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암릉의 향연, 설악산
1. 일자: 2023. 10. 7 (토)
2. 산: 설악산(1708m)
3. 행로와 시간
[한계령(03:00, 920m) -> 능선갈림(03:55) -> (다리) -> 한계령 삼거리(04:50, 끝청 4.2km) -> (너덜) ~ 1450봉(06:15) -> 끝청(07:15) -> 중청대피소(08:10~59) -> 대청(09:30) ~ 중청대피소(10:00) ~ 소청봉(10:30) -> 희운각(11:20) -> 무너미고개(11:32, 양폭 1.8km) -> 양폭대피소(12:30) -> (귀면암) -> 비선대(13:50) -> 설악동(14:42)]
2019년 5월 공룡능선을 탄 게 마지막이었으니, 설악은 4년 5개월만이다. 그 사이 지리는 4번 다녀왔다. 설악에겐 미안했다.
추석 연휴의 아침을 즐기려 신대호수 물가를 거닐고 있을 때 기영에게 톡이 왔다. 설악산에 가고 싶단다. 글은 부드러웠지만 반드시 가자는 '협박'이 느껴졌다. 2주 전 천왕봉을 힘겹게 내려올 때부터 예견했던 바다. 지리나 설악에 맛들이면 그 유혹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천왕봉에 올랐으니 대청봉이 욕심나는 건 당연지사다. 반더룽 대장에게 문자를 보낸다. 입금부터 하란다. 최성수기의 배짱이 느껴진다. 순식간에 금요무박 산행이 결정되었다.
한계령을 들머리, 설악동 C지구를 날머리로 코스를 구상해 본다.
서북능선 삼거리까지는 2.3km, 시작 고도가 높다고 좋아했던 말이 쑥 들어갈 정도로 센 된비알을 이겨내면 대청까지 약 6km의 긴 서북능선이 이어진다. 족히 5시간 이상을 예상한다. 곧 사라질 중청대피소에 배낭을 두고 대청봉에 다녀와 아침을 먹을 작정이다. 중청에서 바라보는 공룡과 설악의 연봉들이 머리에 아른거린다.
하산길, 희운각까지 약 2km는 설악은 내리막도 만만치 않음을 증명할 것이고, 천당폭포, 양폭, 귀면암을 지나 비선대까지 5.3km는 풍경은 멋지지만 발과 종아리와 허벅지가 죽어나는 기나긴 여정이 될 게다. 이후 소공원까지 3km는 설악이 주는 긴 노고에 대한 보상이리라. 총 20km, 11시간의 산행을 예상한다.
설악동에서 아마도 단풍철 인파에 버스는 타지 못할 게 뻔하므로 추가로 3km를 더 걸어야 산악회 버스가 기다리는 C지구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험은 긴 줄과 엄청난 인파를 예고한다.
새벽 잠의 유혹, 20km가 넘는 긴 거리,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긴 고행을 이겨내고도 남을 아름다운 풍경이 나와 친구를 이 길에 기꺼이 나서게 만든다. 머릿 속의 온갖 상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대청봉 정상의 붉은 음각 글씨가 머리에 아른거린다. 설악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가슴이 뛴다. 그 콧대 높은 여인과의 만남이 또 설렌다.
(여기까지는 다시 설악을 준비하며 기록한 것이다. 산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 기대된다.)
< 한계령 ~ 중청 >
질주하는 어두운 버스, 스치는 검은 풍경과 마주하며 눈을 감으면 밤으로의 긴 여로가 또 시작되었음을 실감한다. 아득한 긴장감이 몰려든다.
새벽 3시 한계령, 몇 번을 와도 익숙해지지 않는 여전히 낯선 상황, 랜턴의 불빛이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1.1km 극강의 오름을 55분에 마치고 안부에 닿고 내려섰다 다시 1.2km를 올라 한계령삼거리에 당도한다. 반은 인파에 떠밀리고 반은 졸음에 겨워 무의식적으로 오른 느낌이다. 한 고비 넘겼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잠시 평탄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3.5km 이정목을 전후로 이어지는 긴 너덜은 인내심을 실험했다. 다시는 이 길로 설악을 오르지 않으리란 다짐을 반복한다.
한계령~대청 구간의 절반 지점인 1450봉 전망대에 서니 여명이 밝아온다. 멀리 주걱봉의 특이한 모습과 귀때기청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이 선명하다. 이어지는 길은 용아장성이 전모를 드러내고 설악의 연봉들이 기지개를 펴는, 그야말로 눈이 즐거운 걷기였다. 피어오르는 실안개 속의 설악의 가을은 먼 속초 바다와 조화를 이루며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인 풍광을 선물한다. 기영은 날을 잘 잡았다고 좋아한다. 다행이다. 앞으로 더 설악에 빠질 친구의 뒷날이 그려진다.
