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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이 가장 강도 높게 말씀하신 고난주간 화요일 성전강론 전반부 내용입니다. 성전세와 인두세에 대한 의견을 주시고, 퍼나르기 홍보를 부탁드립니다.
화요일 왕의 성전강론 개관
저희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막 11:27)
예수님이 왕이 되어 통치를 시작한 3일 째 일정입니다. 첫날은 종려 주일로 감람산 벳바게에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여 성전에서 왕의 취임을 했습니다. 이튿날 월요일은 성전으로 등청하는 길에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책망하신 후 성전에서 청소를 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의 사역 중에 가장 크게 노하신 날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인데 장사하는 집이 되었고, 거기에 더하여 강도의 소굴로 변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시장을 독점한 상진들이 가난한 자의 제물인 비둘기에도 가격을 비싸게 받습니다. 20세 이상 성인 남자이면 누구나 내는 성전세 반 세겔에 웃돈을 붙입니다. 성전에서 이런 방법으로 백성들의 부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비둘기 한 마리 가격을 비싸게 파는 것이 나쁜 줄 알고 판단할 수 있지만, 화폐 교환에서 발생한 웃돈 거래에 대해서는 아직 그 실체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웃돈은 생산물이 없으므로 경제에서는 부의 이전 행위이며, 사회적 허수거래입니다. 토지를 비롯한 외환, 주식, 선물, 각종 파생금융상품, 가상화폐까지 생산물 없이 값만 키우는 자본 금융 거래는 모두 이런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늘 투기가 일고, 물가가 오르고, 주기적으로는 금융 위기나 경제 불안이 생깁니다.
오늘은 왕의 3일째 사역을 위하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십니다. 오는 길에 보니 어제 예수님이 꾸짖었던 무화과는 뿌리째 말라 죽어 있습니다. 밭에 열매가 없는 과일나무는 솎아서 땔감으로 쓰고(겔 15:2~5), 충실한 열매를 맺을 나무로 바꾸어 심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도 잎만 무성하고 생활에 열매가 없는 사람은 바꾸어야 하고(요 15:2), 눈앞에 있는 메시아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왕의 통치 3일째는 화요일이며, 이날은 예수님이 성전과 감람산에서 많은 주제를 두고 강론을 펴시는 날입니다. 화요일 하시는 강론이나 행적은 모두 20여 개 항목이 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하루 동안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다루신 것 같습니다. 산상수훈도 말씀이 길지만, 전체 양으로 3개의 장(마태복음 5장, 6장, 7장)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한 주, 고난주간 화요일 강론은 내용이 5개의 장(마태복음 21장~25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화요일 성전강론은 주제의 종류나 내용이 너무 많아서 흡사 하늘에서 소나기를 퍼붓듯이 쏟아부은 ‘소나기성 강론’이라고 할 것입니다.
산상수훈은 예수 그리스도가 산에서 제자들과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화요일 성정강론은 왕이 성전에서 종교지도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전자는 신앙과 삶에 대한 교육적 요소가 강하고, 후자는 백성들의 신앙과 삶을 지도해야 할 통치자의 역할에 대한 내용입니다. 산상수훈은 청중들에게 상위하달식으로 교훈을 전합니다. 그러나, 성전강론은 예수님과 지도자들 간의 대등한 입장에서 하는 질문과 논쟁이며, 거기에 더하여 강한 질책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화요일 저녁에는 감람산에서 세자들과 한 대화나 강론도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소망을 주는 메시지이지만, 성전강론은 죽음을 앞둔 유언과도 같은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자신이 죽음을 자초한 강한 질책과 사후의 있을 심판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산상수훈에는 백성들이 놀라워하며 무리들이 따릅니다. 그러나 화요일 성전강론에는 지도자들의 강한 적개심과 반론, 그리고 고소가 있고, 백성들까지 외면하게 됩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반신반의를 하면서 이상 행동의 조짐을 보입니다.
