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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서정, 묘사, 서사
윤재근
1. 에세이 그리고 다양한 서정
수필가의 문체는 언어를 서정(抒情)으로 이끈다. 여기서 ‘서정’이란 말은 시가(詩歌)에서 말하는 ‘노래’든지 ‘lyric’과 같은 서구의 개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서정시라고 할 때 서정이란 말은 ‘정(情)’을 주로 정감이란 뜻으로 좁혀서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정’을 그렇게 좁히지 않는다. 본래 정이란 마음과 사물이 만나면 일어나는 심리이다. 그 정에는 느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사물을 만나면 무수한 말을 하게 하는 대화(discourse)의 출입문 구실을 하는 것으로 에세이는 정을 수용한다.
에세이는 인간과 사물의 정(情)을 통하게 하고 그 에세이를 만나는 인간으로 하여금 의견이나 견해를 말하게 한다. 이것이 미적 대화인 것이다. 그러므로 에세이의 서정은 감정이나 생각이나 사상이나 관점을 말하지 않고 사물을 말하는 셈이다.
문학의 에세이는 표현의 수필이다. 서정 그것은 진술이 아니라 표현인 것이다.
서정이 왜 표현일까? 서정의 ‘서(抒)’는 ‘정(情)’을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까닭이다. 수필가는 산문으로 서정화하는 언어의 장인이어야 문학의 에세이를 존재하게 하는 셈이다. 높은 식자라고 하여 수필가가 되는 것도 아니고 깊은 사상을 간직한다고 수필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가 선연하게 사물을 드러내게 하는 비밀을 터득하지 못하면 문학의 에세이는 만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니 수필은 쉽게 만들어지는 문학이 아니다. 의미를 전달하려고 글을 쓰는 일이란 정확한 작문 실력이 있으면 되고 타당성을 얻을 논설문을 쓰자면 주제의 내용을 잘 소화하면 된다. 그러나 사물을 말하는 산문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필은 서정(抒情)하는 에세이인 것이다. 서정하는 에세이 그것은 사물을 새롭게 만나게 하는 언어의 꽃밭 같은 셈이다.
그러므로 언어가 서정(抒情)을 하게 수필가는 언어를 사물화해야 한다. 수필가는 어떻게 언어를 사물화하는가? 그러기 위하여 수필가는 낱말을 상(象)으로 변용하여 문장을 구조할 줄을 안다. 수필가는 개념들로 약속된 낱말들을 엮어서 문장을 짜지 않는다. 개념이란 약속된 느낌을 주고, 약속된 생각을 주고, 약속된 이해와 판단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것은 기억된 지식이 아닌가. 상(象)이란 이러한 지식으로는 가 볼 수 없는 미궁이다. 개념이란 길가에 서 있는 교통 표지판과 같다. 그 표지판만 기억하면 항상 낯익은 곳을 갈 수 있을 뿐 새로운 곳으로는 갈 수 없을 뿐이다. 미궁에는 그러한 기억의 표지판이란 없다. 상이란 미궁을 수필가는 만들어 놓고 누구든 자유롭게 만나게 한다. 그러니 문학의 에세이란 미궁의 꽃밭인 셈이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상들을 구조하여 산문의 문장을 만들고 시인은 상들로 엮어서 시(詩)의 행(行)과 연(聯)을 만든다. 수필가는 이렇게 하여 주제를 절묘하게 형상화한다. 물론 에세이 속에 있는 모든 낱말들이 모조리 상인 것은 아니다. 하나의 낱말만으로 기호는 되지만 상징을 이루지는 못한다. 상이란 기호일 수도 있고 상징일 수도 있다. 상이 상징이 되려면 여러 상들이 엮어져야 한다.
이러한 엮음에서 수필가의 문체가 형성된다. 상들을 엮자면 그 문체 속에는 상이 아닌 것들이 접착제 노릇을 해야 한다. 꽃밭에 어디 꽃만 있는가. 줄기며 뿌리며 잎들이 있어야 꽃이 있는 것이 아닌가? 에세이란 언어의 꽃밭에 꽃이란 상징의 상들인 것이다. 문학의 에세이를 만드는 수필가의 성패는 이러한 상들을 어떻게 엮어서 문장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고 상징의 미궁으로 만들어 말하게 하는가에 있는 것이다.
