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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6월 20일 화요일
[bc8937] [오후 6:43] [FILE] g그렉킹밴드 - Jeopardy.mp3 (5.09MB)
[bc8937] [오후 6:46] 백제사의 비밀 계속 이어지는
召西奴와 朱蒙의 關係 편을 올립니다.
이 파일은 2005년도 강연회에서 발표한 율공 이중재 선생님 저작입니다. 사진과 함께 싱싱하게 올리고 있으니 필요하신 분이나 저장하실 분은 컴퓨터에 카카오톡깔고 작업하셔서 저장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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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오후 6:53] ㉯ 召西奴와 朱蒙의 關係
朱蒙에 대한 기록은 正史에 모두 있으나 召西奴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召西奴는 百濟本紀에 의하면 卒本 사람으로 연타발(延陁勃)의 딸로 되어있다. 召西奴가 첫 남자와 결혼한 상대는 우태(優台)라고 했다. 우태는 北扶餘王 해부루(解夫婁)의 서자의 손자라고 되어있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의 주석에 보면 百濟의 始祖가 沸流로 되어있고 우태씨가 아버지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비류(沸流)는 나라를 세우고 도읍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주석에서는 비류가 百濟의 始祖로 되어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필자가 百濟本紀를 검토해서 판단을 내려보고자 한다.
北扶餘에서 결혼한 朱蒙의 본처 예씨(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유유(孺留) 즉 類利가 찾아와 太子로 삼게 되자 沸流와 溫祚는 朱蒙을 떠나갔던 것이다.
전한(前漢.BC.206년)시 성제(成帝.BC.32~29년) 홍가(鴻嘉.
BC.20~17년) 3年의 일이다. 沸流가 도착한 곳은 미추홀(彌鄒忽)이란 곳이었다. 이때 溫祚의 都邑地는 하남성(河南省) 위례성(慰禮城)이다.
沸流가 미추홀에 도읍을 하려했으나 땅이 습하고 짠물 때
[bc8937] [오후 6:53] 문에 편안하게 살기에는 적당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함께 따라간 신하들이 간하여 溫祚가 都邑한 河南慰禮城을 가보도록 권하였다. 이때 沸流는 都邑을 定하지 못한 상태였다.
신하들이 河南慰禮城으로 가보도록 간곡히 간하는 바람에 沸流는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보았다. 沸流가 河南慰禮城을 둘러보니 都邑地가 마치 솥처럼 안정되어 백성들이 크게 편안한 것을 보고 부끄러운 나머지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결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沸流는 百濟의 始祖가 될 수 없는데도 우태씨의 아들 沸流가 始祖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古代社會의 제도상 장자가 代를 이어야한다는 관습에서 죽은 沸流를 위로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始祖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우태씨는 百濟本紀에 있는 것과 같이 北扶餘王의 해부루 서손(庶孫:서자의 손)으로 卒本을 내려와 유구태(有仇台)가 세운 卒本扶餘國에 와 王位에 오르고 비(妃:王의 처)로 맞이한 女人이 召西奴였따. 그리하여 우태씨와 召西奴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이 沸流이고 작은아들이 溫祚라고 되어있다.
通志와 通典 百濟편에는 百濟의 先祖가 위구태(尉仇台)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周書에서는 百濟者는 그 선조가 개마한(蓋馬韓)에 속한 나라이며 扶餘와는 다른 종족으로 유구태(有仇台)가 처음 나라를 세운 곳은 대방(帶方)의 옛 땅이
[bc8937] [오후 6:53] 라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百濟를 건국한 사람이 위구태(尉仇台)인지, 또한 유구태(有仇台)인지, 溫祚인지가 아리송하다.
三國史記 百濟本紀 주석 끝 편에는 北史와 周書를 인용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東明 이후 유구태(有仇台)는 독실한 성품에 어질고 믿음이 있어 帶方郡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고 되어있다. 특히 대방군 옛 땅에서 나라를 세울 때 漢나라 遼東太守인 公孫度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후 東夷의 强國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태씨가 北扶餘에서 卒本으로 와서 卒本扶餘國을 세우고 卒本 사람인 召西奴와 결혼하여 沸流와 溫祚를 낳기 전에 유구태(有仇台)가 먼저 百濟國을 세워 十餘代로 내려온 후 溫祚가 후에 다시 百濟를 세웠다는 것인지 正史에는 기록이 없다.
여하간 우태씨가 죽은 후 北扶餘에서 도망온 朱蒙은 卒本扶餘國을 얻기 위해 沸流와 溫祚 두 아들을 데리고 홀로 살던 召西奴를 비로 맞아 高句麗를 세우는 터전을 잡았다고 보아야한다. 이와같은 사실로 미루어보아 沸流와 溫祚를 朱蒙이 직접 낳지는 않았지만 召西奴를 아내로 맞으면서 자동적으로 아들로 입적되었음을 알 수 있다.
朱蒙이 召西奴를 비로 맞아 卒本扶餘의 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은 正史에 잘 나타난 사실이다. 召西奴는 朱蒙을
[bc8937] [오후 6:54] 맞이하여 모든 재산과 정성을 다하여 朱蒙을 도왔다고 했다. 그것은 훗날 沸流와 溫祚 두 아들을 위해 몸과 마음과 재산마저 다 바친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北扶餘에서 결혼한 禮氏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유유(孺留. 一名 類利)가 찾아오자 朱蒙은 沸流와 溫祚을 제치고 太子로 삼았던 것이다. 이때 召西奴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왜냐하면 유유가 찾아와 太子로 봉해지자 溫祚와 沸流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朱蒙은 어부지리로 卒本扶餘國의 터전을 얻고 따라서 召西奴의 헌신적인 공덕까지 받았으니 朱蒙으로서는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召西奴는 沸流와 溫祚 그리고 朱蒙도 버릴 수 없고 그렇다고 두 아들마저 잃게 되었으니 召西奴의 가슴은 찢어지도록 아팠을 것으로 보인다.
沸流와 溫祚 두 아들은 어머니인 召西奴를 남겨두고 母子간에 눈물의 이별을 했던 것이다. 史書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朱蒙의 본 부인인 禮氏가 朱蒙을 찾아왔다는 대목이 없고 따라서 召西奴 역시 朱蒙을 떠나 溫祚 곁으로 떠났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 아쉽다.
여하간 새로 만난 남자인 朱蒙을 미워할 수도 떠날 수도 없는 상황에서 朱蒙은 大業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 결과 다물(多勿)에 都邑했던 송양왕(松讓王)의 항복을 받았던 것이
[bc8937] [오후 6:54] 다. 그 결과 4년 7월 궁실과 성곽을 짓고 6년 10월에는 오이(烏伊)에게 명하여 太白山 東南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의 부분노(扶芬奴)를 토벌하였다. 다시 10년 11월에는 왕명을 받은 부위염(扶尉厭)은 北沃沮를 정벌하고 강역을 넓혀 나간 것은 이 모두가 召西奴를 비(妃)로 맞이한 덕이었다.
하지만 召西奴는 沸流와 溫祚를 떠나보낸 슬픔으로 朱蒙과 平生을 함께 한 것인지 아들을 따라간 것인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는 것이다. 先人들의 말에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옛 말은 召西奴와 朱蒙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 百濟의 八大姓과 官名
百濟의 八大姓을 살펴보면 百濟初期부터 망하기까지 한반도에는 八大 姓氏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에는 百濟가 있었던 사실이 正史에는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나오는 유물들은 高句麗·百濟·新羅가 쇠퇴하거나 亡한 후에 유민들이 조상들의 유물을 가지고 오거나, 아니면 한반도에 와서 만든 것들이다. 한국에서 나오고
[bc8937] [오후 6:54] 있는 유물들은 유민들이 옮겨온 물건이므로 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이 한반도로 옮겨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유물이 나왔다는 것은 민족의 이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고고학(考古學)은 글자 그대로 옛것을 생각한다는 의미이므로 民族의 이동사라고 볼 수 있다.
고로 엄밀히 따져보면 考古學은 民族이 옮겨온 이동사이다. 그러기에 考古學은 正史가 아니라 민족의 이동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百濟가 초기부터 한반도에서 도읍을 했다면 百濟의 八大 姓氏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와야 하고 따라서 무덤과 都邑地, 그리고 城이 남아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백제왕릉이 없다. 무녕왕릉이 하나 있다고 하는 것은 백제후예들이 와서 새로 만든 것에 불과하다. 百濟가 망한 후 백제의 유민들이 망국의 한을 노래한 것이 산유화이다. 산유화 가사 중에 百濟가 망한 한을 노래한 가사가 문화관광부에 등록되어 있다.
百濟의 八大 姓氏에 대한 正史의 기록으로는 太平御覽·唐書·北史·隋書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 八大 姓氏에 대해 적어보기로 한다.
사씨(沙氏)·연씨(燕氏)·협씨(劦氏. 一名
氏)·해씨(解氏)·진씨(眞氏)·국씨(國氏)·목씨(木氏)·백씨(苩氏)이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현재 한국에는 이러한 姓氏가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에는 百濟가 없었기 때문이다.
[bc8937] [오후 6:54] 三國史記 百濟本紀는 모두 6권으로 되어있다. 그런데도 百濟의 姓이 扶餘氏라는 것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사실 百濟는 색리국(索離國)에서 나왔다거나 扶餘에서 나왔다거나 또한 朱蒙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우태씨(優台氏)의 아들로 沸流와 溫祚가 기록되어 있고, 한편에서는 유구태(有仇台)씨가 百濟를 건국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百濟의 始祖인 溫祚와 沸流의 姓이 무엇인지 자세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正史에 기록되어 있는 百濟의 姓氏가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여덟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같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百濟는 한반도에 없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다음은 百濟의 官名에 대하여 論하기로 한다. 官名은 十六品으로 되어있다. 周書와 通志 그리고 通典, 太平御覽, 그리고 三國史記 등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本文을 통해 싣기로 한다.
百濟의 官의 이름 중에 좌평(左平)을 다섯 명으로 一品은 좌솔(左率)이며 十六品은 다음과 같다.
二品 달솔(達率), 三品 은솔(恩率), 四品 덕솔(德率), 五品 한솔(扞率), 六品 나솔(奈率). 六品 以上은 관모에 은꽃을 장
[bc8937] [오후 6:55] 식하였다. 七品은 장덕(將德)으로 자색의 띠를 둘렀다. 八品은 시덕(施德)으로 검은 띠를 두르고, 九品 고덕(固德)의 벼술이 주어진 자는 붉은 띠를 두르게 했다. 十品 계덕(季德)은 푸른 띠를 두르게 하였다. 十一品 대덕(對德)과 十二品 문독(文督)까지는 모두 누른 띠를 두르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十三品은 무독(武督)이며, 十四品은 좌군(佐軍), 十五品 진무(振武), 十六品 극우(克虞)이다. 十六品까지는 모두 흰띠를 둘렀다. 특히 十五品은 周書·通志·通典에서는 극우(克虞)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太平御覽에서는 권우(卷虞)라고 적고 있다. 본 官名의 수를 좌평(佐平)은 5명으로 하였고, 달솔(達率)의 벼슬자는 32명으로 되어있다.
二品 은솔(恩率) 이하는 官과 상관없이 상시 근무자로 되어있다. 각 부서마다 벼슬한 사람의 업무에는 관청의 안에서 맡는 內部를 두었다. 그 부서는 다음과 같다.
곡부(穀部:양식을 다루는 부서)·육부(肉部:육류를 다루는 부서)·내약부(內掠部:관내서 다스리는 부서)·외약부(外掠部:밖으로 다스리는 부서)·마부(馬部:말을 관리하는 부서)·도부(刀部:무기와 칼을 다루는 부서)·공덕부(功德部:공덕을 다루는 부서)·약부(藥部:병에 대한 약을 다루는 부서)·목부(木部:건축토목을 다루는 부서)·법부(法部:법을 다루는 부서)·후관부(後官部:관직의 승직관계를
[bc8937] [오후 6:55] 다루는 부서)이다.
또한 외관유사군부(外官有司軍部:바깥관직에 있는 군의 부서를 다루는 부서)로는 사도부(司徒部:군사를 주관하는 부서)·사공부(司空部:군사를 충원시키는 부서)·사구부(司寇部:군사의 도둑이나 난동을 다스리는 부서)·점구부(點口部:군졸을 점검하는 부서)·객부(客部:외부에서 찾아온 군의 손님을 관장하는 부서)·외사부(外舍部:외부의 군사를 모시게 하는 부서)·도부(綢部:모든 군기를 다루는 부서)·일관부(日官部:날마다 군부 인사들의 현황을 다루는 부서)·도시부(都市部:군사의 주둔지를 다루는 부서)이다.