화요일 성전강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런데 고간주간 화요일 성전강론을 대하면서 우리가 조금만 눈여겨보면 이상한 점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그만큼 우리가 자주 듣고, 보고, 알고 있는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고난주간 화요일 성전강론은 우리가 대부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고난주간이 오면 한 주일을 특별집회를 하면서 고난주간 한 주에 있었던 예수님이 행적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래서 종려 주일부터 고간주간 특별집회를 통하여 자주 들어온 내용을 기억을 살려서 요일별 주제를 뽑아보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종료 주일>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내용, 왕의 입성보다는 죄를 사하는 구속주의 입성을 강조함
<월요일> : 예수님의 성전청소를 다룸, “기도의 집”이 상인들로 더럽혀진 것을 청소했다는 내용(왕이 "강도의 소굴"을 징계한 부분은 언급하지 않음).
<화요일> : 과부의 두 렙돈 헌금을 예로 들어서 헌금의 중요성을 강조함(화요일 행한 성전강론 중 나머지 항목은 거의 언급하지 않음)
<수요일> : 유월절 엿세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사건을 전하고, 성도들의 헌신을 강조함
<목요일> : 세족식과 겸손의 가르침,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예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함
<금요일> : 본디오 빌라도의 이중성과 무능함, 십자가에 사건에 대한 영적 의미를 강조하고 금식을 권장함
<토요일> : 아리마대 요셉의 예수님 장례와 무덤에 파순꾼을 둔 이야기, 부활절을 맞는 행사 준비
<부활 주일> :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고 축하 행사나 특별찬양으로 하루를 보냄
== 8일 간의 주제를 종합하면 신앙과 신앙 공동체에 필요한 내용을 선택하여 다루고 있음 ==
고난주간에 살펴본 주제나 내용을 이렇게 요약한 것은 필자 주관적 경험입니다. 따라서 이것을 일반화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설명을 위하여 참고로 제시한 것입니다.
고난주간에 있었던 예수님의 행적은 왕의 신분으로 통치에 필요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으로 인하여 십자가형을 받은 행위나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으면, 예수님이 우리 죄를 구원하기 위하여 고난을 받아서 죽어야 했고, 이로써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역만을 한정해서 알려고 합니다. 우리가 고난주간을 맞으면, 예수님이 왕으로서 행한 통치 행위나 생활경제에 대한 가르침은 그만큼 관심이 없거나 제외되어 있습니다.
고난주간 성전강론이 알려지지 않은 것은?
예수님은 고난주간 화요일에 성전강론을 통하여 왕의 신분으로서 가장 많은 주제로, 그리고 가장 강한 어조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날 하신 왕의 강론을 가장 적게, 그리고 가장 약한 강도로 듣고, 보고,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필자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첫째, 성전강론의 내용이나 청취의 대상이 백성들보다 종교지도자들(감람산 강론은 제자들)입니다. 그 내용은 지도자들에 대한 강한 책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둘째, 강론의 내용이 영혼 구원과 관련되어 있거나 은혜로운 내용이 아니고, 대부분 잘못에 대한 책망, 그리고 미래에 대한 경고와 심판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셋째, 이 강론을 행한 장소가 성전입니다. 성전은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종교기관인데, 성전강론은 왕의 통치나 경제활동에 관련된 내용이 많아서 종교기관과는 격이 맞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종교와 통치, 신앙과 생활을 구분하지 않지만, 우리는 이것을 구분하여 다루기를 선호합니다.
특히 공동체에서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가 말하는 내용을 전달하기가 부담스럽습니다. 경작자들(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주인의 종(선지자)들을 때리고 죽이고, 포도원을 강탈하는 등 내용이 살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강한 저주의 내용을 입에 담기도 거북합니다. 그래서 고난주간이라도 화요일 성전강론만은 직접 다루기를 꺼립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고난주간 화요일에 하신 왕의 성전강론은 내용을 잘 모르고 지나치게 됩니다. 이 강론은 예수님이 왕의 통치에서 필요한 것이었므로, 목숨을 내어놓고 전한 내용입니다. 어쩌면 왕이 죽음을 앞두고 하신 유언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목숨을 걸고 전한 화요일 성전강론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 실상들이 아직 덮여있습니다. 곧 고난주간 성전강론은 전해지고 있어도, 신앙과 관련된 내용만 추려서 살펴보거나 생활 이야기를 종교 이야기로 바꾸어 읽고, 전하고, 이해하는 정도라는 뜻입니다.
