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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 마 26:1-13
오늘은 먼저 본문 13절을 읽고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여기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참 의미있는 말입니다. 20세기의 유명한 경제학자인 조셉 슘페터(J. Schum peter)는 외향적이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30세에 경제서적 두권을 출간할 정도였으니, 꽤 대단하긴 합니다. 출판 기념회 때, 누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그가 뭐라고 대답했을 거 같습니까? 뭐 고상한 대답을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유럽 미녀들의 최고 연인, 유럽의 최고 승마인, 그 다음으로는 세계 최고 경제학자로 기억되기 원합니다.” 그는 젊디젊은 나이에 악명 꽤나 떨쳤습니다. 세월이 흘러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친구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자네는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그는 친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여섯 명의 훌륭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교사로서 기억되길 원하네.”
제목이 좀 특이한 ‘처음 늙어보는 사람들에게’란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만 보면, ‘아니 그럼 처음 늙어보지, 두 번 세 번 늙어보나’ 시비 걸고 싶어집니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킨슬리는, “처음 늙어보는 사람들에게”라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가 ‘워싱턴 포스트’ 등 유력 매체에서, 정치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던 42세 때,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파킨슨병은 도파민을 생성하는 뇌 세포가 죽어가는 병입니다. 도파민 분비가 줄면서, 동작이 느려지고, 몸이 떨리고, 근육이 경직되고, 말이 어눌해지고, 표정은 굳어집니다. 나이가 많이 든 노인에게나 나타나는 증상들입니다. 이런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 당장 문제가 생기거나 생명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란 점도, 파킨슨병과 노화의 닮은 점입니다. 이 책은 킨슬리가 먼저 늙어본 사람으로서, 앞으로 늙어갈 모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담았습니다. 그 중 일부 내용을 인용하겠습니다. “남는 것은 사람들의 기억뿐이다. 이런 말을 하긴 싫지만,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가며 가족과 나눈 인사가, 이 생의 마지막 인사가 될 수도 있다. 죽음은 순서를 따지지 않고, 불시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지금 죽는다면 당신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재산? 가족 명의로 된 종신보험? 그건 이생에 남아 있는 상속자의 몫일 뿐이다. 당신이 죽을 때 함께 하는 것은, 당신이 살아온 기억 뿐이다. 세상에 남은 사람들에게 남는 것도, 궁극적으론 당신에 대한 추억뿐이다. 당신은 어떤 기억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은가? 당신은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피터 드러커(P. F. Druck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오스트리아 출생의 미국인으로, 작가이자 경영 컨설턴트였고 대학교수였습니다. 그는 마케팅이란 단어를 창시했고, 경영학의 아버지로 미래학의 대가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그는 90이 넘은 나이에도, “30여권의 저서 중에서 어느 것이 가장 자랑스러운 책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에 나올 책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기의 그 방대한 저술과, 그의 깊은 역사와 문화 미래에 대한 영감과 통찰을, 성경에서 찾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사실 그는 성경을 서른여섯 번 이상 통독한 성경 애독자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한 것을, 현실에 적용하고 진리를 찾는데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13살 때 자기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네들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느냐?” 물론 그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자네들이 대답을 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어.” 그리고 덧붙이기를 “하지만 말이야. 자네들이 50세가 되어서도 이 질문에 대답할 말이 없다면, 인생을 낭비한 것이야.”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그의 가슴에 오래도록 남았고, 현재 자신의 모습이 되기까지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죽어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느냐?’ 이게 피터 드러커의 평생의 좌우명이었다고 합니다. 피터 드러커가 오래 전 만났던 치과의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환자들로부터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치과의사는 “내가 치료한 환자들이 죽어서 병원 안치대에 누웠을 때, 사람들로부터 ‘이 사람은 정말 최고의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았군.’이라는 말을 듣기 원합니다.” 참 멋진 질문에 참 멋진 대답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국 이 한 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죽어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한 번뿐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 두 번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인생인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1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예수님은 주의 재림과 종말에 대해, 마태복음 24장과 25장 두 장에 걸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삶, 곧 개인 종말을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듯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은 “깨어 있으라” 였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리 주의 재림과 종말에 대해 말씀하셔도, 깨어 있지 않으면 소용없습니다. 노아 시대 사람들처럼 말씀을 흘려듣고 깨어 있기를 거부하면, 심판의 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롯의 사위들처럼 말씀을 농담으로 받고 깨어 있기를 거부하면, 심판의 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해 애끓는 심정으로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으라.” “깨어 있어 말씀 위에 굳게 서라.” “깨어 있어 기도로 강력하게 무장하라.” 깨어 있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을 세상이 두려워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을 정치가 두려워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을 제도가 두려워합니다.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사람은,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잠든 다수가 아닌, 깨어 있는 소수가 변화시킵니다.
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던 예수님은, 십자가 사명에 깨어 있으셨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주님은 이 땅에서의 자신의 생명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음을 아셨습니다. 평범한 죽음도 아닌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죽음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마지막을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심적 고통이 보통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사명의 짐을 묵묵히 짊어지고자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는 것이 기뻐서 하신 게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기를 오래 전부터 사모해서가 아닙니다. 해야 하니까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원하시니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야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겨주셨으니 하는 것입니다. 딤전 1:12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3-4절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이미 시계침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의논을 했습니다. 그들은 정당한 절차와 방법으로는 예수님을 잡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흉계를 꾸몄습니다. 달리 불행이 아닙니다. 이런 삶이 불행인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묘책을 짜내는 것이 행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이, 비록 머리가 아플지언정 행복입니다. 어떻게든 살리는 쪽에 서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편에 서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다수가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고 소리칠 때, 그 사람을 살리자 소리치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소리친다고 해도 대개는 묻히고 맙니다. 그래서 체념하여 침묵하거나 다수에 묻어가고 맙니다.
이순신 하면 뗄레야 될 수 없는 사람이 류성룡입니다. 류성룡을 이순신의 천재 멘토였다고 했습니다. 종6품 정읍 현감이었던 이순신을, 6단계 뛰어넘은 정3품 전라 좌수사로 발탁한 사람이 류성룡입니다. 당시 육군이었던 이순신을 수군으로 발탁했던 것이 신의 한수가 됐습니다. 이순신을 발탁한 사람이 류성룡이라면, 그를 선조 임금으로부터 살려준 사람이 정탁입니다. 무능하고도 무책임한 선조는, 간신들의 말을 듣고 이순신 체포령을 내렸고, 감옥에 28일 가두었으며, 고문도 한 차례 시켰습니다. 이순신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상황에서, 정탁은 자기 죽음을 무릅쓰고 선조에게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그래서 선조로부터 이순신의 목숨을 구원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를 수 있었고, 명량해전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럼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자신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아예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치졸한 정치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5절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당장이라도 예수님을 잡아죽일테세였지만, 문제는 시기가 맞지 않았습니다. 유월절 명절 때문이었습니다. 잘못 하다간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민심을 한 번 잃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였습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조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보다는 사람들의 민심이 무서웠습니다.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들의 눈치가 더 무서울 때, 영적 리더십은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간의 충돌은 가까스로 면했지만 잠시 미뤄진 것입니다.
6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때마침 예수님은 시몬의 초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시몬 앞에 나병환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지금도 나병환자라는 말은 아닐테고, 짐작컨대 전에 나병을 앓고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답례로 오늘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셨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몬에게 있어 예수님은 자기 생명의 은인 같은 존재입니다. 제사장으로부터 나병이라고 판정받는 순간 인생 끝장 난 것입니다.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합니다. 목숨은 붙어 있으나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자기 나병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시몬은 예수님이 가장 힘들 때 초대하여 접대를 해주었습니다.
