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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각 나라마다 자기 민족 역사의 획을 긋는 사람이 있다. 보통 그들을 시조(始祖)를 본 따서 중조(中祖)라고 부른다. 영국의 킹 제임스 1세는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명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스코트랜드, 아일랜드, 웨일즈, 그리고 잉글랜드를 통합하며 영국을 대영제국(The Great Britain)으로 만들었던 영국 왕실의 실질적 시조이며, 그를 통해서 현재까지도 온 세상의 기독교 국가에서 읽혀지고 있는 킹제임스 성경을 편찬했던 기독교 세계에서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중국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또한 만만치 않다. 명나라가 쇠퇴하던 당시 여진족의 금나라가 일어났는데, 여기 저기 산재했던 여진족을 재통합하여 금나라를 이어서 후금(後金)이라고 칭하며 중국의 황제가 된 역사가 기록하는 인물이다. 후금(後金)이란 명칭은 그의 아들에 의해 청(淸)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된다.
한국의 인물로 조선의 영의정 김극효(金克孝)는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신)안동 김씨의 중조(中祖)라고 알려졌는데, 조선 사회에서 6조 판서 급의 높은 벼슬을 역임했던 인물은 아니지만, 그의 부모가 조선 이씨 왕가와 혼인으로 연결된 외척이었기에, 그의 아들과 손자들이 영의정에 오르게 되고 또한 그를 사후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존되어 숭앙을 받게 된 인물이다. 아마도 한국인 전체는 아니지만, 안동 김씨 가문에서 그를 중조(中祖)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안동 김씨 족보에서는 유명한 인물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영국과 중국과 한국의 3명의 다른 인물로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세계사와 전체사 속에서는 동일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속한 국가와 그의 이름은 다르게 표현되었지만, 역사적 실체 안에서 역사의 기록자들의 관점이 들어간 도플갱어 표현이라는 것이다.
동일인물의 다른 이름들
▲ 영국의 King James I 세 = 중국의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 = 한국의 안동 김씨 영의정 김극효
성경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를 탐구하는 우리는 모두, 한국, 중국, 일본, 등의 세 나라의 명칭이 실체가 다른 개체들이 아니고, 조선 사회 시스템 안에서 정치 관점의 차이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조선 세계에서 나타난 한국(Corea)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혈통적 언어적 개념이요, 중국(China)은 조선 세계의 한국의 중앙 정부를 다르게 부르는 정치적 개념이요, 일본(Japan)은 중국(China)에 정치적으로 맞서는 개념임을 알고 있다. 즉, 조선이라는 거대한 온 땅의 세계 속에서 전체사, 세계사의 관점에서 한국, 중국, 일본이라는 3가지의 분류가 나온 것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조선의 역사를 개별적으로 보는 부분사에서는 각기 지역마다, 혈통마다, 언어마다 자기 고유의 국가의 명칭이 있다. 그 명칭들에서 바로 현대의 국가명이 나타난 것이다.
온 땅의 역사는 이처럼 거대한 Corean 체계로 이루어진 하나의 집단이었다. 이러한 역사를 세계사, 전체사로 볼 때와 지역사, 부분사로 떼어 놓고 보는 것은 참 역사를 알기에 매우 중요하다. 조선의 세계가 붕괴되었다는 의미는 이러한 세계사, 통합사가 붕괴되었다는 의미와 동일하고, 그 대신에 부분사, 지역사가 마치 온 땅의 참 역사인 것처럼 현대인에게 알려지고 기술된 것이다. 그러한 부분사, 지역사는 대부분 사실(寫實)이다. 그 사실 속에서 전체의 본질을 알아야 인류의 역사가 보이는 것이다. 세계사였던 조선사가 붕괴되면서, 지역사, 부분사가 주도적으로 역사 앞으로 등장했는데, 이러한 지역사의 등장의 시기에 이전에 기록된 역사들이 스스로 자국화되면서 각 지역마다 동일한 실체가 짬뽕이 되면서 수많은 역사 인물과 지명의 도플갱어가 생기게 되었고 마치 다른 이름 다른 지역처럼 보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England) 이라고 부르는 명칭은 바로 당시, 세계 조선사 속에서 지역사로써 English 를 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지역 국가이고, 중국(China)과 한국(Corea)이라고 부르는 명칭은 세계 조선사 속에서 전체사 관점에서 부르는 용어라는 것을 반드시 정확히 이해해야 하겠다. 그렇다면 동일 인물의 다른 표현인 그 인물에 대한 일대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위키 백과를 참조하여 필자가 대략 정리하였다.
