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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고난을이겨내는 절대적인 무기욥/37/26.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알수 없고그 년수를 계산할수 없느니라
욥이란 인물은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욥 같은 고난을 당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루만에 자기가 소유한 모든 재산과 종과 자녀를 다 잃었습니다. 욥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난을 총체적으로 받은 사람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 욥이 당한 고난 중의 한 가지만이라도 당하였다면 과연 이겨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단언 컨데 찾아보기 힘들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으로서는 버티기 힘든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은 담담하게 그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지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분명히 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믿음을 가진 자였다는 말이지요. 욥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이 있었던 거예요. 솔직히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믿음이 있을지라도 고난을 이겨낼 만한 믿음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난 앞에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별것도 아닌 고난 앞에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욥이 당한 고난을 비교하는 자체가 무리인지 모릅니다. 왜냐면 욥이 당한 고난은 고난이 아니라 거의 재앙의 수준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고난이요, 연속적으로 일어난 고난이었으며, 철저한 고난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매우 돌발적으로 일어난 고난이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고난이 갑자기 찾아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예고된 고난도 있지요. 고난의 전조현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대충 감을 잡는 경우가 많지요. 가끔씩 자기 스스로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한방 얻어맞지 않을까?’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돌발적이었습니다. 어떤 전조현상도 없었던 것이지요. 어쩌면 영적 컨디션이 좋을 때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애매한 고난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만큼 돌발적으로 찾아온 고난이었다는 말입니다.
또한 욥의 고난은 연속적이었습니다. 고난위에 고난이 포개진 것이지요. 그러니 정신 차릴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보통 한 고비가 지난 후에 다른 고난이 찾아오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욥의 고난은 매우 이례적이었습니다. 연속적으로 찾아온 것이지요. 집중포화를 맞은 것이지요.욥에게 고난의 폭풍우가 몰아쳤습니다. 먼저 스바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칼로 욥의 종들을 다 죽였습니다(15절).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합니다.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그것을 지키는 종들을 모두 다 태워 죽였다는 것입니다(16절). 당시 욥의 양떼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양이 7천입니다(3절). 7천 마리 양들이 다 죽은 거예요. 거기다가 양을 치는 종들도 다 죽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그 보고가 끝나자마자 다른 보고가 또 들어옵니다.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합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달려 들어와 약대를 빼앗아가고 그것을 지키는 종들을 다 잡아 죽였다는 것입니다(17절). 약대가 얼마였는지 아십니까? 당시 욥이 가진 약대가 3천입니다(3절). 그리고 잠시 후 더욱 충격적인 보고가 들어옵니다. 주인의 자녀들이 맏형 집에서 식물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데 갑자기 대풍이 몰아쳐서 집이 무너지고 그들이 모두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 생떼 같은 자식들이 한 두 명이 아니라 다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날벼락입니까? 당시 욥은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었습니다. 도합 10남매였지요. 그런데 한 날 한시에 십남매가 다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이라기보다는 재앙인 것이지요. 이것이 전쟁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주어진 고난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이 정도면 욥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살 소망이 없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이것이 물리적으로 하루 만에 일어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13절). 그렇게 믿음이 좋은 욥에게, 그것도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종에게, 별다른 이유 없이 이런 고난이 주어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어떤 사람이 이 고난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인 것이지요. 욥의 고난은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욥의 고난은 아주 철저한 고난이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고난이 아니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수준의 고난이었다는 말입니다.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재앙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고난을 감히 누가 무슨 재주로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절대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욥의 고난은 세 가지의 뚜렷한 특징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갑작스런 고난이요, 연속적인 고난이며, 철저한 고난이었다는 말이지요. 고난도 어느 정도라야 감당할 희망이 생기는 법이지요. 욥이 당한 고난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고난이었던 것입니다.심지어 욥의 고난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욥의 아내도 욥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립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비난하고 공격합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욥의 몸뚱이마저 얻어터졌습니다.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난 것이지요. 숨만 붙어 있지 죽은 목숨입니다. 차라리 육신이 죽었다면 그런 고통을 받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고난도 적당해야 버틸 힘이 생기고, 이겨낼 소망을 갖는 법이지요. 이처럼 욥이 당한 고난은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욥이 그런 고난을 받을만한 직접적인 잘못이나 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외견상 그런 고난을 받을 만한 직접적인 허물과 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애매한 고난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왜냐면 욥은 동방에서 의로운 자라는 칭찬을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1절). 하나님도 욥을 그렇게 인정해 주셨지요(8절). 그래서 사람들은 욥이 그런 고난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을 억울하다고 두둔해 주는 것이지요.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난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마치 죄의 결과물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대부분 죄를 고난의 결과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을 죄의 결과물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편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
한 고난도 있거든요. 일종의 애매한 것처럼 보이는 고난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목적 없는 고난은 없습니다. 욥의 고난도 마찬가지에요. 사실 우리가 갖고 있는 고난에 대한 편견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고난을 징계나 징벌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고난이 우리에게 큰 유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서 내 영혼이 정결함을 얻습니다. 고난을 통해 단련을 받은 후에 정금같이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케이스가 아닐까요? 첫째는 욥이 당한 고난이 자신의 직접적인 죄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욥을 징벌하시는 목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참소하는 사단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기 위함이요, 욥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욥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성숙한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시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래서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래야 답이 보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고난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우연이 없습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욥에게 그런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속칭 의인이라 할지라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악인이나 의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작동하는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면 안됩니다. 