7절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한참 식사가 진행될 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한 여자가 향유를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예측못했던 일이 갑작스럽게 벌어졌습니다. 그 여인이 부은 향유는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나드 향이었습니다. 나드 향은 인도산 식물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향인데, 매우 귀하고 값이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한 신분에게 바쳐지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한 옥합의 가격이 300데나리온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300데나리온이면 노동자 한 사람의 연간 수입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가격 뿐만 아니라, 질적 가치면에서도 뛰어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인의 누구인지를 본문에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 여인은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로 보입니다. 그럼 왜 마태가 익명 처리를 했을까요? 아마 그 여인이 당시 생존해 있었고, 유대인들의 박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정 궁금하면 천국에 가서 확인해보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식사하실 때, 향유를 부은 것도 눈여겨볼만합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식사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식사 분위기를 깬 것이 될테지만, 그들의 문화는 달랐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은 식사 도중에, 그 잔치의 가장 귀한 분에게 향유를 부음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는 거였습니다. 비록 그곳이 성전이나 궁궐은 아니지만, 향유 부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8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제자들에게서 말입니다. 사실 자기 스승이 식사 자리에서 향유 부음을 받아 영화롭게 되었으면, 기뻐하며 축하할 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박수는커녕 분개했습니다.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린 매우 귀한 향유를 허비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너무 귀한 것을 아무 가치 없는 일에 썼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치는 향유 가격 300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 고가의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한 번 부어드리고 마는 것을 허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세계 부자 서열 7위에 드는 워렌 버핏과의 점심식사 경매가 매년 있습니다. 낙찰자는 최대 7명까지 초청할 수 있고, 서너 시간동안 버핏과 식사할 수 있습니다. 버핏과의 점심식사 경매 낙찰가격이, 얼마나 될 거 같습니까? 무려 40억 가량입니다. 한끼 식사비로 40억을 쓴다면, 일반인은 미친 짓이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경매를 통해서, 식사권을 서로 따내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와의 3~4시간의 식사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가치 기준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가치 기준을 상대에게도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치충돌이 일어납니다. 교회는 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강남에서 목회하는 어느 목사님이, 신학생들에게 가난하게 자란 사람은 강남에서 목회하지 말라고 했답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기분 나쁘게 들렸답니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는 그 말이 이해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가치관의 충돌은 메꾸는 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천국입니다. 예수님입니다. 천국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예수쟁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300데나리온의 향유를, 보다 가치있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리는 것을 허비라고 본 것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십일조를 합니다. 사정상 지금 못하고 있으면 죄송스러워하고, 어떻게든 언제라도 꼭 하고 싶어합니다. 십일조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십일조를 허비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소득의 1/10은 꽤 큰 비율입니다. 그렇다고 십일조만 합니까? 주정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등등이 있습니다. 저같은 경우 교회에서 받는 생활비의 4/10 정도는 헌금하는 거 같습니다. 그럼에도 매달 매주 헌금하는 것이 그리 즐겁습니다. 결국에는 헌금하는 것, 곧 하늘에 쌓은 보화만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9절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허비로 본, 제자들의 논리가 뭐였습니까? 그들의 논리를 잘 보세요. 그 강조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비싼 값’과 ‘가난한 자들’ 중 어느 쪽입니까? 비싼 값인 거 같습니다. 향유가 값나가는 것이 아니었다면, 가난한 자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 전에는 가난한 자들을 돌볼 생각을 하지 않다가, 비싼 향유를 보니까 생각이 났습니까? 늘 가난한 자들을 돕고 싶었지만 돈이 없어 못 도왔는데, 비싼 향유를 보니까 그게 애석해서 그랬습니까? 그들은 지금 참 희한한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10절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제자들의 억지스런 논리에, 예수님이 한 마디 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제자들이 단순히 9절을 생각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9절 말씀처럼 속삭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 여인을 향해 따가운 눈총을 보냈습니다. 금방이라도 혼낼 것 같은 표정으로 쏘아봤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 헌신하고도 괴롭힘을 당했던 것입니다. 참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아니 교회에서조차,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의 최고의 가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아마 그 여인에게 더 귀한 향유가 있었다면, 그걸 예수님께 부어드렸을 것입니다. 그 여인은 그 향유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감사한 것은, 예수님이 그 여인의 마음을 알아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그 여인에게는 그 한 마디면 족했습니다. 더 다른 어떤 찬사도 감사 인사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좋다고 하시면 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 신앙생활의 기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습니다.” “교회가 좋다고 하면 나도 좋습니다.” “목사님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습니다.” 꼭 보면 헌신 잘 안 하는 사람들이 9절처럼 말합니다. 자기는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헌신하는 것까지 막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교회 나온지 얼마 안 된 새신자랑, 같은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마침 헌금시간이 되었습니다. 헌금 주머니가 그 자리에 오자, 새신자가 오만원짜리 지페를 헌금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새신자에게 “헌금주머니에 넣는 헌금은 그렇게 많이 하는 게 아니라”고 가르쳐 줬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새신자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하는 말이, “5만원짜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어 주어서 했는데요.” 알고보니 그 집사님이 헌금시간이 되니, 호주머니에서 천원짜리를 골라서 꺼내려고 하다가, 그만 오만원짜리가 바닥에 떨어졌고, 후에 그 오만원짜리를 발견한 새신자가 자기 호주머니에 넣기는 뭐하고 해서, 헌금 주머니에 넣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정이 있어 주님께, 주의 몸된 교회에 헌신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라도 잘할 수 있도록 응원해줘야 합니다. 그러지는 못할망정, 일하는 사람 힘빠지게 하는 소리는 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하는 일이 주님께 좋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누가 무슨 말해도 흘려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한테도 입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허물 많은 우리에게 입을 떼는 건 당연하다고 여겨야 합니다.
11절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제자들이 분개한 건 자기들의 관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관점으로, 한 여인의 귀한 헌신은 평가절하했고, 심지어 괴롭히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가난한 자들과 자신을 엄격히 구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선행을 하는 것과 자신에게 헌신하는 것을 구분하셨습니다. 주님께 하는 것과 가난한 자들에게 하는 것은, 같은 듯 하면서도 아주 같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 사랑을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순서는 구분하셨습니다. 본문에서도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선행을 막으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은 제자들 곁에 항상 있으니, 다른 때라도 선행을 베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과의 작별할 때가 멀지 않았던 것입니다. 12절이 그걸 말해줍니다.
12절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이 여인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자기의 가진 모든 것을 드려서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위에 대해, 예수님이 의미 부여를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하는 모든 것은, 그게 크든 작든 많든 적든 다 의미 있는 일임을 믿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걸 예수님이 기억해주십니다.
13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니, 최고의 복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기억해주는 사람이 되었고, 더 나아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향유를 부은 여인은 순수한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러한 여인의 헌신에 대해, 최상의 보상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자신의 부활과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할 때, 이 여인의 헌신도 함께 전하여, 기억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여인이 드린 향유는, 과부가 드린 두 렙돈과 같은, 진정하고 참된 헌신이었습니다. 그녀의 헌신은, 예수님을 감동시켰으며, 또 그것을 듣는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녀의 헌신을 기록하여, 성도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녀가 행한 일을 읽고, 그녀가 드린 헌신을 기념하면서 기리고 있습니다. 여인의 향유를 붓는 사건은, 역사상 딱 한 번밖에 없는, 종말론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 행한 일입니다. 만약 그때 이 여인이 향유를 붓지 않았다면, 부을 수 있는 기회는, 평생 없었습니다. 한 번 온 기회에, 헌신함으로써, 예수님을 장사를 기념하는, 아름다운 일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셔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 앞에서 헌신할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되지 않습니다. 그때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여인이 향유를 부었을 때, 그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고, 그 행한 일이 기억되리라 한 것처럼, 우리의 헌신도 세상으로 퍼져나가고,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합니까? 예수님이 기억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을 기억나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릴 때, 향유의 향기가 온 집안에 퍼졌던 것처럼, 우리의 옛사람이 깨어질 때,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향기가 온 세상에 번져가게 하옵소서. 우리는 날마다 ‘물질중심의 나’, ‘세상중심의 나’를 깨뜨려 우리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 나타나시게 하고, 그분만이 영광을 받게 하옵소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만이 존귀함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하여 행하여지는 아름다운 봉사, 아름다운 헌신, 아름다운 충성, 아름다운 순종이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흐뭇한 감정으로 남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사는 귀한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누가 나의 마음을 주장합니까? / 마 26:14-30
수십년 말씀을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몇가지 있는데, 첫째는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는 방법이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식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은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식을 평안하고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엄마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은 약간 차이가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아버지는 자식들의 일에 대한 사명감을 지켜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한다면, 엄마의 사랑은 자식들이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는 수십년 말씀을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자기 안에 다른 생각을 품고 듣는 사람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말은 힘이 없어서 듣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해도 그럴 것이라고 인정이 되지만, 예수님과 함께 3년을 생활하면서, 예수님께서 깨우쳐주시는 말씀을 직접 듣기도 한 유다의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은 30을 받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주는 일까지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마귀가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 12:6절을 보면, 그는 평소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 돈궤를 맡았는데 거기에 넣는 것을 훔치는 생활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어도, 속에 다른 생각이 있었으니 변화가 되지 않았고, 결국은 예수님과는 다른 길을 가버린 것입니다. 또하나 변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인간들을 끝없이 용서해주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세례요한이 증거 하면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통일신라 시대 원효대사가 중국으로 불교공부를 하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마땅한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서 산 속에서 자게 되었는데, 자다가 갈증이 심하여 자다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그렇게 맛있었고, 덕분에 갈증을 잘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보니까, 그게 동물의 시체가 썩은 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바로 구역질이 났습니다. 그리고 얻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아! 인생만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구나!’ 맞습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내 마음이긴 한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관리가 어렵습니다. 세상에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마음수련원이란 게 다 있을까요.
14절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성경에 이런 저런 인물이 나오지만, 그 중에 자기 마음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인생을 망친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은 찬송입니다. 부모님이 ‘찬송’이란 뜻의 이름을 지어준 것입니다. ‘네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라’는, 부모님의 신앙적 바람이 담겨 있는 이름입니다. 그는 부모님의 바람대로 신앙적으로 잘 자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 중에서, 특히 열둘을 선택하셨는데 그 중에 뽑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삼년 동안 따라다니며, 메시야의 꿈을 꾸었습니다. 머잖아 조국 이스라엘이 로마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3년 동안 준비를 해왔기 때문입니다. 보아하니 예수님도 그 어느 때보다 결연한 표정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실 때 꽤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비록 말이 아닌 나귀새끼를 타서 폼은 덜 났지만, 그래도 사람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마 21:9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민심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뭐 당장이라도 세상이 뒤집어질 거 같았습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는 장면은, 속이 다 후련했습니다.