아래의 표는 이런 관점에서 고난주간 화요일에 예수님이 성전과 감람산에서 행한 왕의 강론을 복음서별로 대조한 것입니다. 전체 내용은 20여 개 항목 넘지만, 그중 16개 항목을 선택한 것인데, 대부분 성전에서 행한 강론이고, ⑧~⑫는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강론입니다. 이 대조표를 보시고 화요일 성전강론에 대해 우리가 평소에 접하거나 관심을 가졌던 주제들을 찾아서 각자 비교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화요일 왕의 강론 주제별 대조표와 관심도
구분 | 주제 및 내용 | 마태복음 | 마가복음 | 누가복음 | 비고(관심도) |
성전강론(낮) | ①권위 논쟁 ②경작자 비유 ③세금논쟁 ④계대결혼 논쟁 (부활논쟁) ⑤새계명 ⑥메시아 질문 ⑦바리새인 저주 (과부의 두 렙돈) | 21:23~27 21:33~46 22:15~22 22:23~33 22:34~40 22:41~46 23:13~39 | 11:27~33 12:1~12 12:13~17 12:18~27 12:28~34 12:35~37 12:38~40 (12:41~44) | 20:1~8 20:9~19 20:20~26 20:27~40 20:41~44 20:45~47 (21:1~4) | * 요한복음은 12:37~50(유대인의 배척)만 있음 * ( ) 안은 우리의 관심사 * ②③④⑦은 거의 무관심 상태 * ⑤이웃은 전도의 대상으로 관심 |
감람산강론 (밤) | ⑧성전멸망 예언 ⑨재림의 표적 ⑩열 처녀 비유 ⑪달란트 비유 ⑫양과 염소 비유 | 24:1~2 24:3~42 25:1~13 25:14~30 25:31~46 | 13:1~2 13:3~33 | 21:5~6 21:7~36 | ⑧⑨⑩은 관심사, ⑪은 영적 관심, ⑫는 무관심 상태 |
기타 | ⑬무화과 마름 ⑭혼인 잔치 비유 ⑮왕의 활동 요약 ⑯제사장들 공모 | 21:18~22 22:1~14 26:1~5 | 11:20~25 14:1~2 | 21:37~38 22:1~2 | ⑭는 성전에서 행한 비유인데 해석이 어렵고, 마태복음에만 있으며, ⑯은 공모의 주체가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임을 잘 모름 |
종합 | 화요일 강론과 행적은 ㉑개 항목이 넘지만, ⑯개 항목만 선택함 고난주간 사역 중 종려 주일, 성전청결, 헌금과 헌신, 체포·심문·사형·부활은 많이 다루지만, 십자가형의 결정적 원인이 된 “강도의 소굴”과 “화요일 성전강론의 긴박한 내용”은 잘 모르는 상태임 | 고난주간 화요강론 이해 부족(성경 이해의 편중 현상) |
대제사장과의 권위 논쟁
고난주간 화요일 아침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화요일 일과 중에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이들은 아침 일찍 출근과 동시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으로 보입니다. 어제 있었던 성전에서의 강한 분노와 격한 행동, 그리고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단정한 것에 대한 종교지도자들의 발 빠른 대응들입니다(막 11:17, 눅 19:47,48). 성전 밖에는 유월절을 지키려고 군중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만큼 성전의 안팎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눅 20:1,2)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은 예수님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하고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답변 대신에 오히려 되묻는 질문을 합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냐”라는 질문입니다. 그들은 이 질문에 서로 의논을 해서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 온 것이면, 자기들이 믿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며, 사람에서라고 하면 요한을 따르는 자들이 많아서 그들이 돌로 칠 것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의논 끝에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러면 나도 너희들 질문에 답을 하지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즉답을 피한 것은 그들에게는 바른 답을 주어봐야 이미 영적인 눈이 감겨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과 두 아들·포도원 주인과 경작자의 비유
종교지도자를 만난 후, 이제 포도원 두 아들의 비유를 말합니다(마 21:28~32). 비유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일하라고 포도원에 보냅니다. 맏아들은 즉시 가겠다고 했으나 가지를 않았고, 둘째 아들은 가기 싫다고 했으나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시킨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한 것이냐고 물었을 때, 청중들은 둘째 아들이라고 답을 합니다.