▲ 영국의 킹 제임스 1세
생몰연대 1566 - 1625
치세연대 1603 - 1625
1603년 스코틀랜드에서 왕이 된 후, 영국 런던에서 대영제국의 치세 시작
1603년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를 reform하여 청교도(Puritan)를 대표하는 최초 왕
1604년 England 와 Spain 사이에 평화를 가져온 왕 - The Somerset House Peace Conference 주최
1604년 성공회와 장로교(Presbyterian) 사이의 교리 일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605년 Guy Fawkes와 카톨릭 추종자들이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어 교수형 당함
1606년 120명의 Protestant(장로교인)들을 America 에 파송함
1607년 The English Parliament 는 Scotland Union (노동조합)을 해산함
1607년 영국과 스코트랜드 국민의 시민권(Citizenship)이 King James 왕의 권위 아래로 복속시킴.
1607년 아메리카 버지니아에 Jamestown 도시 건설
1611년 King Jame Authorized Version of Bible 발행함.
1613년 그의 딸 Elisabeth 는 하노버 왕가의 Frederick V 와 결혼함. Hanover 왕가는 그 이후 1910년 하노버 왕가가 멸망할 때까지 영속적으로 British Throne 을 상속함.
▲ 중국 청태조 누르하치
생몰연대 1559년 - 1626년
치세연대 1583년 - 1616년
금나라의 흩어진 여진족을 다시 묶어 나타난 후금(後金)의 초대 황제로, 뒤에 아들인 청태종에 의해 청나라로 이름을 바꾼 후 사후 추존 청태조로 불림.
흩어진 건주 여진 5부족을 하나로 묶어 나라들을 통일하고 이름을 후금(後金)이라고 칭함.
성은 아이신지로(애신각라), 부안 김씨(金氏)로 알려졌고, 이름 누르하치, 묘호는 태조, 연호는 천명
▲ 한국의 추존 영의정 김극효
생몰연대 1542년 - 1618년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희민(希閔), 호는 사미당(四味堂). 본관은 안동(新)安東
(신)안동 김씨의 중조(中祖), 김극효를 통해서 조선의 안동 김씨의 외척 세력이 형성됨.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영의정으로 사후 추존.
영국, 중국, 한국의 세 인물은 생몰연대가 몇년 차이로 거의 같다. 게다가 한 시대의 중조(中祖)로써 획을 그었다는 관점에서 동일하다. 그들의 이야기와 역대기를 읽어보면 비슷한 사건과 비슷한 내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슷한 내용을 본 글에서 다 표현하여 동일 인물임을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 역사는 세계사였고, 그것은 바로 한국 역사라는 관점에서 이들은 동일 인물로 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Corean 체제(System)에서 전체사와 부분사의 두 가지 관점을 통합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누구나 임진왜란 이후에 여진족들의 반란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는 역사 사실을 안다. 바로 조선의 왕 인조(1595~1649) 시대에, <인조반정>의 명분을 들어서 당시 여진족을 통합한 청나라에 침입을 받았다는 전란이다. 인조반정이란 무엇인가? 선대왕인 광해군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여진족인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이에 반대하는 당시 조선 중앙 정계에서 명나라를 숭상하고자 했던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리고 <배금친명> 정책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이에 반발하여 후금의 두 차례의 침입이 바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인조 대왕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남한 산성으로 도망갔고, 거기에서 일명 <삼전도 치욕>이라는 인조가 청태종에게 무릅을 꿇고 세 번 절을 했다는 치욕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 전후로 명나라는 조선을 사이에 두고 청나라와 이른바 <명청전쟁>이라는 전쟁을 수 없이 벌였지만, 결국 1644년 송나라 수도였던 개봉(開封)에서 이자성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킨 사건을 마지막으로 중국사(Chinese history) 속에서 멸망하고 1644년에 남명이 건국되고 청나라와 계속 싸우다가 1662년 다시 멸망하고 1662년 이후 각종 명나라 제후들이 일어나 청나라와 갖가지 전쟁을 치루면서 서서히 소멸되었다 것이 중국의 명나라 역사이다.