특히 군사의 주둔지를 다루는 都市部는 1만여 호를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五部를 나누어 두었다고 했다. 上部·前部·中部·下部·後部를 두고 각 부마다 군사 5백 명을 두고 다섯 부서마다 각각 한 사람씩 수령을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二品직을 가진 달솔(達率)에게는 군(郡:군은 제후국의 수준)에 세 사람의 장군을 두었다. 그리고 四品직을 가진 덕솔(德率)에게는 주위 군사 1200명 이하 700명 이상을 통솔케 하였다. 그리고 성(城) 안팎으로 백성과 서민들은 작은 성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百濟의 官職제도는 어느 大國 못
[bc8937] [오후 6:55] 지 않게 철저히 분담하여 제도화가 잘되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족벌과 성씨를 초월하여 자기의 관직에 따라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bc8937] [오후 6:55] 第二章. 百濟의 都邑說과 제후국
① 晋平二郡地의 考察
2004년경 KBS 역사 스페셜에서, 北京을 방문하여 大學敎授들에게 晋平二郡이 어디인지를 묻는 放送을 한 일이 있다. 그때 필자가 우연히 放送을 보게 되었는데 晋平二郡의 位置를 放送에 나온 敎授들도 찾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현 中國에서는 江澤民 前 主席 때부터 文民의 시대가 개방되었다. 그러니까 1994, 5년 때부터 歷史工夫에 대해 조금씩 눈을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 中國이 개방정책을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고로 현 中國의 歷史學者들은 共産國家 시절에는 염두에 둘 수 없었던 터라 역사공부는 전연 안된 상태라고 보아야한다.
필자가 1991년 北京에 갔을 때이다. 그때 金智榮 박사와 친한 사이였던 필자는 北京大學校 考古學者인 有名한 嚴文明 박사 댁을 訪問한 일이 있었다. 왜냐하면 1989년 필자가『한民族史』를 집필할 때 우연히 嚴文明 박사의 論文을 입수하여 한民族史에 記錄한바 있었기 때문이다.
[bc8937] [오후 6:55] 嚴 博士는 記念論文에서 밝혔듯이 현 中國大陸에 펼쳐져 있는 유물을 답사 조사한 결과 모두 東夷들의 文化임을 말하였다. 1991년 그때만 해도 歷史에 관한 얘기는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특히 한국과는 國交가 수립되지 않은 共産國 체제였기에 嚴 敎授는 쉬쉬하면서 조용히 말하였다. 그때 필자를 따라간 李昌源 詩人이 녹음한 것을 지금도 보관 중에 있다.
이상의 예로 보듯이 현 中國의 歷史學者들은 깊은 歷史를 工夫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 中國學者들은 漢字로 엮은 歷史書를 어느 나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보다 월등한 실력이 있다고 보아야한다.
우리 祖上들은 歷史를 漢字로 記錄했기 때문에 漢字의 實力 없이는 歷史를 이해하기란 不可能하다. 그러므로 현재 한국의 현실은 歷史를 잃어버린 盲人의 상태라고 보아야한다. 이러한 상태가 수십 년 계속되는 동안 현 中國에서는 한국에서 버린 歷史를 찾아 자기네 것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더구나 隋나라 이후부터 歷史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고치고 또는 없애는 作業을 꾸준히 자행하고 있다. 그러기에 歷史의 진실을 찾으려면 地名을 알아야하는데 규명하기란 어
[bc8937] [오후 6:55] 려운 상태이다. 하지만 아무리 지우고 지워도 진실은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범죄자가 완전 범죄를 노려도 반드시 흔적이 남게 마련이듯이 眞實된 歷史의 지명을 추적하고 찾는다면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百濟가 처음 도읍했다는 晋平二郡을 반드시 그리고 정확히 찾는 것이 百濟史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百濟가 한반도에 있다고 오늘날까지 교육부를 통해 史學者들이 學生들에게 가르쳐왔기 때문이다. 고로 百濟가 都邑했다는 晋平二郡을 기필코 찾아 百濟가 建國한 位置를 알아야한다.
또한 百濟가 도읍했다는 거발성(居拔城)의 位置와 河南省에 있었던 위례성(慰禮城), 그리고 漢城의 位置는 물론 웅진성(熊津城)의 位置도 찾아 밝혀 보려고 한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中國에서는 지금까지도 歷史의 맥이 깃 든 地名은 철저히 바꿔치기 하거나 옮겨버렸다. 또 경우에는 아예 지명을 없애버리거나 엉뚱한 곳으로 둔갑시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규명할 수 있을 때까지 찾아보려고 한다.
[bc8937] [오후 6:56] 사진
[bc8937] [오후 6:56] 晋平二郡이라하면 晋郡과 平郡의 두 곳을 말한다. 분명 이 두 곳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晋平二郡이라고 史書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晋平二郡을 각종 문헌을 통해 고증해 보기로 한다.
우선 가장 최근에 발행한 中國歷史大辭典 2000년 12월 판을 살펴보기로 한다.
晋郡은 晋州일 것으로 보인다. 晋州편을 살펴보면 주명(州名) 즉 고을 이름이라고 했다. 北魏 때 건의(建義.AD.528년) 元年에 고쳐 唐州를 두었고, 晋나라가 얻은 이름이라 했다. 다스리던 이곳은 白馬城이며 지금의 山西省 임분시(臨汾市)라고 적고 있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晋郡이나 平郡 또는 平州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晋郡은 晋州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晋郡이란 晋의 고을을 말하고, 晋州 역시 晋의 고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1988년 3월에 출판된 中國歷史地名辭典이다. 이 사전에는 晉平郡이 있다. 晉平郡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本文을 싣고 풀어보기로 한다.
晉平郡, 南朝宋泰四年(468年) 以晋安郡改置治所侯官縣 (今福建福州市)七年(471年) 復爲晋安郡.
[bc8937] [오후 6:56]
진평군은 남조(南朝) 때 宋泰 4년이라 했는데, 宋泰라는 王의 年號는 없다. 다만 宋나라 때 태시(泰始) 또는 태예(泰豫)라는 年號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南朝 때 宋나라의 王이었던 泰始와 泰豫의 두 王을 지칭하는 年號인 듯하다. 그러나 宋泰四年이 AD.468年이라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서 南朝時 明帝 유욱(劉彧) 태시(泰時.AD.465~471년)임이 분명하다. 晉平郡을 晋安郡으로 고쳐 두어 다스리던 곳은 제후들의 관현이라고 되어있다. 이곳은 현재 복건성(福建省) 복주시(福州市)로 7년은 기원 후 471年에 다시 복귀시켜 晋安郡이라고 적고 있다.
本文에서 보다시피 晉平郡을 晋安郡이라 하여 현 中國 남쪽 끝 복건성 복주시에 백제가 처음 도읍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984년 3월에 출간된 中國古代史敎學參考地圖集에서는 晋州에 대한 기록이 두 곳으로 되어있다. 하나는 河北省 晋縣이며, 또 하나는 山西省 임분시(臨汾市)로 되어있다.
1931년 5월에 출간된 中國古今地名大辭典의 晋州편을 보면, 山西省 임분현(臨汾縣)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平州를 살펴본 결과 엉뚱하게도 河北省과 山西省으로 되어있어 地名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通典과 通志를 보면 ‘百濟亦據有遼西晋平二郡, 今柳城 北
[bc8937] [오후 6:56] 平之間’이라고 되어있다. 中國古今地名辭典(1931년판) 633쪽에 柳城에 관한 기록이 보였다. 이곳은 지금의 河南省 서화현(西華縣) 서쪽 20里로 적혀 있다.
柳城은 古代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복희(伏羲)씨의 동생 여왜씨(女媧氏)의 都邑地로 본 이름은 왜성(媧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柳城을 中國人民共和國 分省地圖集으로 살펴본 결과 서화현(西華縣)은 河南省 東南쪽으로 안휘성(安徽省) 北部 서쪽으로 되어있다. 고로 百濟가 都邑했다는 晋平二郡地는 河南省 남쪽임을 알 수 있다.
② 百濟의 천도설
㉮ 百濟의 都邑地
百濟가 都邑했다는 것은 앞장에서 보듯이 晋平二郡地라고 했다. 또한 三國史記 本紀에는 河南慰禮城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隋書와 北史, 그리고 舊唐書에는 대방군(帶方郡)의 옛 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bc8937] [오후 6:57] 百濟가 처음 都邑을 어디에서 하여 어디로 천도했는지 三國史記 百濟本紀에 나타난 기록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다른 正史에는 百濟가 천도한 기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溫祚가 최초로 都邑했다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서울에 있는 한강 남쪽을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남성(河南省)에 위례성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正史에 보면 섬서장안성(陝西長安城) 또는 사천한성(四川漢城), 그리고 호남웅진성(湖南熊津城)이라고 기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남성위례성, 섬서성장안성, 사천성한성, 호남성웅진성이라고 적지 않는다.
史書의 기록법에는 ‘성’ 자가 겹칠 때에는 앞에 오는 ‘성’ 자는 쓰지 않는 것이 史書를 기록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고로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은 하남성 위례성임을 나타내고 있다.
百濟가 처음 도읍했다는 晋平二郡의 땅은 帶方郡에 속한 옛 지역이라고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晋平二郡地는 帶方郡에 속한 옛 땅이라 했으므로 晋平二郡에 都邑했다는 것과 帶方郡의 옛 땅에 都邑했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하지만 百濟本紀에서는 분명히 河南省에 있는 慰禮城에 都邑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百濟의 처음 都邑地가 晋平二郡地
[bc8937] [오후 6:57] 냐, 즉 帶方郡의 옛 땅이냐, 아니면 河南省에 있는 慰禮城인지가 문제이다.
다시말해 하남위례성이 帶方郡의 옛 땅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晋平二郡地 역시 帶方郡의 옛 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河南慰禮城이 河南省 땅이기는 하나 帶方郡의 땅이 아니라고 했을 때는 문제가 달라진다. 만약 百濟가 처음 都邑한 곳이 晋平二郡地인 帶方의 땅에서 都邑을 했다면 溫祚는 다시 河南慰禮城으로 都邑地를 옮긴 것이 된다.
分明히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帶方郡의 옛 땅에 都邑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河南省 땅인 慰禮城에 都邑을 했다고 되어있다. 물론 河南省 남쪽과 동서쪽으로는 帶方郡의 옛 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河南省 洛陽의 北部는 帶方郡의 옛 땅이다. 다시말해 山西省 남쪽은 옛 帶方郡이다. 만약 河南慰禮城이 洛陽의 서북쪽으로 있다고한다면 이곳은 晋平二郡이 있는 현재의 서화현(西華縣)과는 약 一千里가 넘는 먼 거리이다.
왜냐하면 河南慰禮城은 직산현(稷山縣)이라 했으므로 中國古今地名大辭典과 分省地圖와 그밖의 여러 地理書를 조사해본 결과 百濟時代(高句麗·新羅·隋·唐) 때 河南省 西北쪽은 현재에 와서 성(省)의 位置가 바뀌어 지금의 山西省
[bc8937] [오후 6:57] 최 서남부에 직산현(稷山縣)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직산현의 위치가 옛날 晋平二郡의 옛 땅에 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河南慰禮城이 晋平二郡인 帶方郡의 옛 땅에 있었다는 게 증명되기 때문이다.
百濟의 천도설은 晋平二郡地인 帶方郡 옛 땅에서 시작되어야 하느냐, 아니면 河南省에 있는 慰禮城 즉 직산현(稷山縣)에서 출발되어야 하느냐가 가려져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百濟의 천도설은 다른 正史에는 없으므로 百濟本紀를 기준으로 하여 정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三國史記 百濟에 나타난 河南慰禮城에 대한 位置에 대하여 중요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本文을 간단하게 적고 해설해 보기로 한다.
惟此河南之址,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
이곳은 오직 하남성(河南省)의 터이다. 북으로는 대수(帶水)와 한수(漢水)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다. 남쪽을 바라보면 기름진 땅과 못이 있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땅이 막혀 있어 이곳은 하늘이 내린 험한 땅이라고 되어있다.
[bc8937] [오후 6:57] 本文의 기록을 보면 하남성의 터에서 북으로는 帶水와 漢水가 있다고 했으므로, 이곳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百濟가 都邑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은 곳에서 천도(遷都:도읍을 옮기는 것)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북쪽에 있던 말갈(靺鞨)의 침범이 잦고, 백제와 말갈의 땅이 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 溫祚王 때 漢山 천도
溫祚王 2년 王이 군신들에게 설명하면서 말하기를, 말갈(靺鞨)은 우리 百濟와 북쪽 경계가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溫祚王은 이 점을 매우 우려했던 것이다. 3년 가을 9월 말갈은 百濟의 북쪽 경계를 침범해 왔다. 백제왕은 강한 군사를 급히 보내 대패(大敗)시켜 敵이 살아 돌아간 자는 열 한두 명이었다.
4년에는 樂浪國과 수교를 맺었다. 8년 봄 2월 말갈의 적 3천 명이 와 위례성을 포위했다. 이때 王은 성문(城門)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아니했다.
[bc8937] [오후 6:57] 10년 겨울 10월 말갈이 다시 북쪽 경계를 침범해 왔다. 王은 2백 명의 병사를 시켜 곤미천(昆彌川) 위에서 싸웠으나 백제군사는 패하였다. 이때 王은 친히 1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출격하여 봉현(烽峴)에서 구하는 것을 본 말갈의 적은 물러났다.
