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하게 살펴 본 한국사 총정리
통일신라에서 발해까지
Ⅰ. 남북국가의 성립
신라의 삼국통일과 발해의 건국
신라의 삼국통일: 매소성 등에서 당을 격파, 대동강-원산만 이하의 불완전한 통일
발해의 건국: 말갈족을 피지배층으로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이 만주에 震이란 국호로 세움(698)
cf. 남북국이란 명칭은 <발해고>에서 처음 사용, <제왕운기>에서 발해를 우리 민족의 국가로 봄.
남북국가의 관계
732년에 일어난 당과 발해전쟁에 당의 요청으로 신라가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다가 실패.
이후, 발해와 신라는 상설적 교류(발해의 신라道)
대립갈등을 나타낸 사건: 爭長사건, 등제서열사건
발해는 멸망기에 신라에 지원을 요청하는 등 친선관계
통일신라의 발전과 정치, 경제
통일신라의 발전
삼국사기
상 대 박, 석, 김 ~(성골중심)진덕여왕
중 대 무열왕 ~혜공왕(진골)
하 대 선덕왕 ~진덕왕(진골과 성골의 혼재)
삼국유사
상 고 박, 석, 김 ~지증왕(유교식 왕호)
중 고 법흥왕 ~진덕여왕(불교식 왕호)
하 고 무열왕 ~경순왕(중국식 시호)
신문왕 때 전제왕권 확립, 성덕왕, 경덕왕 때 전성기
무열왕계의 중대왕권을 잘 나타낸 것이 혜공왕때 처음 만들어진 5묘제(미추왕, 무열왕, 문무왕, 성덕왕, 경덕왕)로 直祖관념을 표출함
정치제도의 정비
집사부가 하대에 가면 집사성으로 승격, 중시도 시중으로 격상.
시중의 지위는 전통적 상대등 때문에 낮았다
9주(도독, 당제를 모방하여 민정장관의 성격 가미),
5소경(김해 금관경, 충주 중원경, 원주 북원경, 청주 서원경, 남원 남원경)
군(군태수),현(현령, 소수)의 외관은 모두 중앙 파견, 주, 군에는 감찰임무의 외사정 설치,
자연촌을 합친 행정적 지역촌의 촌주는 현령의 통제를 받음.
주군현에도 토착인으로 吏를 임명하여 외관을 보좌케하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상경시켜 관부의 일을 보게하는 상수리제도가 있었다.
향,부곡의 특수행정조직 존재
군사조직의 재편성
9서당 10정
고구려, 백제, 말갈인 등 피정복민도 포함하여 편성, 이들은 금(옷깃)에 따라 부대명칭을 정하여 국왕직속의 일원적 군사조직화를 보여줌.
주마다 둔 10정(한주는 2)은 주가 군사적 조직과 결함되고 있음을 보여줌.
기타 5주서, 3변수당 등 여러 군대가 있었다.
토지제도의 개편
귀족은 식읍, 녹읍을 받고, 백성은 정전에서 경작하여 조를 납부
신문왕 때 녹읍을 폐지하고 세조를 차등있게 지급하고 관료전을 주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되고 관료전과 세조가 폐지됨.
cf. 신라장적(경덕왕 때 작성된 것)의 내용
-연수유답(정전), 관모답(관유지), 내시령답(내시령이란 관리의 관료전), 촌주위답
-결부제(압파속부결, 1결은100부)에 따른 토지 면적, 호수,인구수,우마수,뽕나무,잣나무,호도나무수 기록, 3년마다 변동상황 기록
-4개촌 총인구 442명 중 노비는 25명
-호는 인정의 다소에 따라 상상호에서 하하호까지 9등급으로 나누고 인구는 남녀별, 연령별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등 상세한 기록
2. 통일신라의 문화
유학의 발달
국학(신문왕): 논어와 효경을 공통과목
독서3품과(원성왕): 능력위주의 제도, 실패
강수는 외교문서, 설총(원효의 아들)은 이두 집대성,<화왕계>는 군주(신문왕)에게 도덕정치를 요구하는 유교사상이 나타남, 김대문의 <계림유전>,<고승전>,<화랑세기>,<한산기>등은 전하지 않지만 신라의 자기문화 의식을 보여줌.
당의 빈공과에 김운경, 김가기, 최치원 등이 합격함
최치원(최언위 등과 함께 6두품)은 <중산복기집>,<계원필경>,<제왕연대력>,<문집>등 편찬, 진성여왕에게 시무10조 건의(수용되지 않음), <계원필경>과 낭혜화상비 등 비문만 전함.
