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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금강산
송나라의 대시인이자 서예가 그리고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소동파(蘇東坡, 1036~1101)가 평생 고려의 금강산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다고 유언처럼 남긴 말이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 이다. 뒤에도 나오지만 조선조의 정사룡(鄭士龍, 1494~1570)은 그의 시 遊楓嶽 말미에 금강산을 본 후 "돌이켜 보니 사십평생을 잘못 살았노라(蘧瑗方知四十非)"고 읊었다. 이런 금강산을 계절마다(봄 金剛, 여름 蓬萊, 가을 楓嶽 그리고 겨울 皆骨) 보지는 못할 망정 아직 한번도 못 보고 육십을 넘게 살아왔으나 어찌 제대로 살았다 하리오. 이제 금강산을 구경할 날도 기약하기 어렵기에 漢詩 몇수와 사진 몇장으로 회한의 정을 달랠까 하니 못 가보신 벗님네들도 함께 하시길...
金剛山 / 宋時烈
금강산 / 송시열
雲與山俱白(운여산구백) 구름과 산 모두 하야니
雲山不辨容(운산불변용) 구름인지 산인지
雲歸山獨立(운귀산독립) 구름 걷히고 산 홀로 서니
一萬二千峰(일만이천봉) 아! 일만이천봉
금강산을 읊은 시 중 백미로 뽑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 선조 40년~숙종 15년)의 동명시이다. 이 시는 漢詩 작법에서 금기시 하는 같은 글자를 일부러 중복하여 쓴 것이 특징이다. 즉 첫구 앞에 雲與山, 다음 구 첫머리에 또 雲山, 그리고 세번째 구에도 雲歸山 을 썼지만 군더더기 같지 않고 오히려 간결하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 2句와 4句 마지막 글자의 각운(脚韻)을 맞추었을 뿐(容/용, 峰/봉)만 아니라, 1,2,3구의 머리 운(頭韻)도 일치시킨 것(雲/운)이 특이하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충청도 옥천에서 출생하고 말년에는 청주 우암동에 우거하였다. 서울에서는 종로 명륜동 성균관 부근에 살았는데, 그가 살던 곳을 중심으로 송동(宋洞)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고 하며, 지금도 종로구 혜화동의 보성고 서쪽 암벽에 그가 모각(模刻)해 놓은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네글자가 남아있다. 혜화동에서 보성고로 해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우암로’라고 이름붙인 것도 이 지역이 그와 이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조 11년(1633) 생원시에 26세의 나이로 장원급제 한다. 그후 그의 뛰어난 학문과 식견으로 여러번 관직에 오르고 또 물러나기를 거듭했으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끊임이 없었다. 말년에 거제 등지로 귀양가는 등 고초를 겪고 괴산 화양동에 은거 선비들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다. 그러나 희빈 장씨 소생 세자 책봉문제로 제주에 귀양갔다 돌아오다 사사(賜死)된다.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대표적 유학자로서, 일생을 주자학연구에 바쳐 조선에 있어서는 가장 완벽하게 주자사상을 이해한 인물로 손꼽히나 사변적 이론보다는 실천적 수양이나 사회적 적용을 더 중시하여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앞세워 평생을 의리의 주인으로 자처하였고, 사설(師說)을 이어 예학에도 뛰어났다. 문장에도 뛰어나 남의 청탁을 받아 수백편의 비(碑) · 갈(碣) · 명(銘) · 지문(誌文)을 지었는데 그 중에서도 효종의 〈영릉지문(寧陵誌文)〉은 명문으로 손꼽히며 안진경체(顔眞卿體)에 주자체(朱子體)를 가미한 글씨는 창고(蒼古)한 맛을 풍긴다고 한다. 그는 시비(是非)에 대한 엄정한 변별과 때로는 독선적일만치 강직한 성품으로 인하여 정적(政敵)이 많았다. 저술로는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 《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小分)》《주문초선(朱文抄選)》《계녀서(戒女書)》등이 있으며 이들과 시문(詩文), 기타를 함께 모아 1787년에 간행한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102책이 있다. 사후 5년 뒤인 숙종 20년(1694)에 신원되었으며 문정(文正)이라 시호하였다(후학들이 그를 숭상하여 성인 송(宋) 다음에 성현들에게나 쓰는 자(子)를 붙여 宋子라 불렀다).