에세이가 말하는 것은 그 에세이의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 달라.”, 그리고 “생각해 달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 에세이란 꽃밭에 있는 꽃송이들이 선연하게 나타나 안개같이 향기를 뿜는다. 그 향기가 바로 언어의 미가 아닌가. 참으로 서정이란 언어의 미가 어우러지는 현장인 것이다. 왜 서정이 그러한 미의 현장이란 말인가? “미는 마음과 자연을 종합하는 힘이다. 그러한 구실은 정절(情節) 그리고 인생이 미를 거쳐 자기를 알고 휴식을 얻을 때라고 암시한” 퍼스(C.S. Peirce)의 비망록을 귀담아 두면 이해가 된다(J.L. Esposito [Evolutionary Metaphysics] P.13 참조)
그러므로 에세이의 서정이란 언어를 사물화하여 상을 만들어 한없이 느끼고 생각하게 한 다음 사색으로 초대하는 힘이다. 이러한 힘이 에세이의 표현이며 그러한 표현은 서정을 타야 하는 것이다. 에세이의 다양한 서정은 다양한 의미를 만나게 한다. 이러한 만남이 체험인 것을 수필가는 알아서 언어를 사물화한다. “언어를 체험하라.”, “언어를 사물화하라.”, “언어로 서정하라.” 이러한 요구는 에세이가 갖는 미적 대화인 셈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을 다양하게 사색하라. 이러한 요구는 에세이가 맺어주는 열매이다.
1. 묘 사
1) 묘사의 개념
‘묘사(descript-xion)’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의 모습, 감촉, 소리, 냄새 등을 마치 그 대상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기술 방법을 말한다. 즉 대상의 특징을 일반화하거나 유형화하여 설명하지 않고 그림 그리듯이 그대로 표현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구체적인 모습이나 소리 등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위기까지 느끼도록 하는 표현 방법이 묘사이다.
<예문 1>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뭇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팔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예문 1>은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달빛이 쏟아지는 밤, 산허리 메밀밭 사이로 길게 뻗은 길이 보이고 달빛을 받아 푸르게 젖은 잎새와 소금을 뿌린 듯한 메밀꽃이 눈앞에 생생하다. 고요한 가운데 나귀들의 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애잔한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독자로 하여금 같은 길을 가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생한 묘사의 힘이다.
<예문 2>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새벽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밝아 오는 아침 햇볕 아래 헐벗은 들판이 드러났고 곳곳에 얼어붙은 시냇물이나 웅덩이가 반사되어 빛을 냈다. 바람 소리가 먼 데서부터 몰아쳐서 그가 섰는 창공을 베면서 지나갔다.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수십여 그루씩 들판가에서 흔들렸다.― 황석영, 삼포 가는 길
<예문 2>는 헐벗은 들판, 얼어붙은 시냇물과 웅덩이, 그리고 매서운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가지만 남은 나무들을 묘사한 것이다. 이 글은 떠돌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소설의 첫머리로서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주인공 영달의 암담한 심정을 암시하고 있다.
이처럼 묘사는 한 편의 글 전체를 구성한다기보다는 글의 여기저기에 부분적으로 삽입되어 배경이나 인물 등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묘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묘사의 효과는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떤 대상을 ‘참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라고 아무리 강조하여도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느낀 감동을 느끼게 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아름답다’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구체적인 움직임이나 자태, 빛깔, 분위기 등에 대한 묘사만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위의 예들은 대체로 글을 읽는 사람에게 기술하는 대상에 대한 어떤 느낌을 불러일으키도록 하기 위한 글들이다. 이러한 글의 묘사 방법을 ‘암시적 묘사’ 또는 ‘인상적 묘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일반적으로 ‘묘사’라고 칭하는 것은 이를 가리킨다.
