이 아닌가.
갈라디아서 전체가 누구나 차별없이, 그의 사회적, 인종적, 민족적, 성적인 외적 조건과 외모, 겉모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핵심 테제라고 할 때, 경제적 차별인 가난한 자를 배려하고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바울적이고, 성경적이다.
8. 이제 우리 교회가 교회 보다는 외부에, 상당한 재정적 부담을 감수하면서 구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할 것>
닫는 말
1. 정리하지 않겠다. 각자 자신이 은혜 받은 바, 깨달은 바를 중심으로 각자의 본문 묵상을 정리하고, 나의 강론을 정리해 보자. 그것은 강론자의 권위로 교우와 청중들에게 억지로 제시할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각자 한 말씀을 읽으면서도 다르게 은혜를 받는다. 어찌되었건, 이 강론을 듣고 배우고 느낀 점을 간단하게마나 글로 정리해 보자. 그것이 기도가 되도록!
2. 다음 강론은 갈라디아서 2장 11-21절이다. 매일 갈라디아서를 한 번 이상 읽고, 저 본문을 좀 더 깊게 묵상하고, 나 자신에게 적용한 것을 나누면 좋겠다.
질의 응답 시간
배우고 깨달은 것을 숙고하는 시간을 갖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