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人權)이라 함은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해서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를 말한다. 지난 27일 오후 1시 서대문구청 인권팀은 인권에 관심 있는 주민 40명과 「주민인권현장탐방」이 있었다. 국가와 사람이 어떤 역할에서 공동체가 되어 사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인권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석도현(정책기획담당관) 인권팀장은 “궂은 날씨에 인권교육에 참가한 주민께 감사합니다. 인권팀은 2013년부터 매년 2번에 걸쳐 교육을 시행했습니다. 다음 달 10월에 8번째 진행될 인권학교 강의에 앞서 인권에 대한 체험을 위해서 탐방을 마련했습니다.
내년에는 찾아가는 인권학교를 확대 운영할 예정입니다.”
서대문구에는 초등학교 19개, 중학교 14개가 있다. 서울시 교육청의 학생인권센터에서 전문강사가 초등학교를 찾아가서 학생들에게 인권교육을 실시한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인권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내년에는 중학교에도 교육을 확대 할 계획이라고 했다.
“먼저 참석하신 분들이 잘 인지하셔서 주민들에게 확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경찰청 인권센터 내(內) 남영동 대공분소와 박종철 기념관, 서대문형무소 옥사 및 사형장을 탐방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탐방팀이 버스에서 내려서 오창익 사무국장의 해설을 들으며 이동하고 있다.
건물 입구에서 오창익 (인권연대사무국)국장의 해설을 듣고 있다.
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은 경찰청 인권센터의 대공분소와 조사실과 전시실 상황을 해설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입니다. 법정행정구역은 용산구 갈월동(옛 주소) 이지만 건물 옆에 남영역이 있어서 남영동 대공분실로 불렸습니다”
지금은 여러 간판이 있지만, 대공분실일 때는 아무런 간판이 없었다. 근처에 선린상고, 용산 고교, 숙명여대, 상명여고 등 학교가 있다. 보안시설로 사용했기에 학생들은 물론, 주민들조차도 이곳이 무슨 건물인지를 몰랐다. 가끔 위장 간판(해양문제연구소 등)을 걸어놓기도 했다고 말했다.
땅 값이 비싼 지역 2,000평의 대지 위에 대공분소가 지어졌다. 이 건물의 중요한 컨셉은 공간이 분할되어 있다는 것이다. 설계자는 건축가 김수근이다. 그는 1970~80년대 올림픽 주경기장, 대학로 문예회관대극장, 코이카건물, 창충동경동교회, 불광동성당, 타워호텔, 국립극장 등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많이 지은 사람이다.
김수근 작품은 외벽에 벽돌을 많이 쓰고 공간을 나누는 특징이 있다. 여기는 두 공간으로 경찰관 공간과 조사받는 사람의 공간이다. 피의자는 건물 후면에 따로 만들어진 작은 뒷문을 지나 5층 취조실로 바로 연결되는 나선형 원통 계단으로 올라간다.
피의자는 후문의 작은 문을 통해서 들어간다. 옷을 벗기우고 또 다른방에서 구타당한 후에 원통형 계단으로 취조실까지 올라간다. 이 계단은 5층까지 연결되있지만 올라가는 사람은 몇 층인지 알수가 없다.
이 계단은 조사원들이 비상용으로 사용하는 계단이다. (아래에서 위로 찍은 모습).
위에서 아래로 찍은 모습.
취조실은 밖에서만 불을 켜고 끌 수 있다. 문마다 감시 렌즈가 달려있다. 욕조는 청결유지가 아니라 물고문용으로 사용되었다. 변기와 침대는 밖에서 볼 수 있도록 오픈되어있다. 책상과 의자는 볼트로 고정되어있다. 형광등은 망으로 둘러쳐져 있다. 취조실의 창문이 좁고, 무자비한 고문과 취조가 자행되던 흔적을 감추고 외부와의 단절을 시도하려는 구상이다.
박종철 군이 무자비한 고문으로 사망한 취조실이다. 변기와 침대가 오픈 되어있다. 다른 방은 모두 철거되고 유일하게 남아있는 방이라고 한다. 사건 이후 색을 입혔다.
밖에서 볼수있도록 변기와 세면대가 모두 오픈되어있다.
피의자의 취조실과 조사원들의 방의 조명이 다른것과 바깥을 볼수있고, 없고의 차이를 설명했다.
전시실에 박종철군의 어린시절 사진(그림과 기타)과 약력이 적혀있다.
대공분실이 있던 당시 식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대공분실 외부 건물을 설명하고 있다.
대공분실은 2005년에 폐쇄했다. 현재 인터넷 검색에는 김수근의 작품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은 삭제됐다. 참여자들은 해설을 들으면서 안타까운 한숨소리를 냈다.
2부에서 서대문 감옥(西大門監獄)은 100년 전, 조선 최초의 감옥이다. 서울의 외곽 인왕산과 무악재가 있는 산 아래 지어졌다. 훼손되어 원형에서 보수한 곳이 많다. 1907년(융희 원년)에 대한제국을 점령한 한국통감부가 서울에 세운 형무소이다.
서대문 형무소로 이동, 외부 모습과 바깥문 부터 설명이 시작됐다.
옥사 안으로 들어가서 문의 형태와 기능을 설명하고 있다.
1908년 일본이 의병탄압을 위해 만들었다. 당시는 경성감옥이라 했다. 해방 이후까지 교도소나 구치소로 활용되었다. 1928년 서대문 형무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교도소 시설은 경기도 의왕시로 옮겼다. 현재는 독립공원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박물관이다.
형무소 입구에 들어가는 문은 외정문(바깥정문)이다. 교도소는 일반 건물과 명칭이 다르다. 본관은 감방영역과 행정영역이 있다. 재소자는 행정영역에 올 수 없다. 구금시설인 감옥을 얘기하면, 인간 신체의 자유를 제한할 때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썼는지 남영동과 서대문 형무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형무소 건물은 남영동 만큼 정교하지는 않다. 문은 모두 철문으로 되어있다. 밖과 안에서 잠글 수 있도록 이중 장치이다. 4평 정도의 감방에 8명을 수용했다. 뺑끼통(푸세식 화장실)이라는 변기를 사용하게 했다. 그 옆에 수도꼭지를 달아서 물을 쓰게 했다. 파놉티콘(Panopticon : 원형 교도소)구조로 교도관 한 사람이 한곳에서 내부를 모두 볼 수 있게 만든 구조다.
4평 남짓 작은 방에 8명을 수용했다. 문의 기능과 활용법을 설명했다. 이 감방에서 여름에는 더위로 겨울에는 추위로 병사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죄수를 운동시키려고 만든 격벽장 역시 원형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라고 했다.
오창익 사무국장은 “사람이 맘대로 다 할 수 있는 것이 권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생활은 알게, 모르게 CCTV에 하루 100여 회 찍힙니다. 감옥과 취조실은 사람의 행위를 감시하고 극단을 보여줍니다. 죗값과 죽음은 다릅니다. 인권에 대한 공부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공부입니다.” 고 했다.
정순병(66·홍제동) 씨는 “오늘 탐방이 유익했습니다. 우리 젊은 시절 일할 때는 인권이란 생각을 못 했지요. 동네에서 봉사하면서 젊은이들 대하니까 인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요. 중요해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앞으로 인권학교 강연도 계속 참여할 생각입니다.” 했다.
9월 29일 복지관 이복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