13년 여름 5월 王이 군신들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백제는 동쪽에 낙랑국(樂浪國)이 있고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이 있어 강역을 자주 침범하고 있다. 그러니 작은 일에도 편안한 날이 없다. 이미 王女인 어머니를 잃고 세태는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도다. 장차 반드시 나라를 옮겨야겠다. 작금에 순방을 하다보니 漢水의 남쪽은 토양이 비옥하고 그곳에 都邑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다. 그래야만 나라를 오래도록 안정된 계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가을 7월이 되자 漢水 아래 작은 성인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慰禮城)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8월에는 馬韓에 파견사를 보내 천도할 것을 알렸다.
드디어 계획이 완료되어 강역의 장소가 정해졌다. 북쪽으로는 패하(浿河. 즉 浿水)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며, 서쪽으로는 넓은 땅이 있고, 동쪽 끝을 달리면 부드러
[bc8937] [오후 6:57] 운 땅이 있다. 9월에는 城과 궁궐을 세웠다.
14년 봄 1월에는 위례성을 떠나 천도하였다.
17년 봄에 樂浪이 침범하여 위례성을 불태워버렸다.
㉰ 近肖古王 때 移都 漢山
百濟 13代 근초고왕(近肖古王) 26년의 기록을 싣고 本文을 풀어보기로 한다.
高句麗擧兵來, 王聞之, 伏兵於浿河上, 俟其至急擊之高句麗兵敗北, 冬, 王與太子帥精兵三萬, 侵高句麗, 攻平壤城, 麗王斯由力戰拒之, 中流失死, 王引軍退移都漢山.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올 것이라는 것을 왕은 소문을 들었다. 그리하여 복병을 패하(浿河)의 강 위에 숨겨두었다. 기다리고 있던차 급작스럽게 고구려 군사를 급습하여 패배시켰다.
[bc8937] [오후 6:58]
겨울, 王은 太子와 더불어 장수와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왕 사유(斯由)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움을 막았다. 이때 날아오는 화살에 百濟 군사가 죽는 것을 보고 百濟王은 군사를 후퇴시킨 후 都邑을 漢山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本文에서 말하는 浿河는 浿水이다. 浿水는 현 中國大陸의 중앙부인 西安에서 동으로 흐르는 黃河로서, 河南省 洛陽 위의 큰 강물을 뜻한다.
그리고 평양성(平壤城)은 현 北韓의 평양이 아니라 서안시(西安市)의 東南에 있는 장안성(長安城)이다. 長安城은 高句麗 때 平壤城이라 했고 古代에는 요임금이 살았던 왕검성(王儉城)이었다.(三國遺事 古朝鮮 참고)
㉱ 文周王 때 熊津 천도
[bc8937] [오후 6:58]
22代 文周王 21년이었다. 高句麗가 漢城으로 침공해 와서 포위하였다. 이때 개로왕(蓋鹵王. 文周王 父)은 스스로 영성(嬰城)을 굳게 지키고 文周王은 新羅에 구원을 요청하여 1만 명의 군사가 왔으므로 고구려 군사는 물러갔다. 이때 城은 파괴되고 개로왕이 죽자 文周王이 즉위하였다. 그해 겨울 文周王은 都邑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고 되어있다.
百濟 천도설에서 本文을 살펴보았다. 百濟 溫祚王은 13년 도읍지를 漢水의 남쪽으로 옮기겠다고 하였다. 여기서 漢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1102쪽에 漢水에 대한 기록이 있다. 漢水에 대한 기록이 너무 길므로 간략하게 本文을 보고 설명하기로 한다.
漢水의 본래 물이 나타나는 것은 섬서성(陝西省) 서녕(西
寧)인 강현(羌縣)의 북쪽 파총산에서 발원된다고 되어있다.
[bc8937] [오후 6:58] 사진
[bc8937] [오후 6:58] 역시 말하기를 東漢水라 한다. 처음 이름은 양수(漾水)이다. 동으로 흘러 漢水에 이른다고 되어있다.
溫祚王은 都邑地인 漢水가 흐르는 남쪽인 漢山의 아래에 작은 목책(木柵)을 세웠다고 했다.
여기서 漢山의 북으로는 浿河에 이르고, 남으로는 웅천(熊川)이며, 서쪽은 넓고 넓은 무궁한 큰 바다와 같은 땅이 있으며, 동쪽 끝으로 달리며 부드러운 땅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漢山의 아래 都邑을 定했다고 했으므로 漢山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地名大辭典 1103쪽에는 漢山은 없고 漢州가 있다. 漢山은 漢州라는 고을에 있을 것이므로 漢州를 보기로 한다.
漢州는 唐나라가 두었다. 고친 이름은 德陽郡이며 다시 찾아 복원시켰다. 宋나라에서 말하기를 漢州德陽郡이라 했고 元나라 때는 漢州라 했다. 明과 淸나라 때에는 四川省 成都에 모두 속한다고 되어있다.
溫祚王이 漢山의 아래에 都邑을 定했다면 河南慰禮城에서 천도하여 漢州에 와 都邑했음을 알 수 있다. 漢州는 德陽郡이라고 했으므로 德陽의 郡과 縣은 지금의 四川省 자동현(梓潼縣) 북쪽을 뜻한다. 고로 漢山은 현재 四川省 成都의 위치이다. 그리고 북으로 이르면 浿河인 浿水라고 했으므로 浿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수경주소(水經注疏)에 따르면 浿水는 동쪽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응소(應劭)에 따르면 朝鮮王滿의 都邑地는 平壤
[bc8937] [오후 6:59] 城 卽 王儉城으로 이곳의 浿水는 낙랑국(樂浪國)이 있는 東으로 흐른다고 했다.
다시말해 平壤城인 王儉城은 古朝鮮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현재 대륙 西安에서 동으로 洛陽에 이르는 黃河의 中流가 패수(浿水)이다.
漢山의 남으로는 웅천(熊川)이 있다고 했으므로 지금의 貴州省이나 湖南省을 뜻하고 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서쪽으로 큰 바다와 같은 넓은 大陸이 있고 동으로 달리면 부드러운 땅이 있다고 했으므로, 이곳은 湖北省과 湖南省 또는 安徽省, 그리고 江蘇省을 말하고 있다.
百濟의 동쪽에는 樂浪國이 있다고 했으므로 그렇다면 만약 한반도에 百濟가 있었다면 동쪽에 樂浪國이 있어야한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없는 것이므로 조작했다는 사실이 명백하다. 또한 百濟의 북쪽과 靺鞨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는데 한반도에는 말갈이 있었던 사실이 없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살펴보면 百濟는 넓은 支那大陸을 무대로 都邑하고 있었음이 확실해진다.
22代 文周王은 웅진(熊津)으로 옮겼다고 한다. 古今地名辭典을 살펴본 결과 熊津은 보이지 않고 1108쪽에 熊耳山이 있었다. 여기에 東熊州와 西熊州가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
[bc8937] [오후 6:59] 사진
[bc8937] [오후 6:59] 아 熊津의 위치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곳에는 湖南省 安仁縣 東南五十里라고 적고 있다. 다시 分省地圖集으로 검토한 결과 湖南省 中部 동쪽으로 安仁縣이 있었다. 이곳은 長沙 바로 남쪽이다. 다시말해 江西省 中部 서쪽과 가까운 곳이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地名을 이리저리 바꾸고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百濟의 行路를 보면 熊津城의 都邑地가 湖南省 安仁縣 東南五十里라고 하는 점이 맞지 않겠는가, 라고 생각된다.
㉲ 聖王 때 泗沘 천도
26代 聖王 3년에는 新羅와 使臣들이 오고가고 하였다. 4년에는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작은 목책(木柵)을 세웠다.
7년 겨울 10월 高句麗王 흥안(興安)은 궁사와 병마(兵馬)가 침공하여 왔다. 그리하여 북쪽에 있는 비혈성(鄙穴城)을 뽑아버렸다. 이때 명을 받은 좌평(佐平:一品)은 연모(燕謨)와 함께 보병과 기병 3만 명으로 五谷의 들에서 싸움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나 되었다.
16년 봄 聖王은 사비(泗沘) 一名 所夫里로 都邑을 옮기고
[bc8937] [오후 7:00] 나라이름을 南扶餘라고 하였다.
[bc8937] [오후 7:01]
歷史辭典과 地名辭典 등을 찾아보았으나 泗沘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았다. 中國古今地名大辭典 521쪽에 泗州가 보였다. 分明 泗州에는 泗沘城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왜냐하면 泗州라는 고을에 泗沘城이 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泗州를 살펴보니 안휘성(安徽省) 우치현(盱眙縣) 東北으로 되어있다. 한편 泗沘는 一名 所夫里라고 했으므로, 所夫里는 所村일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안휘성(安徽省) 靑陽縣 東南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안휘성 우치현이냐, 아니면 청양현이냐는 것이 문제이다. 다만 泗沘는 一名 所夫里라 했으므로, 所夫里는 所村이므로 안휘성 청양현 東南이 확실해 보인다.
安徽省 靑陽縣은 안휘성 남쪽에 都邑한 뒤 百濟의 나라이름을 南扶餘라고 고친 것이다. 그렇다면 26代 聖王 때부터 31代 의자왕(義慈王) 때까지는 百濟가 아닌 南扶餘라고 보아야한다.
百濟는 1代 溫祚王 때부터 26代 聖王 때까지 河南慰禮城에서, 다음은 漢城으로, 세 번째 웅진성(熊津城)으로, 네 번째 泗沘城으로 천도했던 것으로 보아진다.(89쪽 지도 참고)
[bc8937] [오후 7:01] 사진
[bc8937] [오후 7:01] 以上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반도에서는 百濟가 4번이나 옮길만한 곳도 없다. 따라서 植民史學者들이 한반도에 百濟가 있었다고 하는 것은 分明히 국가의 반역죄임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歷史를 날조하는 것은 國家가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百濟의 천도는 4번으로 大陸에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③ 百濟의 戰亂史
㉮ 百濟初期 戰亂
전술한바와 같이 溫祚王이 都邑한 지 2년에 百濟의 북쪽과 연이어 있는 말갈(靺鞨)이 침공해 왔다. 3년에도 말갈이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을 때 百濟는 강한 군사를 급히 파견하여 격퇴시킨 후 말갈 병사가 불과 열 한두 명만 살아 돌아갔다.
[bc8937] [오후 7:01]
말갈은 8년 또다시 군사 3천 명이 침공하여 하남성에 있는 百濟 위례성을 포위하였다. 王은 城門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경순(經旬)은 말갈의 도둑들이 식량이 떨어질 때 돌아갈 것을 王에게 민첩하게 문서를 보냈다. 그리하여 대부현(大斧峴)에서 추격하여 일전(一戰) 즉 한번 싸운 뒤 이겼다. 이때 죽이고 포로 5백여 명을 잡았다고 했다.
溫祚王 10년 겨울인 10월에 또다시 말갈은 북쪽 경계를 침공하였다. 王은 군사 2백 명을 파견하여 곤미천(昆彌川) 위에서 막아 싸웠으나 百濟兵은 패하였다. 백제 군사는 靑木山에서 스스로 보호하고 의지하고 있었다. 이때 百濟王은 정예병과 기병 1백 명으로 봉현(烽縣)으로 나와 구조하는 것을 본 말갈의 적은 즉시 후퇴하였다.
13년 여름 5월 동쪽으로는 낙랑국이 있고 북쪽에 있는 말갈은 百濟 강역을 자주 침노하므로 王은 불안을 느끼고 도읍을 옮겼다.
溫祚王 4년 낙랑국(樂浪國)과 사신이 오고가고 수교한 바 있지만 도읍지를 옮긴 후 3년 후에 樂浪이 침노하여 위례성을 불태워버렸다.
18년 말갈이 엄습해 오자 王은 장수와 군사들로 칠중하(七重河)에서 역전시켜 추장 소모(素牟)를 잡아 馬韓으로 보냈다. 그 나머지 적병들은 구덩이에 묻어 버렸다. 11월
[bc8937] [오후 7:02] 王은 욕심을 부려 樂浪國의 牛頭山城을 습격하였으나 구곡(臼谷)에 이르자 큰 눈을 맞아 이내 돌아왔다고 했다.
22년 가을 8월에는 石頭와 高木의 두 城을 쌓고, 9월에는 王이 장수와 기병 1천 명이 부현(斧峴)의 동쪽에서 말갈의 도적을 맞아 일전을 벌여 포로를 생포하여 장수들에게 하사하였다.
33년 봄과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상황에 이르자 도둑이 크게 일어났다. 王은 백성을 어루만지며 안심시켰다.
34년 겨울 馬韓의 옛 장수인 주근(周勤)이 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王은 궁사와 병사 5천 명으로 토벌하고 주근(周勤)을 잡아 허리를 잘라 죽이고 그 처자를 아울러 주살하였다.
40년 가을 9월 말갈병이 와서 술천성(述川城)을 공격해 왔다. 겨울 11월 또다시 부현성(斧峴城)을 엄습하여 1백여 명을 죽이고 약탈하므로 王의 명에 따라 강한 기병 2백 명으로 격퇴시켜 막았다.