한편 묘사는 독자에게 기술하는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즉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쓰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묘사 방법은 일반적인 묘사와 구별하여 ‘설명적 묘사’ 또는 ‘객관적 묘사’라고 부르며 ‘설명’의 한 방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예문 4>
갓바위 불상은 화강암을 재질로 원각되어 있는데, 광배는 원래 없었던 듯하며 주위를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들이 광배의 구실을 하고 있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가 명확하여 그 위에 삼판형의 자연판석 1매를 올려놓았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여 탄력이 있지만, 반달형의 눈썹 아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점과 알맞게 솟은 코에 양 볼이 두툼하고 굳게 다문 입술로 인해 근엄한 표정을 느낄 수 있다. 이마 가운데 백호가 뚜렷하고 코끝의 입언저리에 팔자 모양이 깊게 패였으며, 귀는 어깨까지 드리워지고 굵고 짧은 목에는 삼도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코 부분은 코를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 대문인지 많이 닳아 있다.― 향토사교육연구회 편, 대구역사기행
<예문 4>는 팔공산 갓바위에 있는 불상의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예들에서 알 수 있듯이 설명적 묘사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그리는 것으로 글을 쓰는 사람의 감정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특징이다. 설명적 묘사는 어떤 대상을 치밀하게 관찰하여 기록하고자 할 때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기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2) 묘사의 요소
묘사가 잘된 글은 마치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감각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효과적인 묘사를 하기 위하여 고려해야 할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① 지배적 인상(dominant impression)
묘사는 대상의 모습을 눈에 비친 그대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그려내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이렇게 자세히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독자에게 의도하는 느낌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효과적인 묘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상으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은 특성을 그리거나 특별히 관심이 있는 특성을 중심으로 묘사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중심을 이루는 인상을 ‘지배적 인상’이라고 부른다.
‘묘사’란 대상의 ‘지배적 인상’을 기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대상의 요점과 특색을 가려 드러내고 불필요한 것은 버려야 효과적인 묘사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에는 그 대상의 지배적 인상을 뒷받침하는 특징들을 선택하여 기술하여야 하는 것이다. 묘사한 글이 통일성과 의미를 갖는 것은 이처럼 지배적 인상을 중심으로 기술함으로써이다.
다음은 시골의 장터거리를 묘사한 글이다.
<예문 5>
(1)마을에서 면사무소로 올라가는 자드락길 초입에 우리집이 있었다. 닭 몇 마리를 놓아 기를 만한 조그만 뜨락을 둘러친 울바자가 있었고, 그 울바자 너머로는 언제나 먼지와 허접쓰레기가 흩날리는 장터거리가 있고, 거기선 닷새마다 한 번씩 저자가 섰다. 무싯날에는 내왕하는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하기만 해서 동네의 개들이 몰려와서 흘레를 붙곤 하였다.
(2)러나 저자가 서는 날엔 새벽부터 장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해서 아침 선반 때가 되면 그 넓은 장터가 사람들의 아우성으로 꽉 들어찼다. 술을 마시지 않았어도 얼굴이 불콰하게 상기된 코주부들끼리 서로 상대의 멱을 뒤틀어 잡고 패대기질을 벌이는가 하면, 소매치기에게 무명 판 돈을 몽땅 털린 뒤 눈자위를 허공에 걸고 장마당에 퍼질러 앉아 넉장거리를 하는 아낙네도 있었다. 주위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고, 대성통곡인 아낙네를 부며 속수무책인 구경꾼들도 푸념을 늘어놓았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극악해져 간다고.
(3)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여름 장마철에는 우리집 울타리 너머에서 어리전이 서기도 하였다. 저자 거리에 내리는 비는 장마당의 악다구니와 앙탈을 함초롬히 적셔 잠재우는 대신, 장거리의 정경들을 보기 흉한 꼴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키꼴이 성큼한 장닭이 속살까지 비에 젖어 측은한 몰골로 벼슬을 늘어뜨리고 망연히 서 있는데, 비를 피해 남의 집 추녀 아래로 멀찌감치 비켜선 닭 주인 역시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비맞은 꼴이 측은해 보이기는 닭이나 닭 주인의 형용이 조금도 짝이 지지 않았다. 그때 베잠방이 속으로 닭 주인의 남근(男根)이 또한 측은하게 들여다보이기도 하였다.
