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철성 이씨)固城 李氏 (鐵城 李氏)금봉재 (金鳳齋)
고성 이씨 (철성 이씨)固城 李氏 (鐵城 李氏)
목차 1. 개요 2. 역사 3. 문화재:금봉재(金鳳齋) 4. 분파 5. 항렬자 5.1. 안정공파 5.2 병사공파 5.3 사암공파 5.4. 둔재공파 5.5. 호군공파 5.6. 좌윤공파 5.7. 동추공파 5.8. 참판공파 5.9. 도촌공파 5.10. 은암공파 6. 왕실과의 관계 6.1. 고려왕실 6.2. 조선왕실 7. 인물 8. 주요 집성촌 1. 개요[편집] 경상남도 고성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시조는 이황(李璜)이다.
固城 李氏 (鐵城 李氏) 고성 이씨 (철성 이씨) 관향 경상남도 고성군 원시조 이이 (李耳) 비조 이반 (李槃) 시조 이황 (李璜) 집성촌 경기도 의정부시·파주시·화성시 충청남도 논산시 전라남도 나주시 경상북도 안동시·성주군·청도군 경상남도 사천시·진주시·고성군·의령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평안북도 삭주군 인구 104,768명[1](2015년) 인구 대종회 2. 역사[편집] 3. 문화재[편집] 안동 임청각(臨淸閣): 보물 182호. 석주 이상룡의 생가이다. 사대부 반가로서는 가장 크게 지을 수 있는 99칸짜리 집으로 유명하며, 현존하는 민가로는 가장 크다. 임청각은 1519년 이명(李洺)이 지어 500년 가까이 고성 이씨 종가로 보존되어 온 고택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제가 이 집의 맥을 끊기 위해 집 안을 지나도록 철로를 부설하면서 일부 철거를 당하기도 했다. 2002년 후손들이 국가에 헌납했다. 안동 소호헌(蘇湖軒): 조선 중기의 별당 건축이다. 본래 안동 법흥동 임청각의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를 분가시킬 때 지어준 것으로, 이고의 외동딸과 혼인한 중종 때의 학자 서해에게로 물려내려졌다. 4. 분파[편집] 안정공파(安靖公派): 이암(李嵒)의 2남 이숭(李崇)을 중시조로 한다. 둔재공파(鈍齋公派): 이원(李原)의 장남 이대(李臺)를 중시조로 한다. 호군공파(護軍公派): 이원(李原)의 2남 이곡(李谷)을 중시조로 한다. 좌윤공파(左尹公派): 이원(李原)의 3남 이질(李垤)을 중시조로 한다. 동추공파(同樞公派): 이원(李原)의 4남 이비(李埤)를 중시조로 한다. 병사공파(兵使公派): 이원(李原)의 5남 이장(李塲)을 중시조로 한다. 참판공파(參判公派): 이원(李原)의 6남 이증(李增)을 중시조로 한다. 철성 이씨: 20세기 중반에 간행된 31장 분량의 철성 이씨 가례파보(鐵城李氏嘉禮派譜)에는 이증의 곤손(昆孫)6대손, 이륵(李玏)과 그 후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2000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고성 이씨는 26,286가구 84,383명, 철성 이씨는 1,513가구 4,871명으로, 인구 비율 은 약 17:1로 나타났다. 사암공파(思菴公派): 이원(李原)의 7남 이지(李墀)를 중시조로 한다. 도촌공파(桃村公派): 이암의 동생 이교(李嶠)를 중시조로 한다. 은암공파(隱菴公派): 이엄충의 5세손 이백(李伯)을 중시조로 한다. 5. 항렬자[편집] 대동항렬자가 없고 각 파마다 따로 항렬자를 사용하며, 대략 27세 정도까지는 항렬자를 쓰지 않거나 다른 파의 항렬자를 쓰는 일이 잦았다. 그나마 28세부터 32세까지는 항렬자를 쓴 경우가 많지만, 약 33세부터는 거의 대부분이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는다. 항렬자의 위치(이름의 앞부분인지 뒷부분인지)가 파마다 다르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2001년 간행된 『고성 이씨 세보』 43~44쪽에 항렬자가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둔재공파를 제외하면 항렬자의 위치가 거꾸로 뒤집혀 있다. 예컨대 은암공파 31세의 실제 항렬자는 '◯영(永)'인데, 세보에는 '영(永)◯'이라고 잘못 나와 있다. 5.1. 안정공파, 병사공파, 사암공파[편집] 『고성 이씨 사암공파보』 (1999) 114쪽에 실려 있다. 『고성 이씨 세보』에 따르면 안정공파와 병사공파의 항렬자는 사암공파와 일치하므로, 하나의 문단으로 묶었다. 5.1. 안정공파, 병사공파, 사암공파[편집] 『고성 이씨 사암공파보』 (1999) 114쪽에 실려 있다. 『고성 이씨 세보』에 따르면 안정공파와 병사공파의 항렬자는 사암공파와 일치하므로, 하나의 문단으로 묶었다.