2代 다루왕(多婁王) 3년 겨울 10월 동부에 있는 흘우(屹于)와 더불어 말갈과 馬首山에서 싸워 이겨 많은 무리를 잡아죽였다. 王은 기뻐 흘우(屹于)에게 상으로 말 10필과 곡식 五百石을 하사하였다.
[bc8937] [오후 7:02]
4년 가을 8월 古木城에서 곤우(昆優)는 말갈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때 2백 명을 참수시켰다. 7년 2월 우보(右輔)인 해루(解婁)가 90살에 죽자 東部에 있던 흘우(屹于)를 右輔로 삼았다. 가을 9월 말갈은 馬首城을 공격 함락시키고 백성들의 집을 불태웠다. 겨울 10월에 또다시 병산(甁山)의 작은 성으로 습격해 왔다.
28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죄인들을 사면시켰다. 가을 8월에 말갈이 북쪽 변방을 침입해 왔다.
37년 王은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의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였으나 꺾지 못했다. 군사는 이동하여 구양성(狗壤城)을 공격하였지만 新羅는 기병 2천 명으로 역습하다가 달아났다.
39년 와산성(蛙山城)을 공격하여 빼앗고 2백 명을 머물러 지키게 했다. 43년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를 침략했다.
48년 겨울 10월 와산성(蛙山城)을 다시 공격하여 완전히 뽑아버렸다. 49년 新羅는 다시 와산성을 수복하였다.
3代 이루왕(已婁王) 9년 봄 정월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의 변경을 침공했다.
29년 파견사를 보내어 新羅와 강화조약을 청했다. 32년 봄·여름에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는
[bc8937] [오후 7:02] 지경에 이르렀다. 가을 7월 말갈은 牛谷城에 들어와 백성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49년 말갈의 침범으로 新羅가 약탈당하자 百濟에게 칙서를 보내 군사를 청하므로 5명의 장수를 보내 구원하였다.
4대 개루왕(蓋婁王) 38년 겨울 10월 新羅 아찬(阿湌)인 길선(吉宣)이 모반을 일으켰다. 그때 신라왕은 국서를 보내 청병하였으나 보내지 아니했다. 이 일로 신라왕은 분노하여 장수를 출동시켜 토벌하러 왔으나 城을 단단히 지키고 나가지 않으므로 신라군사는 양식이 떨어져 돌아갔다.
5代 초고왕(肖古王) 5년 10월 新羅의 군사가 변방을 침입해 왔다. 24년 가을 7월 아군이 新羅와 더불어 구양(狗壤)에서 전쟁하여 패배하므로, 죽은 자가 5백여 명이었다.
25년 가을 8월 군사를 출병시켜 新羅의 서쪽 변경인 원산향(圓山鄕)을 습격하였고, 이어서 진격하여 악곡성(岳谷城)을 포위하였다. 이때 新羅 장군 구도(仇道)는 장수와 병사 5백 명이 항전하므로 거짓으로 물러나 구도(仇道) 장수를 추격하여 와산(蛙山)으로 이르게 한 후 아병(我兵)이 반격하여 크게 이겼다.
34년 가을 지진이 일어났다.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 변경을 침입했다. 39년 가을 7월 군사를 출병시켜 新羅의 요차
[bc8937] [오후 7:02] 성(腰車城)을 뽑아버렸다. 그때 城主인 설부(薛夫)를 죽이므로 新羅王 10代 나해 이사금(奈解尼師今.AD.194~227년)은 노하여 이벌찬(伊伐湌) 리음(利音) 장수에게 명하여 六部의 장수와 정병으로 百濟의 사현성(沙峴城)을 공격하여 왔다.
43년 가을 가뭄이 들자 메뚜기 떼가 곡식을 자라지 못하게 하였고 도적들이 많이 일어나자 王은 어루만지며 안심시켰다.
45년 봄 적현(赤縣)과 사도(沙道)의 두 城을 쌓아 백성들과 가옥을 이주시켰다. 겨울 10월 말갈이 沙道城을 공격하러 왔으나 이기지 못하고 성문에 불을 지르고 달아났다.
49년 가을 9월 北部의 진과(眞果)에게 명하여 영병 1천 명으로 말갈의 石門城을 습격하여 취하였다. 겨울 10월에는 말갈의 강한 기병이 침입하여 우술천(于述川)에 이르렀을 때 王은 죽었다.
6代 구수왕(仇首王) 3년 가을 8월이었다. 말갈이 와서 적현성(赤峴城)을 포위했다. 이때 城主는 굳게 항거하여 도적을 물리쳐 돌아가게 했다. 王은 장수와 강한 기병 8백 명으로 추격하여 사도성(沙道城) 아래서 싸워 이겨 죽이고 포로로 잡은 자가 심히 많았다.
5년 王은 군사를 보내 新羅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므
[bc8937] [오후 7:02] 로 신라왕은 친히 장수와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였다. 이때 百濟의 군사는 패하였다.
7년 王城의 西門에 불이 났다. 그리고 말갈의 도둑들이 북쪽 변경을 침입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막았다. 9년 겨울 10월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 우두진(牛頭鎭)으로 들어가 민가를 약탈하므로 新羅 장군 충훤(忠萱)은 영병 5천으로 역공하여 웅곡(熊谷)에서 싸웠으나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11년 가을 7월이었다. 新羅 일길찬(一吉湌) 연진(連珍)이 침입해 왔다. 이때 아군은 봉산(烽山)의 아래서 역공으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16년 11월에는 큰 돌림병이 있자 말갈이 우곡성(牛谷城) 경계까지 들어와 사람과 물품을 약탈하므로 王은 정예병 3백으로 막으려 했으나 말갈의 적인 복병에게 격퇴되어 아군은 대패하였다.
18년 여름 4월이었다. 밤 같은 큰 우박이 쏟아져 참새가 죽었다.
8代 고이왕(古爾王) 7년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를 침범하였다. 13년 큰 가뭄이 들어 보리가 자라지 못했다. 가을 8월 魏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무구검(毋丘儉)과 樂浪太守 유무(劉茂)와 더불어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 등과 함께 高句麗를 쳤다. 王은 허점을 틈타 좌장군(左將軍) 진
[bc8937] [오후 7:02] 충(眞忠)을 파견하여 樂浪의 변방을 습격하여 백성들을 잡아왔다. 樂浪太守 유무가 소문을 듣고 분노하므로 王은 두려워 침입하여 토벌하러 올 것을 알고 백성들을 돌려보냈다.
22년 가을 9월이다. 장수를 출병시켜 新羅를 침공하였다. 더불어 신라의 병사와 귀곡(槐谷)의 서쪽에서 싸워 신라장수 익종(翊宗)을 죽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 봉산성(烽山城)을 공략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25년 봄 말갈(靺鞨)의 장라갈(長羅渴)이 좋은 말 10필을 헌납하러 왔다. 王은 우대하고 노고를 위로하고 돌려보냈다.
28년 3월 파견사를 新羅로 보내 화해할 것을 청했으나 따르지 아니했다.
33년 가을 8월이었다. 군사를 보내 新羅의 봉산성(烽山城)을 공격했다. 이때 城主인 직선(直宣)은 장사 2백 명을 출격시켜 패하였다.
39년 겨울 11월 군사를 파견하여 新羅를 침공했다.
45년 군사를 출병시켜 新羅 귀곡성(槐谷城)을 공략하면서 포위했다.
50년 가을 9월에도 군사를 보내어 新羅 변방을 침공했다.
53년 봄 정월 파견사를 新羅로 보내 화해할 것을 청했다. 겨울 11월 王이 죽었다.
[bc8937] [오후 7:02]
9代 책계왕(責稽王) 13년 가을 9월이다. 漢나라와 더불어 맥인(貊人) 사람들이 침노해 왔다. 이때 王이 직접 출병하여 적병과 싸우다가 죽었다.
10代 분서왕(汾西王) 7년 봄 2월이다. 몰래 군사를 보내 樂浪의 西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에는 樂浪國王이 太守를 시켜 보낸 자객(刺客)에게 해를 당해 죽었다.
11代 비류왕(比流王) 24년 9월이었다. 내신(內臣:궁에 있는 신하) 좌평(佐平:一品 벼슬) 우복(優福)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거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王은 즉시 군사를 발동시켜 토벌하였다.
28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모두 말라죽었다. 강물도 말랐다. 가을 7월이 되자 이내 비가 왔으나 그해 굶주림을 참지 못해 서로 사람을 잡아먹었다.
34년 봄 2월에 新羅에서 파견한 사신이 찾아왔다.
41년 겨울 10월에 王이 죽었다.
13代 근초고왕(近肖古王) 2년 봄 정월에는 天地神明에게 제사지냈다.
[bc8937] [오후 7:03] 21년 봄 3월 新羅에 파견사를 보냈다.
23년 봄 3월에 다시 신라에 파견사를 보내면서 좋은 말 두 필도 보냈다.
26년 高句麗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王이 듣고 패하(浿河)의 강 위에 복병을 두었다. 기다리던 고구려 군사가 오자 숨어있던 군사가 급히 출격하므로 고구려 군사는 패하였다. 그해 겨울 王은 太子와 함께 장수와 정예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 平壤城을 침공하였다. 고구려왕 사유(斯由)는 있는 힘을 다해 싸움을 막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는 자가 많아 王은 군사를 퇴각시킨 후 漢山으로 都邑을 옮겼다.
28년 가을 7월이었다. 청목령(靑木嶺)에 城을 쌓았다. 그 당시 독산성(禿山城) 성주와 군졸 3백 명이 新羅로 달아났다.
30년 가을 7월이었다. 高句麗 군사가 북쪽 변방을 공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을 함락하였다. 이때 王은 장수를 파견하여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王은 다시 큰 군사를 일으켜 보복하려 하였으나 그해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그해 겨울 11월에 王은 죽었다.
百濟가 개국한 이래 文字 기록을 하지 않았다. 이 당시
[bc8937] [오후 7:03] 어렵게 찾은 박사 고흥(高興)을 통해 처음으로 기록을 하려 했으나 高興 자신도 百濟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어 다른 서책을 통해 기록한 것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14代 근구수왕(近仇首王) 元年이었다. 高句麗王 강왕(岡王) 사유(斯由)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내침해 왔다. 太子가 파견되어 막으러 갔을 때 반걸양(半乞壤) 장군이 다가와 싸우려 했다. 반걸양은 고구려 사람이지만, 사기(斯紀:간단한 기록)에 의하면 본래 백제 사람으로 국마(國馬:나라의 말)의 발굽을 상하게 한 죄가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이제 돌아와 太子에게 이르기를, 저쪽 군사가 비록 많지만 모두 가짜로 된 병사입니다. 그 중에 붉은 깃대를 단 군사가 가장 용맹하므로 만약 그것만 먼저 부셔버리면 나머지는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太子는 그대로 따라 진격하여 대파시켰다. 북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쫓아 水谷城 西北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기를 ‘일찍 들은 바로는 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知足不辱) 알고 살아가면 위태롭지 않다(知止不殆)고 했습니다. 지금 소득이 많은데 어쩌자고 더 많이 구하고자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bc8937] [오후 7:03] 太子는 옳게 여기고 중지하였다.
2년 겨울 11월이었다. 高句麗가 다시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3년 겨울 10월 王은 장병 3만을 이끌고 高句麗 平壤城을 침공하였다. 11월에는 고구려가 다시 내침해 왔다.
10년 봄 2월에는 세 겹으로 해무리가 지더니 宮中에 있는 큰 나무가 저절로 뽑혔다. 여름 4월에 王이 죽었다.
㉯ 百濟中期 戰亂
16代 진사왕(辰斯王) 2년 8월이었다. 高句麗가 침공하였다. 3년 가을 9월 말갈(靺鞨)과 더불어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다.
6년 9월 王의 명을 받은 달솔(達率:二品 벼슬) 진가모(眞嘉謨)는 高句麗를 공략하여 도곤성(都坤城)을 빼앗고 2백 명을 사로잡았다. 王은 진가모를 병관좌평(兵官佐平)으로 제수했다.
7년 여름 4월 말갈이 북쪽 변방에 있는 적현성(赤峴城)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다.
8년 가을 7월 高句麗王 19代 廣開土王 담덕(談德)은 병사
[bc8937] [오후 7:03] 4만 명을 이끌고 북쪽 변방에 있는 석현(石峴) 등 열 몇 군데의 城을 함락시켰다. 王이 듣건대 담덕(談德)인 고구려왕은 군사를 부리는 용병술이 뛰어남을 알고 항거하지 못하였다. 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은 많이 몰수당했다. 그해 11월 구원(狗原)의 행궁(行宮)에서 王은 죽었다.
17대(代) 아신왕(阿莘王) 2년 봄 정월에 동명(東明) 사당을 배알하고 남쪽 제단에서 天地에 제사지냈다. 가을 8월 王은 무(武)에게 말하기를, ‘관미성(關彌城)은 우리 북쪽의 요지인데 지금은 高句麗 소유가 되었다. 과인은 이것이 통분하고 애석하도다. 경이 모쪼록 마음을 헤아려 치욕을 씻게 해달라’ 하고, 드디어 장병 1만 명으로 고구려 남쪽 변을 칠 계획을 세웠다. 진무(眞武)는 몸소 무장하고 병졸들도 돌 촉으로 무장시켜 의도적으로 石峴 등 다섯 城을 먼저 회복시켰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 관미성(關彌城)을 포위하므로 고구려 사람들은 영성(嬰城)을 굳게 지켰다. 진무(眞武)는 군량의 길이 막혀 되돌아왔다.