그 다음은 로마 군인들을 손볼 차례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까지 보여주신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이 로마 군인들을 향해 화를 발하시면, 그걸로 모든 것은 상황 종료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첫 날의 기개와 둘째 날의 위엄은 오간데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러려고 예루살렘에 요란하게 입성하셨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진짜 필요한 것은 액션인데, 제자들 데리고 말씀만 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는데, 그 종말이 지금을 말하는 건지, 먼 훗날을 말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자신이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26: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그 전에도 몇 번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들었습니다. 생즉사 사즉생의 각오 정도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느낌이 달랐고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싸워보지도 않고 패배를 인정하는듯한 말씀을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여기서 선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한테 계속 메시야 기대를 걸고 기다릴지, 아니면 예수님을 깨끗이 포기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 결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3년의 청춘을 바쳤습니다. 꿈을 꿨고 희망을 품었던 3년의 세월이었습니다. 열둘과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어, 그들과 절연하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에 끌려 마냥 기다릴 수만도 없습니다.
15-16절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마침내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최악의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었지만, 당시 가룟 유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선택했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는 그 길로 대제사장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스승을 넘겨주는 대가를 놓고, 악마의 거래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넘겨주면 얼마나 줄지를 물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두말 않고 은 삼십을 달아줬습니다. 은 삼십이 얼마의 가치가 있습니까? 출 21
:32절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 종 한 사람 몸값에 불과합니다. 세상에 자기 스승을 종 한 사람 값에 팔아 넘겼습니다. 이것을 보면 가룟 유다가 꼭 돈 욕심에 예수님을 판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정말 돈 욕심이 전부였다면, 예수님을 넘기는 대가로 은 삼십의 백배를 요구했어도, 대제사장들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이, 가룟 유다를 그렇게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삼년 따라다녔지만, 정작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몰랐고, 예수님의 꿈을 몰랐습니다. 예수님과 같은말 같은마음 같은뜻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비전의 문제고 가치의 문제입니다. 비전이 같아야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같은 가치를 공유해야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는 언제까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뼈를 묻겠다는 일명 ‘골수파’는, 비전이 같고 같은 가치를 공유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교회의 저력은 교인 전체 수에 달려 있지 않고, 골수파의 수에 달렸습니다. 가룟 유다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불행입니다. 이런 불행도 없습니다. 스승과 함께 있으며, 스승을 넘겨줄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스승과 제자 관계는 이미 깨진 것입니다. 오늘날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17절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무교절 첫날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쭈었습니다.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유월절이 어떤 날입니까? 유대인들의 최고 명절 아닙니까? 유월절을 성전에서 맞이하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그럼 유월절 식사 장소를 마련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장소만 준비하면 됩니까? 음식을 장만해야 합니다. 아무 음식이라도 걸게만 준비하면 되는 게 아닙니다. 준비해야 할 음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어린양을 잡아야 합니다.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무교병이 필요합니다. 포도주가 필요합니다. 거기에 쓴나물도 필요합니다. 또한 식사 장소를 청소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온 집안에서 누룩을 완전히 제거해야 했습니다. 유월절인데 유월절 식사에 대한 예수님의 별다른 말씀이 없으시니,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쭈었던 것입니다.
18절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예수님이 미리 생각해 두신 것처럼 보입니다. 성안 아무개에게 미리 부탁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준비성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그 아무개가 누구인지 성경에선 익명으로 되어 있지만, 제자들에게는 알려줬을 것입니다. 아니면 제자들도 아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아무개라고 익명처리 한 것은, 그 사람의 신변 보호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당시 살벌한 분위기에서, 예수님 일행에게 다락방과 유월절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아무개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께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 정도의 다락방이 있는 집을 소유하고 있고, 그 만한 유월절 음식을 제공할 정도면, 좀 사는 사람입니다. 그 아무개는 자신의 소유를 주님을 위해 썼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그의 신변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헌신하면, 주님이 어떤 식으로든 책임져 주십니다. 성경의 기록을 통하여, 오고 오는 세대에 그를 알리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한 여자와 함께,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억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주님 주위에 가난하고 병든 자들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이름 없이 자기 소유를 통 크게 헌신한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자라고 존경하고 가난한 자라고 업신여겨서도 안 되지만, 가난한 자를 정의로 부자를 불의로 여겨서도 안 됩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가난한 자와 부자의 몫이 각각 있습니다. ‘나는 가난하니까 헌신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는 ‘하나님이 나에게 물질을 주신 게 바로 이 때를 위함이다’며 헌신해야지, 흉내만 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헌신할 기회가 늘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말에 헌금통계를 보면, 살짝 시험에 들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것을 보며 ‘이 분은 하나님이 복주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분은 흉내만 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기헌금이라고 해봤자, 부활절, 성탄절에 맥추감사주일, 추수감사주일, 일 년에 네 차례 드립니다. 감사하게도 어느 한 달에 몰려있지 않고, 뛰엄뛰엄 들어있습니다. 그럼 미리 준비해서 드리면, 최선의 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 드린 것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19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제자들이 성안 아무개 집에 갔더니, 모든 게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제자들이 예수님께 순종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성경은 성안 아무개의 헌신 못지 않게, 제자들의 순종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가란 곳으로 그냥 갔을 뿐입니다. 성안 아무개가 준비해 놓은 것을 가지고, 테이블 세팅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 제자들의 순종을 높이 샀습니다. 그만큼 순종이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순종의 가치에 대해서는, 사무엘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삼상 15:22-23절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제사보다 낫다고 했고, 거역을 점치는 죄와 같다고 극단적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그만큼 순종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한해가 저물었고, 다시 한해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연초에 순종하기로 했던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잘 순종했습니까? 혹시 잊고 지내왔던 건 아닙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순종을 지체하지 않았습니까?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그냥 넘어가는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산에 정확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주실 복도 정확하게 주시지만, 당신의 몫도 정확하게 가져가십니다. 작년에는 그냥 넘어갔을지라도, 올해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계산하실 것입니다.
20-21절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유월절을 준비하다보니, 어느 새 날이 저물었습니다. 유월절 만찬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와 함께 둘러 앉으셨습니다. 주님께는 이 식사자리가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하는 최후의 만찬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자들은 평소와 다름 없는 유월절 식사자리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유월절 저녁식사는 어려서부터 해오던 거라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하신 말씀 때문에, 특별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식사하시다 말고, 다소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하마터면 먹다 체할 뻔했습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열둘 중에서 예수님을 팔 사람이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제자들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봤습니다. 얼굴빛이 점차 잿빛으로 변해갔습니다. 누가 그런 짓을,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들은 근심으로 가득하여 침묵의 수렁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22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그러다 더 이상 짓누르는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주여, 나는 아니지요?”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절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예수님은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짓더니, 손을 그릇으로 옮기며 대답하셨습니다. 자기를 팔 자를 눈 앞에 두고도, 어쩌면 그렇게 태연하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무엇을 먹기 위해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입에 뭐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혼이 빠진 멍한 표정인데 반해, 가룟 유다는 별일 없다는 듯이,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었습니다. 예수님도 대단하시지만, 가룟 유다도 만만치 않습니다.
24절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좀 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요 예정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이면 인간의 책임이 면제되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십니다. 딤전 2: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당신이 그걸 원하시면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말고를 떠나, 그대로 하시면 될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과 우리가 할 일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가룟 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결코 희생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죄로 죽은 것입니다. 자기 의지로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결과로 죽은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 이 말만은 안 들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사람들에게도 안 들어야 할 말을,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들었습니다.
25절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그러나 가룟 유다는 얼굴에 철판 깐 듯 말로 표현할 수 없을만한 뻔뻔함을 가졌습니다. 예수님한테 기절할 소리를 듣고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모습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가룟 유다의 말에 예수님도 바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다른 나머지 제자들은, 예수님 얼굴 한 번 봤다가 가룟 유다 얼굴 한 번 봤다가, 정신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요한복음 13장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그 길로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예수님이 회개하고 살 기회를 주셨음에도, 그걸 거부하고 죽음의 길을 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26절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식사가 계속 되었습니다. 주님은 떡(빵) 덩이를 손에 들더니,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떡을 주님 자신의 몸과 연관시키셨습니다. 떡을 여러 조각으로 떼심으로, 장차 자신의 몸이 찢기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27-28절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어서 주님은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번에는 포도주를 자신의 피와 연관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자신의 피라고 설명하셨습니다. 떡과 포도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29-30절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그리고는 작별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영원한 작별을 고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나라에서 다시 만날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찬 마지막에 부르는 찬송을 하며, 장소를 감람산으로 옮기셨습니다.
26-28절은 기독교에서 행하는 성찬식의 유래가 되는 말씀입니다. 26절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왜 주님의 몸을 받아먹어야 합니까? 요 6:51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만찬을 하면서 떡을 먹는 것은 뭡니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죄를 지시고 죽으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요 6:58절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27-28절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여기 잔은 뭘 의미합니까?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신 주님의 피, 곧 언약의 피입니다. 고전 10: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그리고 본문의 ‘흘리는’의 헬라어 ‘에퀸노메논’은 ‘쏟아내다’ 또는 ‘붓다’라는 의미로, 아낌없이 내어주시는 희생을 말하면서 현재분사이기 때문에, 지금도 계속해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쏟아내고 계신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쏟아내시는 피의 능력이 뭐라고 하십니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는 피라는 겁니다. 히 9:22절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창조 때부터 세우신 하나님의 법이, 피로써 정결하게 하시기 때문에, 대속의 피 없이는 사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담대하게 선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엡 1:7절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당신의 피를 뭐라고 부릅니까? ‘언약의 피’입니다.
