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준의 생애와 사상
서자 출신의 콤플렉스를 딛고 醫聖의 반열에 오른 허준. 의료인의 길을 택한 그는 젊은 시절 조선 당대의 명의 양예수를 만나 의술을 전수받았다. 임진왜란 이후엔 만연하는 질병에 고통받던 민초들을 위해 동의보감과 많은 언해본 의서들을 편찬했다. 그는 유교․도교․불교의 자연관을 수용해 당시 의술의 수준을 넘어 의학철학으로 끌어올렸다.
동의보감의 첫장은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라는 인체도로 시작한다. 신형장부도는 인체의 장기와 그 특징을 그린 것이다. 옛 신선과도 같은 단순한 모습의 이 그림은 사실 간단치 않은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동양의 전통적 자연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세가지 요소를 인간의 몸 속에 상징화한 도형이다.
옆으로 그려진 인체의 상반신 그림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머리, 땅을 상징하는 몸 그리고 머리와 몸을 연결하는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척추가 있다. 이는 하늘과 땅이 지닌 선천의 기운과 인체 안의 후천 기운이 인체 내부(척추의 길)를 통해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를 보여준다. 대우주와 소우주가 합일하는 지점이 바로 인체라는 설명이다.
바로 이 동의보감 서두를 장식한 인간론은 허준이 의학을 단순히 질병 치료의 기술로 여기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까지 고양시켰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경지는 물론 허준이 유학과 도가(道家)에 충분한 소양을 갖췄기 때문이다. 당시 중인 신분의 직업인이었던 의원이 이처럼 높은 학문 수준을 갖추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의술을 철학 수준으로 고양시킨 것은 동양의학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허준을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주체성있는 학문으로 정착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 사람에게는 그들의 땅에서 나는 약초들이 효험이 있듯, 우리 몸에는 우리 땅에서 자라나는 약초가 적합하다는 신토불이(身土不二) 이론을 펴 우리의 몸에 맞는 의학을 연 것이다.
허준은 1546년(명종 원년) 아버지 허론과 어머니 손씨(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무과를 통해 입신하였으며 부안군수․용천부사 등 지방 외직을 두루 경험했다. 생모 손씨의 아버지는 지방 현령(縣令)이었으며 외할아버지는 무과 출신의 청주 한씨였다. 따라서 허준의 외가와 친가 모두 무과를 통해 입신한 양반집안이었다. 그러나 허준의 어머니 손씨는 허론의 첫째 부인이 아니었다. 허준은 서자였던 것이다. 서자 출신 허준은 생래적인 콤플렉스를 타고났지만 양반집안이었기 때문에 학문적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토양이 의술을 철학의 경지로 끌어올려 집대성하는 자양분이 된 것이다.
사실 허준의 일생에서는 생모 손씨보다 큰어머니(嫡母) 김씨가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큰어머니는 영광(靈光) 김씨로 전라남도 지역에 살았는데 그의 큰어머니 집안과 당시 고관대작이었던 유희춘과의 안면이 후일 허준의 출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의술을 학문경지로 끌어올려
허준의 형제는 모두 이복으로 형 옥(沃), 동생 징(生)이 있었다. 옥은 내승(內乘)이란 낮은 직책을 지냈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동생 징은 역시 서자였는데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 첨정․승문원 교검․교리 등 내직과 영월․파주 등지의 지방관을 역임하는 등 관료로 출세했다. 그러나 당시 문과에 합격할 때 다른 사람의 작문을 베껴 문제가 됐으며 또한 사람됨이 욕심이 많아 관물(官物)에 손을 대 파직당하는 등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허준의 출생지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통설은 경기도 양천( 강서구 가양동)에서 태어났을 것이라는 설명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출생지보다 젊은 시절 생활했던 장소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볼 때 허준은 청소년기에 해당하는 10대를 주로 해남과 담양을 축으로 하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보냈다. 비록 서자였지만 그는 부모님이 모두 양반 출신이라서 어려서 유학의 기본 소양과 글을 배우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후일 허준이 경사(經史)와 의학에 모두 밝은 드문 의원이라는 칭송을 받은 것은 바로 어려서 유교 수업을 받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 산 129번지에 있는 허준의 묘소. 이 묘소는허준 선생 기념사업회가 지난 91년 국방부의 허락을 받아 DMZ 안에서 찾아낸 뒤 복원했다.
그러나 서자라는 꼬리표는 그가 양반으로 출세하는 길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었다. 그는 결국 대부분의 서자들이 택했던 양반 아래의 중인, 즉 기술관의 길을 걷고자 다짐했다. 특히 기술관 가운데서도 어려운 한문 실력을 겸비해야 했던 의관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허준은 한가지 결심한 일은 꼭 이루어내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라도 지역의 심약(審藥․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검사하기 위해 지역에 파견했던 종9품 벼슬)직을 수행하는 한편 의학 공부에 전념하여 지역사회의 의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따라서 이미 10대에 그의 의술은 전라도 지역에서는 내로라 하던 의관들도 모두 칭찬하는 수준에 올라 있었다. 특히 큰어머니의 삼촌이었던 김시흡은 그의 의술을 보다 드높이기 위해 서울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당시 전라도 출신 고관이었던 유희춘에게 허준을 소개했다.
