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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섬길 자를 택하라 / 수 24:14-18, 계 21:1-7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다. 올 한 해를 돌아보면 기쁜 일도 있었지만 기쁘지 않은 아픔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아픔과 문제들 속에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다. 우리들은 그 아픔들로 인하여 더 이상 좌절하지 않는다. 좌절이란 자신의 능력에 대한 한계 상황에서 나타나는 자포자기의 절망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시간에 절망이 아닌 또 다른 희망과 소망을 바라본다. 우리들이 믿고 있는 신앙이 거짓이 아니라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기회를 주신다. 그 기회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문제는 그런 좋은 하나님의 기회를 기회로 생각하지 못한 어리석음이 우리들에게 있을 뿐이다. 어떤 자들에게 기회를 주시고 희망과 소망과 비전을 주시는가?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이같은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수 24장은 회고와 다짐, 결단과 각오의 장이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인생의 무상함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믿음과 헌신을 회고하며 백성들이 성실하고 진실된 신앙생활을 추구하도록 권면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늘 새로운 다짐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서 늘 새힘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다짐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 힘을 덧입고 계속 전진하게 되는 것이다. 수 24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여호수아는 지난 날들을 회고하고 있다.
2-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을 간략하게 회고하고 있다. 2-4절에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으므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른 민족에 비하여 조금도 우수한 조건이 없고 똑같이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숭배하던 죄인들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들이 다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또 구원도 받았다는 것이다. 강 저편이란 유브라데강 저편을 가리킨다. 그곳은 갈대아 우르 지방이다. 온갖 거짓 신들에 대한 우상숭배가 가득했던 곳이다. 그곳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약속의 땅과 약속의 아들을 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교만해서는 안되며, 오직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구원을 받게 된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과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하나님의 축복된 백성이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오직 겸손히 감사해야 한다.
5-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기까지 여러 차례의 난관과 역경 가운데서 친히 그들을 구출하셨던 사건들을 상기시킨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라는 말이 13번이나 나온다. 여기 ‘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거듭거듭 자신을 내세우시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루어오신 이가 자신임을 강조하셨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그들이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그들이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 하나님은 기적적으로 그들이 아모리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은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셨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게 하셨으며, 그래서 그 땅의 성읍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그들에게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기적과 큰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역사하셨다. 여러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과 은혜가 무엇인가?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내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사무엘이 블레셋 군대와 싸워 물리치고 그 자리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 하였다. 그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기념하며 감사했다. 우리 하나님은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시다. 여러분의 에벤에셀은 어디인가? 지난 한 해를 회고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둘째, 여호수아는 하나님에 대한 언약을 새롭게 하고 있다.
14-18절에는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이방신들을 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기로 다짐하고 언약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는 지난 역사를 회고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줄 알았으니 이제는 온전히 여호와만을 경외하며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고 다짐하고 있다. 14-15절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신앙만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만일 강제적인 명령으로 강조하였다면 여호수아 앞에서 그 말을 거역할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여호수아의 말에 복종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체하는 외식적인 신앙을 갖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며, 무엇보다도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강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우상을 섬기라고 했다. 그렇다고 여호수아가 우상을 섬기라고 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도 우상도 아닌 신앙적 혼합주의에서 떠나라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결단을 요구하였다. 하나님이든 우상이든 당장 선택하라는 것이다. 신앙의 중립지대, 믿음의 회색지대는 허락하지 않는다. 둘 다 선택하는 것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다. 실상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다. 하나님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신이 아니라 유일한 신이다. 또한 하나님 외에 이 세상에서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미국 남북전쟁이 한창일 때의 일이다. 남쪽 군대와 북쪽 군대의 접전지대에 한 나이 지긋한 농부가 살았다. 그의 농장과 집터는 하루는 북쪽 군대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다음 날에는 남쪽 군대의 점령지가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새로 그 지역의 주인이 된 군대에 자신의 소속을 해명해야만 하였다. 이러한 전쟁의 끊임없는 혼란에 지친 농부는 한가지 묘안을 생각해 냈다. 