혹은 자신을 한탄하거나 낙심하는 것도 안됩니다. 분명히 고난의 뒤편에 하나님의 뜻이 감추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고난을 좋아하는 자는 없습니다. 믿는 자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래서 사람마다 자기 앞에 주어진 고난을 대하는 자세가 다양합니다. 믿음이 있노라 해도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는 자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고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문제는 믿음을 가진 자들이라 할지라도 고난을 이겨 낼만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인들은 자기 앞에 주어진 고난을 믿음으로 잘 이겨낸 사람들입니다. 욥도 그중에 한 사람이지요. 욥은 자기에게 당한 고난의 접근부터 달랐습니다. 고난의 출발점에서 그는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방황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욥도 고난을 해석하는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 자기 속에 숨겨있는 인간적인 본성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고난을 인과응보로만 접근하고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인과응보로만 접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분명히 뒤에 감추어진 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죄의 결과물로만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욥이 고난을 당한 것은 분명 뒤에 감추어진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욥의 고난 뒤에 감추어진 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욥도 사람인지라 완전하지 않거든요. 그러나 욥의 고난을 무조건 죄악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모든 죄가 고난을 뚫고 드러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특별히 욥의 고난은 더욱 그러합니다. 거기다가 친구들의 그런 발상이 더욱 위험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들은 죄가 없어서 고난이 없다는 말입니까? 물론 욥도 자기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기도 했고, 친구들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충분히 사람들과의 논쟁을 하다보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요. 우리가 어떤 주제에 대해 논쟁을 하다보면 선악의 논리로 접근하여 잘잘못을 추궁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다소 과격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욥도 친구들과의 논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변호하는 차원에서 공격적인 논쟁을 시도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은 매우 다양합니다. 고난이 다양한 얼굴로 찾아오지요. 무엇보다 고난은 믿는 자든지 믿지 아니하든지 상관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이지요. 고난은 시험의 옷을 입고 찾아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시험은 사단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인간을 시험하는 사단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려서 자기들의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 하에 사단의 시험을 허용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의 고난이 그런 케이스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전적으로 지지하셨습니다. 욥의 믿음을 전폭적으로 인정하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사단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사단은 끝까지 욥을 참소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단의 참소에도 불구하고 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욥의 믿음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지요. 결국 사단의 시험을 허락하십니다. 물론 범위를 제한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욥을 믿었던 것입니다. 역시 욥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고난으로 인하여 자기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욥은 고난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결국 갑절의 축복을 받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욥에게 이 정도의 고난을 감당할만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믿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보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의 크기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만일 욥이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었다면 하나님이 허용하셨겠습니까? 욥은 하나님이 사단 앞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믿음의 소유자이었음을 아셨던 것이지요.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강인함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것이지요. 이른바 욥은 하나님의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만한 시험 외에는 주신 적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10장13절을 보면, 하나님은 시험을 주시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
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사람에게 감당할만한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말씀이요, 또 한 가지는 시험당할 때 반드시 피할 길을 내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누구나 감당할만한 고난입니다. 그러나 만일 감당치 못할 고난이라면 피할 길을 내어주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 하에 주어지는 고난임을 인정한다면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하옵는 것은 내가 그런 고난을 감당할만한 사람이라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고난이 크면 클수록 내 믿음이 그만큼 크다는 논리입니다. 때문에 고난도 감사할 일입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내게 주어진 고난의 무게를 덜어주실 것입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주시는 고난임을 확신한다면 결코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통하여 해결될 것이니까요. 분명히 욥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문 21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욥은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고난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나온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때문에 자신은 적신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입니다.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말이지요. 이는 모든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면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지요. 내 것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부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불평할 이유도 없고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욥은 그 믿음으로 고난에 접근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1절에 욥이 하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주신 자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자도 하나님이시오니 하나님만 찬송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을 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고상한 믿음입니까? 감히 어떤 자가 이 상황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그는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믿음은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인정하는 성숙한 믿음인 것이지요. 욥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섭리로 본 것이지요. 그래서 고난을 찬송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고난 앞에 선 욥은 보통 사람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욥은 고난을 동굴로 보지 않고 터널로 본 것입니다. 동굴과 터널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얼핏 보면 동굴과 터널은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릅니다. 동굴은 입구는 있지만 출구가 없습니다. 그래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손해입니다. 동굴에서 나올 때 들어간 것만큼 나와야 하니까요. 그러나 터널은 그렇지 않습니다. 터널은 입구도 있고, 출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들어간 것만큼 출구가 가까워집니다. 그러면 믿는 자의 고난은 무엇일까요?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캄캄한 동굴로 인식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고난 앞에서 ‘이제는 죽었구나’라고 탄식하고 절망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을 동굴로 보지 않았습니다. 터널로 본 것이지요. 무엇보다 그는 터널 저쪽에서 자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한 것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만 바라보고 전진한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 욥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여 출구에서 큰 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갑절의 축복을 받은 것이지요. 