3년 가을 7월이었다. 고구려와 더불어 水谷城 아래에서 싸웠으나 패하였다.
4년 가을 8월 王의 명을 받은 좌장군(左將軍) 진무(眞武)
[bc8937] [오후 7:03] 등이 고구려를 치니, 고구려왕 담덕은 친히 장수와 병사 7천 명으로 패수(浿水:西安에서 洛陽으로 흐르는 큰 강)의 위쪽에 진을 치고 싸웠으나 아군(百濟軍)이 크게 패하였다. 그때 죽은 자가 8천 명이었다. 겨울 11월 王은 보복할 욕심으로 浿水에 부역을 하였다. 또한 친히 장수와 군사 7천 명이 漢水를 지나 청목령(靑木嶺) 아래에 이르렀으나 큰 눈을 만나 士卒들이 많이 얼어죽었다. 하는 수 없이 漢山으로 회군하여 군사들을 위로했다.
6년 여름 5월이었다. 王이 왜국(倭國)과 화친을 맺을 때 太子인 전지(腆支)를 볼모로 보냈다. 가을 7월에는 漢水의 남쪽에서 군사를 크게 점검하였다.
8년 가을 8월 王은 高句麗를 침공할 욕심으로 병마(兵馬)를 크게 징집했다. 그때 백성들은 고달픔으로 견디다 못해 新羅로 많이 달아나 戶口가 없어질 정도로 쇠하였다.
1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벼 싹이 마를 지경이었다. 王은 친히 횡악(橫岳)에서 제를 지내니 이내 비가 왔다. 5월 파견사가 倭國으로 가서 큰 구슬을 구해왔다.
12년 봄 2월 倭國의 使臣이 왔다. 王이 맞이하여 노고를 위로하고 후대하였다. 가을 9월 군사를 보내어 新羅 변경을 침공하였다.
[bc8937] [오후 7:03]
14년 봄 3월에 백기(白氣:흰 기운)가 王宮 서쪽에서 일어나 짝으로 가리는 것 같으니 가을 9월에 王이 죽었다.
18代 전지왕(腆支王)은 太子 때 볼모로 간 지 3년 봄 2월 전지(腆支)는 倭國에서 돌아왔다. 아신왕(阿莘王)이 14년에 돌아가자 元子인 전지가 王位에 올랐다.
전지왕 2년 봄 정월 東明의 사당을 배알하고 남쪽 제단에서 天地에 제사를 지낸 후 대사면령을 내렸다. 2월 晋나라 사신이 들어와 조공을 받쳤다.
13년 여름 4월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가을 7월에 東北 이부(二部) 사람 15세 이상을 징집하여 사구성(沙口城)을 쌓게 하였다. 이때 사병관(使兵官) 좌평(佐平) 해구(解口)를 감독 역으로 시켰다.
14년 여름 使臣을 倭國에 파견할 때 흰 베 10필을 보냈다.
16년 봄 3월 王은 죽었다.
20代 비유왕(毗有王) 2년 봄 2월 王은 四部를 돌며 백성들을 어루만졌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곡식을 차등으로 하사
[bc8937] [오후 7:04] 하였다. 그 당시 倭國 使臣 5십 명이 따라왔다.
7년 봄과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가을 7월 파견사를 新羅에 보내 화친을 청했다.
29년 가을 9월 漢江에 검은 용이 보였다. 이윽고 안개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니 王이 죽었다.
21代 개로왕(蓋鹵王) 15년 가을 8월이었다. 장수를 보내 高句麗의 남쪽 변을 침공하였다.
21년 가을 9월 高句麗王 20代 長壽王 거연(巨璉)이 장수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王의 都邑地인 漢城을 포위하였다. 王은 문을 닫고 출전하지 않았다. 고구려 병사는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였다.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질렀다. 城門은 불에 타고 人心은 두렵고 위태로웠다. 혹 욕심 같아서는 나아가 항복하고 싶었다. 王은 궁색하고 급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기마병 수십 명이 문을 나와 서쪽으로 달렸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격하여 해를 입혔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음모로 百濟를 도모코자 간첩으로 갈만한 사람을 구하던 차였다. 부도(浮屠:스님의 법명) 도림(道林)이 모집에 응하여 말하기를, 어리석은 중이지만 道를 닦기에는 불가능하므로 나라의 은혜에 보답코
[bc8937] [오후 7:04] 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大王이 신을 불초하다고 하지 마시고 사신으로 지목해 주신다면 王의 명에 욕되지 않게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王은 기뻐하고 百濟를 속이는 밀사로 보냈다.
道林은 죄를 지어 거짓으로 도망온 것처럼 百濟로 들어갔다. 그때 百濟王 근개루(近蓋婁)는 바둑두기를 좋아하였다. 道林은 王에게 나아가 아뢰기를, 신은 어릴 때부터 바둑을 배워 묘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좌우에서 들어주시길 원합니다, 라고 하였다. 王은 불러들여 바둑을 대하고 보니 과연 國手로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윗 손님으로 모시게 한 뒤 친근하게 대하였다. 중략.
道林은 말하기를, 大王의 나라는 四方이 모두 산과 구름, 그리고 강과 바다와 같은 강역을 갖고 있어 하늘이 내린 험한 곳이며,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형상입니다. 이곳은 四方 이웃에 나라가 있지만 감히 엿볼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만 한가하지 않는다면 원하옵건대 일을 받들고 싶습니다. 王은 마땅히 숭고한 자세와 부유한 업적으로 사람들이 보고 듣고 칭송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곽도 수리하지 않으시고 궁실도 수리하지 않으시고, 先王의 해골도 땅위에 옹기종기 모여있고 백성들의 집들도 강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bc8937] [오후 7:04]
신은 大王이 취하지 않는 것에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王은 승인하면서 장차 내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흙을 구워 城을 쌓고 궁실도 짓고 누각과 화살대도 마련했다. 고로 장엄하고 화려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큰돌을 욱리하(郁里河)에서 취하여 관을 만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장사지냈다. 그로 인하여 강이나 나무가 있는 언덕 등 사역(蛇域:뱀 모양으로 둥근 형상의 지역)의 동쪽으로 숭산(崇山)의 북으로 이르는 곳이다. 이와 같은 무리한 공사로 인해 창고는 바닥나고 人民은 궁핍해졌다. 나라는 계란을 쌓은 것처럼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道林은 이 틈을 타 고구려로 도망가서 고했다. 중략… 고구려의 장수와 군사들은 北城을 7일 동안 공략하여 뽑아버리고, 이동하여 南城도 공격했다. 城中은 두렵고 위태로워 王이 나와 도망가버렸다.
22代 문주왕(文周王) 21년 高句麗가 침입해 와 漢城을 포위했다. 개로왕(蓋鹵王)은 영성(嬰城)을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아들 文周에게 사신을 보내 新羅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新羅가 1만 명을 보내왔으므로 고구려 군사는 물러났다. 하
[bc8937] [오후 7:04] 지만 城은 부셔지고 王은 죽었다. 드디어 文周는 王位에 올랐다. 성정이 유순하여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겨울 10월 도읍을 웅진(熊津)으로 옮겼다.
23代 삼근왕(三斤王) 2년 봄이었다. 좌평(佐平:一品) 해구(解仇)와 은솔(恩率:三品) 연신(燕信)은 무리를 모아 大豆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王은 좌평(佐平:一品) 진남(眞男)에게 명하여 군사 2천 명으로 토벌하려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덕솔(德率:四品) 진노(眞老)에게 명하여 장수와 정예병 5백 명으로 공격하여 해구(解仇:佐平一品)를 죽이고 연신(燕信:恩率三品)은 高句麗로 달아났다. 그 처자들을 몰수하여 웅진시(熊津市)에서 참수시켰다.
3년 봄과 여름은 크게 가물었다. 가을 9월 大豆城으로 옮긴 王은 斗谷城에서 살다가 겨울 11월에 王이 죽었다.
24代 동성왕(東城王) 4년 가을 9월이었다. 말갈의 군사가 漢山城을 엄습하여 파괴한 후 포로 3백여 호를 데리고 돌아갔다.
7년 여름 5월 新羅에 사신을 보냈다.
10년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치려고 왔다가 우리에게 패하였다.
[bc8937] [오후 7:04] 13년 여름 6월 웅천(熊川)의 물이 넘쳐 왕도(王都)에 있는 2백여 家의 민가가 떠내려갔다. 가을 7월 백성들이 굶주리자 新羅에 6백여 家가 도망갔다.
16년 가을 7월이었다. 高句麗와 新羅가 살수(薩水)의 들에서 싸웠으나 고구려는 이기지 못했다.
17년 가을 8월 고구려가 치양성(雉壤城)을 포위했다. 王은 新羅에 파견사를 보내 구원을 청했다. 신라왕은 장군 덕지(德智)에게 명하여 장수와 병사가 구원하므로 고구려 군사는 후퇴하여 돌아갔다.
21년 여름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서로 잡아먹었다. 그러나 도둑떼가 크게 창궐하자 신료들은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구해야한다고 청하였으나, 王이 듣지 아니했다. 그러자 漢山 즉 漢城에 살던 백성 2천 명이 高句麗로 도망갔다. 12월에 이르자 이내 王이 죽었다.
25代 무녕왕(武寧王) 봄 정월 좌평(佐平:一品) 백가(苩加)는 가림성(加林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王은 장수와 병마(兵馬)로 우두성(牛豆城)에 이르자 명을 받은 한솔(扞率:五品) 해명(解明)이 토벌하므로 백가(苩加)가 나와 항복하였다. 王은 참수시켜 白江에 던져버렸다. 겨울 11
[bc8937] [오후 7:04] 월 파견된 달솔(達率:二品) 우영(優永)은 장병 5천을 이끌고 高句麗 水谷城을 습격하였다.
2년 봄 백성들이 굶주리자 돌림병이 일어났다. 겨울 11월 군사를 보내 고구려 변방의 경계를 침략하였다.
3년 9월 말갈은 마수(馬首)의 작은 城을 불태우고 고목성(古木城)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王은 군사 5천 명을 보내어 격퇴시켰다.
6년 봄 큰 병이 있었고, 3월과 5월에 이르러 비가 오지 않고 강과 못이 고갈되어 백성들은 굶주렸다. 그리하여 창고를 열어 구하였다. 가을 7월 말갈병이 내침하여 古木城을 파괴하고 죽인 후 포로 6백여 명을 데리고 갔다.
7년 여름 5월 작은 성 두 곳을 古木城 남쪽에 세우고 또한 장령성(長嶺城)을 쌓아 靺鞨을 대비하게 했다. 겨울 10월 高句麗 장수 고노(高老)와 말갈과 더불어 모의하여 욕심을 갖고 漢城을 공격하기 위해 횡악(橫岳)의 아래로 나아가 주둔하였다. 王은 군사를 출동해 싸워서 격퇴시켰다.
12년 가을 9월 고구려를 습격하여 가불성(加弗城)을 빼앗고 군사를 이동시켜 원산성(圓山城)을 파괴시켜 죽이고 약탈한 것이 심히 많았다. 또한 王은 장수와 용맹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에서 싸울 때 고구려 군사
[bc8937] [오후 7:04] 는 백제의 병사가 적은 것을 보고 진(陳)을 설치하지 않은 것을 알고 王은 기습으로 출격하여 대파시켰다.
21년 여름 5월 큰물이 났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곡식을 헤쳐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9백 戶 가량 新羅로 도망갔다. 겨울 11월 梁나라가 파견사를 보내 조공을 바치러 왔다. 이에 앞서 高句麗에게 패하여 여러 해 동안 쇠약하게 지내다가 이제 와서 글을 드립니다. 그동안 고구려를 여러 번 쳐부수고 난 후 처음으로 좋게 통하게 된 것은 다시 강국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3년 봄 2월 王은 漢城으로 행차하였다. 좌평(佐平:一品) 인우(因友)와 달솔(達率:二品) 사오(沙烏) 등과 함께 하였다. 이 당시 漢北州 郡民 15세 이상을 징집하여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다. 3월에 漢城으로 이른 후 여름 5월 王이 죽었다. 죽은 후의 휘호를 무녕(武寧)이라 했다.
여기서 武寧王이 좌평 인우(佐平因友)와 달솔 사오(達率沙烏)와 함께 행차하여 이른 곳은 漢城이라 했다. 그 당시 漢城은 지금의 四川省 成都이다. 漢城은 百濟 13代 近肖古王 26年에 이곳으로 都邑을 옮긴 후 22代 文周王 元年 熊津城으로 都邑을 옮기기 전까지 漢城은 百濟의 都邑地였다.
[bc8937] [오후 7:04] 26代 성왕(聖王) 元年 가을 8월이었다. 高句麗兵이 패수(浿水)에 이르렀다. 王은 좌장(左將) 지충(志忠)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1만을 출전시켜 격퇴시켰다.
