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도 안인 장마비 속에 무더위가 교차 하면서 요즘은 선풍기를 안고 산다 열대야 때문인지? 종종 날
괴롭히는 불면증인지? 도저히 잠이 안온다.
묵은 앨범에 손이가 뒤적이다가 그리운 이들의 사연을 연상하며 여기 한줄 추억을 되 씹어본다.
( 연변 중심 여행 이야기다)
일제 강점기(倭政時代 ; the period of the Japanese rule in Korea <1910~45>;the Japanese administration period)우리의 아픔 속에 한줄기 독립의 굳은 의지만은 만주의 간도땅에 숨 쉬고 있었다.
그 흔적을 찾을 량 1990년 1994년 2001년 2002년중국을 왕래하며 우리민족에 대하여조금 깊이 생각을 갖고 일 한 적이 있어 묵은 앨범을 들추는 횟수가 늘고 있다.
일을 통해서 던지 정을 통해서 던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맺은 뜻이 그립기도 한데 나들어 이제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나고 보니 더욱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우리의 백두산은 민족의 영산 이며 이민족 신화속의 산이며 온국민의 이상인 심령의 산이다 우리민족은 고조선 이전부터 백두산을 근간으로한 모든 민족문화가 창조 되여 왔다.
민족의 성산 백두산
역사적 민족 인재의 산실 대성중학교
이름만 들어도 알아볼 수 있는 근대사의 인물 정일권(전 국무총리), 문익환 목사, 시인 윤동주가 다니던 역사가 깃든 학교가 현대화 되면서도 옛자취를 그대로 보존하며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윤동주 (尹東柱 1917∼1945)
시인 윤동주 아명은 海煥 北間島 明東村 출생. 기독교 장로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고 성장하였다. 1925년 명동소학교에 입학, 1929년 문예지 《새명동》 발간에 참여하였고, 1931년 大拉子의 중국인관립학교를 거쳐 1932년 龍井의 恩眞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35년 平壤 崇實中學校로 옮겼으나 신사참배문제로 폐교되자, 용정의 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1938년 서울 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하였다.
1942년 일본 리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 입학, 그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으로 전학하였다. 1943년 귀국 직전에 항일운동을 한 혐의로 송몽규(宋夢奎)와 함께 체포되어 2년형을 받고 규슈[九州(구주)] 후쿠오카형무소[福岡刑務所]에서 복역중 1945년 옥사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시는 초기 시부터 마지막 작품으로 보이는 쉽게 쓰여진 시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시적 변모를 드러내고 있다. 초기 시 겨울, 조개껍질, 버선본 등에서는 암울한 분위기와 유년적 평화를 지향하고 있으며, 후기 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등에서는 역사감각을 지닌 자아성찰을 보여준다. 그는 자전적이고 내성적인 시, 그리스도교 신앙에 바탕을 둔 실존적 윤리의식, 그리고 시대와의 갈등에 성실했던 민족의식을 나타낸 시를 썼으며, 이러한 주제를 고도의 상징과 은유적 기법으로 독특하게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시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유해는 용정에 묻혔고,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다.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있다.
보존되고 있는 옛 대성중학교 본관
교정의 윤동주 시비
방명록에 "민족혼의 산실 대성중학교"라 쓰고 헌금 하고 있는 필자
청산리대첩 (靑山里大捷)
1920년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대파한 전투이다.
청산리항일대첩기념비는 우리의 국가보훈청과 광복회 중국화룡시 인면정부와 화룔시 공공협회가 주관이되여 우리측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중국측에서 자재조달과 시공을 맏아 6년여에 걸친 산고끝에 2002년 8월 29일 준공식을 갖고 청산리 현지에 우뚝서서 중.한의 항일투쟁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당초 1920년 청산리대첩을 상징하는 1920cm로 건립할계획이였으나 중국내에 기념비중 제일 높은 기념비를 세울수 없다는 인민정부의 의견을 받아들여 높이를 1720cm으로 조정한것으로 알려 젓으며 이준공식에 현직 국회의원, 광복회회원등 우리측인사 50여명이 초청되였고 중국측에서 인민정부 요원 공공협회 회원 등 500여명이 참석 했으며 필자가 초대되여 축사를 올린바 있다.
맨 앞줄 맨 오른쪽이 필자 (축사를 끝내고 중국측의 경과보고를 듣고있다).
선구자 (先驅者)
내가 애창하고 있고 수없이 불렀던 그저 아끼는 가곡중의 가곡이다. 요즘 가사의 사실성이나 구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학자들 간의 갑론 을박 말이 만치만 가사가 Fiction 이면 어떠냐!
