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죽고 살아 있네!
이영호
오랜만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하는 소리가 ‘너 아직 안 죽고 살아있네’ 언뜻 듣기에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있는 말투이지만 오래도록 사귀어 온 죽마고우(竹馬故友)라 ‘그래 아직 안 죽고 살아 있다. 어쩔래, 이놈아’하고 응답했다.
이제 환갑도 지나 고희(古稀)를 넘기고 나니 주위 친구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아직 남아있는 친구들끼리 가끔 만나거나 안부 전화를 할 때 하는 농담 섞인 말투려니 여긴다. 아직 안 죽고 살아있기 때문에, 듣고 있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경상도 사투리로 ‘문디 자석 안 죽고 살아있네. 보고 싶다. 억수로 반갑데이’ 하는 것도 서로 격의 없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친근감을 더 느끼게 한다.
어린 시절 동네 어른들에게 아침 인사를 할 때 하던 기억으로 ‘진지 잡수셨습니까’ 하는 말도 옛날 보릿고개로 어렵고 살기 힘든 시절 듣던 소리인데, 그 당시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서 원래 속뜻은 ‘안 죽고 살아있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고 하듯이 이 세상에 태어나 부귀영화(富貴榮華)와 천수(天壽)를 누리며 살다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짧은 생을 마감하는 사람도 있다. 이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전생(前生)의 업보(業報)가 긴 목숨 짧은 목숨으로 갈라놓는 것인지도 모른다.
옛날 같으면 칠십 대 이상이면 상노인(上老人) 취급, 뒷방 늙은이 신세들인데, 지금은 식생활과 의학의 발달로 젊은이 못지않게 활동적인 이들도 많다.
젊은 시절에는 꿈과 희망, 생존 경쟁에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제 황혼의 길에서 원대한 꿈과 희망은 사라지고 삶의 폭이 좁아지고 단순해져 가고 있다. 하루해는 길게 느끼지만 한 해는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길을 뒤돌아보아도 즐겁고 기쁜 일보다는 슬프고 괴로웠던 일이 더 마음속 깊숙이 남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지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삶의 발자취와 훌륭한 업적이 있는 분들에게는 역사적으로 후세에 길이 남기고 있다.
주변에서 보고 느끼는 일이지만 빠르게 진행하고 있는 노령화와 생산 인구의 감소, 저출산 등으로 인해, 새로운 문제점으로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 노인 빈곤율, 고독사,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지고 있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발전해 감에 따라, 부모를 모시고 살던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제도로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복지 및 사회보장제의 해결책이 요구된다.
백세 시대에 ‘오래도록 사세요.’ 하는 것보다는 ‘사는 날까지 건강하세요.’ 하는 것이 듣는 당사자는 더 좋다고 한다. 골 골 백세 보다는 팔 팔 백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친목 모임에서도 앞으로 남은 인생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들어보면, 도움 없이 나 스스로 걸어 다닐 수 있고, 치매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지 않을 때까지 살다가, 어느 날 잠자듯 이승을 마감하고 싶다고 한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직장에서 은퇴한 후 무미건조한 생활을 보내다가 노인이 되면서 만성질환에 걸리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받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직장에서 은퇴한 것이지 인생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다.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하듯이, 인생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이제 나는 너무 늙었어’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3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생각,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길 필요가 있다.
나의 경우, 퇴직 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보람 있는 삶’을 위해 선배들의 조언이나 전문 서적을 통해 준비는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살이인 것 같다. 특히 가족 건강 문제로 고생을 하고 있으며, 나 역시 건강하지 못하다. 취미생활이라고 여행을 좋아하는데 코로나19로 발이 묶여있으니 답답하다. 마음을 달래고 시름을 풀기 위해, 가끔 글을 쓰고 있다.
불확실의 시대,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 내일을 모르고 살아가지만, 후손들을 위한 미래의 걱정과 더 좋은 세상을 갈망하면서,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오늘 이 순간을 만족스럽고 보람 있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첫댓글 이영호 선생님, 좋은 수필 늘 잘 읽고 있습니다.
새 해에도 계속 건필을 빕니다.
김종상 선생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늘 건강 하십시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