3년 봄 2월 新羅와 서로 사신을 교환하였다.
4년 겨울 10월 웅진성(熊津城)을 수리하고 사정(沙井)에 작은 목책의 城을 세웠다.
7년 겨울 10월 高句麗王 興安은 궁사와 병마를 이끌고 북쪽 마을에 있는 혈성(穴城)을 내침하였다. 王의 명을 받은 좌평(佐平:一品) 연모(燕謨)는 영병과 보병, 기마병 3만으로 五谷의 들에서 싸움을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12년 봄 3월 梁나라 사신이 파견되어와 조공을 받쳤다.
16년 봄에 都邑을 泗沘(一名 所夫里)로 옮기고 나라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했다.
18년 가을 9월 王은 당군 연회(燕會)에게 명하여 高句麗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26년 봄 정월 고구려왕 평성(平成)과 예(濊)와 더불어 한북(漢北)에 있는 독산성(獨山城)을 공략할 것을 모의했다. 王은 파견사를 新羅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신라왕은 장군
[bc8937] [오후 7:05]
주진(朱珍)에게 명하여 뛰어난 군사 3천을 출전케 했다. 주진(朱珍) 장군은 밤낮의 일정으로 獨山城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고구려 군사와 일전(一戰)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28년 봄 정월 王은 장군 달기(達己)를 파견하여 군사 1만으로 高句麗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3월 고구려 병사는 금현성(金峴城)을 포위했다.
31년 新羅는 東北 변방을 취하여 신주(新州)를 두었다. 겨울 10월에 王女가 新羅로 도망갔다.
31년 가을 7월 王은 신라를 습격할 욕심으로 친히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bc8937] [오후 7:05] 사진
[bc8937] [오후 7:05] 新羅에서는 百濟의 군사가 올 것을 대비하여 숨겨둔 복병과 난전(亂戰)을 하는 사이 王은 죽고 말았다.
聖王이 죽자 셋째 아들 林聖太子는 人生의 無常을 느끼고 지금의 대만(옛 夷州‧東州‧琉球)을 통해 유구열도의 섬을 따라 오끼나와를 거쳐 九州로 올라가 京都地方에서 日本 歷史 이래 처음으로 나라(奈良)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bc8937] [오후 7:06] 오늘은 여기가지 올립니다.
낼 모레
㉰ 百濟末期 戰亂부터 올리겠습니다.
[bc8937] [오후 7:11] 제가 환단원류사를 낸 것은 아무도 이 분야에 저서를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환단고기류 사서들을 번역하거나 해설한 저서는 많이 나왔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비슷하고 환과 단의 정의 조차 제대로 내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본인은 자신감을 가지고 환단원류사에 매진하게 된 것입니다.
[bc8937] [오후 7:12] 환단원류사에 맨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한 20여 년 전입니다.
[bc8937] [오후 7:14] 주말이면 늘상 도서관에서 살았고 보름에 빌린책 5권씩 읽어 나갔습니다.
[bc8937] [오후 7:15] 아마도 그때부터 인류 태고사에 관심이 가장 컸었습니다.
[bc8937] [오후 7:17] 인류가 어떻게 생겨서 지금 이런 역사 속에 살고 있을까하는 의문은 국민학교때 부터 였지만 본격적으로 책을 가까이 했을 때가 1988년도 부터 입니다.
[bc8937] [오후 7:18] 그 동안 공부해온게 모두 환단원류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bc8937] [오후 7:19] 고구려 백제 신라사나 조선 고려 현대사는 너무 많이 연구되어 있어 제가 삐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bc8937] [오후 7:19] 이이왕 할려면 아무도 안하는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김태수] [오후 7:19] 항상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bc8937] [오후 7:19] 자연스럽게 환단사에 집중할 수 있엇습니다.
[bc8937] [오후 7:19] 그게 가장 자신있었기 때문입니다.
[김태수] [오후 7:20] 오늘 동국정운 13만원주고 구입했습니다.
[bc8937] [오후 7:21] 제 책을 읽으신 분은 대게 이런 취지로 말합니다.
[bc8937] [오후 7:21] 첫째 내공이 대단하다고 하며
[bc8937] [오후 7:22] 둘째 처음보는 정보가 너무 많다고
[bc8937] [오후 7:22] 다른 책은 싱겁다고
[bc8937] [오후 7:23] 그렇죠 환단원류사 권말에 참고자료 를 적었습니다.
[bc8937] [오후 7:24] 율곤선생님 저서 한민족사와 강상원박사님 조선고어 실담어 주석 그리고 동영상강의
[bc8937] [오후 7:24] 그리고 BBC, NHK, 내셔널지오그래픽 등 다큐
[bc8937] [오후 7:24] 이외에 저서는 없습니다.
[bc8937] [오후 7:25] 율곤 선생님을 비롯하여 다른 저자들의 인용서목을 보면 너무 방대하더라고요
[bc8937] [오후 7:26] 저는 그게 불만이고 보기 싫었습니다.
[bc8937] [오후 7:26] 율곤 선생님같은 분은 소장도서만 1만 권이 넘으니 그리고 50년간 한학만 하신 분이니 그렇게 해도 아름답개 보이지만
[bc8937] [오후 7:27] 다른 저자들의 인용서목이 방대한 것은 못마땅했습니다.
[bc8937] [오후 7:27] 그들의 내공이 인용서목 만큼이나 뛰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bc8937] [오후 7:28] 인용서목이 많다고해서 잘나보이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bc8937] [오후 7:29] 그냥 누구 책에서 인용햇으면 책 속에 본문에서 소개하고 아주 많이 반복해서 인용한 책 중요한 책만 책 뒷장에 소개하면 됩니다.
[bc8937] [오후 7:30] 그런데 지식이라는게 머리 속에서 만들어 지더란 말입니다.
[bc8937] [오후 7:31] 나무를 심어 놓으면 그게 물먹고 공기마시고 점점 자라잖아요
[bc8937] [오후 7:32] 지식도 책을 읽어 놓으면 십년 이십년 지나면서 그 정보가 자라나서 새로운 형태의 정보로 진화를 하더라구요
[bc8937] [오후 7:33] 사실상 책을 일으면 얼마지나지 않아 읽은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bc8937] [오후 7:33] 그게 스토리 형태로 바뀌어 저장됩니다.
[bc8937] [오후 7:34] 전체를 스토리로 저장하게 되면 전체 스토리와 검색어 색인만 기억납니다.
[bc8937] [오후 7:35] 그리고 인터넷이 등장했습니다.
[bc8937] [오후 7:35] 인터넷에 내가 생각하는 검색어를 치면 옛날에 공부헸던 다 나오더라고요
[bc8937] [오후 7:36] 인터넷 정보를 읽으면 스토리가 더 명확하게 자리잡게 됩니다.
[bc8937] [오후 7:37] 그리고 글의 분량에 따라 하루 내지 삼 사일간 명상에 집중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막히지 않고 글이 막 나옵니다.
[bc8937] [오후 7:37] 환단원류사는 그러ㅗ게 꼬박 만 2년간 썼습니다.
[bc8937] [오후 7:38] 환단원류사는 인터넷에 게재한게 한 12년 정도 됐을 겄입니다.
[bc8937] [오후 7:39] http://www.bc8937.pe.ne.kr/
[bc8937] [오후 7:43] 천제환국상고사 홈피 주소 입니다.
[bc8937] [오후 7:44] 이 홈페이지는 제 손으로 직접 만든 것입니다.
[bc8937] [오후 7:45] 이홈피에 올린글이 십여년 넘게 제가 습작으로 올린 것들입니다.
[bc8937] [오후 7:46] 자료실을 개방하지 않았는데 가끔 저작권 운운하면서 시건방떠는 애들 때문에 아예 내만 볼려고 잠궈 두엇습니다.
[bc8937] [오후 7:47] 인터넷에 자기글을 올리는 것은 공개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bc8937] [오후 7:47] 남들이 자기글 읽어 주면 좋은 것이지요
[bc8937] [오후 7:47] 그리고 퍼가면 어때요 책으로 낼것도 아니면서
[bc8937] [오후 7:47] 되도 안한 것이
[bc8937] [오후 7:48] 자기꺼 인용했다고 저작권침해 햇으니 고발하겠다고 엄포 치는 자가 두세명 있었습니다.
[bc8937] [오후 7:48] 이런 자들은 우리 역사 발전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bc8937] [오후 7:49] '우리역사의비밀' 운영자 송준희님 싸이트에 한 번 가보세요
[bc8937] [오후 7:49] 주인장께서 하시는 말씀
[bc8937] [오후 7:50] 다 퍼가라 그리고 주소 안 밝혀도 좋으니 제발 식민사학에 쪼그라 들리 말고 우리 역사 바로 세워주기바란다고 당당히 주문하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7:51]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으려고 애써시는 분이시라면 한가지 부탁하고 싶습니다.
[bc8937] [오후 7:52] 게시판에 퍼가기 방지 하지 마세여
[bc8937] [오후 7:52] 마우스로 긁는거 안 될 때
[bc8937] [오후 7:52] 이거 도대체 뭐 하는 수작인가 싶기도하고
[bc8937] [오후 7:53] 저작권 챙기는 거 도 좋지만
[bc8937] [오후 7:53] 그 글수준이 퍼가기 방지 할 만큼 아니더라고요
[bc8937] [오후 7:53] 심지어 남의 글로 도배해 놓고 퍼가기 방지해 놓은 홈피도 잇어요
[bc8937] [오후 7:54] 물론 홈피 트래픽이 쌓여서 그렇게 하는 수도 있지만 이게 대부분 무지에서 비로쇼 된 것이라고 봐여
[bc8937] [오후 7:55] 우리 역사 바이러스를 아주 멀리 많이 퍼트리려면 상업주의를 떠나야합니다.
[bc8937] [오후 7:55] 그래서 약간의 금전적 손해도 볼 줄 알아야 하고여
[bc8937] [오후 7:56] 참 내가 뭔애기 하고 있지
[bc8937] [오후 7:57] 그래요 환민족 태고사 상고사는 제가 쓰고 삼국사는 노성매씨가 쓰고 고려사는 다시 제가 쓰고 조선사 는 박인수씨가 쓰고 이렇게 대충 저절로 정리가 됐어요
[bc8937] [오후 7:58] 누가 모여서 합의한 것도 아닌데 율곤선생님 후학들이 골고루 공부하고 골고루 퍼자 한개 분야씩 맡아 열심히 하고 잇습니다.
[bc8937] [오후 8:00] 이창원님은 역학, 천부경, 환민족 철학분야, 노성매씨는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는 아직 없으니 제가, 조선은 박인수씨가 현재 잘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고사 상고사도 제가
[bc8937] [오후 8:00] 그리고 산해경 분야에 최근 저서를 내신 오정교선생님
[bc8937] [오후 8:00] '산해경 신주의 발견'
[bc8937] [오후 8:01] 이번 강연회때 만나서 한 30분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신주의 발견 책 한 권 받았습니다.
[bc8937] [오후 8:01] 그 다음 날 제꺼 다 부쳤습니다.
[bc8937] [오후 8:02] 지식이 한번 머리 속에 심어지면 나무 처럼 자라고 세월이 흐른 후에 그 지식이 새로운 지식의 기반이 됩니다.
[bc8937] [오후 8:03] 율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지 몇 해 선생님께서 뿌려 놓은 씨앗도 점점 자라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8:04] 좋은 열매가 맺어지려면 몇 해 더 지나야하겠지만 분 명히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8:05] 상고사 학회 소송이 끝나고 저작권 분쟁이 마무리 되면 제가 가지고 있는 파일은 책으로 내겠습니다.
[bc8937] [오후 8:06] 복사본 형태로 소량만 찍어 꼭 필요하신 분께 보내드리도록하겠습니다. 물론 발행비용은 신청자 부담이 되겠지요
[bc8937] [오후 8:07] 백제사의 비밀 180쪽이면 한 1만 5천원정도 될 것입니다.
[bc8937] [오후 8:08] 지금은 안됩니다. 저작권 시비가 완전히 끝나야 됩니다.
[bc8937] [오후 8:08] 괜히 좋은 일하려고 했다가 나만 덤탱이 쓴다고요
[bc8937] [오후 8:09] 책을 쓰시려는 분께 조언드립니다
[bc8937] [오후 8:10] 남이 해놓은거 재방송하지말것
[bc8937] [오후 8:10] 재방송하더라도 짧게 요약해서 할 것
[bc8937] [오후 8:11] 나의 독창적인 내용은 진부하게 친절하게 아주 상세히 쉽게 써서 발표할거ㅅ
[bc8937] [오후 8:11] 남의 거 너무 많이 인용하면 실례, 또 돈주고 책사보는 사람은 돈 아까워요
[bc8937] [오후 8:12] 그리고 제목을 잘 지어야해요
[bc8937] [오후 8:13] 제목 짓는데 책쓰기 전부터 책다쓰는 날 그 다음날까지 충분히 생각해서 제목으로 할 것
[bc8937] [오후 8:14] 중학생이면 이해할수있게 쓸것
[bc8937] [오후 8:14] 이게 제일 중요합니다.
