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 해전
8시간 이순신 대장선 혼자 싸움
후위 함선은 지도 위치 보다 더 후방, 그림상 후위 작은배 뒤쪽에 있었다고 함.
명량해전 승첩 장계를 왜 없애 버렸나?
김무일(예 해군대령)
우리는 명량대첩이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위대한 승리라고 자랑하지만 왕조실록에는 명량해전 승첩 장계가 없다. 그래서 해전과 관련한 역사자료는 해전(9월 16일)이 끝나고 2개월여 시간이 지난 11월 10일자 조선 조정에서 명나라 제독총병부에 서면 통보한 이순신의 전과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에 앞서 원균이 칠전량 해전에서 참패하자, 선조는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편입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 폐지불가 장계를 올렸는데 장계내용 중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습니다.(今臣戰 船尙有十二)” 라는 구절만 연상(聯想)해 4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명량해전에 조선 전선 12척이 참전했다고 글을 쓰는 사람이 많다. 실록에 명량해전 장계가 빠졌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이라 생각된다.
◎ 난중일기는 『장계를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유년 9월 23일 : 승첩장계 초본을 수정하다.
9월 27일 : 송한, 김국, 배세촌 등이 승첩장계를 가지고 뱃길로 올라갔다.
9월 28일 : 송한 등이 바람에 막혀 돌아왔다.
9월 29일 : 정제가 장계를 갖고 다시 올라갔다.
임진년에는 해전을 치르고 귀영(歸營) 2~3일 후에 장계를 올렸는데 이때는 11일이 지나서야 장계를 발송했다. 왜군에 포로로 잡혔다가 도망쳐 나온 김준걸이 “각 처의 배를 불러 모아 조선군을 격멸한 후 한강으로 올라가자 하더라.” (난중일기 9월 14일)는 진술이 있었으므로 왜군의 동정을 살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6일 : 물결이 몹시 험하고, 외롭고, 위태해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9월 17일 : 어외도(於外島)에 이르니 피난선이 무려 300여 척이 먼저 와 있었다.
9월 19일 : 저녁에 법성포에 이르니 흉한 왜적들이 육지로 와서 인가(人家) 곳곳에 불을 질렀다.
9월 20일 : 새벽에 배를 타고 위도(蝟島)에 이르니 피난선이 많이 정박해 있었다.
9월 21일 : 일찍 떠나 고군산도에 이르니 호남 순찰사가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급히 옥구로 갔다고 한다.
◎ 선조는 승전 보고서를 받아 보았다.
선조 30.10.11(무진) 군량을 주관한 명나라 동지(同知) 진등(陳登)을 접견한 자리에서
진(陳) : “이순신이 왜적을 많이 포획했다고 하니 매우 좋은 일입니다.”
선 조 : “그가 황제의 위령에 힘입어 조금 포획하기는 하였습니다.”
또, 선조 30.10.20(정축) 명나라 경리(経理) 양호(楊鎬)를 접견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를 보면 선조는 명량해전 결과를 알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선 조 : “통제사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인이 은단(銀段)으로 상주고 표창하여 가상히 여기시니 과인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양경리 : “이순신은 좋은 사람입니다. 다 흩어진 뒤에 전선을 수습하여 패배한 후에 큰 공을 세웠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그 때문에 약간의 은단을 베풀어서 나의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 이순신의 전공을 폄훼 하는 선조
명량해전 후 양경리에게 “이순신이 사소한 왜적을 잡은 것은 바로 그의 직분에 마땅한 일이며 큰 공이 있는 것도 아닌데...” 라고 한 선조의 발언은 조선을 도우러 온 외국 장수에게 겸손의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명나라 장수들의 ‘이순신에게 표창하라’는 압력에도 꿈적도 않다가 6개월이 지난 이듬해 4월 『황제가 이순신을 표창할 수 있도록 명나라에 보고해 달라』는 양경리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보낸 회답을 보면,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의 공적을 높게 평가하면 할수록 그 반대로 깎아 내리려고 발악을 한다.
〈비변사의 건의〉 선조 31.4.15(기사)
우리나라에서 적의 머리를 조금 베었다고 시끄럽게 황제에게 보고한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나 양경리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해로울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양경리로부터 (이순신이) 칭찬까지 받게 된 것이므로 표창해 주는 문제는 오직 전하의 처분에 달려 있습니다.
〈선조의 지시〉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주워온 것쯤은 아이들의 장난 같은 것이어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작은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문서로 황제에게까지 보고함으로써 다시금 명나라 조정에 죄스러운 일을 하겠는가. 이순신에게 표창해야 할 것이나 품계를 올려준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듯하다.
◎ 선조는 암군(暗君)?
명량해전 전투경과 보고서(일시, 참가세력, 전과, 아군피해 등)는 왕조실록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구체적인 전과(戰果)를 언급하는 신하들도 찾아 볼 수 없다. 선조가 승첩장계를 자신만 보고 없애 버렸기 때문에 실록에 기록할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품계가 종1품 승정으로 한 단계 올라갈 예정이며, 거제현령 안위는 통정(정3품)으로 올라갔다고 증언하고 있다. 거제현령을 승진시키면서 통제사를 승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난중일기〉
정유년 11월 11일 (무술) : 새로 부임한 평산포 만호 신훤이 임명장을 바쳤다. 그가 전하는 말이 숭정(崇政)으로 가자(加資-품계를 올려 주는 것)하는 것이 이미 발행되었다고 한다.
11월 16일 (계묘) : 아침에 조방장 장홍부사가 방문했다. 개인별 전공 조사 기록을 보니 거제현령 안위는 통정(通政)이 되고 그 나머지도 차례로 벼슬을 받았으며 내게는 은자(銀子) 20냥을 상금으로 보냈다. 불과 5일 사이에 이순신에게 승정으로 가자(加資)한다는 언급은 없고 상금 은자 20냥만 보낸 것이다. 소서행장을 이용하려고 그 부하인 요시라에게 정 3품 첨지중추부사 벼슬과 은자 80냥을 준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하다. 그러면서 해전이 끝나고 11개월이 지나 조용해진 시기에 “이순신의 승첩을 가지고 온 자에게 논상하라.(선조31.8.15 무진)”고 지시한다. 이 얼마나 비열한 행패(行悖)인가. 절대권력에 집착해 세자인 광해군까지 끊임없이 견제했던 선조이고 보면 상승장군 이순신이 자신에게 잠재적 위험인물로 보였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명나라 장수들의 끈질긴 포상 압박(양경리를 포함 명나라 장수 15명이 70여점의 선물을 보낸다.)은 선조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불과 한 달 반 전에(8월3일) 통제사로 재임명하면서 나라를 구해 달라고 애원하던 그들이 승첩장계를 보자 마음이 바뀐 것이다. 용렬한 인물이 윗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