이러한 조선의 병자 호란과 명청 전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 조선의 조정에서는 명나라가 옳으니 청나라가 옳으니 하면서 싸우는가 말이다. 정승들끼리 싸우고 육조 판서급이나 그 이하의 조정의 인물들이 각기 동서남북의 당을 짓고 서로 다투었는가 하는 말이다. 서인이라고 칭하는 당파와 남인이라고 칭하는 당파가 서로 싸웠는가 하는 말이다. 이들은 동일한 한국말을 사용하는 같은 조선인 아닌가? 왜 명과 청이 지역적으로 전투가 벌어졌다고 역사 기록은 지명과 장수 이름까지 거명하며 말하는데, 동일한 시기에 조선의 조정에서도 임금을 보필하던 정승과 육조판서급의 인물들이 왜 이들이 동-서-남-북, 노-소 의 당을 짓고 그토록 명이 옳다, 청이 옳다라고 조선 조정에서 정쟁을 벌였는가는 말이다. 바로 그 이유는 조선은 세계사 중국사였고, 명청은 지역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지역사 관점에서 살펴 보자. 조선의 관료들의 정쟁이 있고, 명과 청이 지역 전쟁을 벌이고 있을 동일한 시간대에, 당시 서구에서는, 런던에 수도를 두고 있으며 강력한 항해술과 무역으로 강성해 진 영국이, 유럽의 패자인 합스부르크 왕조를 도와, 유라시아의 중심인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두고 있는 Ottoman Empire 와 전쟁을 벌였으며, 그 전쟁에서 승리하고 1623년에 평화 조약을 맺은 후, 당시 북아프리카, 유럽과 중동 아시아를 영역으로 하며 아랍어 사용 국가들을 통합했던 Ottoman Empire 의 쇠퇴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를 Ottoman-Habsburg Wars (오토만-합스부르크 전쟁들) 이라고 부르며, 그 이후로도 오토만 제국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제국의 영토를 뺏기며, 결국 1923년 1차 세계대전에 완전히 멸망한다는 것이다.
위 그림을 보자. 설명을 위해서 위키 백과의 내용을 가져 왔다. 그림에서 보듯이, Ottoman 제국의 개략적인 흥망 성쇠를 보면, 쇠퇴기가 1623년 영국(English)과 기독교 연합 세력에 지원을 받은 옛 신성 로마 제국의 강자인 합스부르그 왕조와 전쟁을 치루고 평화 조약을 맺는 그 당시부터 급속히 쇠퇴하여 1695년에 헝가리를 제일 먼저 잃으며 거의 멸망 단계로 가는 것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중국의 명나라 역시도 Ottoman Empire 와 비슷한 시기에 전쟁이 일어났다.
Ottoman Empire 의 쇠퇴기의 시작인 1623년과, 중국의 명청 전쟁으로 알려진 1618년-1644년 까지의 시기와, 조선이 겪은 정묘 호란과 병자 호란 2개의 난을 겪은 1627년-1636년과 연대가 거의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고, 결론적으로 이러한 세계 역사의 기록은 우연히 아니며, 동일 실체의 다른 표현이며, 조선 전체사 속에서 지역사의 표현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사 전체사 관점에서 동일 실체를 나열해 보자.
▲ The Great Britain Empire = 청(淸)
▲ Ottoman Empire = 명(明)
▲ Habsbrug dynasty = 조선(朝鮮) 왕조
이렇게 매치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1603년 스코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아들 킹 제임스 VI 세가 스코틀랜드 왕으로 등극하였고, 그가 또한 London 으로 와서 온 Englishman을 통합하며 대영 제국의 킹제임스 1세가 되었기에,
▲ 영국의 Scotland = 후금(後金)의 수도 심양
▲ 영국의 수도 London = 청(淸) 수도 연경 = 조선의 경상도 안동 → 중국사 관점에서 북경(北京)으로 이름 고침
▲ 오토만의 수도 Constantinople = 명의 수도 북경(명 조정이 멸망후 북경 이름을 청 조정에게 빼앗김) = 원고려의 남경 = 조선의 남경(南京) = 조선의 한양 → 한성부
▲ 합스부르그 왕조의 오스트리아 Vienna = 조선 왕가(王家)의 거하는 곳, 경조(京兆), 경사(京師)
이렇게 다르게 표현된 동일 실체를 매치시킬 수 있으며, English 언어로 표현한 서구의 역사와 중국 중앙 조정의 한자(Chinese)로 표현한 중국의 역사가 바로 동일 역사의 다른 시각이었다는 것이다. 잘못된 기록이 아니고, 전체사와 부분사의 관점 차이라는 것이다. 당시 수많은 영어 사용자 지역 조선의 백성이 보는 Newpaper 에 혹시나 왜곡된 정보를 집어 넣어 오해를 조장할 수 있지만, 사실 자체를 100% 거짓으로 기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China)의 수도인 북경(北京)이라는 도시를 두고, 이것이 지역사와 전체사에서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면서 한국의 역사를 더욱 이해하자.