尹海榮작사, 趙斗南작곡. 이 가곡의 가사는 북간도 龍井을 배경으로 작시한 것으로, 가사 첫머리의 一松亭고개는 독립투사들이 오가며 쉬던 곳이며, 海蘭江은 그 옆을 흐르는 강 이름이다. 조두남은 당시 망명청년으로서 1933년 21세 때 이 시에 곡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가 Fiction 을 꾸몄으면 어떠랴.
이 곡은 광복 후 대중에게 많이 불려졌으며,특히 1963년 12월 30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열린 송년음악회에서 바리톤 김학근(金學根)의 독창으로 발표된 것을 당일 기독교방송국에서 녹음하여 이 곡의 앞부분을 <정든 우리 가곡>이라는 프로그램의 시그널뮤직으로 7년 동안 사용함으로써 더욱 애창되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일송정 선구자 노래비를 깍아내고 2004. 4. 20일 용정찬가를 조각해 선구자 노래는 볼수없다 했다
이 날에도 난 노래비 앞에서서 주의 사람들을 관객으로 모시고 "선구자"를 2절까지멋지게?? 불러 재켰었다.
최근에 와서 "선구자" 노랫말과 작사가 작곡가의 진위가 실존 사실에 논란이 되여 학자들 간에 의견과 학설이 분분한 실정으로 급기야 "선구자" 노래비를 갈아내고 그 위에 다시"용정찬가" 노랫말을 조각했다는 소식이 있는데 대하여 창작물인 노랫말(가사)에 대하여 역사적 사실의 진위여부를 구태여 가릴 필요가 있는가? 생각 되여진다. 역사는 역사대로 사실을 규명하고 노랫말은 노랫말대로 그냥두면 안되는것인가?
그것도 사실이고 역사 인데!
지금으로 부터 412년 전인 1605년에 에스빠냐의 쎄르반테스는 "동키호테"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역사가란 응당 정확하고 진실하여 절대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는것이다. 그리하여 어떠한 흥미도, 공포도, 미움도, 사랑도 역사가를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진리의 어머니는 역사이다. 역사는 시간의 경쟁자이며 위대한 사적의 저장고이며 과거의 증거인이며 현재에 대한 본보기와 교훈인 동시에 또한 미래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라고
하지만
"선구자" 노래 가사를 역사에, 노랫말 작사자를 역사가에 빗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 가곡이나 동요중에 "달아 달아 밝은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를 놓고 달에서 이태백이 놀았느냐? 따지고 몇년도냐? 묻는다면 .................................
"반달" 이란 가곡에 "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한마리 ....하얀 쪽배에 돗대도 않이 달고 삿대도 없이...."하는데 달에 계수나무와 토끼와 쪽배를 역사적으로 규명한다면 이건 넌센스라고 본다.
노랫말이 Fiction 이면 무슨 상관인가 우리 민족이 70년이 넘게 그런 가사로 불러온 노래인것을................
우리의 민족사가 간도에 혼을 잇고 떼놈보다 월등히 선진화된 문화 민족이며 간도를 점유 지배 했고 그 흔적이 지금도 뚜렸하고 떼놈이 쓰는 한자도 우리 민족이 만들어 준 거라 걸 세계의 석학들이 인정하는걸 지들도 잘 알면서 동북 공정이 우리 민족사를 들먹이는 건 건방진 노릇이죠.
첫댓글 학자이셨나요?
공직에 계셨던가요?
저도 백두산을 선생님과 똑 같이 연변을 통해서
그리고 위 족적을 남기신 곳엘 다 다녀왔습니다.
저도 사진 꽤나 찍어 왔는데...
컴이 바이러스를 먹는 바람에 몽땅 유실이 됐습니다.
이곳의 터줏대감이신 '막일꾼'선배님과 함께 올랐답니다.
그러나 통분을 금치 못하겠는 것은 중국 놈들의 동북공정이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저 것을 무엇으로 격파해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좋은 사진 자료 잘 읽었습니다.
우리의 민족사가 간도에 혼을 잇고
떼놈보다 월등히 선진화된 문화 민족이며 간도를 점유 지배 했고 그 흔적이 지금도 뚜렸하고
떼놈이 쓰는 한자도 우리 민족이 만들어 준 거라 걸 세계의 석학들이 인정하는걸 지들도 잘 알면서
동북 공정이 우리 민족사를 들먹이는 건 건방진 노릇이죠.
저도 대성중학교에 거금500元을 헌금 했었는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