여기서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며,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 비유에서 "세리와 창기들은 요한의 말을 믿었으나 너희들은 이것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라고 하십니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두개파 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엄청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끄집어 내십니다(마 21:33~46). 여기서 주인은 자기 포도원을 경작하는 자가 세를 내기 싫어하여 수차례 거역하며, 주인이 보낸 종을 폭력으로 대하고 죽입니다. 마지막에는 포도원을 소유하고자 상속자까지 죽입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올 때는 이들에게 포도원을 빼앗아서 제 때에 세를 내는 자에게 준다고 합니다.
이 경작자의 비유 역시 유대인 종교지도자를 포도원 강탈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레위기 희년법을 어기고 바알 제도를 도입하여 백성들을 수탈합니다. 그래서 성전은 불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가며 나라는 패망했습니다. 또 예수님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제사장들은 대제사장 임명권을 가진 로마 정부와 결탁하여 종교적 특권을 행사하며,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적대시하다가 결국 모함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합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이 비유가 자기들을 두고 하는 것임을 알아차리고, 예수를 잡고자 기회를 보고 있습니다(마 21:45).
왕자 혼인 잔치의 비유
그래서 왕은 다시 천국에서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초청된 자와 택함을 받은 자를 비유를 들어서 이렇게 알리고 있습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9,10)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에 종들 보내어 점심 식사에 초대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자기 밭(농지)으로, 또 한 사람은 자기 장사를 이유로 초대를 거절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처럼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입니다.
이 비유는 먼저 초대를 받았으나 그 초대를 거부하는 사두개인(제사장들)과 바리새인과 같이 유대의 종교지도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먼저 어겼으며,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결국은 메시아 예수까지 거부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게 합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들이 죽어야 했습니다. 신약시대는 스데반(헹 7:58)과 야고보(행 12:2)가 이들에게 순교를 당합니다. 그래서 임금은 그들을 진멸하고 동네를 불사릅니다. 헤롯 성전은 주후 70년에 불타버렸고, 유대인들은 주후 135년 경에는 세계 각국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나라의 주권만 잃은 것이 아니라 땅과 백성들까지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잔치에 참여할 자의 예복은?
그러므로 임금은 먼저 청함을 받은 자들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이번에는 종을 길거리로 보냅니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청하니 혼인 잔치는 손님이 가득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열려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사람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이루어지므로 그 뜻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이를 본 임금은 그를 결박하여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버리라고 합니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임금의 이런 행위는 너무 야박하여 보입니다. 선악을 구분하지도 않고 길거리에서 만나는 자마다 초대를 하고있습니다(마 22:9). 그런데 그런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았다고 이처럼 가혹한 벌을 내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래서 성경 연구가들은 혼인 잔치의 비유가 해석하기 어려운 3대 난제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비유에서 말하는 예복은 잔치에 초청받은 자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절차나 의무를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비유가 말하는 예복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예복이지만, 실제는 잔치에 참여한 자의 속마음이 문제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임금은 하나님, 아들은 예수님으로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최소한의 절차는 마음의 준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면 먼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은 피를 흘리는 희생 제사가 우선입니다(레 17:11, 히 9:22). 구약시대는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하는 희생 제물이 들여져야 했고, 신약시대는 구주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믿음(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천국 잔치에 입을 예복은 흰옷입니다(계 3:4,5).