고려나 조선은 제방 제도 속에서 <서울>을 지명할 때, 동경, 서경, 남경, 중경은 있으나 오직 북경(北京)은 없다. 동경 = 경주, 서경 = 평양, 남경 = 한양, 중경 = 개성, 등 그러나 아무리 역사 기록을 읽어도 한국에는 북경(北京)은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가 송, 원, 명, 청 이라고 하는 중국에만 북경(北京)이 존재하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발생했을까? 왜 한국은 전체사로서 세계사를 가지고 있는데, 고려사 조선사의 Corea 의 역사는 북경(北京)이라는 서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북경(北京)이라는 의미는 천자의 제후(Emperor)들이 고려나 조선을 대표하는 통치 정부나 지역 정부 입장에서, 천자가 그 곳에 계셔서 통치하는 곳이라는 상징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 한국의 왕이었던 천자(天子) 자신에게는 북경이 없는 이유이고, 모든 제후들에게 천자는 오직 북(뒷)쪽에 있기 때문이다. 오직 북경은 제후 (Emperor)들의 입장에서 천자를 바라보고 천자가 집무를 수행하는 곳을 정치적 개념과 상징적 개념으로 북경(北京)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의 방위 개념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원나라 북경, 명나라 북경, 청나라 북경은 바로 천자가 업무를 보는 Chinese Capital 로 역사는 인식한다는 것이다. 물론 살펴본 것처럼, 천자(天子)가 거하는 서울은 경조, 또는 경사라 하며, 그것은 영어권에서는 Austria Vienna 라고 인식한 것으로 본다.
천자(天子)의 정치는 신정(神政) 정치였음이 틀림 없다!
그리고 그를 받들어 온 세상에 실무 정치를 집행하는 자들은 바로 조선의 1품계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정승과 6조 판서급의 인물들과 그 위치의 품계를 가진 사람들이 한 것으로 본다. 이들이 천자의 명에 따라 정치와 사무를 맡아 일하던 곳, 그 곳을 바로 일반 백성들은 천자가 다스리는 정치 개념으로 <북쪽의 서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그 곳이 명나라가 망하기 전 병자 호란의 당시에는, 명나라의 북경은 조선의 남경, 바로 한양이었다는 것이고 영어권 사용자들이 표현할 때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었다는 것이고, 청나라가 조선의 중앙 정부로 통치를 시작했을 때, 그곳은 청나라 원래의 수도인 연경이 다시 천자의 정치 수도인 북경으로 인식되었고, 바로 그 곳이 런던(London) 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천자가 계신 곳은 경사, 또는 경조라 했으며 서구 영어권 백성들은 Austria Vienna 라고 부르고 인식했고, 심지어 미국 지역의 Newspaper 등에서 그 이름으로 쓰여진 것을 보면 서구권에는 누구나 그렇게 인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의 임금인 천자는 때와 정치적 상황에 따라 경사를 떠나서 중경, 서경, 동경, 남경, 북경 등 조선의 지역 수도 서울을 두루 다녀서 거쳐하고 집무를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경조(京兆)에서 머물렀을 것으로 생각한다. 바로 서구에서 표현하는 오스트리아 빈이다. 얼마나 작은 도시인가? 그러나 그러한 조그마한 도시에서 한국의 천자, 하늘의 권력을 대행해서 통치하는 The Chinese Emperor 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 글에서 Newspaper 를 인용하며 필자가 언급한 1895년 일제의 칼에 암살당한 한국의 명성황후는 바로, 1898년에 이탈리아의 자객의 칼에 암살 당한 오스트리아 엘리자베스 황후와 동일 인물이 되는 것이다.
