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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남연회와 경기연회 조직과 제18대 최종철 감독회장
1988년은 제24회 올림픽 경기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고, 제5 공화국의 군부 독재정부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끝나고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하는 새 헌법에 의거하여 제6 공화국이 탄생되는 해이다. 그해 10월 25일부터 광림교회에서는 한국감리교회의 자치 60주년 성숙한 감리교회를 이끌어갈 새 지도자를 선출하는 제18회 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6공화국 탄생으로 민주화의 숨통이 트이기 시작하자 1970년과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현장에서 수난과 고난을 당하였던 진보적 소장파 목회자와 청년 학생들이 과거 독재정권에 결탁하였거나 교단 비리에 연루된 혐의가 있는 교계 인사들의 퇴진을 요구했다. 또한 고난의 시대에 예언자적 역할을 하지 못했던 교회의 개혁 갱신을 촉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들이 총회장을 점거 농성하면서 총회장은 어수선했다. 한국 감리교 역사상 처음으로 총회 단상 점거되어 회의 진행하지 못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장기천 감독회장은 소장파 목회자들의 충정을 받아들이면서 총회 질서를 위하여 책임을 느끼고 감독들과 감리교 민주화추진위원회(의장 조화순 목사) 대표 사이의 대화를 주선하였다. 그 결과 세 가지의 안을 이야기했다. 첫째, 장정개정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하되 10명은 비리와 관련 없는 신인으로 연회에서 선출한다. 둘째, 비리척결 문제로 회기 중 비리 관련자 처리를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5공화국에 밀착된 인사, 교단비리에 관련된 자, 신학교 비리에 연루된 자를 조사하기로 했다. 셋째, 감독 선거는 회기 중에 선거를 실시하되 금품 수수나 향응을 제공했거나 각종 비리에 관련된 자를 배제하고 선거에 임하기로 한다. 이에 양측 대화에서는 이 중에서 세 번째 안을 제외하고 다른 안을 받는 것으로 동의했다. 그런데 총회에 참석했던 평신도 대표들도 긴급결의안을 채택하였는데 즉 총회 중에 강단을 점거하고 실력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한 목회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총회 이름으로 징계한다는 건의안이었다.
그러므로 제18회 총회에서는 독재정권에 밀착한 비민주인사, 교단 및 신학교 비리에 관련된 자, 총회에 난입하여 의사진행을 방해한 자를 조사하여 처벌할 특별조치법을 만들었고 회기 중에 처리하기로 하고 우여곡절 끝에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18회 총회는 다음과 같이 새로운 감독들을 선출하였다.
서울연회 최종철 목사, 중부연회 한경수 목사, 동부연회 김희도 목사, 남부연회 이종주 목사, 삼남연회 강원재 목사가 각각 연회별 선거에서 당선되었다.감독회장은 새로 감독될 이들을 대표하여 중부연회 감독 당선자 한경수 목사가 서울연회 감독 당선자 최종철 목사를 감독회장에 추대하기로 4개 연회 감독 당선자들이 합의한 사항을 발표하여 회원들이 박수로 받으므로 최종철 감독이 감독회장 직을 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최종철(崔鍾喆) 감독회장은 1926년 3월 21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대선리에서 출생하였다. 1947년 8월 15일 광주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인천동지방 약대교회에서 담임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1949년 논산지방 육곡교회로 부임하여 목회하던 중 1952년 3월 2일 서울신학교(현 성결교 서울신학대학)을 수료하였다. 1953년 동부연회 준회원에 허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군목으로 입대했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 그해 육군 제2훈련소 15사단 포병학교에 발령을 받고 1958년까지 5년 간 근무했다.
1957년 3월 30일에 제9회 동부연회에서 정회원으로 허입했다. 1958년 군목 전역 후 논산지방 강경제일교회를 담임했고 1959년 3월 12일 광주 조선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원주지방 학성교회를 담임하였고 그때 1963년~1966까지 원주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66년에 서대문지방 광염교회로 목회 임지를 옮겼고 1967년 4월 23일 이명구 목사가 인천 내리교회로 부임함에 따라서 창천교회 담임자로 부임했다. 이때 1968년 2월 28일에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여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6년~1969년까지 원주대학교 강사로 활동하였고 1970년~1971년까지 한국기독교협의회와 기독교대한감리회 실행이사로 있었다. 1971~1974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총리원 선교국장을 역임했다. 이때 1972년 미국연합감리교회 총회대표로 참석했다. 1974년 동작지방 상도교회로 부임하여 1996년 은퇴할 때까지 22년 동안 목회했다. 1974년 감리회 제12회 총회 서기로 일했다. 1983년 미국 플로리다 주 명예 시민증을 받았다.