그러므로 이 비유가 말하는 예복을 누구는 신약시대에 필요한 믿음이라고 하고, 또 성령이라고도 합니다. 아니면 계명(말씀)의 준수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필요한 믿음, 성령, 그리고 계명 준수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성령이 임할 수 있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계명을 준수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잔치의 초대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잔치라는 공석에는 자기 생각대로 옷을 입을 것이 아니라 공석에서 합당한 옷을 입고 참석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잔치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그 믿음에 합당한 예복을 갖추고, 천국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역할이 필요합니다(빌 1:27). 다만, 이런 최소한의 역할도 하지 않는 자가 많은가 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으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왕자의 혼인 잔치와 가정의 큰 잔치
마태복음 22:1~14에서 말하는 '혼인 잔치의 비유'는 누가복음 14:15~24에서 말하는 '큰 잔치의 비유'와 비교해 보면 이해가 더 쉽습니다. 마태복음 잔치는 마지막 때에 임금이 구원과 심판을 하는 자리의 초대입니다. 비유를 베푼 장소는 성전이고, 먼저 초대받은 대상자들은 그 성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잔치는 자비와 구제가 필요한 자에 대한 초대입니다. 비유를 베푼 장소는 가정이며, 큰 자치에 먼저 초대받아야 할 사람은 부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주인의 초대에 대하여 농지를 샀다면서, 소 다섯 겨리(다섯 쌍, 열 마리)를 사서 시험해야 한다면서, 또 한 사람은 장가를 들어서 못가겠다고 합니다. 겉보기로 보면 모두가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해야 할 일에 있어서 우선순위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잔치를 베풀면 상좌에 앉기를 좋아하고, 율법의 준수에는 자기의 의를 내세우며, 가난한 자나 병든 자에 관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매입한 그 땅에 대해서도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땅을 샀지만, 희년법에 따른 토지거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땅이 팔린 자는 무르기나 희년이 필요한 전후 사정을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농가에서 부릴(시험해야 할) 소가 다섯 겨리나 되는 것으로 보아 그는 넓은 농지를 가진(경작하는) 부자입니다. 장가를 들었어도 초대를 받으면, 잠시 가족을 두고 잔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두 공적인 일보다 사적인 일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주인이 자비를 베풀거나 구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 몸이 불편한 자,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다가 잔치를 베풉니다. 아직도 남은 자리는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먼저 청함을 받은 자(부자)들은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눅 14:24).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잔치는 마지막 때에 베푸는 잔치에 초청을 받은 자, 택함을 받은 자, 그리고 그 택함의 자리에 남아있기에 합당한 자를 구분하는 비유입니다. 누가복음의 큰 잔치는 지금 생활에서 구원을 받기에 합당한(필요한) 자와 합당하지 못한 자를 알려주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이르시되 그런즉 가시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시니(눅 20:25)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와 혼인 잔치의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서 하신 말인 줄 알고 이를 잡고자 하지만, 백성들을 의식하고 두려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로마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 넘기려고 고소 거리를 찾습니다. 예수님에게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을 함께 보내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지 그른 지를 질문하게 합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에 바치는 세금으로 인하여 적대감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금을 바치라고 하면 유대주의에 반하는 자로 흠을 잡을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로마 정부에 고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를 아시고 데나리온화를 보이며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책을 잡으려던 자들이 기이하게 여기며 떠났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간교를 이렇게 피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말하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성경 연구가의 해석은 대체로 이러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우리의 생명, 능력, 재산을 말하며, 가이사의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나 로마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바쳐야 하는 인두세(人頭稅)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세금을 내라는 것은 로마 정부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독립을 위해서는 어떤 자극적인 표현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정치에 대하여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7)”고 했습니다. 모든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롬 13:1).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중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전에 낼 성전세와 로마에 낼 인두세