영국의 제임스 왕, 중국의 청황제, 한국의 영의정 김극효!
지역사 부분사에 따라 다르게 표현한 동일 인물인데, 글을 마치기 전에 정리해보자.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창업되고 중국이라고 알려진 명나라는 바로 서구권에서 표현하면 Ottoman Empire다. 명나라의 수도는 북경(北京)인데, 그 북경은 바로 Constantinople 이었고, 하늘을 받드는 조선 천자의 Corea System 체제에서는 북경은 없고, 그 곳을 양주, 남경(南京)이라고 호칭했으며 바로 한양(漢陽)이었다. 여진족을 통합하며 후금이 일어났고 청태조의 아들인 청태종에 의해서 이름이 바뀐 청나라가 발흥하면서 명나라는 몰락했다. 바로 이 청나라는 서구권에서 표현하면 The Great Britain Empire 였으며 런던에 수도를 두었기에 청나라의 수도 연경은 바로 London 이었다.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고 조선 천자의 중앙 조정의 다스림을 대신했을 때 - 조선의 영의정(領議政)의 품계를 얻었을 때 - 연경은 북경으로 이름이 바뀌었기에, 청나라의 북경은 콘스탄티노플이 아니라 London 으로 바뀌게 된다. 그 곳이 바로 경상도 안동(安東)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 세계의 Corea 체제로 보았을 때, 조선 팔도 중에서 경기도가 바로 Ottoman Empire가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에 속했으며, 그 경기도는 오스트리아 빈과 조선의 남경이었던 한양 즉, 콘스탄티노플을 주변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며, 이탈리아 로마와 밀라노 지역은 황해도에 들어가므로 서쪽으로 경계를 삼고, 북쪽으로 발틱 3해 지역이 또한 황해도 이므로 그 근방까지가 경기도 전체의 지역이라고 보며, 황해도의 서해는 대서양이며, 경기도의 서쪽 바다는 바로 지중해(地中海, Mediterranean Sea)로 본다.
글을 마치며,
조선 세계사 관점에서 보이는 영국의 청교도 혁명(1642-1660)은 주객이 전도된 잘못 해석된 역사라고 본다. 당시 킹제임스 1세 영국 왕은 청교(淸敎, Puritan, 장로교) 출신이며, 카톨릭과 대항하며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와 교리를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왕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러한 장로교 포함 개신교 - 청교(淸敎) - 를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왕을 피해서 청교도(개신교)들이 시민 봉기를 벌이고, 왕을 피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그 곳에서 공화제 미국을 탄생시키는 주된 역사가 되었다 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역사는 해석이 오도된 것으로 본다. 청(淸) 나라의 국왕 종교가 바로 청교(淸敎)라고 본다. 왜냐하면 동일 실체로서 영국 국왕의 종교가 영어로 Puritan Religion 즉, 한자로 청교(淸敎)라고 불리우기 때문이고 동일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영국 시민들이 Parliament(향회)를 통해서 청교(淸敎)를 왕이 배척한다며 대항하며 칼과 무기를 들 수 있은가 말이다. 그 사실은 앞 뒤 모순이다. 누가 이런 모순을 만들었나? 청(淸)조선을 거부했던 일본 세력의 역사 조작이라고 본다.
한국의 통치 시스템은 신정 정치 체제이다. 즉, 천자(天子)라는 의미는 Son of Heaven 으로서, 천자와 함께하는 모든 중앙 관료는 천자 아래의 제사장(Khan) 직분들이었고, 왕(King)이었고, 온 땅을 통치하시고 운행하시는 천지의 주재인 신(神) 즉, 하느님이라고 부르든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영어로 God 이라고 부르든, 얼 이라고 부르든 알라 라고 부르든지, 천지의 주재이신 그 분을 모시는 종교 시스템이 바로 Corean System 이고, 조선 중앙 관료의 정치 관계는 바로 어떤 종교관을 천자(天子)를 위시한 조선 백성의 종교로 받아들이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명(明)이 Ottoman Empire 로써 현재 이슬람교의 지역이었고, 청(淸)이 British Empire 로써 개신교를 가진 백성이 주류였다. 이들의 싸움은 종교 전쟁이었으며, 조선 중앙 조정의 관료들의 정쟁도 바로 어떤 종교가 천자를 통한 백성들의 대표 종교가 되느냐의 싸움이었다. 끝으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듯이 언론에 발표된, 이슬람교를 가진 남명(南明)의 마지막 황제 주유량이 청(淸)에게 마지막 굴복을 하기 전에 카톨릭 교황에게 십자군 전쟁의 참여를 부탁한 서신이 언론에 발표되었다. 물론 남명 황제의 마지막 희망은 무산되었고 남명은 멸망하였다. 인터넷에 많이 알려진 그 내용을 첨부하며 글을 마친다.