― 김주영,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
<예문 5>의 (1)단락은 황량한 시골 마을의 정경을 표현한 것이며 (2)단락은 장터의 소란하고 부산스러운 모습과 민초들의 끈질기고 억척스러운 삶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3)단락은 비 오는 날의 어리전을 묘사한 것으로 비에 젖은 장닭과 닭 주인의 초라한 모습이 인상적으로 그려져 있다. 장터의 풍경을 빠짐없이 세밀하게 기술하기보다는 필자에게 강렬한 인상을 준 것, 또는 필자가 장터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등, 지배적 인상을 중심으로 묘사함으로써 글을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작가의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의 고향 마을 장터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해 준다.
② 시점(視點:point of view)
독자로 하여금 묘사된 글을 읽고 구체적인 모습이나 소리 등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글의 구성도 정연하게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묘사할 때에는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세부적인 특징들을 어떤 순서로 기술할 것인가, 즉 어떻게 조직화하여 한 편의 글로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글의 구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시점(視點)’이다. 시점이란 대상을 바라보는 필자의 위치를 말하는데, 시점이 고정되어 있는 글도 있고 이동하는 글도 있다.
다음은 필자의 시점이 고정되어 있는 예이다.
<예문 6>
천마총 금관은 일반적인 신라의 금관과 마찬가지로 관테의 중앙과 그 양쪽에 맞가지의 솟은 장식을, 그 뒤 양쪽에는 2개의 사슴뿔 장식을 세웠다. 관의 표면에는 금실로 곱은옥과 달개 장식을 달았다. 관장식은 2점으로 나비형과 새날개형이다. 2점 모두 순금제로 맞새김한 금판에 달개장식을 매달아 꾸몄다.
― 국립경주박물관 편, 신라인의 무덤
<예문 7>
장독들이 비를 맞고 섰다. 그것들이 어찌 시원해 보이는지 지나다 말고 툇마루에 앉아 바라다보았다.
빗발은 고르지 않다. 어떤 것은 실같이 가늘고 어떤 것은 구슬같이 무거운 것이 떨어져 깨어난다. 이런 무거운 빗발에 맞아 떨어짐인가. 어디서 버들잎 하나가 날아와 장독 허리에 사뿐 붙는다. 버들잎은 ‘나비인가’ 하리만큼 노랗게 물들었다. 벌써 낙엽이었다.
비는 시름없이 내리어 장독들도 버들잎도 묵묵히 젖을 뿐, 나는 손끝에 튀어오는 몇 방울 빗물에 얼음 같은 차가움을 느끼며 따스한 방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 어떤 학생의 작문(이태준의 문장강화에서 재인용)
<예문 6>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의 형상을 그린 것으로 설명적 묘사의 예이며, <예문 7>은 가을비가 내리는 정경을 묘사한 것이다. 모두 필자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는데 <예문 7>의 서두에는 필자의 위치가 ‘툇마루’임이 밝혀져 있다.
시점이 고정되어 있을 때에는 대상을 몇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마치 카메라의 앵글을 돌리듯이 순서에 따라 기술하거나 일정한 방향을 유지하면서 묘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예문 6>에서는 금관의 골격을 보여준 다음, 금관의 표면에 달린 세부 장식을 묘사하고 있으며 <예문 7>에서는 가을비의 빗발과 장독 허리에 떨어진 버들잎을 차례로 묘사하고 이어서 비가 오는 정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였다. 이들 예를 읽으면서 필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정연한 구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점과 관련하여 주의해야 할 점은 시점이 기술의 정도(scale)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 위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의 풍경을 그릴 때에는 그만큼의 거리를 인식하면서 묘사하여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어느 집 창에 드리운 커튼의 색깔을 구별 할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한다든가 어떤 사람이 무엇을 들고 있는지 보이는 것처럼 표현한다면 앞뒤가 안 맞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필자의 시점이 이동하는 예이다.