최종철 감독은 1988년 10월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총회에서 제5대 서울연회 감독에 당선되고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18대 감독회장 직을 맡아 감리교회를 이끌게 되었다. 그가 감독회장에 당선되면서 당장 처리할 사안이 바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처리하는 문제였다. 이에 최종철 감독회장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새로운 선교의식과 제도를 구축하고 이에 따른 교회 갱신과 개혁을 촉구하는 소장파 목회자들의 요구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교단 구성원 전체의 화합과 일치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1988년 감독회장이 되면서 당연직인 기독교대한감리회, 태화복지재단, 감리교신학대학교 재단이사장, 1990년 기독교대한감리회 은급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1990년~1991년 협성대학교 강사로 활동했다. 무엇보다 최종철 감독은 방만해진 서울연회 행정을 원활하게 이끌기 위하여 연회를 둘로 나누어 1990년 서울남연회를 새롭게 조직하였다. 이에 그는 서울연회 제5대 감독이면서 서울남연회 초대감독이 되었다. 그 후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상도교회에서 목회를 마무리하고 1997년 3월 12일에 경신교회에서 개최된 제8회 서울남연회(김용주 감독)에서 은퇴하고 경기도 안성시에서 거주했다. ‘신실’이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하나남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온 최종철 감독은 2024년 7월 6일 향년 98세의 일기로 별세하여 그의 유해는 경기도 용인의 평온의 숲(나래원)에 안장되었다.
최종철 감독은 재임 시 주재했던 연회와 총회는 다음과 같다. 제9회 서울연회(1989년 3월 15일~17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0회 서울연회(1990년 4월 2일~4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또한 제1회 서울남연회 조직연회(1990년 4월 5일~7일, 광림교회)를 개최하고 주관하였다. 그리고 제18회 총회 임시총회(1989년 2월 16일~17일, 금란교회 개최), 제18회 총회 특별총회(1989년 10월 31일~11월 2일, 금란교회 개최), 제19회 총회(1990년 10월 29일~31일, 광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한경수(韓景洙, 호 朱巖) 감독은 1926년 9월 1일에 황해도 연백군 해성면 일신리 412번지에서 아버지 한홍석(韓洪錫)과 어머니 이창순(李昌順) 속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연안 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군입대하여 훈련 받던 중 영양실조에 걸려 의병제대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고향 근처 강화도에 임시 거처하다가 조산교회를 출석하여 권사가 되었다. 당시 조산교회 김봉록 전도사의 소개로 강남복음중학교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가 1952년 동광중학교로 개교하면서 교사로 봉직했다. 1952년 동향 사람인 이을순(李乙順)을 만나서 조산교회에서 결혼하여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동광중학교에 근무하던 중 강화 갈정교회에 담임자가 군 입대하는 바람에 공석이 생겨 강화지방 박용익 감리사가 한경수 권사를 추천받아 파송하여 1953년 그는 평신도로서 강화 길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잠간의 평신도 목회자로 활동하던 중 소명을 깨닫고 장로회 신학을 공부하고 1955년 수원 삼막교회를 개척, 담임하여 첫 목회를 시작했다. 1955년 수원지방 발안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감리교 목사가 되기 위하여 1957년 감리교 대전신학교 제2회로 졸업하였다. 1957년 인천동지방 도화교회, 1961년 만수교회를 담임하였다. 만수교회를 담임할 때 1962년 4월 26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중부연회에서 김종필(金鍾弼) 감독의 집례로 준회원에 허입, 1964년 3월 12일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중부연회에서 이환신(李桓信)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1964년 만석교회를 거쳐 1967년 주안교회에 부임하여 1997년 정년 은퇴할 때까지 목회했다.