送僧之楓嶽 / 成石璘
금강산 가는 중을 보내며 / 성석린
一萬二千峯(일만이천봉) 일만 이천 개의 봉우리
高低自不同(고저자불동) 높고 낮음이 저마다 다르다네
君看日輪上(군간일륜상) 그대, 해 솟을 때 한번 보게나
高處最先紅(고처최선홍) 높은 곳이 가장 먼저 붉게 물들지
금강산을 읊은 漢詩 중 누구나 가장 격조 높은 작품으로 인정하는 독곡 성성린(獨谷 成石璘, 1338~ 1423 / 고려 충숙왕 복위 7년~ 조선 세종 5년)의 送僧之楓嶽이란 제하의 시이다. 쓰여진 한자가 모두 평이하여 얼핏 보기에 단순하고 범상한 듯 하나, 오히려 그 울림에 증폭되어 웅혼함과 호방함이 보통사람이 미칠 바가 아니라 하였다.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은 그의 시선집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이 시를 수록하고 "看他負遠到氣象" 즉 그가 "원대한 기상을 자부하고 있음을 보라"는 평어를 남겼고, 그에 앞서 김종직은 청구풍아(靑丘風雅 )에서 “도를 깨닫는데 앞섬과 뒤짐, 깊고 얕음이 있는 것은 인성의 높고 낮음이 있는데 말미암는 것임을 비유한 것”(喩得道之有先後深淺, 由人性之有高下)이라고 하였다. 옛사람들은 이 시를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제 모습을 드러내는 묏부리를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여겼는데,. 가장 높은 봉우리는 바다 위 붉은 빛으로 제 몸을 밝히지만, 아래 쪽의 낮은 봉우리들은 해가 다 떠오르도록 그 빛에 제 몸을 쏘이지 못한다. 같은 가르침의 말씀을 듣고도 단번에 깨닫는 사람이 있고, 아무리 되풀이해 일깨워 줘도 쇠귀에 경을 읽는 용렬한 사람도 있음을 비유하였다고나 할까.
*성성린(成石璘)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으로 본관은 창령 호는 독곡(獨谷). 시호는 문경(文景). 고려에서는 문하부평리(門下府評理), 대사헌(大司憲)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조선에서는 역성혁명에 참가하여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태조의 건원능비문(健元陵碑文)을 쓴 명필로 특히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는 항상 한 나무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하였다. 문집으로 ≪독곡집(獨谷集)≫이 있다.
명경대
遊楓嶽 / 鄭士龍
풍악산 유람 / 정사룡
萬二千峰領略歸(만이천봉령약귀) 만 이천 봉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
紛紛黃葉打征衣(분분황엽타정의) 흩날리는 단풍잎은 옷 위로 떨어지고
正陽寒雨燒香夜(정양한루소향야) 찬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사르는 밤
蘧瑗*方知四十非(거원방지사십비) 돌이켜보니 사십 평생을 잘못 살았노라
*領略(영약) ; 중요한 곳만 둘러보다
鄭士龍(정사룡, 1491~1570 / 성종 22년~선조 3년)은 풍류객과는 거리가 먼 엄격한 유학자이다. 正陽寒雨燒香夜(정양한우소향야)처럼 운치 있는 구절 뒤에 蘧瑗(거원)의 멋없는 말이 나오니 말이다. 거원은 중국 위나라 대부로 莊子에 그의 이 말이 나온다. 行年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행년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라 50년을 살다보니 그 중 49년이 잘못임을 알겠더라는 고사에서 비롯된 말이다. 금강산의 절경을 보며 인간의 왜소함을 느끼고, 우주만물의 진리 앞에 인생의 헛됨을 깨닫게 되었다고...
*정사룡(鄭士龍)은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호는 호음(湖陰)이다. 학문이 뛰어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영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들과 주고 받은 시가 많았다. 특히 칠언율시(七言律詩)에 능했으며 당대 문단에서 신광한(申光漢)과 쌍벽을 이뤘다. 관료적인 시인으로 시문, 음율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탐학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저서로 <호음잡고> <조천록(朝天錄)> 등이 있다.