그렇다면 이 언약의 피가 주는 능력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① 죄사함입니다. 본문 28절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② 하나님과의 화평을 가져옵니다. 골 1:20절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③ 성도간에 화평입니다. 엡 2: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④ 의롭다함을 받는 것입니다. 롬 5: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⑤ 영생입니다. 요 6:54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예수님은 이와 같이 평상시 반복해서, 이 성만찬의 의미로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살아가도록, 성만찬예식을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마음관리가 잘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마음을 잘 다스리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내 마음의 주인이면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주장하면 가능합니다. 우리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가 주장하도록 우리 마음을 주님께 내어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인류의 비겁하고 영악하고, 비루한 배신과 변명의 역사를 헤치고,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분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구원 신비를 찬양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함으로, 새생명을 얻어 영생 얻은 삶을 살고,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매일의 삶속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증거 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가룟 유다가 걸어갔던 배신자의 길을 보면서, 두 마음을 품게 될 때 언제든지 배신하여,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늘 우리 자신에게 배신자의 길과 관계없는 사람인가를 물으면서, 신앙의 정절을 지키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계시는 천성을 향하여 기쁨으로 나아가는 그날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세포 하나까지도 주님이 사용하시도록 내어드리고, 주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삶을 이루어 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면 / 마 26:31-35, 69-75
우리 인생은 크로스컨트리 트랙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크로스컨트리라는 경기 말입니다. 근대 5종 경기 중의 하나로, 오토바이를 타고, 들이나 산을 넘어 돌아오는 경기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평탄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고랑과 깊이 팬 도랑, 수많은 장애물과 언덕들이 있습니다. 그곳을 통과하다보면, 급커브길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점프를 해야만 넘어갈 수 있는 길도 만납니다. 과정 중에는 진흙탕 길도 있고, 돌작밭 길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처박히기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잘해서 선수가 되었는데도,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는데,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평탄한 길만 있으면 좋으련만, 우리를 좌충우돌하게 만드는 일이 많습니다. 때론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기도 하고, 때론 질병으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무기력함에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하나님을 원망해 보기도 합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엄청난 시련을 주십니까?” 마치 나만 이런 어려운 곤경에 처한 것처럼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적으로 산 분들도 알고 보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 분들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승리한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강한 자기 확신이 있다고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실패한다는 것 자체보다는 ‘어떻게 실패를 딛고 일어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사도 베드로는 좋은 예가 됩니다.
자기 확신은 필요합니다.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확신이 없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확신은 자기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의 힘은 이 세상 그 어떤 힘보다 강합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은 대체로 긍정적이고 부지런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반드시 해내겠다는 신념이 있고,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확신은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공동체를 이끄는 리더라면, 자기만이 아닌 공동체에도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확신은 양날의 검과 같습니다. ‘확신이 강한 사람’이란 제목에 나오는 글의 일부입니다. ‘자기 멋대로 행복해 하면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강하기 때문에 참 난감하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스스로 자기가 옳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최상석 신부의 ‘여지와 겸손이 있는 자기확신’이란 제목의 글을 소개합니다. “자기 확신은 여지(餘地)를 갖고 있어야 한다. 여지는 본래 남은 땅을 의미한다. 또는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희망을 여지라고 한다. 집이나 방에도 여지가 있다. 여지가 있기에 창고가 들어서기도 하고, 물건들을 들여 놓을 수도 있다. 우리의 생각이나 주장에도 ‘여지’가 있어야 한다. 내 마음 안에 어제와 다른 생각, 다른 사람의 생각, 나와 다른 반대 의견, 다른 사람의 진심어린 충고 등이 들어와 있을 마음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자기 확신은 자기만, 자기네만 옳은 확신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을 무시한다. 내 생각 내 주장을 절대적 진리로 내세워 전혀 굽히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여지가 있는 자기 확신은 내 생각만 맞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 기울인다. 세상에서 나만 옳은 사람이 아니라, 너도 옳을 수 있다고 여기며 살게 한다. 나만이 ‘옳음’을 독점할 수 없으며, 옳음은 누구도 독점할 수 없다. 그게 겸손한 자기 확신이다.”
“여지가 있는 자기 확신”, “겸손한 자기 확신” 진심으로 동의가 됩니다. 아니 진심으로 동의 안 할 수 없습니다. 자기 확신에서 여지가 없으면 피곤합니다. 자기는 바르게 산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삶에 여유가 없습니다. 인생에 여백이 없습니다. 촉박한 삶, 쫓기는 인생을 삽니다. 그러니 행복은 남의 얘기입니다. 행복은 사치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은 스스로를 진리인 줄 착각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인 것은 맞지만, 우리가 진리 자체일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예수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확신을 하지 말고, 예수 확신을 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확신하면 허망한 미래가 찾아옵니다. 이단과 사이비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허망한 미래를 맞게 됩니다. 진리가 아니라도 그럴듯해 보일 수 있습니다. 진리로 둔갑한 가짜가 더 진짜 같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단에 빠지고 사이비 집단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진리입니다. 오직 예수만 진리로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직 예수만 진리로 믿는 사람이 모인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자기 확신이 아니라 예수 확신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한 주를 보내고 계십니다.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으로서 겪어야 할 모든 것을 체휼하시고, 십자가를 앞두고 계십니다. 주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기에, 유월절에 죽임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명의 길을 가셔야 하지만, 제자들이 걱정이었습니다. 더구나 자기를 파는 제자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게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이었기에 미리 준비해두셨습니다. 제자들이 물어서 대답하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예수님은 그때 부랴부랴 준비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리 성안 아무개에게 부탁해 놓았습니다. 제자들이 가서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뜻깊은 자리에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제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확인을 했습니다. “주여, 나는 아니지요?” 가룟 유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예수님은 그의 질문에 대답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가룟 유다는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지 않고 떠나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은 가룟 유다가 빠진 채 진행되었습니다. 늘상 해오던 유월절 식사입니다. 매년 먹어왔던 빵이고 포도주였습니다. 그런데 그 빵과 포도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는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유월절 식사의 전통대로 그 순서의 마지막은 찬송하는 거였습니다.
31절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식사 시간에 못다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충격 2탄을 터트리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아니 이게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까 식사자리에서도 이상한 말씀을 하셔서, 가룟 유다가 기분 나빠서 나가버렸는데. 오늘 예수님이 뭔가 이상합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어떤 일이, 예수님한테 생긴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말씀을 이어갔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번에는 성경까지 인용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로 번역된 말씀을 직역하면, “너희가 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입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하면, 모든 책임이 제자들에게 있습니다. 스승이 가장 힘든 상황에서, 자기 살겠다고 스승을 버리고 도망가는 못된 제자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다 나 때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이 실족했을 뿐이라고 감싸 안으셨습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자기를 버릴 제자들마저도, 사랑하여 감싸 주시는 주님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요 13: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왜 예수님이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는 가룟 유다에게, “네가 말하였도다” 대답하심으로, 마지막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팔아넘긴 가룟 유다를 자기 사람들 안에 포함시키셨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를 이 예배의 자리에 있게 했습니다.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이란 복음성가입니다.
‘생명과 바꾼 주의 사랑을 잊지 않게 하소서. 나를 위해 흘렸던 주의 눈물 잊지 않게 하소서. 주의 긍휼과 주의 선하심 내가 묵상하오니, 내 영혼 위해 베푸신 주의 은혜 잊지 않게 하소서. 감사합니다. 주님, 고맙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 눈물 때문에, 주 앞에서 예배합니다.’
32절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제자들은 평소와 다른 예수님 때문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습니다. 아니 또 이건 무슨 말씀입니까?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말씀하지를 않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하시지를 않나. 그런데 또 느닷없이 32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전에도 몇 차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가, 제 삼일에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동안은 그런 말씀을 안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비슷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전의 말씀에 비해 진전된 게, 부활하신 후에 어디로 갈 것인지, 그 행선지까지 밝히셨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실망하여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해서 갈릴리로 갔다가,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제자로서 새 출발을 했습니다. 말씀을 기억하고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들다면,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나 싶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말씀입니다. 말씀을 얼마나 붙드느냐, 아니 말씀에 얼마나 붙들리느냐에서 신앙의 질이 결정됩니다.
