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길용사는 1928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서 태어났다.
건장한 청년이 되어 농사를 지으며 살던 중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육군 제 5훈련소 서귀독립대대에 입대하여 육군 용사가 되었다.
그 곳에서 신병기초 훈련을 이수한 후 9월 26일 진해에서 보병제 11사단 제 13연대 대전차 포중대에 배치되어 도보로 함양을 거쳐 전주북중학교에 도착하였다.
당시 전황을 보면 20여일 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차단된 적 패잔병들은 험준한 소백산맥 일대에 숨어들어 산간마을을 점령한 후 소위 해방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한 겨울을 지내는 동안 13연대는 적패잔병의 주력을 분쇄하였다.
1951년 4월 15일 보병 제 11사단은 보병 제 8사단과 교대를 하였고
제 13연대는 포항으로 이동하였다.
1951년 11월 18일 제3대대에서는 양군찬 중위가 지휘하는 제10중대 제 3소대로 하여금 강원도 고성군 수동면 남강 바로 북쪽에 솟아있는 35고지를 공격토록 하였다.
이 작전은 제 3소대의 작전인데도 제1소대장의 동의를 얻어 김응길 하사가 그 공격대로 합류하였다.
김 하사는 양 중위와 함께 3고지 공격에 나섰다.
이 고지를 공격하는데 겁을 먹은 병사들이 양중위의 명령을 즉각 이행하지 않았다.
양 중위 홀로 앞장서서 6부 능선에 근접했다가 지뢰폭발로 중상을 입었다.
소대원들은 일제히 남강을 넘어 안전지대로 후퇴하려했지만 김 하사는 소대장이 부상당한 것을 방치하고 갈 수 없다면서 고지로 올라가니 양 중위는 전신에 선혈이 낭자한 채 부르짖고 있었다.
양 중위를 업고 산을 내려 왔을 때 양 중위는 숨을 거두었다.
김 하사는 즉시 화기중대에 이런 상황을 알리니
양 중위와 동향이고 친척인 양완우 하사가 달려와 피 범벅이 된 양중위를 업고 내려오느라
전신에 피와 땀으로 얼룩져있고 기진맥진한 김하사를 대신하여 시신 운구와 화장에서부터 유해봉송까지 도맡아 수고하였다.
양 중위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애국자였는데 고성군 수동면 남강변에서 아까운 생을 마감하였다. 김응길 용사는 나라위해 몸 바친 양중위님 모습이 생생하게 눈앞에 떠오른다고 술회하였다.
<발췌> 정수현 [한라의 젊은 영웅들] 제주특별자치도재향군인회,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