<예문 8>
아우라지강은 굽이굽이 맴돌아 정선읍내에 이르러 조양강이 된다. 여량에서 정선으로 가자면 큰 고개를 하나 넘게 되는데 그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국토의 오장육부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을 이룬다. 강은 산과 산을 헤집고 넘어가는데 산은 강을 넘지 못하여 옆으로 비껴간다.
조양강은 푸르고 푸른 옥빛이다. 잠시 후 우리가 맞을 사북과 고한의 시커먼 물빛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기만 하다. 조양강의 풍광은 아침햇살을 머금은 때가 가장 아름답단다. 그래서 이름조차 아침 조(朝)자에 볕 양(陽)자가 되었다. 답사길이 그쪽으로 닿지 않아 나의 회원을 이끌고 가지 못하여 못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는 비봉산 봉양 7리의 정선아리랑비(77년 건립)에서 조양강과 정선읍을 내려다보는 정경은 그 자체로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정선읍에서 동대천을 따라 사북 쪽으로 가다보면 가파르게 경사진 비탈에는 강원도 옥수수가 싱싱하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여름이면 대궁이 굵고 잎이 크며 ‘옥시기’ 술이 축 늘어진 강원도 옥수수의 싱싱함, 그것이 곧 강원도 금바우들의 정직과 순박, 그리고 저력을 상징해 준다. 가을이면 비탈 곳곳에 베어진 옥수숫대는 선사시대 움집처럼 늘어서고 파란 비닐부대에 담긴 옥수수가 점점 포진한다. 그것은 풍요의 감정이 아니라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말해 주는 처연한 담담함으로 다가온다.
―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예문 8>에서 필자의 시점은 ‘정선으로 가는 길의 고갯마루’에 위치하고 있다가 ‘동대천을 따라 사북 쪽으로 가다보면 만나는 경사진 비탈’로 이동하고 있다. 시점이 이동하는 글에서는 이 예에서처럼 그 위치를 구체적으로 밝히거나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경우에도 특정 위치에서 관찰할 수 없는 상황을 기술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2. 서 사
1) 서사의 개념
‘서사(narration)'란 어떤 사건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하듯이 서술하는 기술 방법을 말한다. 즉 어떤 사건에 대하여 그 전개 과정이나 인물의 움직임을 생생하게 서술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그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자가 의도하는 감정까지 느끼도록 하는 표현 방법이 서사이다.
기술 방법으로서의 서사는 ‘서정’, ‘서사’, ‘극’ 등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서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한편 서사는 묘사와도 구별된다. 독자로 하여금 기술하는 대상에 대해 상상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묘사와 동일한 속성을 지니지만 구체적인 움직임과 사건의 전개를 기술한다는 점에서 한 순간에 존재하는 대상의 형상을 기술하는 묘사와 다르기 때문이다.
다음은 서사의 방법으로 쓴 한 편의 글이다.
<예문 1>
전쟁은 끝났다. 그는 독일군에게서 찾은 고향의 거리로 돌아왔다.
불이 침침한 길을 그는 급히 걷고 있었다. 어떤 여인이 그의 손을 잡으며 술이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유혹의 말을 건넨다.
“어딜 가세요. 나를 찾아오세요, 네? 여보세요.”
그는 물었다.
“천만에요, 당신한텐 왜요? 난 지금 아내를 찾고 있소.”
그는 여인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은 가로등 밑으로 왔다.
그러자 여인은 갑자기 ‘앗!’ 하고 부르짖었다. 그도 그만 무심중에 여인의 어깨를 잡고 불 밑으로 끌어당기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은 여인의 두 팔을 꽉 부둥켜 쥐었다. 그의 눈은 빛났다.
“요안”하고 그는 여인을 와락 끌어않았다.― 허버트 렐리흐, 독일군의 선물
<예문 1>은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남편이 아내를 만나는 장면을 서술함으로써 전쟁이 가져다 준 비극을 표현하고 있다. 특별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우연한 만남에 대한 짤막한 서술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쟁의 비극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준다.