올해는 말씀을 더 가까이 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다 보면 말씀을 기억할 수 있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게 가능해지리라 믿어서입니다. 물론 성령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는 한 수레의 두 바퀴처럼 같이 가야 신앙의 균형이 잡히고, 그럴 때 건강한 신앙이 됩니다.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베드로가 이런 말을 듣고도 의외로 진중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워낙 분위기가 무거워서였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하지만 이 말에서는 사나이 베드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야 말았습니다.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가 어떻게 폭발했습니까?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버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 대단한 결의를 보였습니다.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하고, 자기 자신만 결의에 차면 될 일을,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얼마나 기분 나빴겠습니까? 나이 상으로 보나 헌신도로 보나, 베드로에게 따지고 대들 수는 없겠지만, 속으로는 아닙니다. 잠시 후면 드러날 것도 모른 체 호언장담하는 베드로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그렇게 말할 때 예수님이 빙긋이 웃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뭐 꼭 이렇게까지 꼭 집어서 말씀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이 말씀은 사나이 베드로의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됩니다. 베드로가 비록 말이 앞서서 실수도 많았지만, 그래도 뚝심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나이 의리’ 하나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을 꼭 찍어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는 말씀을 들으니,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베드로는 더 강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35절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보통 결의가 아닙니다. 새끼손가락이라도 물어뜯어, 당장 혈서라도 쓸 기세입니다. 무엇보다 그건 진심이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덩달아 그와 같이 말했습니다. 아마 분위기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혼자 가만히 있으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는 자기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자기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결의를 다짐하는 것 좋습니다.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각오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도움 없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불과 몇 시간 후에,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지나친 자기 확신으로, 더 크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끌려가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어떻게 될지 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처럼 살겠다고 도망쳤습니다. 한참을 도망치다가, 문득 ‘아,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예수님이 무지막지하게 붙들려가셨는데,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깥뜰에 앉아 주위를 관망하고 있었습니다.
69절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그런데 한 여종이 베드로에게 다가오더니, 위아래를 훑어봤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이 애가 왜 이러나’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고, 자기를 확인하는 것 같았습니다. 베드로는 속으로 ‘설마 무슨 일 있겠나’ 싶어, 애써 태연한 척 했습니다. 그때 그 여종이 치명적인 말을 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70절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베드로는 반사적으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어떻게든 살고봐야겠다.’ ‘이러다가 나도 죽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을 거 같지는 않습니다. 자기 신분이 들통났다는 두려움에, 반사적으로 그랬을 거 같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잠입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날이 추운데 마침 모닥불이 있어 곁에 가서 쬐고 있었습니다. 모닥불 빛에 자기를 알아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썰미가 좋은 여종이, 자기를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자 이런저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자기보호본능이 작동된 것입니다.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71절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는 계속 그곳에 있다가는 문제가 될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앞문으로 옮겨갔습니다. 앞문은 바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칫하면 바깥으로 도망갈 심산이었습니다. 그리고 앞문은 모닥불과의 거리가 떨어져 있어, 불빛이 그곳까지는 비취지 않습니다. 그럼 자기를 쉽사리 알아보기 힘들 거라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엄습해오는 두려움으로 몸을 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빌었습니다. ‘제발 더 이상 날 따라오는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 잠시 후 자기에게 한 여종이 가까이 오더니, 확신 있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72절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베드로는 이번에는 단호한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인하는 강도가 좀 더 세졌습니다.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더 이상 물어보지 말라는 강경한 어조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마치 주님이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하실 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하는 어조였습니다. 베드로는 여종을 향해 목소리는 높였지만, 상대적으로 자기 확신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73절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베드로를 수상쩍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앞문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여종에게 강경하게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목소리가 높아져, 저만치 떨어져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들렸던 모양입니다. 몇 사람이 베드로에게 다가왔습니다. 순간 베드로는 숨이 멎을 것만 같았습니다.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아뿔싸, 갈릴리 말투가 튀어나오고 말았습니다. 지방 사람이 서울에 올라가서 몇 년 살다보면, 서울말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급한 일이 생기거나 당황하게 되면, 고향 말투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3년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말투가 순화되었다고 해도, 그런 긴박한 상황이었으니, 갈릴리 말투가 불쑥 튀어나올 수밖에요.
74절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번에는 더 강력한 맹세가 필요했습니다. “저주하며 맹세하여” 처음에는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인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점점 예수님을 부인하는 강도가 강해졌습니다. 처음에 부인했을 때 “아 그러냐고,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 넘어갔으면, 맹세하며 부인할 필요도, 저주하며 부인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 세 번 묻게 되고, 그때마다 신변 위협에 대한 공포가 더해졌습니다. 베드로가 저주한 내용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었던지, 복음서 기자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저주 뒤 맹세한 내용만 기록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때 마침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확신으로 시작했던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시간 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다가, 닭울음소리 듣고 말씀이 생각나, 통곡의 자리에 서고 말았습니다. 이게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자기 확신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확신은 위험합니다.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면 넘어질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에 꼭 필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는 자기 확신은 독선에 빠질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이 아닌 예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영혼을 보게 하는 소리, 우리를 깨닫게 하는 소리가 필요합니다. 오늘도 닭이 우는 소리는 우리를 향하여 들려옵니다. 우리가 당하는 사건을 통하여, 환경을 통하여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 시간 베드로의 심금을 울렸던 닭의 울음소리가, 우리 심령에도 분명히 들려지게 하옵소서. 그 소리는 영적인 교만을 깨뜨리는 소리,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소리, 새로운 삶을 살도록 다짐시키는 소리이오니, 부디 닭의 울음소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이 생각나게 하옵소서. 주님을 말과 행동으로 부인하고 살아가던 자신을 발견하여 철저히 회개함으로, 다시 쓰임 받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실망과 좌절을 하게 되더라도, “다시 시작하라”는 복음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연약한 인간의 자기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에 의지하여, 삶 속에서 예수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하면 결국 승리한다. / 마 26:36-46
만일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면, 이 세상 가운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욕심으로 구한 기도까지도 하나님께 응답해 주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2003년 짐 캐리가 주연한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브루스는 뉴욕 버펄로 지방 방송국의 뉴스 리포터였습니다. 그는 재미있고 소박한 이웃들의 얘기를 단골로 맡아, 재미있는 입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리포터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별볼일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곧 은퇴할 앵커의 후임이나, 적어도 극적인 사건의 현장을 전하는 것이 그의 꿈이었습니다. 이런 브루스는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삶이 불만이었고, 그는 쉴새 없이 신에게 불만을 쏟아 놓았습니다. 이렇게 불만 가득한 브루스에게, 어느 날 신이 나타나서 내 대신 이 세상을 잘 다스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브루스는 잘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신은 브루스에게 두 가지 조건 하에 전지전능한 능력을 주면서, 세상을 잘 이끌어보라고 합니다. 그 두 가지는 아무리 전능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움직일 수가 없고, 또한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꼭 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한 능력을 받아 신이 된 브루스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릅니다. 정말 마음먹은 대로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꽉 막힌 도로에서 마음만 먹으니까, 차들이 다 비키면서 길을 만듭니다. 날씨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사랑하는 애인을 위해 달도 가까이 당겨 올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앵커의 자리까지도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날마다 브루스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밤만 되면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데, 가만히 들어보니까 사람들이 기도하는 소리였습니다. 신이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기도를 들어보고 응답해주는 일인데, 브루스는 이 일이 귀찮아서, 모든 기도제목들을 컴퓨터에 입력을 시키고는, 모든 기도에 yes라고 대답을 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난리가 났습니다. 복권 1등 당첨자들이 쏟아지고, 대학은 정원이 초과됐으며, 도시에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든 다 응답해 주시면, 인간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신다면, 세상이 난리가 나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원함은 좋은 것도 있지만, 악한 것들도 많습니다. 성도들이 기도하지만, 욕심으로 기도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면, 이 세상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성당 홈페이지에 실린, 기도문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굴곡 많던 한 해를 돌이켜보며 감회에 넘쳐 기도를 드립니다. 아프고 피곤할 때 용기를 주시고, 괴롭고 외로울 때 소망을 주셨고, 일을 주셔서 보람을 갖게 하시며, 가족을 지켜 큰 사고 없게 하시고, 고통 속을 헤엄치면서도 아주 빠지지 않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머리 둘 곳 없었던 주님에 비하면 난방된 집에 편한 잠자리가 있었고, 외롭게 배신당한 주님에 비하면 못 참을 만한 악당도 없었으며, 비난 속을 사신 주님에 비하면 가끔 칭찬도 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가시관을 쓰신 주님에 비하면 아픔다운 아픔도 사실 없었고, 십자가다운 십자가도 지지 않아 감사하기도 하지만 부끄럽습니다. 욕심이 채워지지 않음을 불평했고, 마음대로 안 된다고 중얼거렸으며, 내가 중심이 못 됨을 한탄하고 내 비위 안 맞춰줌을 비난했으며, 이해하기보다 비판이 앞섰고, 덮어주기보다 들추기를 즐겼으며, 싸매주기보다 아픈 데를 건드렸고, 별 것 아니면서 잘난 척한 것들을 다 용서해 주옵소서. 내 인생에 폭풍이 있었기에 주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며, 가끔 십자가를 지게 해주셨기에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었음을 감사합니다. 이익에도 감사하고 손실에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덤의 공평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환영해 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공격해 온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를 더 너그러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때때로 가시를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잠든 영혼을 깨워주셨습니다. 한숨과 눈물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행복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실수와 실패에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약할 때 강해지는 진리를 터득하게 하셨습니다. 날마다의 평범한 생활 속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36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마친 예수님은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그 장소는 겟세마네였습니다. 30절에 의하면 감람산으로 나아갔습니다. 겟세마네와 감람산은, 사실상 같은 장소로 봐도 무방합니다. 겟세마네가 감람산 기슭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를 찾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이별할 시간 역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일분 일초도 허투루 보내서는 안 되는 금쪽같은 시간입니다. 주님은 그 귀한 시간을, 기도하기 위해서 겟세마네를 찾으셨습니다.