욥기서42장10절에 보면, 하나님이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욥이 받은 복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욥42:12). 7천 마리의 양떼가 1만 4천으로 늘어났습니다. 3천 마리의 약대가 6천으로, 오백겨리의 소떼가 일천겨리로 늘어났습니다. 5백 마리 암나귀가 일천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정확하게 갑절의 복을 받은 것이지요.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다시 주셨습니다. 거두어 가신 자녀를 그대로 돌려주신 것이지요. 이것도 역시 갑절의 축복입니다. 이미 데려가신 자녀들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거든요. 그러므로 욥은 갑절의 복을 받은 것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욥이 고난의 터널을 믿음으로 통과하여 최후승리를 얻을 줄 믿으셨던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이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심으로 보다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케 하신 것이지요.그래서 욥은 나중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욥기서42장5절을 보면, 그동안 자기는 귀로 듣기만 하였는데 이제는 눈으로 직접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귀로만 듣던 신앙이 눈으로 직접 확인하여 보는 신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위대한 발견입니까? 욥은 고난을 통해 신앙의 대단한 발견을 한 것입니다. 고난이 없었다면 꿈도 꿀 수 없는 발견이지요. 그래서 욥의 고난이 신앙에 엄청난 유익이 된 것입니다. 욥의 신앙이 훨씬 더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한 것이지요. 고난이 욥을 그렇게 만든 거예요. 결국 하나님이 의도하신대로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욥이 당한 고난은 위장된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욥은 그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욥에게 허락하신 고난의 목적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신 고난도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용하신 고난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반드시 위장된 축복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육에 속한 사람들이 어찌 그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알 수 있겠습니까? 알 리가 없는 것이지요.
마태복음13장44절에 보면,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라는 비유가 나옵니다. 사람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을 숨겨둔 다음에 자기의 전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구입한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에 드러나는 밭의 가치보다 밭에 묻혀 있는 보화의 가치가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고난이 진짜 하나님이 주신 위장된 축복이라는 사실을 믿는 다면 어떤 고난도 달게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고난 뒤에 주어지는 축복이 고난의 무게보다 훨씬 더 크기 때문이지요.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이라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수면위로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알 턱이 없는 것이지요. 감추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성숙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복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이지요.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고난 뒤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고백을 한 것입니다. 21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십시다. 욥은 고난 속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고난보다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본 것이지요. 어떠한 고난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본 것입니다 욥이 그렇게 본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요,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부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는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고난도 이겨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욥은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이지요.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욥은 어떤 고난도 겁나지 않았던 것이지요. 솔직히 욥이 당한 고난은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감히 어떤 사람이 욥의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에게 그런 고난이 주어진 것은 결코 사람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임을 알려주는 것이요, 또한 그런 고난이라도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욥이 당한 고난을 감당하라고 주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그런 고난이 닥쳤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욥처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자신 없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대답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대신 대답해 드릴게요. 미안하지만 당신도 욥처럼 감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코 당신을 무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솔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우리는 욥을 칭찬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칭찬하고 싶은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칭찬함은 찬양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욥을 인정하신 하나님을 칭찬합니다. 하나님이 만일 욥의 믿음을 인정해주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그런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욥이 그 정도의 고난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임을 처음부터 믿어주셨던 것이지요. 모든 고난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욥이 그런 고난을 감당할 수 없는 자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넘어진 그곳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단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난의 무기들을 총동원하여 욥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믿음으로 방어했습니다. 이는 욥을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믿음에 절대적으로 부응했습니다.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아니하셨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하나님도 우리를 향한 믿음을 갖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나의 믿음이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보다 나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이 황공할 정도입니다. 이런 나를 믿어주시는 하나님의 믿음이 너무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욥이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자신을 믿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이지요. 그는 하나님께 어떤 섭섭함이나 서운함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욥이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비결입니다. 욥은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진짜 고난 앞에서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고난을 통과해서 갑절의 복을 받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믿음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범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앙이 무너지고 탈선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믿음이 파선되어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대부분 평범할 때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고난 앞에서 우리 믿음의 수준이 드러납니다. 고난 앞에서 우리 믿음의 바닥이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고 자기를 원망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쥐구멍을 찾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욥은 고난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했습니다(20-21절). 이것이 욥이 엄청난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한 비결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무기는 감사와 찬송입니다. 무엇보다 감사는 고난을 이겨내는 절대적인 무기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작은 고난도 버거워합니다. 이겨내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자는 어떤 고난도 겁내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감사는 고난을 이기는 최고의 무기임을 잊지 마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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