주안교회를 담임할 때 1968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원 수료, 1973년에 인천동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73년 6월 영국 에버딘 가톨릭대학에서 개최된 홍콩 기독교 지도자수련회 참석했다. 1975년 1978년 일본 간사이(關西) 성서신학교를 수료하였다. 1975년 미국 시카코에서 개최된 교육세미나 참석한 후 제1차 성지순례 및 세계일주여행을 다녀왔다. 1978년 7월에 일본 혼다고지 목사 초청 부흥회를 개최할 때 교역자반 통역을 담당했다. 1978년 국제 와이즈맨 클럽 한국지구 새인천 클럽 초대회장을 역임하고 1982년에 인천기독교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1983년 제2차 성지순례를 다녀 온 후 14차례나 성지를 순례했다. 1983년 감리회 본부 선교국, 교육국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속회와, 웨슬리 세미나를 수십 차례 인도했다. 1985년 선교 100주년 기념탑 건축위원장을 맡아서 한국교회 복음의 첫 번째 관문인 인천의 성시화(聖市化)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85년부터 주안교회 삼위일체성서연구원장, 1987년부터 웨슬리 목회연구원장을 맡았다.
그 후 한경숙 감독은 1988년 10월 30일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총회에서 제19대 중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는 감독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다음과 같이 연회를 이끌었다. ① 지방 행정구역 단위로 분할하여 효율적인 지방 운영을 가능케 하였다. ② 목사 안수 보좌위원들을 가운을 입도록 했다. ③ 준회원 영성훈련을 실시하였다. ④ 해외선교지방을 설립하여 뉴욕선교지방을 만들어 뉴욕연회와 자매결연을 하였다.⑤ 평신도공과 제작 ⑥ 남북기독교지도자 회의에 참석하여 평양신학원 학생들에게 교재를 전달하였다. ⑦ 농어촌 교회 목회자에게 최저 생계비를 지원하였다. ⑧ 경기연회를 태동시켰다.
또한 1989년 감독 재임 시에 러시아선교회 총재를 맡아서 고려인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92년 5월에 미국 센터너리 대학에서 명예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해 인천 성시화 운동본부 이사장, 1993년 기독교선교문화연구회 이사장, 중국 길림성 연변 여명농민대학 명예교수로 활동하면서 북한선교에 대한 꿈을 이루었다. 1995년 4월 30일 주안교회 교육관 5층에 국제성서박물관 설립 및 관장에 취임하였다. 평생 수집한 다수의 고성경들과 웨이커필드 박사가 기증한 고성경을 합하여 박물관을 개관했다. 1996년 기독교텔레비전 선교후원회 지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97년 3월 11일 인천숭의교회에서 개최된 제56회 중부연회(이호문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은퇴 후에도 1997년 군선교후원회 이사장,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연합동창회 제1대 이사로 피택되어 왕성하게 활동했다. 2002년 국제 군선교회 총재를 역임하고 2005년 감리교 전․현직 감독들로 구성된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2005년 80세 되던 2005년에 《한경수 감독 은총의 팔십년》을 출간했다. 이것은 1997년 은퇴기념으로 출간한 《한경수 감독 회고록》에 이어 두 번째 출간된 자서전이다. 2005년 제4대 기독교 대한감리회 감독협의회 회장을 역임했다. 그 후로도 국제성서박물관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보급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다가 그는 2011년 9월 22일에 향년 85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생전에 시신기증 약속에 따라 담당기관에 양도되었다. 유족으로는 이을순(李乙順) 사모와 1남 한상신(韓相信) 목사와 한혜영 사모, 2남 한상일(韓相一) 권사와 조순덕 권사, 3남 한상호(韓相浩) 목사와 황영옥 사모가 있으며 손자로는 요셉, 에드윈, 매튜, 요한과 외손 윤지환이 있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좌우명을 가진 한경수 감독은 평생 다음과 같은 상훈을 받은 공적이 있다. 대통령표창(1981년), 국민훈장목련장(1984년), 제1회 자랑스런인천기독인상 목회자부문(1997.7), 한국선교대상 목회자부문(1997.11), 목원을 빛낸 동문상(1997), 감리교 선교대상 성서부문(2003년)이 있다.
