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낮은 궁핍
텅 빈 잔고를 보듯 쓸쓸한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만지면 까맣게 묻어나는 내 삶의 그을음이었다. 바닥 중에도 가장 낮은 밑바닥이 있듯이 궁핍 중에서도 가장 낮은 궁핍이었다. 가난에 익숙했으므로 우리는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늘 만나는 저녁노을 같은 것이었다.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던 가난, 철없어서 오히려 가벼웠던 가난, 하지만 잠시 사라진 가난은 노을처럼 다시 찾아왔다. 침몰하는 하루, 추락이 빤한 내일, 노을의 끝은 어둠이었다. 그 막막한 시간을 어머니가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아홉 명의 자식들, 끼니마다 아귀처럼 먹어치우던 그 식욕을 어머니가 다 감당하셨다.
상자에 보관한 고구마가 싹을 내밀었다. 참을 수 있는 시간은 다 써버린 것이다. 자줏빛 잎은 고사리처럼 말려있다. 물 한 방울 없는 곳에서 어린잎이 어미의 몸통을 뚫고 나왔다. 묵은 고구마가 어둠에 갇혀 생사를 궁리 중일 때 나는 한 상자의 침묵을 방치하였다.
고구마가 내민 어린순은 간절한 몸의 언어, 가장 낮은 궁핍은 언제나 몸으로 말한다. 괭이를 든 흙투성이 할아버지가 그랬고 망치를 든 땀내 나는 아버지가 그랬다. 농부와 목수 사이에서 아버지는 목수를 택했다. 그것이 최선이었고 우리는 당연히 가난했다.
그 시절 언덕에 서서 저물어가는 하늘을 바라보듯이, 그때마다 불안한 예감이 어디선가 몰려오듯이, 그런 심정으로 고구마는 목을 축이고 제 살을 깎아 줄기와 잎을 만들 것이다. 유리컵에 담겨 허공을 더듬어 오를 때마다 컵에 갇힌 뿌리는 길을 찾아 헤맬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최선이다. 최선의 끝이 캄캄하게 저무는 일일지라도.
우리의 최선은 말을 아끼는 것이었다. 어른이 주는 대로 먹고 시키는 대로 말없이 순종했다. 그것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침묵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은 몸의 말이었다. 마음이 가르쳐주는 대로 몸이 절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이 웃을 수 있었다. 학예회에 오지 않는 어머니, 비가 내려도 결코 우산을 가져다준 적 없는 어머니, 담임이 가정방문을 오시면 이웃집으로 피신해버린 어머니, 그래도 우리는 많이 웃었다. 이쯤은 별 게 아니라고 창피함도 대수롭지 않다고 가난이 몸소 가르쳐주었다.
어떤 조건에도 나는 빠르게 적응했다. 내성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가 내게 물려주신 유일한 유산이다. 낯선 객지에서 혼자 살아도 어머니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다. 그것으로 나는 단단해졌다. 시가 내게 위로가 되었듯이, 어머니가 그리워서 더 단단해졌다. 외로움의 힘, 그 힘의 근저는 가난함이다. 그래서 나는 함부로 넘치지 않았고 정직할 수 있었다.
외할머니는 가끔 우리가 좋아하는 참가자미와 가오리를 말려 이고 오시고 돌산 송도에 사는 고모는 맛있는 털게를 쪄서 보따리에 싸오셨다. 섬에 사시는 할아버지는 철따라 다디단 고구마와 찰옥수수를 지고 오셨다. 이것들로 우리는 참 많이 따뜻했다. 양식이 떨어져도 우리에겐 한 이불을 덮고 잠드는 가족이 있었다.
무강,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 집에 씨고구마인 무강이 있을 리 없었다. 집 앞 공터에 돼지를 키우던 어머니는 아마도 돼지를 먹인다는 핑계로 이웃에서 얻어왔을 것이다. 그 무강이 점심으로 밥상에 올라왔다.
세상에 그렇게 맛없는 음식이 있을까. 푸른 줄기를 토해내고 아무 맛도 남지 않은 씨고구마, 제 몸의 단맛을 다 써버리고 푸석거리는 고구마는 자식 아홉 낳은 늙은 어미처럼 질긴 심줄만 박혀있었다. 더는 먹을 수 없어 돼지에게 던져준 무강, 어머니는 말했다. 흉년에는 소나무껍질도 벗겨 먹었다고…. 하지만 내게 무강도 나무껍질 같은 맛이었다.
저물어가는 것, 기울어가는 것들을 사랑한다. 마지막 한줌의 힘으로 버티는 것을 보면 그때 그 무강이 생각나는 것이다. 오래 묵은 가난이 그랬고 홀로 걸어온 길이 그랬다. 나는 점점 저물어가지만, 가장 낮은 궁핍의 힘으로 그 어떤 일도 쉽게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