기도는 할 일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한가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시간 남아도는 사람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시간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해도 되는 옵션이 아닙니다. 기도는 시간이 없으면, 시간이 나지 않으면,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합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옵션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때론 기도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도도 좀 쉬어가면서 해도 될까요? 기도하기 싫을 때가, 가장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혹 ‘내가 요즘 기도가 잘 안 된다.’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아는데, 기도의 자리가 피해진다.’ 그러면 신앙의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누군들 기도가 잘 될 때만 있겠습니까? 기도야말로 버티는 것입니다. 기도로 버티다보면 뭐가 돼도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손쓰실 때까지 버티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기도의 손을 들고 버텼습니다. 엘리야는 가뭄 중에서 비오기를 위해, 기도의 무릎으로 버텼습니다. 기도로 버텨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이번에 겟세마네를 처음 찾으신 게 아닙니다. 눅 22:39절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은 감람산을 찾는 게 습관이었습니다. 주님은 기도할 일이 있을 때마다, 습관적으로 감람산을 찾았던 것입니다. 기도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기도를 위해 시간을 정해놓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를 위해 장소를 정해놓는 것도 좋습니다.
하워드(Haward) 장군이 미국서부해안지구 사령관으로 취임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수요일 저녁에, 그의 영예를 축하하는 환영 만찬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여러 곳에 초대장을 보냈고, 미국 대통령까지 축하 전문을 보내왔습니다. 그들은 장군을 깜짝 놀라게 해주기 위하여,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 그에게 알리기로 했습니다. 친구들은 모든 준비를 마친 후, 장군에게 이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하워드 장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안하게 되었네. 수요일 저녁에 다른 약속을 이미 해두었네.” 친구들은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아, 이 날은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석할 텐데, 그 선약을 취소할 수 없겠는가?” 장군은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 수요일 밤 기도회 시간에 꼭 주님을 만나 뵙겠다고 주님과 약속했다네. 어떤 것도 이 중요한 약속을 깨뜨릴 수 없다네.” 장군의 친구들은 할 수 없이, 만찬회를 하루 연기해야만 했습니다.
중국선교에 일생을 바친 영국의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가,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일생을 사역자로 보낼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행복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제 헌신과 행복의 비결은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연주자는 음악회가 시작되기 전 악기를 조율합니다. 음악회가 끝난 뒤 조율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겠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새벽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맞추는 일부터 합니다. 그러면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최고의 습관은 기도의 습관입니다. 습관은 길러지는 것입니다. 습관은 조금씩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맘만 먹는다고 바로 습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기도, 며칠은 할 수 있습니다. 새벽기도의 묘미는 매일 그리고 평생에 있습니다. 새벽기도하는 것은 매일 도 닦는 것에 비견됩니다. 그런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은 믿을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힘들 때 기도의 장소를 찾았고, 세 제자를 뺀 나머지 제자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기도할 때 옆에 앉아만 있어줘도 힘이 납니다. 자리라도 채워주는 게 어디입니까? 주님도 제자들에게 큰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내가 기도할 동안 여기서 기도해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기 앉아만 있어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세 제자만 데리고 좀 더 가셨습니다.
37-38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좀체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지 않았던 주님이십니다. 그게 리더의 힘든 점입니다. 자신은 따르는 자들의 힘든 점을 다 듣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힘든 점은 드러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주님이 자신의 고통스런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셨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주님은 자신이 십자가를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적 고뇌로 힘들어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심적 갈등이 극에 달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우리도 이런 말을 흔히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런 고민이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어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진 못할지언정, 배부른 돼지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고민할 줄 모르는 배부름보다, 고민할 줄 아는 배고픔이 낫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민이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를 따르는 우리에게 고민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천국에서,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살고자 하면, 고민은 피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그 고민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입니다. 그 고민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입니다. 주님은 깊은 고민, 죽을 정도의 고민 가운데, 기도를 선택하셨습니다. 아무리 잘 믿어도 고민은 있습니다. 끝까지 잘 믿는 비결은 딱 한 가지입니다. 고민 중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고민을 끌어안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중에 버마(미얀마)로 가서 선교사로 일한 미국의 아도니람 저드슨이, 인도에서 일하고 있던 영국의 위대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를 1812년에 방문하였습니다. 저드슨은 캐리 선교사와 정원을 함께 거닐면서, 캐리 선교사의 헌신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캐리 선교사는 세 차례에 걸쳐 살해당할 뻔했고, 인도 정부의 갖은 선교 방해를 받았으며, 수고와 땀으로 이룩해 놓은 원고와 인쇄 도구들과 서류들이 거의 다 불타 버리는 화재를 경험했었습니다. 저드슨은 어떻게 이러한 수많은 역경들을 견디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 그 용기와 믿음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캐리 선교사는 저드슨을 안내하여, 정원의 한 편 구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여기가 바로 나의 예배 장소이자, 기도와 묵상의 자리입니다. 이 자리가 없었다면, 나는 계속해서 닥쳐온 고난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매일 새벽 5시마다, 이 자리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주님은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교회를 통해 기도의 자리를 마련하게 하시고, 먼저 와 기다리십니다. 그걸 알면 우리는 기도의 자리로 달려올 수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달려오는 사람이, 가장 복된 성도입니다. 주님이 세 제자에게 뭐라고 부탁하셨습니까?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여덟 명의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씀과는 사뭇 뉘앙스가 다릅니니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여기 앉아 있으라”와 “여기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의 차이입니다. “앉아 있으라”는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에 가깝고, “깨어 있으라”는 말은 기도하고 있으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주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세 제자만 함께 하셨고, 그들에게 기도로 도와달라는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39절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부탁하시고, 주님은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주님의 기도 폼이 나옵니다.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기도의 모습은, 서서 두 손을 들고 하거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앞에 절대 복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주님은 기도의 자세를 통해, 벌써 아버지 앞에 절대 복종의 의사를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심적 갈등까지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도 인성을 가졌기에 두 마음이 있었습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마음과, 십자가가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주님께도 두 마음이긴 했지만, 무게 중심은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기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런데 우리는 그 정도의 수준이 안 됩니다. 그래서 안갯속을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럼 인생의 안갯속에, 우리가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안개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안개에는 미로도 없습니다. 안갯속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하나님이 안개를 걷어주시는 것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안갯속에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바로 보지 못합니다. 자기 사명을 바로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알 때, 안갯속을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한 증기선이 카나다의 뉴펀들랜드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는데, 바다에는 안개가 많이 끼어, 배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선객이 선장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선장님, 저는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때까지 그 곳에 배가 도착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저는 평생 동안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지금으로서는 도리가 없군요.” “그러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선장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난데없이 기도를 하자는, 이 사람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보세요!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지 안보이십니까?” 그러나 그 선객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을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안개를 5분 내에 걷어주옵소서. 하나님이 저를 위해 만들어 놓으신, 퀘백에서의 약속을 아시지 않습니까? 바로 돌아오는 토요일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안개가 걷혔습니다. 그 기도의 주인공이 바로 조지 뮬러였습니다. 안갯속에서도 기도하는 사람이 진짜입니다. 인생의 자욱한 안개로 인해 답답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놈의 안개는 언제쯤 걷히려나...’ ‘무슨 안개가 어떻게 한 치 앞도 안 보이는지...’ 인간의 힘으로는 안개를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안개를 걷으실 수 있습니다. 그걸 안다면 안갯속에서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40절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주님은 기도를 마치고 세 제자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때 세 제자는 자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얼마 전 뭐라고 했습니까? 마 26:35절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주와 함께 죽겠다고 각오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자고 있습니다. 깨어 있어 기도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길게 기도하고 오신 것도 아닙니다. 한 시간 남짓입니다. 주와 함께 죽겠다고 한 사람들이,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게 연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세 제자도 연약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곤히 잠든 제자들을 측은히 여기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며 최소한 갖춰야 할 것을 생각해 봅니다. 하루 한 시간은 주님과 함께 깨어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자기 영혼을 위한 한 시간 기도라고 봅니다. 내 영혼이 살기 위해서 최소 한 시간의 기도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비롯한 중보기도까지 하려면, 2-3시간은 필요합니다.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지만, 자기 영혼은 방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영혼에 잡초가 우거지는 것을, 본체만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들 “나는 아니지요?” 하는 표정입니다. 자기 영혼을 위해 하루 한 시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거운 마음으로 대답하겠습니다. “네가 말하였도다.”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자기 영혼을 위한 하루 한 시간 기도는 건너뛰지 않아야 합니다.
