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송00(남, 63세. 2021.10.19.)
- 앞으로도 지역발전을 위해 더 큰 일을 하고 싶다 -
<사북에서의 삶이야기>
송00 씨는 63세이고 사북이 고향이다. 아버지는 이 지역에서 광부로 일했고, 그는 7남매의 맏이였다. 어쩔 수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부가 되었다. 77년 1월 동원탄좌에 들어갔다.
원래는 3월에 졸업하는데 밴드악장을 하는 바람에 두 달 일찍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당시에 동원탄좌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탄광에 들어갔는데 광부 중에는 영월공고출신도 있고, 태백공고출신도 있고, 서울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이들과 섞여보니 식견이 딸려서 얘기가 안 되는 거야.”
내성적이 성격이라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책도 많이 보고, 사회 보는 훈련도 하고 그랬다. 결혼식사회를 수백 건 하면서 꽤나 인지도가 높아졌다.
지금은 신협이사장을 비롯하여 여러 직함을 가지고 있다. ‘사음회’라는 모임이 있는데 여기의 회장직도 맡고 있다.
“이 모임은 ‘사북의 소리’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요.”
20대 초반부터 JCI활동도 오래했다. 99년도에는 강원지구 전체 회장을 지냈고 누구보다도 호기심이 많아 세계여행도 다녔다. 특히 오랜 선진지 견학으로 지식과 정보를 축적한 아이디어뱅크다. 지금도 끊임없이 발전적인 생각으로 벤치마킹을 해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31세에 군의원선거에도 출마했다. 노조위원장 출신도 있고 해서 모두 안 된다고 그랬다.
“겨우 서른한 살짜리 어린애잖아요.”
당시만 해도 합동연설회이라는 게 있었다. 학교운동장에서 하는 대중연설이었다.
“그때 수천 명이 모였는데 거기에서 끝내버렸어요.”
선거에서 당선되었는데 의원이 되고 보니 전문지식이 부족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태성전문대학을 거쳐 삼척대학교 행정학과를 나왔다. 이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연세대학교 대학원도 마쳤다.
의원이 돼서 군정질문을 하는데 연설문을 직접 쓸 줄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스스로 연설문을 써서 질문을 했다.
지금은 공직에서 물러나 사북신협 이사장과 강원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다. 중앙회 사무국장도 맡고 있는데 내년 이사선거에 도전한다. 지역발전을 위해서 2007년부터 번영회장직도 맡고 지역발전의 거름이 될 것을 다짐했다.
<사북살리기 도시재생이야기>
88년도부터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이 시작되었다. 공동화현상이 초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북을 떠났다. 이런 도미노현상을 막기 위해 신협을 만들었다. 29년 전의 일이다.
“폐광이 되고 난 후를 생각하니 참으로 막막했어요. 무엇을 해먹고 살아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카지노유치였다. 이 아이디어도 그가 냈다. 그리고 2004년도 10월 30일 동원탄좌가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정성군 마지막 탄광이 문을 닫았다. 그때 갱도 600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살렸고 수갱철탑도 헐지 못하도록 했다.
“나가려거든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나가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현장을 리얼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사비를 수천만 원 들여서 갱도와 주변사진들도 촬영해두었다. 소중한 문화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탄광문화가 고스란히 밴 유물 4만 5천 점도 그때 모았고 그것을 정선군에 넘겼다.
“지금 보존이 잘 되고 있어요.”
그는 석탄이라는 문화와 이미지를 살려서 연탄과 관련되는 사업을 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이른바 ‘연탄불고기’ 아이디어다. 석탄이 나는 곳이니 우선 마을을 불고기마을로 조성하고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굽는데 연탄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정체성도 있고 이미지를 부각시키기에 좋다.
주민들은 매머드 고기음식점을 운영하고 연탄불을 고정으로 공급하는 업체를 용역화해서 불편함이 없이 공급해 주면 된다고 했다.
“이른바 ‘연탄불공장’개념인 거죠.”
여기에 부수적으로 연탄 찍는 과정에서부터 연탄불을 피우는 과정들을 체험해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지역상권도 살고 용역업체를 지역에서 운영함으로서 이익 또한 창출되기 때문이다. 타 지역 온 유지들에게 연탄불구이로 식사를 대접할 기회가 있었는데 음식도 배로 먹고 환장하더라는 것이다.