(성전세를 드라크마화로 낼 수가 있을까요?)
성전세는 출애굽기 30:13에 따라 이스라엘 성인 남자이면 누구나 내어야 하는 세금입니다. 이 세금의 용도는 성전을 관리하는 비용으로 쓰입니다. 성전세는 반드시 세겔화로 내어야 하고 사람의 얼굴이나 우상이 새겨진 외국 화폐는 성전세로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순례객들이 가져오는 로마 화폐를 받고, 성전세 납부용 세겔화를 바꾸어주는 환전상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환전에서 웃돈을 붙이는 악행으로 예수님께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두세(人頭稅)는 로마 정부가 사람의 머릿수를 따를 징수하는 세금입니다. 납세 의무자가 유대인이든, 로마인이든 구분 없이 12세에서 65세(?)까지 징수하는 세금입니다. 이 세금은 로마 정부로 들어가므로 로마 화폐나 외국 화폐로 납부합니다. 예수님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고 하는 말은 좁게 보면, 이 인두세를 뜻합니다. 로마 정부는 이 외에도 속국의 백성들에게 곡물의 십일조, 과일 수확은 5%, 기름은 1% 등의 각종 세금을 부과하여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샀습니다. 유대인들이 열망하는 독립운동과 로마에 반역을 노리는 열심당의 활동도 이 세금과 관련이 컸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7:24 이하에서 세금과 관련된 이야기는 성전세인지, 인두세인지는 우리가 생각을 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이르되 내신다 하고...(개역개정, 마 17:24,25)
그들이 커퍼나움에 왔을 때에 세금을 거두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말하기를 “너희 선생은 세금은 내지 아니하느냐?”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내신다...(킹제임스 성경, 마 17:24,25)
여기서 반 세겔로 번역한 단어는 헬라어 “디드라크몬”으로 '둘'이라는 ‘디스’와 화폐 단위인 ‘드라크마’의 합성어입니다. 드라크마는 그리스 화폐입니다. 데나리온화는 로마 화폐입니다. 곧 이 단어는 반 세겔이 아니고, 두 드라크마입니다.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얻은 것도 세겔화는 아니고 가격이 한 세겔(헬, 스타텔?)에 해당하는 ‘동전’입니다. 그래서 킹제임스성경은 “반 세겔”을 ‘세금’으로 번역하고, 물고기 입에서 낸 것은 '동전(a piece of money)’으로 표기했습니다. 영어 성경(NIV)에서도 ‘2드라크마(마 17:24, the two-drachma tax)’ 또는 ‘4드라크마(마 17:27, a four-drachma coin)’으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근거도 있습니다. 로마의 9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주후 69~79)는 세리의 아들로 가혹한 세금을 징수였습니다(자료, 나무위키). 이때 유대인에게는 성전세 반 세겔에 해당하는 2드라크마의 '인두세(FISCUS INDAICVS or JUDAICUS)'를 부과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자료, https://smile-happyday.com/27).
그러므로 개역개정 성경에서 '반 세겔'로 번역한 것은 외국 화폐 2드라크마와 유대 화폐 반 세겔이 가격(가치)이 같아서 빚어진 오해로 보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2드라크마는 1인분 인두세와 성전세 1인분 반 세겔이 가격이 같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낸 세금도 2인분 세금으로 한 세겔의 가격을 내었으므로, 반 세겔의 2인분 성전세와 크기가 같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논의의 대상인 드라크마와 세겔>
2드라크마 = 2데니리온 = 반 세겔 = 1인분 인두세 = 1인분 성전세(세겔화)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 하나>
4드라크마 = 4데나리온 = 한 세겔 = 2인분 인두세 = 2인분 성전세(세겔화)
마태복음 17:24에서 말하는 세금은 성전세가 아닌 인두세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성전세는 성전에 내는 세금으로 매년 3대 절기마다 성전 순례객들이 성전에 직접 내는 세금입니다. 이에 대해서 지방에서 절기가 오기 한 달 전부터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연구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인두세 징수를 성전세의 징수로 오해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② 성전세는 세겔화로만 내야 합니다. 외국 화폐는 가이사나 우상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성전세로 낼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7:24에서는 두 드라크마를 받는 자들이므로 이는 인두세를 징수하는 자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③ 성전세를 세리들이 징수한다는 것이 격이 맞지 않습니다. 지금 두 드라크마를 거두는 자들은 로마 정부에 바칠 세금을 거두는 세리들로 보입니다. 아니면 이 당시 유대 사회는 로마의 바칠 세금을 거두는 세리와 성전세를 거두는 세리가 따로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십일조가 있고, 그 외에 반 세겔 내는 성전세, 그리고 특별하게 성전 건축에 필요한 특별세를 징수하는 외에는 세금이 없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은 세금이 필요 없는 경제체제입니다.
④ 베드로가 징수자들의 질문에 “내신다”라고 즉답을 한 것은 인두세가 아니고 성전세라고 보아야 합니다. 성전세는 20세 이상 남자이면 누구나 내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예수님은 율법을 따라서 8일 만에 결례도 행하고(눅 2:21,22), 제물도 드리고, 요한에게 세례도 받으셨습니다(눅 3:21,22). 성전세의 납부도 이와 같은 성격으로 보입니다.
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금에 대하여 이렇게 질문하고 설명합니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정세를 징수하느냐?”, “그들의 아들에게서냐? 타인들에서냐?”라고 묻습니다. 일반 국세나 관세는 특수 신분자에게 세금이 면세되는 것이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도 그들과 같은 면세 대상자의 신분이라는 뜻입니다.