상대적으로 덜 험하다 하지만 끝청으로 향하는 길에는 졸음이라는 복병이 찾아왔다. 기영을 뒤로 하고 앞서 간다. 풍경에 감탄하고 동시에 힘겨운 걸음을 이어가며 한계를 경험한다. 예전 산행에서 인상 깊은 장소로 기억하는 고목이 길가에 활처럼 휘어 서 있는 '나무 개선문'을 기대하며 걷지만, 9년 이란 시간을 이겨내지 못했는지 그 존재를 찾지 못했다. 많은 것들이 시간 앞에서 사라져가는 게 안타깝다.
중청을 돌아든다. 갑자기 안개가 몰여든다. 곧 사라질, 인파로 북쩍이는 중청대피소에 자리를 잡고 버너에 불을 붙인다. 50여분, 작은 버너와 7~8년은 더 사용한 가스통 덕에 지나는 이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졌다. 드립 커피로 입가심까지 하는 호사를 누렸다.
< 중청 ~ 희운각대피소 >
시간은 9시를 향해 간다. 배낭은 두고 삼각대만 들고 대청으로 향한다. 어깨에 짐어 사라진다는 게 이런 자유로움을 준다는 걸 새삼 느끼며 룰루랄라 정상으로 향한다. 구름이 걷히고 드러나는 암릉과 바다가 함께하는 풍광은 그 자체가 천상의 그림이다. 여러 번 대청에 올랐지만 오늘 만큼 풍경이 화려한 날은 없었다. 서두르는 내게 기영은 '이 좋은 경치 좀 가슴에 품고 가자' 란 말로 내 조급함을 나무란다. 그래 맞다. 서두를 이유가 뭐가 있으며, 언제 다시 이 좋은 모습과 마주할 수 있겠는가. 값진,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1시간이 고맙게 지나간다. 아주 오래 기억될 모습을 가슴에 담아 둔다.
소청봉 하산 길의 풍광도 화려했다.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이 경쟁하듯 자태를 뽐낸다. 새로 단장한 희운각과 소청대피소의 건물 지붕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감동과 감탄이 끊이지 않는다. 희운각에 도착하여 올려다 보는 눈에는 산을 내려오는 있는 단풍의 모습이 선명하다. 이 역시 감동스럽다.
< 희운각 ~ 소공원 >
기영에게 계곡 물소리가 들릴 때까지는 힘겹게 내려서야 한다고 말한다. 천당폭포와 계곡 속 작은 담들이 옥빛 물빛을 드려내면서부터 눈과 귀를 자극하는 천불동계곡 하산길이 본격화된다. 얼추 1시간 만에 양폭, 다시 1시간 조금 넘어 비선대에 도착한다. 무척 빠른 속도로 계곡을 내려왔다. 이어지는 소공원 길은 평지를 흙을 밟으며 걷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호사임을 알려주었다.
'무사한 나날들', 때론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평범하게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일도 등산도 내겐 일상이다. 이 순환이 계속되기를 바라며 행복으로 삼기로 한다.
흥정 끝에 택시잡기는 포기하고, 밀려 올라오는 차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체념하고 한참을 걸어내려가다 오늘부터 서비스가 시작된다는 셔틀버스를 용케도 타게 되었다. 작은 행운에 천하를 얻는 냥 행복해 했다.
< 에필로그 >
일요일 이른 아침,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사진을 PC에 옮겨 페이지를 넘긴다. 아하! 하는 감탄사가 또 나온다. 어제 산에서의 일들이 고스란히 살아서 움직인다. 힘겨운 일들은 사라지고 행복한 모습만이 정지된 채 사진에 담겨 있었다. 한마디로 가을 설악의 풍광은 결코 애써 오른 이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왜냐고, 왜 굳이 그 극한의 고생의 감내하며 설악에 오르냐고 묻곤 했다. 산에서 찾지 못했던 답을 집에서 찾았다. '다시 감동하고 싶기 때문이다.' 위안 받고 싶고,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삶의 방식이라 여겨진다. 설악에 안 가본 이는 많아도 한 번 간 이느 적다는 흔한 이야기가 새삼스럽다.
지리산에서도 그랬지만, 첫 설악 산행을 마친 친구의 느낌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감동 이상의 진한 여운이 느껴지는 경험이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가고픈 서락 ..! ! ^^
덕분에 서락 단풍도 보고
잠시 옛 생각에 빠져 봅니다. ^^
설악보러 가자 가자 하면서도 여러가지 일들이 발을 잡네요. ^^
청계산에서 오래만에 봐요. ^^
잘봤어요 ^&^
ㅎㅎ 잘 계시죠?
오랜 만에 가니 힘들었지만 좋았습니다.
예, 곧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