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으로 철학사 속으로 들어가는 분위기입니다.
31. 아르카익 시대의 사고에는 일반적으로 어떤 확고한 전문용어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학적 언어와 일반적 언어 사이의 엄격한 구분도 없으며, 무엇보다 물리학과 우주론 같은 개별과학들의 언어들과의 구분도 없습니다. 또한 내가 알기로 벌써 20년 전에 인식 Erkenntnis지에 발표된 아주 중요한 논문에서 한스 켈젠이 [지적했]듯이, 우리 철학 개념들 상당수의 기원을 이루는 법학과의 구분도 없습니다.(47)
이는 고대의 사상가들 사이에 전문용어상의 고착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뜻합니다. 또한 이 경우, 태고화하기를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이 되풀이하여 강조한 것처럼, 이 태고적 사유에서는 사유의 경험들이 그 후의 경우보다 더 직접적이고 덜 사물화된 상태로 나타난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사실상 다음의 단점도 있습니다. 즉 그것들은 바로 사변적인 사고들이지만, 직접적 경험에서 유래하는 개념들을 사용함으로써, 그 의미가 무엇인지 별로 명확하지 못하며, 그래서 종종 무엇보다 어떤 명제들이 어느 영역에 해당되는 것인지 명확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우 우리는 한쪽의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의미들 및 명제들과 [다른 쪽의] 물리학이나 우주론과 같은 자연과학적 의미 및 명제들의 구분을 요구하는 성향이 있는 한에서, 어쩌면 이미 일종의 시대착오적 투사(Projektion)를 저지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한 구분은 사유의 이 단계에 −이때 나는 예컨대 이오니아 자연철학자들을 생각합니다−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 의식의 특징은 그러한 영역들이 아직 전혀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그들의 경우, 정신에 대해 자립적으로 맞서 있는 자연에 대한 의식은 아직 신화적 마술적 관념들에 젖어 있었으며, 이것들이 이 고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활물론에서 처음으로 개념을 통해 승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또한 그들의 전문용어는 그처럼 유동적이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그 후 그들 가운데 몇몇에 대해서는, 전체적으로 단지 단편적으로만 전해진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어두운 철학자(σχοτειγός)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별명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은 판단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철학사를 다룬 사람들은 알고 있듯이, 그래도 핵심적인 부분들이 전수되고 있는 파르메니데스의 교훈시와 같은 작품의 경우, 예컨대 존재 개념과 같이 거기서 쓰이는 가장 중요한 전문어들조차 결코 완전히 해소될 수 없는 부단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