유희춘과의 만남으로 허준은 일생일대의 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1568년 그의 나이 22세 때 허준은 드디어 서울에 입성해 유희춘을 찾아갔다. 이미 전라도 지역에서 의술로 이름을 날리던 허준이라 유희춘은 서울에서도 그의 의학적 포부를 펼칠 수 있다고 보았다. 언젠가 서울에 올라 오면 자신을 찾으라고 말해 두었던 참이었다.
허준과 유희춘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허준은 유희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정도였다. 전라도의 다른 지역으로 몸소 왕진하여 유희춘의 친구들을 치료해주었다. 또 유희춘이 관직을 제수받아 서울에 상경하거나, 하직해 담양이나 해남으로 내려갈 때는 반드시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 또한 유씨 집안의 병치레는 허준이 도맡아 치료할 만큼 주치의로서의 역할도 했다.
이듬해인 1569년 윤6월 유희춘은 이조판서 홍담(洪曇)에게 허준의 내의원직(內醫院職) 천거를 부탁했다. 허준의 첫번째 내의원 출사였다. 그동안 그의 의술이 서울의 양반들에게 매우 훌륭한 것으로 정평나 있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직함을 갖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제 비록 말단이기는 하지만 모든 의원들의 선망의 대상인 내의원에 출근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유희춘이 양예수에게 허준 소개
조선시대 서울이 모든 학문의 중심이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의술의 경우 최고 수준인 내의원 의원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서울에 거주한다는 사실은 이같은 높은 의학 수준에 접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당시 내의원 의관 중에서도 최고의 의원은 어의 양예수였다. 유희춘은 당대 최고의 의관 양예수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양예수 역시 유희춘이 서울에 거주하면 매번 문안인사를 빠뜨리지 않는 관계였다. 1570년 6월 양예수는 유희춘을 찾아가 유희춘의 보약을 의논하고 돌아갔다. 1573년에도 양예수는 유희춘의 부인이 질병으로 고생하자 이를 치료하기 위해 유희춘의 집에 들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병문안 부탁도 들어주었다.
유희춘이 서울에 거주하는 동안에는 거의 매월 양예수가 그를 문안했으며 1570년 8월에는 양예수와 허준이 모두 유희춘을 방문했다. 따라서 두 사람은 허준이 내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유희춘을 매개로 자연히 알고 지냈을 가능성이 높으며, 허준의 내의원 입사 후에는 더욱 친밀해졌다. 당시 양예수의 나이는 대략 40대 후반에서 50대였다. 그러니 20대 전반의 젊은이에 불과했던 허준에게는 아버지뻘 되는 선배이자 스승이었다.
특히 양예수의 의술은 당대 최고였으며 그가 남긴 의림촬요(醫林撮要)가 후일 동의보감의 기초가 됐던 점을 생각한다면 양예수를 만난 것은 허준에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이미 내의원 의원으로서 확고한 명성을 지닌 양예수와 함께 근무하게 된 것만으로도 허준은 양예수의 의술을 전수받을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허준 연표
1546 명종 원년 1세 서울 강서구 가양동에서 출생
1575 선조 8년 30세 명의 안광익과 함께 왕의 병 진찰
1581 선조 14년 36세 纂圖方論脈訣集成 4권4책 교정 개편
1590 선조 23년 45세 왕자의 병 고침. 당상관에 오름.
1592 선조 25년 47세 임진왜란 발생, 임금의 파천에 함께 따라감
1596 선조 29년 51세 왕이 의서의 총정리 편찬 명령
1604 선조 37년 59세 扈聖功臣 3등으로 책록돼 양평군에 봉해짐
1607 선조 40년 62세 언해구급방 상하 2권2책 개편
1608 선조 41년 63세 선조의 별세에 따라 수의로서 책임 묻는 요청 잇따랐으나 광해군이 듣지 않음. 언해태산집요 찬술, 언해두창집요 개편
1610 광해군 2년 65세 14년만에 동의보감 완성
1615 광해군 7년 70세 8월에 서거. 보국숭록대부로 추증됨
사실 양예수에게도 허준과의 만남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이 시기 내의원에 양예수의 의학적 맞수라 할 만한 어의(御醫) 안덕수(安德壽)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처방을 고수했다. 양예수는 강한 약재를 사용해 빠른 효과를 기대하는 준한제(峻寒劑) 처방을 선호했고 안덕수는 이를 비판해 강한 약재보다 지속적이고도 꾸준한 효과의 처방을 선호했다.
이런 상황에서 양예수에게 허준과 같은 젊고 능력있는 제자를 키워 자신의 의학론을 전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역사는 양예수의 준한 전통이 승리, 허준에게 계승됨으로써 조선의학의 전통으로 성립됐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계피․부자․인삼 등 강하고 효과가 빠른 약만 찾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양예수는 허준을 통해 자신의 의학 전통을 이어가도록 한 것이다.
어쨌든 허준에게 양예수와의 돈독한 친분은 의학이론의 전수와 함께 임금 선조와의 관계를 위해서도 중요했다. 당대 최고의 의사 양예수는 허준에게 스승이자 곧 넘어야 할 산이었다. 또 신분적 제약을 극복해 출세길을 제시해준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