그는 평생 다음과 같이 다수의 역, 저서를 남겼다. 즉《주안교회 60년사》(저, 1985), 《요한웨슬리》(저, 1986), 《아펜젤러》(저, 1987), 《미감리회 교의와 됴례》(영인본, 1987), 《웨슬리와 속회》(역, 1987), 《찰스 웨슬리》(역, 1988), 《감리교회와 속회》(역, 1991), 《1992년 속회공과》(저, 1991), 《프란시스 애즈베리》(역, 1992), 《이것이 속회이다》(역, 1993), 《주안교회 70년사》(편, 1995), 《용정전설설화집》(편, 1995), 《성서와 역사》(편, 1996), 《사람을 낚는 어부》(저, 1997), 《한경수 감독 회고록》(저, 1997), 《40인 사도의 편지》(공저, 2005), 《이 민족 위에 그리스도의 계절이》(공저, 2005), 《한경수 감독 은총의 팔십년》(저, 2005), 《감독들의 이야기》(편, 2007)이 있다.
한경수 감독은 제48회 중부연회(1989년 3월 27일~29일, 계산중앙교회 개최), 제49회 중부연회(1990년 3월 26일~27일, 주안교회 개최), 제1회 경기연회 조직연회(1990년 3월 29일~30일, 수원 매산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김희도(金熙道) 감독은 1922년 5월 6일에 평안남도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에서 출생하였다. 1939년 경남성경학원을 거쳐 1960년에 대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했다. 삼척지방 후포교회, 울진읍교회, 홍전교회를 담임하였다. 1966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영월지방 감리사, 감리교 총리원 교육국 위원, 원주동부신학 이사, 목원대학교 이사를 역임했다. 1969년 영월지방 상동제일교회를 담임하다가 본부 재단사무국 총무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영월중앙교회로 부임하여 담임하던 중 1988년 10월 30일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총회에서 제19대 동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는 연회를 제도와 행정의 민주화,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는 민주화에 초점을 맞추어 연회를 이끌었다. 김희도 감독은 제40회 동부연회(1989년 3월 14일~16일, 강릉교회 개최), 제41회 동부연회(1990년 3월 13일~15일, 강릉중앙교회 개최)를 주관하였다.
이종주(李鍾柱, 호 石泉) 감독은 1926년 6월 16일에 황해도 옹진군 용천면 제작리 39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45년 3월 동관농업학교를 졸업했다. 1957년 3월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졸업, 1974년 목원대학 교역대학원 수료하였다. 2002년 웨슬레 디비니치 신학대학원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목회는 1953년부터 시작되어 남부연회 두계교회, 흑석교회, 오정교회, 육곡교회, 연무중앙교회, 논산제일교회를 담임하였다. 1963년 목원대학 동문회장, 1966년 논산지방 감리사, 1971년 계명중학교 이사장, 1980년 감리교유지재단 이사, 1981년 감리교본부실행위원, 1983년 충남경목위원회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83년 기독교연합봉사회 재단이사를 3회 연속 감당했다. 1987년 논산군청 군청자문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종주 감독은 감독이 되기 전 목회현장에서도 대 사회적인 활동을 왕성하게 함으로써 교회의 세상의 직분을 잘 감당했던 것이다.
이종주 감독은 1988년 10월 30일에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총회에서 제7대 남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어 연회의 중심적인 행정을 처리하는 수장이 되었다. 그는 취임인사를 통하여 “연회 중심의 사업운영 활성화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이종주 감독은 재산개발위원회를 통해 지금까지 준비해 온 남부연회 회관 건축을 위해 전심을 다하는 한편, 남부연회 시청각선교교육원을 승인하고 해외선교회를 조직했다. 1989년 남부연회 재산개발위원회가 모여 대전시 선화동 85-1번지에 남부연회 회관을 건축할 모든 준비 즉 건축업자 선정, 건축비조달계획 등을 논의하고 감리교선교회관 건축위원회 규약(제8장 제18조)을 제정했다. 1990년 3월 30일에 기공예배를 드린 후 9개월만인 1990년 12월 26일에 준공했다. 1990년 12월 3일에 박철규 총무의 사회로 회관준공예배를 개최하였다. 이 회관이 준공되기까지 이종주 감독의 노력이 있었지만 준공예배는 감독 직무가 막 끝난 직후여서 후임 감독의 집례로 진행되었다. 이 예배 때 이종주 감독은 공로패를 받았다.