서사도 앞에서 살펴본 묘사와 마찬가지로 독자에게 기술하는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즉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쓰이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의 서사 방법을 ‘설명적 서사’ 혹은 ‘사실적 서사’라고 부르며 ‘설명’의 한 방법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설명적 서사는 보고서나 신문 기사,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나 실험 과정의 서술 등에 흔히 쓰인다.
다음의 <예문 2>는 이러한 서사 방법의 예로 ‘카오스 이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친 로렌츠의 발견에 관해 서술하고 있는 글이다.
<예문 2>
<전략> 1961년 어느 겨울날, 로렌츠는 하나의 결과를 더 면밀하게 검토하기 위해 지름길을 택했다.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계산하지 않고 중간부터 시작했다. 초기 조건을 부여하기 위해 이전의 인쇄 출력을 보고 그대로 타이핑했다. 그리고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홀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한 시간 후에 돌아왔을 때 그는 예기치 못한 무엇인가를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과학의 씨를 뿌린 것이다.
이 새로운 계산은 이전의 결과와 일치해야 할 것이다. 로렌츠는 숫자들을 컴퓨터에 그대로 타이핑했고, 프로그램이 바뀌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새로운 출력 결과를 검토하던 중에 새로 계산된 기후가 매우 빠르게 이전의 계산 결과와 어긋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단지 수개월 만에 모든 유사성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먼젓번에 나온 숫자들을 검토하고 다시 뒤에 나온 숫자들을 검토해 보았다. 두 결과는 전혀 달랐다. 처음에는 또 어떤 진공관이 고장난 것으로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진실을 깨달았다. 고장난 데는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그가 타이핑한 숫자들에 있었다. 컴퓨터의 기억장치에는 소수점 이하 6자리, 즉 .506127까지 기억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쇄 출력할 때는 분량을 줄이기 위해 3자리, 즉 .506만 나타나게 했다. 1000분의 1 정도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고 반올림한 3자리 숫자를 입력했던 것이다.<하략>― 제임스 글리크, 카오스(박배식․성하운 옮김)
<예문 2>는 로렌츠가 컴퓨터에 숫자를 입력하면서 소수점 4자리 이하를 생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나비효과’라고 불리는 현상을 발견하게 된 것을 한편의 이야기처럼 서술한 것이다.
2) 서사의 요소
서사란 사건을 서술하는 기술 방법이다. 어떤 사건을 효과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으로 완결되고 통일된 의미가 드러나도록 글을 구성하여야 한다. 여기서는 이를 위하여 고려해야 할 요소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① 구성(plot)
하나의 사건은 일련의 움직임과 행동들로 이루어지는데 이처럼 사건을 구성하는 움직임과 행동들을 ‘단위 사건’이라고 한다. 서사의 목적은 독자로 하여금 사건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필자가 의도하는 감정까지 느끼도록 하는 데 있다. 독자에게 기술하고자 하는 사건에 대한 선명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단위 사건들 가운데에서 글 전체의 통일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만을 선택하여야 하며 선택된 단위 사건들은 필자가 의도하는 바를 드러낼 수 있도록 인과 관계에 의해 긴밀하게 배열되어야 한다. 인과 관계를 바탕으로 한 단위 사건들 사이의 긴밀한 배열을 ‘구성’이라고 부른다. 서사의 구성은 흔히 ‘발단-전개-(절정)-결말’의 형태를 취한다.
<예문 3>
구두 수선을 주었더니, 뒤축에다가 어지간히는 큰 징을 한 개씩 박아 놓았다. 보기가 흉해서 배어 버리라고 하였더니, 그런 징이래야 한동안 신게 되구, 무엇이 어쩌구 하며 수다를 피는 소리가 듣기 싫어 그대로 신기는 신었으나, 점잖지 못하게 저벅저벅, 그 징이 땅바닥에 부딪치는 금속성 소리가 심히 귓맛에 역(逆)했다. 더욱이 시멘트 포도(鋪道)의 딴딴한 바닥에 부딪쳐 낼 때의 그 음향(音響)이란 정말 질색이었다. 또그닥또그닥. 이건 흡사 사람은 아닌 말밥굽 소리다.
