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머문 사람
시에 미친 시인, 이생진
“선생님, 오늘 뭐 하세요?”
멀지 않은 곳에 계시는 선생님이신지라 가끔 전화를 걸어 데이트를 청하면 “허허 나 지금 부산에 있어요” 하시거나 “우이도에 있어요” “제주도에 있어요” 하실 때가 대부분이다.
때로는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신다.
“윤선생 나 우이천에 왔어요.”
우이천은 내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북한산의 지류로 산책로가 잘 마련된 곳이다.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이 94년이니 어느새 30년이 가까워 온다. 그동안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열리는 우이시낭독회와 매월 마지막 금요일에 열리는 인사동 시낭독회에서 선생님의 시를 듣고 말씀을 들으면서 깊은 존경과 신뢰를 쌓아왔다.
김삿갓의 행적을 따라 여행을 하시며 시집 <김삿갓>을 쓰시고 황진이와 고흐를 연구하여 <너도 울어라, 황진이>와 <반 고흐, 너도 미쳐라>를 내시는 등 <그리운 바다 성산포>를 비롯하여 40여권의 시집과 수상집을 내시고도 여전히 시와 문학에 대한 갈증으로 주 2회 교보문고를 찾으시는 분!
우리나라의 많은 섬 중에 2000개 이상을 걸어서 탐방하시고 전국각지를 여행하시면서 발로 시를 쓰는 시인! 부지런히 쌓은 여행길에서 맺은 인연으로 선생님은 어디를 가든 친분도 많고 팬도 많다. 인사동 시낭송회에는 각지에서 모여온 팬들이 선생님의 시를 낭송하며 노래와 웃음으로 한저녁을 보낸다.
시낭독회에서도 우리는 책자를 보고 시를 읽는 것이 보통인데 선생님은 거의 모든 시를 외워서 낭송하신다. 시낭송을 위한 소품과 의상등도 언제나 소홀함이 없으시다. 김삿갓을 낭송하실 때는 두루마기와 삿갓을, 황진이를 낭송하실 때는 황진이 역의 여성을, 고흐를 낭송하실 때는 자른 귀를 싸맨 노란붕대와 압생트주,... 바라볼 때마다 나는 나의 나태함을 반성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제주 명예도민이시며 신안군 명예군민이신 그 명예가 어찌 거저 주어졌겠는가.
해마다 제주 성산포에 올라 그곳 도민들과 함께 새해맞이 시낭송을 하시고 4월에는 4.3사건 희생자의 혼령을 위한 위혼제를 다랑쉬오름에서 올리신다. 선생님의 그런 행사에 나는 몇 번 선생님을 따라가서 함께 시공연을 하기도 했다.
‘무명도’ 와 ‘떠나던 날’ 은 선생님의 시에 곡을 붙인 노래인데 애석하게도 이 곡의 작곡자 변규백 선생님은 몇 해 전 세상을 뜨셨다.
이중섭 미술관에서도 해마다 자리를 마련하고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거기서도 선생님의 시공연은 뭇 관중을 사로잡는다. 그림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너른 무대 전면을 화선지 삼아 붓으로 그림을 그리시고 팝가수 현승업은 기타를 치고 나는 노래를 부른다.
공연을 앞둔 어느 저녁,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시더니 “윤선생, 연습해”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다 아는 노래인데 무슨 연습을...?’ 했지만, 선생님께서는 의관까지 갖추시고 입장에서 퇴장까지 몇 번이고 거듭거듭 리허설을 하시는 것이다.
몇 년 전 가까운 김수영 문학관에서 이생진 시인 초청강연이 있어서 관객으로 참가했는데 선생님께서 또 노래를 청하셨다. ‘떠나던 날’을 읊으시면 나는 그 노래를 부르고 ‘무명도’를 읊으시면 또 그 노래를 불렀다.
강연이 끝나고 돌아올 때 선생님께서 나에게 봉투를 주시면서 “강연료 받은 건데 똑같이 나눴어.” 하신다. 나는 그야말로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 그 일은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런가하면 나는 몇 년 전에 있었던 아드님의 결혼식에도, 세상 떠나신 사모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나뿐만이 아니라 선생님을 나보다 더 따르고 가까이 모시는 모든 분들이 다 마찬가지였다. 혹시라도 폐가 될까 선생님께서는 쉬쉬 혼자 일을 치르시는 것이다.
어느새 92세, 하루 두세 번 끊임없이 걷기를 실천하신 결과로 지금도 걷는 모습이 청년 같으시다.
시에 미치고 바다에 미친 시인! 그래서 자칭 미친놈.
세상의 탐욕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시만을 사랑하고 시가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않고 달려가시는 귀한 선생님을 가까이 뵐 수 있게 된 것은 내 인생의 큰 재산이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도 건강히 천수를 누리시기 바라며, “시에 한 번 미쳐봐” 라고 해주신 충언을 실천 하지 못하는 것은 선생님께 대한 나의 빚이다.
2021. 1.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 . 서울
이생진 시인
이생진 시인과 함께 하는 시 낭송회 참석한 날(인사동 시가연)
블로그
문서 저장하기
이생진 시인과 함께 하는 시 낭송회 참석한 날(인사동 시가연)
92세 이생진 시인의 광주 강연을 듣고 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