41절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어차피 시험은 있습니다. 시험이 있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시험에 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게 주님이 제시하신 답입니다. 마음이야 원하지요. 문제는 육신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는 마음 먹기에 달렸습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면 그대로 됩니다. 그럼에도 시험에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육신이 약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약한 육신을 깨어 기도하는 것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육신은 한없이 편해지려고 합니다. 뛰면 걷고 싶어지고, 걸으면 서고 싶어집니다. 서면 앉고 싶어지고, 앉으면 눕고 싶어집니다. 우리 육신은 도무지 만족이란 것을 모릅니다. 육신을 그대로 두면 타락과 방탕에 빠지게 됩니다. 비록 육신이 약하지만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약한 육신을 이끌고, 어떻게든 깨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나 제자들이나, 약한 육신을 갖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시험을 이겼고, 제자들은 시험에 들었습니다. 그 차이는 깨어 기도하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42절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주님은 약한 육신을 이끌고,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육신만 약한 게 아닙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좋은 컨디션으로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몸도 마음도 컨디션이 좋으면 기도가 더 잘 됩니다. 그런데 어디 우리 심신의 컨디션이 늘 좋기만 합니까? 아주 엉망일 때도 있습니다. 이 피곤한 몸으로 교회 가봤자 뻔히 졸다가 옵니다. 이 심란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가봤자 기도 제대로 안 될 게 뻔합니다. 그래도 그 몸으로라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0분 기도하고 50분 자다가 오더라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라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50분 기도줄 못 잡고 헤매다가, 10분 기도하다 오더라도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게 왜 부끄러워 할 일입니까?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건 절실함입니다. 절심함이 그런 기도를 가능하게 합니다. 기도에 있어 우리는 무엇보다 절실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43절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주님이 두 번째 기도를 마치고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고 있었습니다. 피곤함을 이기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주님께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44절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그런 제자들을 뒤로 하고, 주님은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셨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첫 번째와 두 번째와 동일했습니다. 결론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내 원대로 되기를 위해, 피땀 흘려 기도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위해, 그토록 기도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사실 우리의 모든 기도의 결론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기도로 승리하셨습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승리 이전에, 이미 겟세마네 기도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내 뜻을 꺾는 것입니다. 기도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기를 부인하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요, 그래서 기도를 통해 죽은 나를, 하나님께서 응답을 통해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수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이기에 값진 기도입니다.
45-46절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주님은 땀으로 흠뻑 젖은 몸으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해 나지막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있습니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 잠들어 있었던 제자들의 앞날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면 결국에는 승리합니다. 승리는 결국 기도에 달렸습니다. 믿음의 승리자치고 기도를 게을리 한 사람은 없습니다. 올 한해 기도하므로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그리스도인의 만족과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얻는데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사는 삶이 가장 가치있고 복된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에, 십자가가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므로, 마침내 하나님 오른편에 앉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은 지금 실망하고 있는 우리들, 연약하기만 우리들에게 찾아오시고 깨우시며, ‘나와 함께 가자’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지금도 여전히 신뢰를 보내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 마 26:47-68
편이란 단어는 ‘쪼가리’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나누다, 가르다, 쪼개다’ 이런 느낌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정치는 이런 편가르기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넌 누구편이야?’ 이 말은 이태원 참사의 국정조사에서도 나왔습니다. 편 가르기는 한국 정치문화입니다. 네 편 내 편, 편 가르기에 온 국민이 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 의견만 중요하고, 그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편 가르기는 한국 직장문화에도 만연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 등 줄서기와 파벌이 판을 칩니다. 편 가르기는 국가, 인종, 지역, 계층, 세대 간에 일어납니다. 이민, 난민 문제로 국가 간 고립주의가 부활하고, 정치권의 편 가르기는 나라를 망칩니다. 한국 사회는 편 가르기가 유독 심합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진보와 보수, 금수저와 흙수저 논쟁으로 과열되고, 남녀갈등·세대갈등·인종차별‧빈부격차 등으로 나라가 어지럽습니다. 지역감정과 집단이기주의도 팽배합니다. 편 가르기는 사람 모인 곳이면 어디나 일어납니다. 삶이 피폐하고, 먹고사는 게 힘들면 더욱 심해집니다. 편 가르기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편 가르기에 익숙합니다. 운동회에서 청군‧백군이 나뉘어 싸웁니다. 우리 편이 이기면 기쁘고, 상대편이 이기면 화가 납니다. TV에서 축구경기를 보며 열광합니다. 우리 편이 지면 슬프고, 상대편이 지면 신납니다.
경기장에서 시합 전에 무릅 꿇고 기도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축구에서 골을 넣고 기도하는 선수들이 있습니다. 가끔 목회자들이 모여서 축구를 합니다. 경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상대편 선수들과 인사를 합니다. 인사를 나눈 후에 빙 둘러서 파이팅을 외칩니다. 이때 어떤 믿음 좋은 목사님이 “자, 기도합시다. 기도해야 이깁니다”라고 해서, 거기서 누가 “에이 하지 마요” 할 수 없어서 기도를 했습니다. 상대팀도 목사님들인데, 괜히 하나님 곤란하게 해드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 되실까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의 편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사는 자의 편입니다. 이런 사람의 기도는 다릅니다. 자기 욕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대로 살아갑니다.
유럽에 가면 도시마다 중세 성주들이 살던 웅장한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의 중심에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채플(chapel)이 있습니다. 당시 성주들은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느라 자주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럴 때면 그들은 먼저 승리를 기원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 편을 들어주실까요? 강자 편일까요, 약자 편일까요? 기도를 많이 한 자 편일까요, 적게 한 자 편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긴 자 편일까요?
재미교포 청년 자매가 미국의 외교관 시험에 응시했는데, 어려운 필기시험에 무사히 합격했습니다. 마지막 관문으로 면접시험을 보는데, 면접관들 앞에 앉아서 이런 저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주 난감한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한국계 미국인인데, 혹시 외교관이 되어서 미국과 한국의 국익이 상치되는 경우에 봉착하면, 어느 편에 서서 일하겠습니까?” 그때 그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저는 한국 편에 서서 일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미국 편에 서서 일하지도 않을 겁니다. 저는 크리스천으로서 정의의 편에 서서 일할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과 한국의 국익을 동시에 충족시킬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 자매는 합격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미국 편에 서겠다고 하여, 면접관 비위를 맞추면 좋을 듯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정의 곧 하나님 편에 서겠다고 대답했을 때, 오히려 면접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그 자매는 면접에서 떨어질 각오를 하고, 그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평소 생각하고 있던 바를 대답했던 것입니다. 평소 가지고 있던 신앙적 가치관을 따라 대답했던 것입니다. 그게 면접관들을 감동시켰고, 직책을 잘 감당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국경도시인 펠드리히시가,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럽을 휩쓸던 프랑스 군대가 그 도시를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고지에서 진지를 구축한 채 명령을 기다리고, 펠드리히시로 쳐들어갈 때였습니다. 이때 펠드리히시 의회는 비상회의를 소집하여서, 서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있었는데, ‘싸우다가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굴욕적이긴 하지만 항복하고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회의에 참석한, 그 도시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이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정대로 종을 치고 예배를 드립시다. 우리 힘으로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께 나머지 일은 맡기고 예배를 드립시다.” 그래서 각 교회당마다 종소리를 우렁차게 울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폴레옹 군대는 그 종소리를 듣고 지원군대가 온 것인 줄 알고, 공격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서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펠드리히시 사람들은,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원해주실 거라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부활절이니 당연히 예배를 드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나폴레옹 군대로부터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계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 편에 섰을 때, 얼마나 이득을 보고 얼마나 손해를 보느냐를 주판알 튕기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기 위해, 희생까지도 각오할 뿐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은 에이브러햄 링컨입니다. 그는 노예해방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동족끼리의 전쟁도 감수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1861년부터 65년까지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당시 인구의 3%에 해당하는 103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전사자만도 62만명에 달했습니다. 처음에는 링컨이 속한 북군이 남군에게 맥없이 밀렸습니다. 남군에 있는 로버트 리 장군 때문이었는데, 그는 아주 탁월한 전략가였습니다. 그래서 계속 북군을 괴롭혔고, 남군은 여러 전투에서 북군에 승리했습니다. 보좌관 중에 유머를 잘하는 사람이, 이렇게 대통령에게 말했습니다. “대통령님, 요즈음 하나님께서 곤란하실 것 같습니다. 북쪽에서는 북쪽이 승리하도록 열심히 기도하고, 남쪽에서는 남쪽이 승리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니,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고, 누구 편에 서야 하실지 난처하실 것 같습니다.” 링컨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난처하실 것 하나도 없지. 하나님이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누구의 편에 서는가가 문제가 아니고, 누가 하나님 편에 서는가가 문제일세. 하나님 편에 서는 편이 반드시 승리할 것일세.” 링컨은 이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암살당했습니다. 노예제도 폐지를 주창하면서, 늘 암살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링컨은 평소에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만약 내가 암살자의 손에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나는 분명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때까지 ‘나의 의무’를 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 선 자는, 하나님 뜻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의무를 다합니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한 후에, 결과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런 사람은 슈몰크 목사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찬송가 549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선 자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 4:15절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사는 것만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사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잘 살면 됩니다. 죽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잘 죽으면 됩니다.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를 따로 데려가면서, 자신의 솔직한 심경을 밝히셨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예수님 역시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에 고민이 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게 사명인줄 알지만 고민까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명이냐 사명이냐의 고민은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사명이 생명보다 중요하다. 사명을 위해 생명이 존재한다’라고 하지만 막상 사명과 생명, 이 둘 사이에 서면 고민이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고민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도의 자리로 나가셨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사명 앞에 고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고민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고민으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민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고민을 안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 철저히 자기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셨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은 피땀 흘려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피곤을 이겨내지 못했습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동안에,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부탁을 받았지만, 그들은 졸다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는 책망을 듣고도, 몸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기도해야 할 때, 자기 의지만 믿고 기도하지 않아서였습니다.