[bc8937] [오후 8:15] 저는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서 이말씀을 해주셔서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글 쓰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8:16] 책 속에 율곤 선생님처럼 자신의 개인 적인 경험이나 잡답을 많이 하지 말것
[bc8937] [오후 8:17] 율곤 선생님 처럼 학식이 높아서 존경 받는 경우라면 좋게 봐 중ㄹ수도 있지만 초보자 일 경우는 곤란
[bc8937] [오후 8:18] 남을 공개적으로 비방하지 말것
[bc8937] [오후 8:18] 모씨 모는 어쩌구 정도는 괜찮을 듯
[bc8937] [오후 8:19] 글 쓰기 전에 명상은 필수
[bc8937] [오후 8:20] 글이 큰제목 소제목으로 쓰여지기 때문에 각 문단마ㄱ다 내용이 크게 바뀌는 경우 충분히 생각한 후 막히지 말고 쓸것
[bc8937] [오후 8:21] 마지막으로 감수를 받을 것
[bc8937] [오후 8:24] 딱히 감수 받을 사람이 없으면 인터넷에 일부 공개해서 평가를 받을것
[bc8937] [오후 8:24] 이상입니다.
[bc8937] [오후 8:34] 제가 이 말릉 하는 이유는 율곤선생님 파일을 통째로 베껴서 자기가 쓴 글이라고 하던 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bc8937] [오후 8:35] 김해 가야 성씨를 소개한 책인데 완전히 똑깥아요
[bc8937] [오후 8:35] 그래서 노성매씨한테 알렸더니
[bc8937] [오후 8:35] 노성매씨는 또 율곤선생님께 알렸고
[bc8937] [오후 8:36] 율곤선생님 전화해서 크게 한번 야댠치고 사과 받고 그냥 용서 해줬답나ㅣㄷ
[bc8937] [오후 8:36] 이거 잘못 걸리면 골로 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bc8937] [오후 8:37] 학문하는 풍토가 이렇게 되면 안됩니다.
[bc8937] [오후 8:38] 남이 죽자고 열심히 공부해서 만들어 놓은 지식을 한방에 가로 채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은 도둑이지요
[bc8937] [오후 8:38] 옛날에 그런 일이 비일 비재 했다고 합니다.
[bc8937] [오후 8:38] 음악 출판사가 대표적이지여
[bc8937] [오후 8:39] 요즘은 악보책이 안나오잖아요
[bc8937] [오후 8:39] 그게 저작권 고발 시스템이 활성화 되었기 때문인데
[bc8937] [오후 8:40] 옛 날에 세*출판사, 후반*출판사 등등 악ㅈ보집 팔아서 수억 벌엇을 것입니다. 7~80년 대에 통기타 붐 때문에 엄청 나게 많이 파렸거든요
[bc8937] [오후 8:51] 지금 은 골동품이 되어 인터넷에 올라오는거 보면 쌍당히 비싸게 팔리데요
[bc8937] [오후 8:51] 외국 유명서적도 누가 번역해서 내 놓으면
[bc8937] [오후 8:52] 번역 전문가도 아닌 놈이 글자 몇개만 수정해서 또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재탕으로 출판
[bc8937] [오후 8:52] 이건 옛날 이야기 이고
[bc8937] [오후 8:52] 뻔히 눈 뜨고 도둑질 당하고 법정 공방에서 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bc8937] [오후 8:53] 논문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저자보다 먼저 다른 사람이 발표하는 바람에
[bc8937] [오후 8:54]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bc8937] [오후 8:54] 아 오늘 백제사의 비밀 때문에 잡담이 길었습니다.
[bc8937] [오후 8:55] 카카오환단원류사 제목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환단원류사가 아니라 잡담이기 때문입니다.
[bc8937] [오후 8:55] 백제사의 비밀도 환단원류사가 아니잖아요
[bc8937] [오후 8:55] 카카오환단원류사 시작합니다. 박 민우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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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8937] [오후 9:02] 위에서부터 차례로 자오지천황 청구강역 예상도, 개벽시대 天海와 파내류 예상도,부도지 인류의 이동, 마고성의 위치, 마고성위치 확대, 봉래 영주 방장의 위치, 오녀산성에 있는 천지, 불함삼역 강역도
[bc8937] [오후 9:02] 먼저 자오지 천황 강역부터 해설들어갑니다.
[bc8937] [오후 9:04] 년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4700년전부터 입니다. 큰 동그라미가 만리 강역입니다. 서해가 조금 생겨났습니다. 반은 육지입니다.
[bc8937] [오후 9:05] 요녕성에 삼신산이 있엇는데요 삼신산이란 봉래 방장 영주를 합쳐서 삼신산이라고 합니다.
[bc8937] [오후 9:05] 요건 좀 있다가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bc8937] [오후 9:07] 청구강역에서 많이 등장하는 지명을 표시 했습니다. 탁록, 공상, 회대
[bc8937] [오후 9:09] 이지역은 2백년 후 단국이 들어서면서 순임금에게 땅을 맡기게 됩니다.
[bc8937] [오후 9:11] 제후국들로 구성된 당을 순임금이 냐금냐금 침략하고 도둑질하니 단군부루 때 다시 정벌군을 보내 싹스리하게 됩니다. 청구원류에 소개
[bc8937] [오후 9:12] 개벽시대천해와 파내류 예상도
[bc8937] [오후 9:13] 마고성이 천해의 동쪽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천해를 제대로 그려낸 사람이 없었습니다.
[bc8937] [오후 9:14] 마고성이 천산에 있었더ㅏ면 당연히 그 서쪽이 천해여야하는데 그 서쪽은 파미르고원이기 때문입니다.
[bc8937] [오후 9:14] 그래서 임모교수는 바이카호라고 했습니다.
[bc8937] [오후 9:15] 또 어떤 학자는 카스피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폴권)
[bc8937] [오후 9:16] 그런데 저는 천해가 갑자기 생긴 호수이며 그 호수는 지금 사라졌다고 정의 햇습니다.
[bc8937] [오후 9:18] 빙하기가 7천년전에 끝나고 이일대에 쌓여있었던 최고 4킬로미터 최소 1킬로미터 높이로 쌓인 빙하가 녹았습니다.
[bc8937] [오후 9:18] 상상도하기 힘든 어머어마한 양의 물입니다.
[bc8937] [오후 9:19] 아마도 물이 가장 많이 찾을 때 그림에 보이는 3개의 큰 호수는 하나 였을 것입니다.
[bc8937] [오후 9:22] 저렇게 3개의 호수가 된 것은 약 1만 2천 년 전이라고 봅니다. 얼음이 막 녹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그전에 천해는 실달성이엇습니다. 대홍수가 나기 이전
[bc8937] [오후 9:27] 부도지 第九章 번역 : 김은수
분거제족(分居諸族)이 각 주(洲)에 이르니, 어느덧 천년이 지났다. 옛날에 먼저 성을 나간 사람들의 자손이 각지(各地)에 잡거(雜居)하여, 그 세력이 자못 강성하였다. 그렇기는 하나 거의가 그 근본을 잃고, 성질이 사나와져서, 새로 온 분거족을 보면, 무리를 지어 추격하여 그들을 해하였다. 분거족이 이미 정주(定注)하니, 바다와 산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내왕이 거의 없었다. 이에 마고가 궁희와 소희와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여, 천수(天水)를 부어 성내(城內)를 청소하고, 대성(大城)을 허달성(虛達城)의 위로 옮겨버렸다. 이 때에 청소를 한 물이 동과 서에 크게 넘쳐 운해주의 땅을 크게 부수고, 월식주의 사람을 많이 죽게 하였다. 이로부터 지계(地界)의 중심(重心)이 변하여, 역수(曆數)가 차이가 생기니, 처음으로 삭(朔)과 판(昄)의 현상이 있었다.
[bc8937] [오후 9:28] 마고가 궁희와 소희와 더불어 대성을 보수하여, 천수(天水)를 부어 성내(城內)를 청소하고, 대성(大城)을 허달성(虛達城)의 위로 옮겨버렸다
[bc8937] [오후 9:29] 여기서 말하는 천수는 빙하가 녹은 것을 말합니다.
[bc8937] [오후 9:29] 마곳성을 허달성으로 옮긴후 천해가 생겻습니다
[bc8937] [오후 9:31] 천해가 생기기전 그 자리는 실달성이엇습니다.
[bc8937] [오후 9:32] 실달성에서 산천초목과 생명이 자라서 마고대성으로 옮겨와 살았다고 하는데 그 실달성이 천해로 바뀐 것입니다.
[bc8937] [오후 9:33] 빙하가 녹으면 당연히 호수가 생기는 것이고 실재로 천해가 생긴 곳은 지금도 저지대입니다.
[bc8937] [오후 9:35] 동방에서 수메르까지 뚱이흫야들이 진출할 수 있엇던 이유가 바로 천해에서 터어키북부 (수메르지역북부) 아나톨리라까지 강물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bc8937] [오후 9:36] 지형을 잘 살펴보면 분명히 고대에는 강물이 흘렀을 거이라는 것을 알 수 잇습니다.
[bc8937] [오후 9:36] 이런 상황을 소설환단원류사 님금나무에 자세히 묘사햇습니다.
[bc8937] [오후 9:37] 다음은 부도지 인류의 이동
[bc8937] [오후 9:38]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바이칼호는 최초의 흑수입니다.
[bc8937] [오후 9:39] 흑수란 생명이 탄생하는 물을 가히킵니다.
[bc8937] [오후 9:40] 북방의 주인을 임검(壬儉)이라고 하는데요
[bc8937] [오후 9:41] 실제로 단제부루는 태자일 때 우임금에게 금간옥첩을 내리면서 나는 '수정자이이라' 라고 하였습니다.
[bc8937] [오후 9:41] 북극수정자 라고 하였습니다.
[bc8937] [오후 9:43] 북극수정자는 오제중에 한 분 의 神을 말하는데 북방을 다스린다고 하엿습니다.(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bc8937] [오후 9:43] 생명의 탄생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입니다.
[bc8937] [오후 9:44] 이는 삼신오제본기를 설명할 대 자세히 하기로 하고 북방은 생명을 관장한다 그래서 흑수는 생명이 탄생하는 물이다
[bc8937] [오후 9:45] 바이칼호가 왜 길게 짓어진 형태인가하믄요
[bc8937] [오후 9:45] 이게 삼천만년전부터 땅이 갈라져 찟어지기 시작해서 점점 크진 것입니다.
[bc8937] [오후 9:46] 다시말해 이곳은 지판의 경계지역인데 땅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9:46] 문제는 세계 내륙호수 중에 유일하게 바닥에서 화산열수가 솟아 나옵니다.
[bc8937] [오후 9:47] 그래서 스스로 깨끗함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해서 자정작용을 한다고 합니다.
[bc8937] [오후 9:47] 왠만해서는 오염이 안되는 호수입니다.
[bc8937] [오후 9:48] 그리고 열수기 바닥에서 솟아나오므로 열수와 물이 만나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bc8937] [오후 9:49] 그 작용 때문에 인간이 탄생한 것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작은 생명체 즉, 박테리아나 단세포 동물든 태어납니다.
[bc8937] [오후 9:49] 인간은 물에서 기원햇습니다.
[bc8937] [오후 9:49] 원숭이와 인간의 차이는 털이 있고 없고 다릅니다.
[bc8937] [오후 9:50] 유전자가 다섯개 차이 나는데 원숭이와 인간처럼 틀리게 됩니다.
[bc8937] [오후 9:50] 인간이 털이 없는 이유는 수생동물이라는 것을 아려줍니다.
[bc8937] [오후 9:50] 수생동물이란
[bc8937] [오후 9:51] 물고기, 양서류 처럼 물속에서 살던 동물이었다는 말입니다.
[bc8937] [오후 9:51] 언래부터 육지에 살았다면 원숭이처럼 온몸이 털로 덮여있어야합니다.
[bc8937] [오후 9:52] 털이 없는 종은 모두 물속에 살고 잇습니다
[bc8937] [오후 9:52] 털이 수북한 고래는 없잖아요
[bc8937] [오후 9:52] ^^
[bc8937] [오후 9:53] 공룡도 털있습니다.
[bc8937] [오후 9:53] 과학자들이 고정을 잘 못해서 파충류처럼 복원했는데 아닙니다. 조류에 더 가깝습니다.
[bc8937] [오후 9:53] 그리고 온몸에 털이 덮여있었습니다.
[bc8937] [오후 9:54] 깃털 공굥이라고 해서 중국에서 많이 발견 되엇습니다.
[bc8937] [오후 9:55] 인간이 털없이 추위에 견디려면 물속 밖에 없습니다.
[bc8937] [오후 9:55] 물속에 살면 춥지 않습니다.
[bc8937] [오후 9:55] 그래서 육지에 올라 올 때 쯤 되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세상구경을 합니다.
[bc8937] [오후 9:56] 그렇게 해서 직립하게 되었고 전두엽이 커지고 활성화 되었습니다.
[bc8937] [오후 9:57] 점점 머리가 좋아지고 직립하였던 인간은 물가에서 살다가 위험을 느끼거나 추위가 다가오면 다시 물속에서 살아갔습니다.