6. 왕실과의 관계[편집] 6.1. 고려왕실[편집] 근비 이씨: 도촌공파 11세. 이림(李琳)의 셋째 딸. 음력 12월 12일생. 6.2. 조선왕실[편집] 혜순궁주(惠順宮主) 이씨(李氏): 도촌공파 13세. 이림의 손자인 이운로(李云老, 1383~1417)의 딸. 태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뒤 들인 후궁으로, 족보에 보이지 않는다. 이구(李嶇): 사암공파 14세. 이지(李墀)의 4남인 이맥(李陌)의 차남. 성종의 서자 운천군 이인(雲川君 李인, 1490~1524)의 장녀 이계영(李桂英, 1505~?)과 혼인하여 1남 6녀를 두었다. 7. 인물[편집] 인터넷 족보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세(世), 파(派), 생년 순으로 정렬하였다. 이인충(李麟冲): 5세. 고려 판문하시중(判門下侍中). 이엄충(李嚴冲): 5세. 고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待中). 이존비(李尊庇): 7세. 1260년(원종 1) 과거에 급제한 후,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를 거쳐 관직은 판밀직사사에 이르렀다. 좌승지, 필도치(必闍赤), 세자원빈(世子元賓), 지공거(知貢擧), 감찰대부(監察大夫). 이우(李瑀): 8세. 이암(李嵒): 9세. 이교(李嶠): 도촌공파 9세. 이숭(李崇): 10세. 이암의 둘째 아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정원공신(定遠功臣). 이강(李岡): 10세. 이암의 넷째 아들. 이림(李琳): 도촌공파 10세. 이교의 장남. 문하시중(門下侍中), 좌명공신(佐命功臣),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근비 이씨의 아버지, 우왕의 장인. 이원(李原): 11세. 이강의 장남. 이육(李陸): 사암공파 13세. 이괄(李适): 사암공파 17세. 이로(李魯): 은암공파 17세. 용사일기 .송암 문집.송암세보 사성강목 저술. 곽재우 의 첩 장인. 임진 전란시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막료이자 의병장으로 활동.비안 현감 이응태: 참판공파 17세. 이종주(李鍾宙, 1935~): 참판공파 28세. 전 대구시장. 이수정(李秀正, 1940~2000): 참판공파 28세. 전 문화부 장관. 이종명: 참판공파 28세.전 국회의원, 전 육군 이상룡: 참판공파 30세.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이진희: 참판공파 30세.제24대 문화공보부 장관이영창: 참판공파 .30세전 치안총감,전 주택공사 이사장,전 국회의원이상희: 참판공파. 30세 전 과학기술처 장관,전 국회의원이동흡: 참판공파. 30세. 이효수: 참판공파 .30세 전 영남대학교 상경대학 학장 이용득: 참판공파. 30세. 이현동: 참판공파 .30세 전 국세청 청장 이기백: 사암공파 30세. 합참의장과 국방부장관 이기준: 도촌공파 30세. 제22대 서울대학교 총장, 제5대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겸 부총리. 이군현: 도촌공파 30세.전 국회의원 이광민: 참판공파 31세. 이영진: 사암공파 32세. 이한동: 도촌공파 32세.변호사, 전 국무총리 이한석(李漢錫, 1964~): 도촌공파 32세. 가천대학교 행정학박사. 이서진: 참판공파 33세.탤런트, 영화배우 이유근(李裕根, 1944~2011): 사암공파 33세.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제2대 총장. 이필모: 도촌공파 33세.탤런트, 영화배우 이석제: 사암공파 34세. 이호영:은암공파 31세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차관) 8. 주요 집성촌[편집] 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하저리(下楮里)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증거리(增巨里)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신충리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 경상북도 성주군 금수면 광산리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경상북도 청도군 금전면 김전리·동곡리·방지리 경상북도 청도군 매전면 하평리 경상남도 사천시 사남면 사촌리 경상남도 진주시 이반성면 가산리,경남하동군 옥종면 안계리,진주시 금산면 갈전리 조동리 경상남도 고성군 동해면(東海面) 외곡리(外谷里)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 오방리,용덕면 죽전리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爲美里)[8] * 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外南面) 송남리(松南里) [1] 고성 이씨(88,587명)+철성 이씨(16,181명) [2] 바이두 에서 찾거나 구글링을 해도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정말로 이름 없는 평민이었거나, 아니면 전형적인 조상 숭배의 결과로 나타난 가공 인물일 것이다. [3] 시기상 대략 손자, 증손, 또는 멀리 가야 현손이었을 것이다. [원문] 遺乘云, 漢文帝時, 李槃中書舍人. 漢武討朝鮮時, 槃後孫, 以都護元帥, 出來仍居焉. 槃後二十四世孫璜, 而玄遠不可考. [5] 대종회에서는 고성 이씨에서 분파된 철성 이씨는 따로 존재하지 않고 고성 이씨가 옛날에 철성 이씨였다고 주장. [6] 계보 불명인 도촌공파 후손도 적지 않다. 도촌공파의 밑에 지파(支派)가 9파나 있고 동명이인이 많기 때문이다. [7] 인터넷족보를 기준으로 은암공파 34세 이상은 없고, 33세의 생년이 분포하는 범위가 1989년부터 2019년까지이다. 따라서 60세의 항렬자를 쓰는 인물은 서기 29세기가 되어야 나타날 것이다. 다만 은암공파에서 항렬자를 사용한 것은 32세까지이고, 33세는 아직까지 항렬자를 사용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8] 1624년 이괄의 난으로 인해 이괄의 맏형인 진사(進士) 이적(李適)이 연좌제로 화를 입게 되자, 그의 둘째 아들 이만세(李萬世)가 제주도로 피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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