해금강
登毗盧峰 / 任叔英
비로봉에 올라 / 임숙영
皆骨山頭望八垠*(개골산두망팔은) 개골산 꼭대기에서 온 세상을 바라보니
大千*超遞隔風塵(대천초체격풍진) 광대무변의 대천세계가 속세를 떠났구나
慾傾東海添春酒(욕경동해첨춘주) 동해를 기울려 봄 술을 담가
醉盡寰中*億萬人(취진환중억만인) 세상의 억만 사람을 모두 취하게 하련다
*팔은(八垠) : 온 세상을 나타내는 말로 八極, 八荒, 八紘(굉)도 같은 의미로 쓰인다
*대천(大千) : 불교용어로 三千大千世界의 준말,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한 광대무변의 세계
*환중(寰中) : 寰은 고을이나 관내를 나타내는 한자인데 여기서 寰中은 '세상' 정도로 새기는 것이 좋을 듯
*임숙영(任叔英, 1576)∼1623 /선조 9년~인조 1년)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소암(疎庵).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한다. 광해군 3년, 별시문과의 대책(對策)에서 주어진 이외의 제목으로 척족의 횡포와 이이첨(李爾瞻)이 왕의 환심을 살 목적으로 존호를 올리려는 것을 심하게 비난하였다. 광해군이 대책문을 보고 크게 노하여 이름을 삭제하도록 하였다. 몇 달간의 삼사의 간쟁과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장으로 무마, 다시 급제되었다. 그 뒤 승문원정자ㆍ박사를 거쳐 주서가 되었으나 후에 파직되어 외방으로 쫓겨나 광주(廣州)에서 은둔하였다. 인조반정 초에 복직되어 예문관검열과 홍문관정자ㆍ박사ㆍ부수찬 등을 거쳐 지평에 이르렀다. 고문(古文)에 힘썼으며, 중국 육조(六朝)의 사륙문(四六文)에 뛰어났다. 그가 지은 「통군정서(統軍亭序)」는 중국학자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한다. 문집으로 《소암집(疎庵集)》이 있다.
옥류담
賞景 / 金笠
경치를 감상하고 / 김삿갓
一步二步三步立(일보이보삼보립)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山靑石白間間花(산청석백간간화) 산은 푸르고 바윗돌은 흰데 틈틈이 꽃이 피었네
若使畵工模此景(약사화공모차경) 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其於林下鳥聲何(기어림하조성하) 숲속의 새소리는 어찌 하나
김삿갓 처럼 금강산에 대한 숱한 일화와 많은 시를 남긴 이도 없을 것이다. 이 시는 꽃이 만발한 봄의 금강산을 읊은 것으로 보이는데 새소리 마저도 그리려는 시인의 감수성이 부럽다. 그의 파격적인 시 松松栢栢岩岩回 水水山山處處奇, 굳이 해석 한다면 "소나무와 소나무, 잣나무와 잣나무, 바위와 바위를 돌아오니 물과 물, 산과 산, 가는 곳곳이 기암절경이로구나" 쯤 되는데 7언 2구로 더이상 금강산을 잘 표현할 수 없다라고 극찬한 이도 있다.
만물상
入金剛 / 金笠
금강에 들어 / 김삿갓
綠靑碧*路入雲中(록청벽로입운중) 가지각색 푸른빛 산길을 따라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樓使能詩客住笻(누사능시객주공) 누각이 詩客으로 하여금 지팡이를 내리게 하는구나
龍造化含飛雪瀑(용조화함비설폭) 눈 내리듯 쏟아지는 폭포는 용의 조화이고
劍精神削揷天峰(검정신삭삽천봉) 하늘을 찌르는 봉우리는 신이 깍아 꽂아놓은 칼 솜씨련가
笻 : 대이름 공, 지팡이
재미있는 것은 푸른 색이 모두 제각각이라 이를 나타내기 위해 초록빛 綠, 푸를 靑 그리고 푸를 碧 모두 썼다는 것이다. 역시 봄의 금강산을 읊은 시로 생각된다.
金剛山 / 金笠
금강산 / 김삿갓
萬二千峰歷歷遊(만이천봉역역유) 만이천봉 두루 유람하고
春風獨上衆樓隅(춘풍독상중루우) 봄바람에 홀로 누각 모퉁이에 올랐네
照海日月圓如鏡(조해일월원여경) 둥근 해와 달이 거울같이 바다에 비추는데
覆載乾坤小似舟(복재건곤소사주) 천지가 작은 배에 엎어 실어놓은 듯하다
覆 : 뒤집힐 복, 載 : 실을 재
집선봉
단풍이 붉게 타는 어느 가을날 금강산 마하연의 암자에 행색이 남루한 객이 찾아와 스님을 뵙기를 청한다. "대사의 명성를 듣고 한번 뵙고 배우고자 멀리서 찾아왔읍니다.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좋은 글귀로 소생을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비록 차림새는 거지나 다름없었지만 말씨가 제법 공손하고 상되지 않아, "과찬의 말씀이오." 말했다. 이에 객은, " 듣건데 대사께서는 시를 잘하기로 이 금강산에서 비길 자가 없다 하는데, 외람되오나 한수를 주시면 제가 대구(對句)를 답해 보겠읍니다." 내심 괘씸한 생각이 없지 않았으나 심심하던 차에 이 놈이나 데리고 놀려먹을까 하고 한 수를 띄워 본다.