47절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님의 기도가 끝나자 가룟 유다가 다가왔습니다. 타이밍이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은 타이밍 조절의 귀재이십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중에, 그들이 들이닥쳐 예수님을 체포했다면, 영 폼이 안 날 뻔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당부를 마친 후에, 그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비무장한 주님을 잡으려고,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큰 무리가 왔습니다. 약 200명 정도입니다. 성전경비대가 총동원된 것으로 보입니다. 은 삼십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를 이렇게 지칭합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 욕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끝까지 열둘 중의 하나였다고 해줍니다. 그가 비록 지금은 종교지도자들 편에 가담하여 있지만, 본래는 예수님 편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걸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녹아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자기를 따라다니던 제자가, 종교지도자들의 앞잡이가 되어 자신을 잡으려고 왔을 때, 예수님은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은 그의 영혼을 생각하니, 너무나 너무나 안타까우셨습니다.
48절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다는 자기 일을 했습니다. 군호를 현장에 와서야 짰습니다. 그들이 일을 얼마나 급하게 진행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지도자들 입장에서는 애가 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입술이 타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명절을 앞두고 시간적으로 무리인줄 알면서도, 일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 예수님과 제자 열한 명 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일지 알아볼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굳이 유다가 군호를 짰습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대낮이 아닙니다. 아무리 횃불이 있지만 식별이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인줄 잘못 알고 잡으려고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대충 짐작이 됩니다.
49절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유다는 천연덕스러웠습니다. 유월절 식사 때 자리를 박차고 나갔던 그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한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인사를 건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리고는 예수님께로 다가와 입을 맞췄습니다. 군호를 짠 그대로 행했던 것입니다. 군호를 통해 자신들이 잡아야 할 예수가 누군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급히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비무장이었기 때문입니다.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예수님은 유다를 뚫어져라 쳐다보시며, 사실상 그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배신자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배은망덕한 자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자신을 향해 친구여 할 때, 유다의 양심이 요동쳤을까요, 아니면 미동도 없었을까요? 미동도 없었다면, 화인 맞은 양심이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더 이상 예수님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습니다. 그때 무리들이 예수님한테 나아가 붙잡았습니다. 그때 갑작스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51절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예수님의 제자 중 칼을 준비했던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 떨어뜨린 것입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평화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순순히 체포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러면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잘못하면 제자들도 다 끌려가게 됩니다. 이건 전혀 예수님이 원하시던 그림이 아닙니다.
52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예수님은 서둘러 사태를 진화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 제자 입장에서는 억울할 일입니다. 전에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눅 22: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검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제자는 ‘검을 준비하란 것이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칼을 휘둘렀습니다. 너무나 순간적으로 일어났기에 누가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성전경비대는 흥분했고, 칼을 휘둘렀던 제자는 움찔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태도가 중요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상황에서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상황이 진전될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칼을 휘두른 제자를 나무라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그리고 잘린 귀를 붙여주셨습니다. 눅 22 :50-51절 ‘그 중의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53절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은 무력해서 잡히신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어떤 군대보다 강력한 군대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늘의 천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면, 열두 군단 더 되는 천군을 부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자인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뜻을 보여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 편에 선 자의 삶입니다. 이건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내가 힘이 없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아니 참을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지만 내가 힘이 있는데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참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힘이 있는데도, 교회의 덕을 위해 참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 편에 선 자의 삶인 것입니다.
54절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예수님이 12군단이 되는 천군천사를 동원할 수 있었지만, 참으셨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력해서도 아니고, 숙명으로 받아들여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자기를 잡으러 온 사람들에게 적극적 저항을 하고, 인간적인 충동으로 사태를 뒤집어엎었다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은 문제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늘 생명 걸어야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결정적인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기 위해 내 생명을 걸어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는, 자기 생명보다 더 큰 것을 걸어야 했습니다. 바로 자기 아들을 희생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급히 말리시지 않았다면, 그대로 드렸을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편에 선 자가 갖춰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 편에 선 자는 환경이 아닌 말씀을 봅니다. 상황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55-56절 ‘그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잡는 무리들을 향해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들도 자신들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물어서는 안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암묵적으로 불의에 가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편이 아닌 종교지도자들 편에 서 있었습니다. 혹시 이들 중에도 훗날 회심하고, 예수님 편에 선 자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넓은 길로 가기에, 좁은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적당히 살면 되는데, 적당히 넘어가면 되는데, 적당히 비위 맞추면 되는데, 말씀 앞에 이런 것이 안 됩니다. 그렇게 살면 곁에 있던 사람이 떠나가기도 합니다.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이게 세상 인심입니다. 예수님도 버림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밖에 몰랐던 예수님,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예수님인데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자신만 잡고 제자들이 도망갈 길은 터달라고 하셨습니다. 요 18: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아무리 예수님의 배려였다고 해도, 제자들은 체포되는 스승을 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꽁지가 빠지게 도망쳤습니다. 사람은 유불리를 따지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자는, 그게 하나님의 뜻이냐를 따집니다. 그게 하나님의 뜻이면 자기에게 불리해도 선택하고,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자기에게 유리해도 포기합니다.
57절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예수님은 체포되어 종교지도자들에게 넘겨졌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사람이었지만, 실제로 하나님 편에 서 있지는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웠습니다.
58절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한참 도망치던 베드로가 되돌아왔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자기 살겠다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되는지, 그 결말을 보려고 비록 멀찍이지만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입니다. 다른 제자들과는 격이 다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지만,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을 멀리 떠나 있으면, 부인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는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없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까?
59-61절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예수님에 대한 결론은 이미 나 있습니다. “예수를 죽이려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결론입니다. 미리 결론을 내 놓고 모든 것을 거기에 꿰맞춥니다. 공회에서 심문하고 재판하는 것은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증거재판주의’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재판에서 사실의 인정은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에 의하여 행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말합니다. 재판에 있어서 증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습니다. 거짓 증인도 나타났지만 서로 엇갈렸고, 그래도 도움이 될 만한 증언을 확보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유대인들에게 성전과 율법은 생명과 같습니다. 다른 거 다 건들 수 있어도, 그 두 가지만은 건들면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 대해 말했던 증언을 확보한 것입니다.
62-63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자백을 듣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법적으로 묵비권이 보장된 시대가 아니었을 거 같은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급한 쪽은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또 물었습니다.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하나님께 맹세까지 시키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를 밝히라고 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침묵하시던 예수님입니다.
6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묻지 않은 것까지 구체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맞다는 것입니다.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과,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65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종교지도자들은 그 말을 들으며 한 마디로 기가 막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것으로 단정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옷을 찢으며 격분했습니다. 더 이상의 증인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한 자백을 듣고는,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66절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그들은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물었습니다. 이건 사실상 선동이지 재판이 아닙니다. 재판할 것도 없었습니다. 이미 사형판결의 각본을 짜놓고 진행했기 때문입니다. 모인 무리들은 한 목소리를 외쳤습니다.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그러나 이 판결은, 여러 가지가 불법입니다. 탈무드를 보면, 산헤드린은 생명을 죽이기보다, 구하는 일에 힘써야 했습니다. 궐석판결을 금했고, 다수의 동의가 아니라면,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했고, 사형을 선고하려면 같은 날에 하지 못하게 하는, 판결 원칙을 가르쳐 왔습니다. 이런 판결원칙은, 죄인에게 가능한 자비를 베풀기 위한 것이요, 잘못을 방지하기 위한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이미 죽이기로 결정했으니, 산헤드린은 자비의 정신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산헤드린 법은 이렇습니다. ‘① 심문은 반드시 낮에 하고, 해지기 전에 끝마치라. ② 무죄인 경우는 심문 날에 선고하고, 유죄인 경우에는 다음날 선고해야 한다.’ 그러나 산헤드린은 이러한 법규들을 어기고, 조급하게 예수님의 심문했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한 당일에 선고하였고, 바로 그 날에 형을 집행했습니다. 사형 죄에 해당한다고 하면서, 자비가 없이, 예수님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었습니다.
67-68절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생각없는 다수가 예수님께 어떻게 했는가 보십시오. 역시 그들은 생각없이 행동했습니다. 곁에 있는 다수의 힘을 믿고, 예수님께 침을 뱉기도 하고, 주먹으로 치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불과 며칠 전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환호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예수님 반대편에 서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게 생각 없는 다수가 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선 깨어 있는 소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이 맞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편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 선 자로서, 어떠한 대가도 치를 준비가 돼 있습니까?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세상 명분을 따라가는 우리의 삶이 중단되게 하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내 인생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되는 아름다운 인생으로 되어가게 하옵소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뜻에 나의 모든 것을 맞추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내 인생, 내 계획, 내 지혜, 내 경험들을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내 자아를 죽이는 신앙 생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