어느 날 초으스름이었다.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창경원(昌慶苑) 곁담을 끼고 걸어 내려오노라니까, 앞에서 걸어가더니 이십 내외의 어떤 한 젊은 여자가 이 이상히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에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또그닥 소리의 주인공을 물색하고 나더니, 별안간 걸음이 빨라진다.
그러는 걸 나는 그저 그러는가 보다 하고, 내가 걸어야 할 길만 그대로 걷고 있었더니, 얼마쯤 가다가 이 여자는 또 뒤를 한번 힐끗 돌아다본다. 그리고 자기와 나와의 거리가 불과 지척(咫尺)임을 알고는 빨라지는 걸음이 보통이 아니었다. 뛰다 싶은 걸음으로 치맛귀가 옹이하게 내닫는다. 나의 그 또그닥거리는 구두 소리는 분명 자기를 위협하느라고 일부러 그렇게 따악딱 땅바닥을 박아 내며 걷는 줄로만 아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여자더러, 내 구두 소리는 그건 자연(自然)이요, 인위(人爲)가 아니니 안심하라고 일러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어서 가야 할 길을 아니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나는 그 순간 좀더 걸음을 빨리하여 이 여자를 뒤로 떨어뜨림으로 공포(恐怖)에의 안심을 주려고 한층 더 걸음에 박차를 가했더니, 그럴 게 아니었다. 도리어 이것이 이 여자로 하여금 위협이 되는 것이었다. 내 구두 소리가 또그닥또그닥, 좀더 재어지자 이에 호응하여 또각또각, 굽 높은 뒤축이 어쩔 바를 모르고 걸음과 싸우며 유난히도 몸을 일어 내는 그 분주함이란, 있는 마력(馬力)은 다 내 보는 동작에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한참 석양 놀이 내려퍼지기 시작하는 인적 드문 포도 위에서 또그닥또그닥, 또각또각 하는 이 두 음향의 속 모르는 싸움은 자못 그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나는 이 여자의 뒤를 거의 다 따랐던 것이다. <중략>
여자는 왜 그리 남자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여자를 대하자면 남자는 구두 소리에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가져야 점잖다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라면, 이건 이성(異性)에 대한 모욕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나는 그 다음으로 그 구두징을 뽑아 버렸거니와 살아가노라면 별(別)한데다가 다 신경을 써 가며 살아야 되는 것이 사람임을 알았다.― 계용묵, 구두
<예문 3>은 주인공이 구두에 징을 박으면서 발단한 사건을 서술한 글이다. ‘또그닥또그닥’하는 소리로 인하여 오해를 받은 것과 오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빨리 한 것,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위협이 되어 끝내 오해를 풀지 못하고 만 것 등 단위 사건들이 인과 관계에 의해 긴밀하게 배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구두의 징을 뽑음으로써 결말을 짓고 있다.
② 시점(視點)
어떤 사건을 서술하는 필자를 흔히 ‘화자(話者)’라고 부른다. 묘사에서 필자의 시점이 일관되게 지켜져야 하듯이, 서사에서도 화자의 시점은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한다. 서사의 시점은 묘사의 시점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서사가 사건을 서술하는 기술 방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서사의 시점은 화자가 사건 속의 인물이 아닌 경우와 사건 속의 인물인 경우로 크게 나뉜다. 화자가 사건 속의 인물이 아니지만 사건 속의 인물의 생각까지 다 알 수 있는 전지적 역할을 하는 경우(전지적 작가 시점)와 관찰자의 역할에 그치는 경우(3인칭 관찰자 시점)로 나뉜다. 또한 화자가 사건의 주인공인 경우(1인칭 주인공 시점)와 사건 속의 인물이기는 하되 관찰자의 역할에 그치는 경우(1인칭 관찰자 시점)로 나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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