朝登立石雲生足(조등입석운생족) 아침에 입석봉에 오르니 구름이 발 밑에서 생기네
(네 놈쯤이야 내 발 밑이지...) 그러자 이 객은 바로 답하여,
暮雲黃泉月掛脣(모운황천월괘순) 저녁에 황천담의 물을 마시니 달이 입술에 걸리네요
(음,, 제법이네. 아침 朝에 저물 暮라, 발밑을 말하니 입술로 답한다...대구로 쓸만하군.) 이에,
影浸綠水衣無濕(영침녹수의무습) 그림자가 녹수에 잠겼건만 옷은 젖지 않소 하자,
夢踏靑山脚不苦(몽답청산각불고) 꿈에 청산을 다녔지만 다리는 아프지 않네요
(그림자 影에 꿈 夢이라. 그리고 綠水에 靑山, 나쁘지 않은 대구로군...) 그리고는 비아냥 투로,
石轉千年方到地(석전천년방도지) (산에서) 돌이 천년을 굴러야 평지에 닿겠나 이에 바로,
峰高一尺敢摩天(봉고일척감마천) 봉우리가 한 자만 더 높으면 하늘에 닿겠소
보통 녀석이 아님을 간파한 스님은 이제 젊잖게 한 수를 읊는다,
秋雲萬里魚鱗白(추운만리어린백) 가을 구름 만리에 뻗었으니 하얀 고기 비늘 같군
古木千年鹿角高(고목천련록각고) 천년 고목은 사슴 뿔 처럼 뻐쳤네요
(허참! 고기 비늘(魚鱗)에 사슴 뿔(鹿角)이라..) 어디 한번 더 가보자구.)
靑山賈得雲空得(청산가득운공득) 청산을 사고 보니 구름은 공것으로 얻었네 하자,
白水臨來魚自來(백수임래어자래) 맑은 물가에 오니 물고기가 절로 따라오네요
(靑山에 白水라, 공것으로 얻었다(空得)하니 저절로 온다(自來).... 끝까지 해보겠다는 거야 뭐야?)
雲從樵兒頭上起(운종초아두상기) 구름은 나무하는 아이의 머리 위에서 일어나네
山入漂娥手裏鳴(산입표아수리명) 산은 빨래하는 여인의 손안에서 소리로 울리네요
이에 태연한척 한 수를 더 붙인다.
絶壁雖危花笑立(절벽수위화소립) 깎아지른 절벽에도 오히려 꽃은 웃고 있네
陽春最好鳥啼歸(양춘최호조제귀) 화창한 봄이 더 없이 좋아도 새는 울며 돌아가지요
(이렇게 무너지는가... 마지막 비장의 무기 즉 한시에서 잘 구사하지 않는 변칙을 써 보자.)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 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도 다 희구나
눈앞이 하얗다는 말? 위에서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한시에서는 가급적 같은 자를 반복해서 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한 句 속에 흰 白자를 세번이나 쓰고 있으니 분명 변칙이 아닌가. 그러나 객은 망서림 없이,
山深夜深客愁深(산심야심객수심) 산도 깊고 밤도 깊고 나그네의 시름도 깊소이다
이쯤되자 스님이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를 못한다. 이에 객은 약간 빈정대는 투로 "이를 빼기에는 아직 성한 듯한데 어찌 입을 다물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오히려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는 뉘시오?" "김삿삿 올습니다만,," 라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여기서 스님은 공허(空虛)스님이라고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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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 숙영님이 지으신 시가 제일......
" 동해물로 술을 담가 세상 사람들 다 취하게 하리....."
보통 배포가 아닌.....스케일이 요즘 정치꾼들 수억배는 될......
그래도 역시 우리에게는 김 삿갓의 시가 와 닿는군~~~
소생은 약 15년 전 금강산에 가본 적이...설봉호라는 배를 타고.....
이북의 너무 비참한 모습에 기가 막혔던......
선상 뷔폐에서 그대로 버리는 무진장한 산해진미, 굶주리는 북한 주민에게 나눌 수 있다면.....
선상 노래자랑에서 상 탄 기억이~~~
정형은 금강산엘 갔다 왔으니 인생을 헛 산게 아니네여. 몇년 내에 재개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