⑥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오해나 논쟁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낚시로 건진 물고기 입에서 나온 동전 하나로 두 사람의 몫의 인두세를 내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①~⑥의 내용을 종합하면 마태복음 17:24에서 말하는 세금은 인두세가 더 타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 추정은 ㉠ 성전세를 지방(가버나움)에서 세리들이 거둔 것이 맞거나, ㉡ 마 17:24에서 세겔은 헬라어 성경이 화폐 단위를 드라크마로 표기했거나, ㉢ 드라크마를 받는 자가 성전의 환전상처럼 세겔화를 바꾸어 주는 자이면 현재 개역개정 성경의 번역이 맞을 수도 있습니다.
** 마태복음 17:24에서 성전세와 인두세에 대하여 필자의 의견은 추정입니다. 하여 이런 추정에 오류가 있거나 생각이 다르시면 의견을 주시기 바랍니다. 바로잡겠습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에 대한 경제적 이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분한 것은 좀 더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이사 정부를 인정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문제에 국한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가이사 정부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주권적 역사의 한 과정에 속해 있을 뿐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전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 정부를 붕괴시키고, 이스라엘을 바로 독립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는 중입니다. 지금 상태에서 나라를 독립시켜 주어야 한다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로마의 침공을 막아주셨을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선민 간에 처음부터 맺었던 약속이었습니다(출 20:5,6, 축복 ⇨ 신 28:1~14, 저주 ➜ 신 28:15~68).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들이 그 언약을 어길 때마다 선지자를 보내어 수시로, 그리고 그 언약을 상기시키며 계명의 준수를 촉구했습니다. 이것이 엘리야부터(왕상 17:1) 세례 요한까지 활동했던 선지자들의 역할입니다(눅 3:7,8). 그러나 지도자와 백성들은 완악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런 고초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진 영성이나 정신력은 독립을 시켜주어도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독립된 나라를 꾸려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섭리에 들어있고, 그 때가 차야만 그 회복이 가능합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너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 때 “지금은 내 나라가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9:36)”라고 한 답변은 바로 이런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에 대한 경제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창조질서를 통하여 그리고 희년법 등으로 하나님의 것에 대한 일관된 기조가 정해져 있습니다. 첫째로 천지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 능력, 재산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앙적인 고백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현실 경제에서는 하나님이 희년법을 통하여 하나님이 직접 지으신 땅만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게 했습니다(레 25:23). 그리고 소유와 거래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여 사유재산제와 시장경제의 기초를 세워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희년법을 따라서, 하나님이 주신 땅과 그 생산물을 근거로 하여 십일조 의무도 부과하고(레 27:30), 친족 간에는 기업 무르기 의무(레 25:24~28), 동족 간에는 구제의 의무를 부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희년법을 어기고 계명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경제생활에서 하나님의 것과 자기들의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에 탐욕을 부려서 나라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로 포도원 생산물에서 “네 것(노동가치, 사유재산)과 내 것(토지가치, 공유재산)”을 분명하게 구분하여 주었고(마 20:14,15), 포도원 경작자의 비유를 들어서 “하나님의 것”과 “경작자의 것”도 구분하여 주고 있습니다(마 21:41).
그러므로 우리가 경제생활에서, 하나님의 주신 포도원에 대하여 “내 것”과 “내 것”, “하나님의 것”과 “경작자의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바로 사용할 줄을 안다면, 지금이라도 “가이사의 것”은 당장 없애 버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강제성을 가진 세금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가이사 정부와 세속 정치도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복음적 경제는 세상 경제법과 차이가 있고, 그 내용은 탁월합니다. 이것이 포도원 비유가 보여주는 경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 구분과 인정 범위
구분 | 하나님의 것 | 가이사의 것 | 비고 |
개념(범위) | 천지만물, 생명, 사람의 능력과 재산 등 | 가이사의 통치권 영역 | 통치권의 범위와 신앙고백 |
좁은 의미 | 성전세 반 세겔 | 인두세 두 드라크마 | 반 세겔 = 두 드라크마 |
구약 제도 | 십일조(무르기와 구제) -희년 경제- | 이방 정부의 일반세 | 통치권의 인정 범위 |
신약 제도 | 땅과 토지가치 -천국 경제- | 사유재산에 강제성을 가진 모든 세금 | 시장경제에서 사유와 공유의 구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