[bc8937] [오후 9:57] 이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완전히 육지로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bc8937] [오후 9:57] 그 물이 저는 바이칼호라고 생각합니다.
[bc8937] [오후 9:58] 인류의 씨앗은 누가 퍼트렸을 까요
[bc8937] [오후 9:58] 그건 미스테리입니다.
[bc8937] [오후 9:58] 저는 운석을 타고 씨앗이 바이칼호에 떨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9:59] 수생동물로 변하유전자가 운석에 실려 호수에 떨어졌다고
[bc8937] [오후 10:00] 그렇게 삼천만년전에 생긴 이;ㄴ류는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bc8937] [오후 10:01] 삼성기에 하늘에서 동남 동녀 팔백이 내려왔다는 말은 바로 그런 사실을 축약해서 말하고 잇습니다.
[bc8937] [오후 10:01] 북쪽은 춥잖아요
[bc8937] [오후 10:01] 고대에는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bc8937] [오후 10:02] 좌우간 남쪽으로 와야 생존의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bc8937] [오후 10:03] 그래서 2천구백구십만년즘 지나서 마고성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10:03] 환단원류사는 이래서 문제 입니다.
[bc8937] [오후 10:03] 강단사학에서 이걸가지고 욕합니다.
[bc8937] [오후 10:04] 뚜렸한 물증없이 상상력과 추리력 만으로 쓴게 소설이지 어떻게 역사냐고 욕하지요
[bc8937] [오후 10:04] 아므레도 좃습니다.
[bc8937] [오후 10:04] 지금은 참습니다.
[bc8937] [오후 10:05]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bc8937] [오후 10:05]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바탕으로 여러분은 더 열심히 파고 들어서 보다 완성된 역사를 집필해 주시기바랍니다.
[bc8937] [오후 10:06] 실망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bc8937] [오후 10:06] 최첨단과학이라고 다 물증을 바탕으로 된 것은 아닙니다.
[bc8937] [오후 10:07] 먼저 가설을 세우고 가설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내면 그게 정설고 굳혀지는게 과학입니다.
[bc8937] [오후 10:07] 각 시대마다 첨단 학설이 각광을 받아왔고 정설이 뒤집어 지기를 반복해 왔습니다.
[bc8937] [오후 10:21] 뉴튼의 만류인력도 아인시타인에 의해 수정되었고 아인시타인은 죽는 날까지 중력(블랙홀의 존재 가능성) 연구만했는데 그후 양자의 구조가 밝혀지고 중력 이외에 전자기력, 양력(방사능 붕괴), 강력(원자안에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강력하게 결속시켜주는힘) 이세가지 힘이 발견되엇습니다. 지금 과학계는 우주를 움직이는 힘이 중력, 양력, 강력, 전자기력 네가지로 밝히고 잇습니다
[bc8937] [오후 10:21] 이런 이론의 발전을 토대로 끈이론이 등장합니다.
[bc8937] [오후 10:22] 끈이론이야말로 저의 황당한 수준과 비슷합니다.
[bc8937] [오후 10:23] 처음에는 비난만 받다가 요즘은 거의 과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이론이 되었지요
[bc8937] [오후 10:24] 끈이론이 바로 순간이동 빛보다 빠른 존재의 가능성 우주 타임워프, 11차원 등등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잇는 최 첨단 이론입니다.
[bc8937] [오후 10:24] 바로 가설이 없으면 발전도 없습니다.
[bc8937] [오후 10:25] 너무 고증 증거에 매달리면 다람쥐채바퀴 돌리듯 발전을 기대할 수 없고 소위 겨수라는 것이
[bc8937] [오후 10:26] 교수라는 것이 특정 집단의 돈 벌이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10:27] 자기 보다 나은 논문이 들어오면 교수가 공부해서 배울려고 하지 않고 논문을 떨어뜨려버리거 불이익을 주거나해서 아예 세상밖에 목 나오도록 방해하는 개새끼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대학에서 밥줄대고 기생충처럼 ㅅ버티거ㅗ 잇습니다.
[bc8937] [오후 10:29] 되도록이면 재야 사학자와 가까이 지내면서 대학에서 발표할 기회도 주고 상호 학문을 교류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포괄적이고 너그럽게 경청하는 자세가 학자의 태도지 어떻게 재야학자라면 죽이고 보자는 식으로 달려들면 곤란하다는 이야기
[bc8937] [오후 10:30] 봉래 방장 영주의 위치 지도 를 설명합니다.
[bc8937] [오후 10:31] 발해라는 글씨의 그 바다는 예전에 육지입니다.
[bc8937] [오후 10:31] 봉래가 등고선으로보면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해 잇습니다.
[bc8937] [오후 10:32] 예전에는 이곳이 육지였으나 가장먼저 바닷물에 잠기었지요
[bc8937] [오후 10:33] 그 다음에 요녕성대련지구로 걸어서 오면 점점 높아지는 지형입니다. 수암현에 당도하면 그 곳은 옥이 많이 산출되는 곳입니다. 그게 방장입니다. 방장에서 북으로 계속가면 점점 높아지면서 영주까지 갑니다.
[bc8937] [오후 10:34] 영주에 오녀산성이 있고 오녀산성에 천지가 있습니다.
[bc8937] [오후 10:34] 이지역이 불함삼역이며 불함삼역이 삼신산입니다.
[bc8937] [오후 10:36] 삼신산은 커발환 초대 밝달환웅께서 무리 삼천의 파견사를 데리고 당도한 곳입니다.
[bc8937] [오후 10:36] 약 6천년전입니다.
[bc8937] [오후 10:37] 같은 시기에 서방 수밀이로도 3천이 떠났습니다.
[bc8937] [오후 10:37] 그건 김정양박사께서 수매르 점토판해석해서 알아냈고
[bc8937] [오후 10:38] 동방으로 6천년전에 삼천명이 온 것은 삼국유사에 실려있습니다.
[bc8937] [오후 10:38] 아무리 환단원류사가 걸레조각같아도 이건 확실한 것입니다.
[bc8937] [오후 10:39] 가능성이있다면 더 연구해 볼 가치도 있습니다. 점토판 있갰다, 삼국유사에 기록되 있지, 옛날에 서해가 육지였다는 말은 백과사전에 다 나와 있는 지리과학입니다.
[bc8937] [오후 10:40] 몇번 이나 말했지만
[bc8937] [오후 10:42] 비슷한 명칭이나 그에 관한 전설 등 이본이 많으면 그게 진실이고 식물도 아류 아칭 종류 아종 등이 많으면 그곳에 식물하나가 원산지로 인정 됩니다.
[bc8937] [오후 10:43] 청구, 발해, 밝달, 부상, 빠라따, 신시(신불) 등이 같은 뜻이라고 제가 밝혔잖아요
[bc8937] [오후 10:44] 혹자는 박민우가 상고시대 우리의 강역을 한반도에 묶어 놓는다고 불만을 토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bc8937] [오후 10:45] 그러나 무조건 강역이 크다고 소리치는 것은 역효과만 크집니다.
[bc8937] [오후 10:45] 이미 전세셰는 뚱이족이 개척한 역사인데 더 커질게 뭐가 있습니까
[bc8937] [오후 10:47] 저는 한반도가 약속의 땅이며 신이 꼬불쳐둔 금단의 땅이며 안식의 땅이고 축복받은 미래의 땅이기 때문에 환인씨 개천이래 한번도 남의 나라가 지배한 적이 없고 영원히 침범하지 못하는 땅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bc8937] [오후 10:49] 환인씨 환국은 천산에서 다스렸고 환인씨께서 동방으로 환웅씨를 파견 약 6천년전부터 한반도는 미래의 땅이 되어 동국 전체를 다스리는 중심국가엿습니다. 환웅씨가 쇠하자 천산에서는 다시한번 임검천제를 파견하엿습니다. 그 땅이
[bc8937] [오후 10:51] 홍수로 망가지고 위기에 처해 홍수를 극복하고 다시 동방을 지켜내도록 천산에서 6만이 이주해 왔습니다.
[bc8937] [오후 10:52] 그래도 인구가 모자라 대륙에서 구려의 무리가 많이 유입되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bc8937] [오후 10:52] 아까지도에서 만리강역이 조선이고 그 조선의 중심국가가 단국 환국입니다.
[bc8937] [오후 10:53]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삼국시대를 거치고 지금은 한반도만 차지하고 살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10:54] 빼앗긴 땅인지 아니면 스스로 버린 땅인지 아니면 운명적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는 한번 깊게 생각해보아야합니다.
[bc8937] [오후 10:54]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10:55] 넘이 쓰놓은 것은 참고만 할 뿐 스스로 참 역사응 파보려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10:56] 확실히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한반도에 쭈구려 넣으면 말이 안됩니다.
[bc8937] [오후 10:56] 이건 일제 앞잡이 들이 반성해야합니다.
[bc8937] [오후 10:56] 그런데 저는 대륙조선이 좀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bc8937] [오후 10:57] 이글 박인수선생님이 안 봤으면 좋겟습니다.
[bc8937] [오후 10:57]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 저라도 해야 겠습니다.
[bc8937] [오후 10:57] 간단하게
[bc8937] [오후 10:58] 역정보라는 것이 있습니다.
[bc8937] [오후 10:58] 박인수 선생님은 역정보에 대해 알고 계신지 모르겟습니다.
[bc8937] [오후 10:59] 대륙조선이란것이 바로 역정보입니다.
[bc8937] [오후 11:00] 고구려 신라 백제 고려가 대륙에 있엇다 라고 많은 연구가 나오니 이를 파괴하려고 더 부풀려서 조선도 대륙에있엇다 아메리카가 부상국이라카더라 지구전체가 조선이다 점점 커지면 주변국 사람들은 역사를 진지하게 바라보지 않고 만화처럼 보개됩니다.
[bc8937] [오후 11:01] 그냥 무시 당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도매금으로 대륙고려 대륙삼국이 넘어가버립니다
[bc8937] [오후 11:01] 한국의 재야사학이 이렇게 간단히 무너지게 됩니다.
[bc8937] [오후 11:01] 이걸 자충수라고 하던가요
[bc8937] [오후 11:02] 제가 바둑용어는 잘 모릅니다만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11:04] 제가 대륙삼국 대륙고려를 몰라서 발표안하는게 아닙니다.
[bc8937] [오후 11:04] 이에 대해 주장하는 이론이 많으니 저는 안해도 되니까 안하는 것입니다.
[bc8937] [오후 11:05] 그런대 대륙조선을 말하려면 대륙고려까지만이라도 마무리하고 말하십니사
[bc8937] [오후 11:05] 환국 태고사 상고사가 그래도 연구하기 제일 편합니다. 아무도 안건드리니까요
[bc8937] [오후 11:07] 실상 환국태고사 상고사가 있어야 단국사 중원제국사 삼국사 고려사 가 질서있게 정리 되지 않겟습니까
[bc8937] [오후 11:07] 우리 뿌리의 연유부터 찾고 조선은 그 후에 찾아도 늦지 않습니다.
[bc8937] [오후 11:08]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이라도 있잖아요
[bc8937] [오후 11:08] 고려부터는 자료가 너뮤 없습니다.
[bc8937] [오후 11:08] 없느ㅜㄴ것부터 연구해서 복원에 힘써야합니다.
[bc8937] [오후 11:09]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정확하게 고증해야합니다.
[bc8937] [오후 11:09] 최소한 이 고증만이라도 하고 대륙조선을 이야기해야합니다.
[bc8937] [오후 11:11] 갑자기 금광이야기하면서 결론만 이야기하고 끝나버리면 외국인 학자들이 역정보라 생각하고 일본이 배후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상상인데요 실재로 그런 의심을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bc8937] [오후 11:11] 유투브에 대륙조선 허구 라고 치고 검색해 보세요
[bc8937] [오후 11:12] 정말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말을 해야하므로 제가 합니다.
[bc8937] [오후 11:14] 어쩌면 강상원 박사님에게도 치명타가 될 수 잇습니다. 본인은 역정보가 아닌게 분명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정보가 되었습니다.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bc8937] [오후 11:16]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말하겟습니다.대륙조선이라는 결과만 말하지 말고 고려애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소상히 발히세요
[bc8937] [오후 11:18] 정신없이 이야기하다보니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마지막 사진 천지는 오녀산성에 있는 인공샘입니다. 왠만한 수영장크기에 수영장처럼 생긴 샘입니다.
[bc8937] [오후 11:19] 삼심오제본기에는 영주는 천지가 솟는 곳이라고 언급하고 잇습니더ㅏ. 그래서 저는 이곳 오녀산성이 고구려 때 새운 것이아니라 이미 그 이전 단국시대에 홍수를 피해 수도를 이곳으로 옮겨 세웠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bc8937] [오후 11:20] 감사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하겠습니다.
[bc8937] [오후 11:20] 지금까지 카카오환다누언류ㅜ사 박 민우였습니다.
[bc8937] [오후 11:20] 안능시야
[bc8937] [오후 11:21] [FILE] Bob Seger - Fire Lake.mp3 (4.71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