후기의 유교는 진골중심의 신라사회에 대하여 비판, 도전하는 사상적 기반
향가문학의 발달
각간위홍과 대구화상의 <삼대목>등은 전하지 않고, <삼국유사>14수, <균여전>11수만 전함.
불교의 발전
5교: 계율종(통도사), 열반종(경복사), 법성종(분황사, 원효), 화엄종(부석사, 의상), 법상종(금산사, 원측)으로 화엄종과 법상종이 대표적.
혜초:<왕오천축국전>
의상: 화엄종이 고려 초 균여로 이어짐
원측: 당에서 서명학파 성립, 유식학 외 다른 사상을 포용하여 당 규기의 자은학파로부터 배척당했으나 티벳불교에 큰 영향을 줌. 고려 중기에 귀족불교로서 부흥.
원효: 화쟁사상, 통불교사상을 불교계 분위기로 이끌어감. 화엄경을 최고의 경전. 불교의 종합화와 대중화(나무아비타불). 정토신앙. <대승기신론소>,<십문화쟁론>
불교대중화의 현상: 점례법회, 관음신앙, 밀교, 정토신앙
미술의 발달
불국사와 석굴암은 경덕왕-혜공왕때 김대성. 석굴암은 화강암의 인조석굴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의 봉토 주위에 둘레돌(호석)을 쌓고 12지신상을 조각하는 양식 발달
다각,다층탑은 고려 이후 발달
Ⅳ. 발해의 발전과 사회,문화
발해의 발전
무왕: 연호 인안, 일본에 사신, 당과 대립, 장문휴가 흑수부,산동성을 공격
문왕: 연호 대흥, 당과 화친
성왕: 연호 중흥, 상경으로 환도
선왕: 연호 건흥, 요하유역까지 진출하여 요동 지배권 획득, 해동성국으로 불림
거란의 침략으로 멸망(926), 이후 정안국,흥요국,대발해국등으로 부흥운동(동모국은 거란이 세움)
발해의 정치와 사회
정당성(상서성,대내상), 선조성(문하성,좌상,충인의), 중대성(중서성,우상,지예신)
정당성에서 귀족들이 국가중대사를 회의,결정. 중정대는 감찰, 위자감은 국립대학
5경15부62주(도독인 장관인 15부가 중심)
cf. 6부: 이호예병형공=충인의(좌)지예신(우)=천지춘하추동
발해의 문화
정혜, 정효공주지묘의 비는 세련된 병려체로 도교적인 불로장생의 내용이 적혀 있어 한문사용의 능숙함을 보여줌.
불교가 지배자를 중심으로 전파, 관음신앙과 법화신앙 유행
상경은 당의 수도인 장안성을 모방, 주작대로가 있었고, 온돌장치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것.
이불병좌석불, 와당, 석등 등 소박하고 직선적인 고구려적 문화
제4장 신라후기의 사회변동
Ⅰ. 진골사회의 동요
진골귀족의 자기항쟁
신라의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때 시작(대공의 난)
헌덕왕때 김헌창의 난(822): 국호를 장안, 연호를 경운, 아들 김범문도 후에 반란
흥덕왕 이후 왕위싸움이 더욱 치열해짐
골품제의 붕괴
진골체제에 대한 반항: 6두품은 소극적, 지방호족은 적극적
지방세력의 대두와 후삼국
호족의 대두
토착적 지방세력이 성장한 호족, 지방에 내려간 중앙귀족의 호족화
장보고 등 군진세력도 성장
선종의 대두 9산: 가지산,수미산등. 호족들의 사상적 기반
유교정치사상의 대두와 사상의 복합화
최치원과 최언위가 많은 선승들의 비명을 지은 것은 그들이 유교적 입장에서 불교를 이해하였음을 나타내는 것.
도선의 풍수지리설(왕씨의 고려 건국 예언)
사상의 복합화
-원광의 세속5계: 유 불 선
-최치원의 사산비문: 유 불 선 풍수지리
-김시습의 금오신화: 유 불 선
-최제우의 동학: 유 불 선 천주교 샤머니즘
농민봉기와 후삼국
하대의 혼란은 진성여왕때 절정, 전국적 민란(초적) 발생
후백제: 견훤(농민)이 완산주에서. 오월,일본과 교섭. 후고구려에 멸망(936)
후고(구)려(마진,태봉): 궁예(신라의 왕자로 중)가 송악에서 건국. 철원으로 천도후 왕건(송악의 호족)에 의해 고려로 교체됨(918). 신라 병합(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