이종주 감독은 재임 기간에 1988년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본부 교육국 위원장을 맡았다. 감독의 임기를 마친 후 1995년 선명회 논산지구장, 1997년 감리회 남부신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7년 3월 24일에 계룡대군인교회에서 개최된 제43회 남부연회(김영웅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고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에 거주했다.
이종주 감독은 사회와 교단 각 기관에서 받은 상훈은 다음과 같다. 제2훈련소 장병사기 양양공로패(군종감 문은식 대령), 기독교방송기능정상화 공로패(방송국장 최희섭), 지역계몽공로패(충남와이즈맨 회장 김유환), 남부연회 옥사 신축공사 공로패(김규태 감독), 논산시 승공가연 공로패(강경경찰서장 김진태), 충남 경찰청 선교 공로패(권기수), 구재사업공로패(선명화 회장 이윤구), 한전안전정신함양 공로패(한국전력공사 조창구), 육군병원장병건강 공로패(육군논산병원장 신철호) 등이다. 또한 평생 그가 남긴 저서로는 《목원의 꿈》, 《성공적인 목회》, 《감리교인의 생활 1집․2집》이 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이종주 감독은 제35회 남부연회(1989년 3월 28일∼30일, 대전선화교회 개최), 제36회 남부연회(1990년 3월 21일∼23일 대전중앙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강원재(康元栽) 감독은 1934년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2836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55년 서귀포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3년 대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1970년 8월에 일본 애농단기대학을 수료했다. 1971년 6월에 일본 와끼야마 오니시엔서 감귤 1년을 연수받았으며 1975년 2월 목원대학교 교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 4월에는 미국 플로리다 주 비콘성서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목회는 신학교 졸업 후 바로 시작되었다. 1955년 6월 춘천지방 가정교회를 비롯하여 1959년 3월 대전지방 우명1,2교회를 담임하고 1960년 3월 논산지방 화악교회를 담임하면서 성전과 사택을 건축했다. 1963년 3월 광석중앙교회를 담임했다. 여기서 10년 동안 목회하면서 성전과 담임자 주택을 건축했다. 1966년 3월 16일부터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남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8년 3월 12일에 제14회 남부연회에서 이강산 연회장의 집례로 정회원에 허입했다. 1968년 8월에 논산지방 사월교회로 부임하였고 성전을 건축했다.
1972년부터 1977년까지 목원대학교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였고 1977년 1월에 대구지방 남문교회에 부임하여 26년 동안 은퇴할 때까지 목회했다. 재임 중에 성전을 건축했다. 1979년 3월 목원대학교 재단이사로 12년간 봉직했다. 1980년 감리회 총회 규칙해석위원(2년), 총회 선교국 위원(4년)을 맡았다. 1981년 대구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고 1982년 장정개정위원으로 6년 동안 활동했다. 그해 12월에는 미국 뉴욕 한미선교협의회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84년 2월에 신천강씨 대구종친회 회장, 3월에는 삼남연회 재판위원으로 6년간 활동했다. 1985년 7월 일본 구마모도 구사바쪼 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조인식을 거행했다. 그해 8월에는 미국 달라스 국제 아슈람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다. 1986년 3월 대구경북 기독교연합회 회장을 역임했다. 1987년에 대구지방 감리사를 두 번째 맡았다.
강원재 감독은 1983년에는 북대구교회를 설립을 시작으로 1995년 3월 구미교회, 5월에 경북지방 경찰청교회를 창립하였고 1995년 5월에 남문교회 창립 50주년 기념 교육관을 매입하여 봉헌했다.