향수를 불러올 수 있는 도시락사업도 병행하면 된다. 손님을 많이 유치하기 위해서 강원랜드와 시내를 연결하는 인차를 운영해야 한다. 카지노고객들이 자가용운전을 하지 않고 시내에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하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최근 들어 33공추위에서 ‘아름다운 거리’만들기 사업을 18번가에서 수행하고 있고 서울서 인연이 된 이용규 박사가 내려와 도시재상사업을 위해 노력하는 것에 고마워했다.
650갱도 3층 건물도 리 모델링을 해서 복원을 하고 있다. 수갱철탑도 그대로 유되고 있다. 앞으로 650거리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야 된다.
“개가 만 원 짜리 물고 다니는 풍경도 재현해야죠.”
그렇게 하면 관광객들이 탄광촌 문화(광부들의 생활상 등)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는 어떻게 하면 연 500만 명이나 되는 강원랜드 고객을 끌어들여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라는 문제라고 했다. 그들을 유인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한 문화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문화라는 것은 진정성이 가장 중요해요.”
진정성이 결여되고 문화는 설득력을 잃고 만다. 석탄도 나지 않는 인근지역에서 박물관을 짓고 그러는데 이런 것은 진정성이 결여된 사례다. 600갱도 일대도 입구가 무너진 것을 보강했는데 잘한 일이다. 그곳도 공기가 맑고 청정구역이라서 힐링자원으로 활용하면 된다. 권양기도 그대로 살리고 그러면 하나의 ‘관광문화촌’이 된다.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젊은 인재가 없는 것이 문제다. 다소 주민들의 반대가 있더라도 51%만 찬성하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저돌성이 필요한데 그런 것이 없어서 아쉽다.
한 번은 새로 온 기관장이 모노레일을 걷어치우려고 해서 그가 가서 드러눕겠다고 하니 더 이상 추진을 못했다. 지금은 주민들의 반대의견 때문에 추진 못하고 있는 모노레일사업도 엔젠가는 다시 추진해야 한다. 충분히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20~30미터 간격으로 역을 만들고 설화나 이야기를 넣으면 되는 것이고 이것도 강원랜드 정상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는 사북을 사랑해서 책도 다섯 권이나 썼다. 특히 다신이 예지력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민기업 만든 이야기>
그는 25년 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북주민기업’이란 것을 만들었다. 주민운동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지역을 살리자. 이제는 탄광에서 관광지로 만들어보자. 라는 취지로 설립했다.
한 구좌에 5천씩 총 6억 원을 모았다. 주민기업에서는 눈썰매장도 운영하고, 정선 두위봉 철축제라든가 산악자전거대회 등도 개최했다. 산악자전거대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회였다. 숙박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에 사북 중・고등학교 학교를 빌리고 군부대에서 침낭 등 야영 장비를 몇 차를 빌려와서 학교에다 설비하고 전국대회를 열었다.
주민기업은 사북이 모델이 되어 그 후 고한, 태백, 영월 상동, 삼척 도계에도 설립되었다. 주민기업은 주식회사와 유사한 형태로 운영된다. 이 기업이 강원랜드 청소용역, 경비업무를 맡고 있다. 강원랜드 직원이 5,000여 명 중 직영 직원이 3500명이고, 용역회사 직원이 1500명이다.
그는 또 5개의 주민 기업을 통합을 시켜서 ‘강원남부주민기업’이라는 것도 만들었다. 고한에 가면 강원랜드 본관 건물 앞에 ‘강원남부주민기업’이라는 회사가 있다.
서울에 있는 큰 회사들과 MOU를 체결하여 지원부분을 명확히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서울의 대기업이 주민기업의 업무를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주민기업 초창기에 무보수로 3년간 기반을 다졌다. ‘강원남부주민기업’은 지금 현재 직원이 800명 규모가 되었다. 주권은 일반 주민주와 청년 주민주가 있다. 모두를 포용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강원남부주민기업’만 연 매출이 400억이다.
<군립병원 탄생이야기>
사북지역에는 큰 병원이 없었다. 동원탄좌를 기반으로 한 동원보건원이라는 것이 전부였다. 이 병원이 석탄산업합리화의 영향으로 부도직전까지 갔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군립병원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팔자에도 없는 원장을 1년 했어요.”
사북주민기업에서 2억 원을 출자해서 이 병원을 인수했다. 그리고 강릉에 있는 연세병원 병원장을 찾아가서 도와줄 것을 간곡히 호소했다.
“무릎 꿇고 제발 이 지역 와서 이것 좀 살려주세요.”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었다. 연세병원에서 자본금을 투자해서 한국병원을 탄생시켰다.
“그때 이 병원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은 더 큰일 났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