서신 원본 - 한자로 기록되어 있다
라틴어 번역본
영국의 킹 제임스 1세 왕과 그의 아들 찰스 왕과, 청나라 태조 누르아치와 그의 아들 청태종과 조선의 추존 영의정 김극효와 그의 아들 인조 시대에 조선의 영의정 김상헌은 모두 동일 인물들로, 외양은 어떨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Corea의 언어인 한국어와 지역 정부로서 English 그리고 중앙 정부 통치자로서 한자(Chinese)까지 모두 사용하고 구사할 줄 아는 인물이었으며 조선의 혈족으로는 김(金)씨이고, 영어로는 King Family 이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부계 혈통으로 분별할 때는 요셉 지파가 되는 것임을 성경 역사는 바로 세계사이며 한국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한번 더 어필하며 글을 마칩니다.
한국의 역사는 전체사이며, 부분사의 집합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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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럼 실재 조선 왕가의 모습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이겠네요..현재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궁전들의 모습은 우리가 대궐이라 부르는 곳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들이니까요. 참 궁금 하네요..어떤 모습이였는지..
믹님의 항상 관심 감사합니다. 님의 질문에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전혀 다른 모습 아닙니다. 사극에서 나온 모습이 맞아요 ^^ 어리둥절하죠..ㅎㅎ 저와 함께 역사 여행 계속하면 이유를 알게 됩니다.
아~그래요? 기대 할께요..개인적으로 전 광산 김씨인데 ..광산 김씨도 요셉지파와 관련이 있나요? 지나가는 말로 가볍께 여쭙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3.06 14:21
전주리씨 할아버지들 초상화보면 한복은 입었지만 얼굴 생김새는 이러한 백인 LEE씨들과 닮아서 의아했었는데 왜 닮았는지 이해가 됩니다
(사진은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장수 Robert LEE)
한국인은 그가 속한 지역에 따라 얼굴과 외양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그 지역에 속한 인종과 동일하다는 것인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전부가 다 한복을 입고 살았다고 보입니다. 채색옷이든 흰옷이든. 사진과 같은 양복 차림의 사람은 특별한 행사 때문에 찍은 것이 아니고 평상복이라면 일본인 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본계 미국인 정도 보면 될 것 같아요.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고 현재까지의 개인적 의견임)
가을님. 사진이 엑박(엑스박스)이네요. 저만 그런지 몰라도... mik Kim 님은 잘 보이시나요?
전 잘 보이는데요..
저도 이제 보입니다. ^^
댓글 보고 엑박 금방 바꾸었습니다. ^^
진실 탐구의 목적은 즐거움입니다. 즐거움이 없다면 인생사 다 소용 없는 겁니다. 그것이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도 해요. 이 글은 쓰는데 이틀 걸렸어요..ㅎㅎ 즐거움 보다는 눈 아파서..고역.. 주말 다 반납했답니다. 쓰는 것은 그래도 빨랐는데, 생각이 많아서 쉬면서 썼기에 2틀입니다. 제 역사글 중에서는 가장 길다고 생각들고, 아무래도 중요한 관점이라서 좀 길게 글을 썼으니 감안하시고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회원님들 늘 강건하세요.
그러셨을거 같습니다..고생 하셨네요.. 읽는 사람은 잠깐 이지만 글 쓰는 사람은 정말 많은 수고가 필요한거 같아요. 웬지 요리랑 비슷하네요...먹는것 잠깐, 할일은 짠뜩....그래도 가족들의 살과 뼈가 되는것이니 감수 해야겠죠...글은 영혼을 살찌우는 것이니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