강원재 감독은 1988년 10월 30일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총회에서 삼남연회 제5대 감독에 선임되어 연회 행정을 담당했다. 감독이 된 이후 그는 1988년 감리교기본재산위원장, 감리교 인권위원회, 감리교 부산복지화관 운영위원회 이사장, 감리교 총회 실행부위원으로 있었다. 1989년 대구교회연합회장,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재단이사,로 활동했다. 1990년 1월에 한미감독회의 미국 5개 지역에 참가했고 1990년 5월 동남아시아 선교사 세미나 강사로 참가했다. 8월에는 미국 에머리대학교 국제선교세미나에 참가했으며 11월에 감리교 재단이사에 선임되었다.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1993년 감리교 대구신학원 이사장을 맡아 10년 동안 활동했으며 1994년 기독교 대구 환경협회 상임회장, 1995년 3월 삼남연화 과정고시위원장, 1997년 전국시도 경목실장회 회장, 1998년 감리교 재단이사, 한국기아대책기구 대구지회장, 섬기는 사람들 대구지회 이사장, 2000년 11월 삼남연회 감독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수행했다. 2000년 1월 27일에 미국 플로리다 주 라르고시 명예시민권을 취득했다. 2002년 6월에 남문교회에서 은퇴를 발표하고 2003년 4월 1일 마산합성교회에서 개최된 제23회 삼남연회(오세창 감독)에서 은퇴하고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에 거주하고 있다.
강원재 감독이 받은 상훈은 다음과 같다. 1979년-대구총력전도운동 대회장 감사패, 대구소방서장 감사패, 1981년-내무부 치안 본부장 감사패, 경북경찰청 경목위원장 감사패, 대구소방서장 감사패, 1983년-삼남연회 감독 공로패(여관구 감독), 내무부치안본부장 감사장, 1984년-법무부장관 표창장, 1985년-내무부 치안본부장 감사패, 1986년-대구남산신협 이사장 감사패, 중구 남산1동 정화협의회위원장 감사패, 1987년-대구직할시장 표창장, 1988년-내무부장관 감사장, 육군 6755부대장 감사패, 1990-삼남연회 공로패(김종수 감독), 1992년-감리회 원로목사회장 감사패, 중구 남산1동 모범동민상, 내무부장관 감사장, 1993년-목원대학이사장 공로패, 1994년-신천강씨 대구종친회장 감사패, 1995년-삼남연회감독 표창패(박문순 감독), 경찰서장 감사장, 1996년-경북지방경찰청장 감사장, 1997년-남문교회교우일동 감사장, 목원대학교 신학동문회장 “목원대학을 빛낸 동문패”, 1998년-대통령 당선자(김대중) 감사장, 전국경목실장 공로패, 대통령참전용사 증서, 2000년-삼남연회감독 공로패(최타권 감독), 2002년-대구광역시장 표창장, 대구YMCA이사장 감사장, 2002년-삼남연회 감독 공로패(석준모 감독) 등이다.
‘정직과 진실’을 좌우명으로 삼은 강원재 감독은 제9회 삼남연회(1989년 3월 29일~31일, 마산합성교회 개최), 제10회 삼남연회(1990년 3월 6일~8일, 제주회복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최종철 감독회장이 이끄는 제18회 총회의 감리교회는 1990년 자치 60주년을 맞이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자치 60주년 기념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신학세미나에서 유동식 박사가 한국 감리교회의 어제, 박봉배 박사가 한국 감리교회의 오늘, 변선환 박사가 한국 감리교회의 미래에 대한 강연회가 있었고, 축하 음악회, 기념성회를 개최하였다. 기념성회는 김홍도 목사가 설교하였으며 성회 후에는 기념 대회로 모여 최종철 감독회장이 설교를 하였고 한국인 3명 선교사 3명에게 공로패를 수여했고 선언문도 낭독하였다.
또한 감리교의 성장에 따라 연회 분할조직이 불가피하게 되자 1989년 10월 30일~11월 2일까지 광림교회에서 개최된 제18회 특별총회는 서울연회를 분할하여 서울남연회를 조직하고 중부연회를 분할하여 경기연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래서 1990년 4월 5일~7일에 광림교회에서 제1회 서울남연회가 조직연회로 개최되었고 제1회 경기연회는 1990년 3월 29일∼30일에 수원 매산교회에서 조직연회로 개최되어 7개 연회 시대가 열렸다.
최종철 감독회장(서울연회)
한경수 감독(중부연회)
김희도 감독(동부연회)
이종주 감독(남부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