그는 농장 근처의 전쟁이 치열했던 격전지로 나갔다. 그리고 전사한 군인들을 살폈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속을 드러내는 군복을 걸치고 있었다. 자신의 소속을 분명히 드러내며 생명을 걸고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이었다. 그러나 농부는 그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농부는 군복을 탈취하였다. 먼저는 북쪽 군대 소속 병사의 군복을 벗겨냈다. 그러나 온전한 한 벌의 군복은 그 농부에게 필요 없었다. 단지 웃옷만이 그에게 필요하였다. 다음에 농부는 남족 군대 막사가 있던 곳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전사한 남쪽 병사를 발견하였다. 그는 그 병사에게서 군복의 바지를 벗겼다. 농부는 이렇게 마련한 군복을 깨끗이 손질하여 준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금 그의 농장이 남북 군대의 접전 중심지가 되었다. 그때 이 농부는 미소를 머금고 준비해 두었던 군복을 입었다. 위에는 북군의 군복을 걸치고, 아레에는 남군의 군복을 입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입으면 북군은 내가 북군 소속임을 알 것이고, 남군은 내가 자신들의 편임을 알아보겠지. 이렇게 명쾌한 생각을 진작 했어야 하는데...’ 농부는 이러한 차림으로 농장으로 나가 총성과 포탄 소리에 겁내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 농부의 판단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농장이 탁 트인 밭에서 일을 하던 농부를 보았을 때, 남군과 북군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남군은 농부의 상반신에 걸쳐진 북군의 옷을 보고 그를 북군으로 판단하였다. 북군은 농부가 입은 바지를 보고 그를 남군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양쪽 군대는 그 농부에게 서슴지 않고 총탄을 날렸다. 양편에 속할 수 있다던 농부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그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자로 생명을 잃은 것이다.
여러분, 한 해를 어떻게 살고자 하는가? 지나간 한 해 동안 세상과 타협하며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살지는 않았는가?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를 원하신다. 작은 생각에서부터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구별된 것이기를 원하신다. 한 입에서 저주와 하나님을 찬양함이 나올 수 없다. 이제 우리는 새해를 맞이하면서 옛것을 버리고 새로운 피조물을 입어야 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 우리의 옛 행위와 새로운 결단이 공존할 수 없다. 우리의 정과 욕심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 다시금 옛 모습으로, 땅의 것을 생각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 결과는 사망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새 생명을 바로 간수하고 이 땅에서 우리의 소속을 분명히 밝히며 구별되게 살자. 그러면 생명을 풍성히 누리는 삶이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섬겨야 한다. 우리는 거짓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성실함이 없는 믿음은 간음하는 여인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은 토하여 내친다고 하셨다. 약 4:8절에서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하였다. 모세는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거짓과 불성실은 관게를 깨뜨리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사람이 어떻게 불성실할 수 있는가?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다가도 어떤 때는 불신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상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새상과 물질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세상 쾌락과 정욕에 빠지고.... 이것이 바로 불성실한 사람들의 모습이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과거 기신을 섬기고 미신으루 따랐던 일들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여호수아는 외쳤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16-18절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들과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하니라.’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가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너희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결단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라고 대답하는 백성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은 ‘너희가 다른 신들을 완전히 버리지 아니하는한 능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요,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다는 말이요, 물질에 마음이 빼앗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이요, 미신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다’는 말은 피조물이나 미신들과는 완전히 다르며 성별된다는 말이다.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분이다. 그런데 그런 피조물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노하지 않겠나?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동시에 섬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 이 말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경솔히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은 듯이, 쉽게 대답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는 두려움과 겸손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만 구하는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만 믿고 살겠다고 너무 쉽게 맹세할 때가 많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 주로 모시겠다고 고백하면서도 불성실하게 살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시다. 거짓되고 불성실한 사람에게 진노하는 분이시다. 우리가 거짓되고 불성실하면 복을 주셨다가도 화를 내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한 자세로 그의 은혜를 구해야 한다.
어느 성도가 공장을 폐업하면서 폐업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간증을 했다. 10여년 전에 가발 공장을 소규모로 시적했다. 처음에는 설명서대로 했더니 원하는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자체적인 연구와 개발을 했더니 품질이 좋은 물건을 생산하게 되었다. 그것이 잘 팔려서 4-5년 만에 큰 공장을 세우고 부자가 되었다. 재산이 많아지다 보니 교만한 마음이 생겨서 30년이나 하나님을 믿어온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세상에 파묻혀 살았다.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할 생각은 하나도 하지않고 공장 기숙사에서 나오는 밥 찌꺼지로 기르던 돼지를 잡아 고사를 지내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또 누가 아주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해서 거기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모두 허사였다. 이제 수억의 빚을 지고 더 이상 공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여사장은 교회에 30년을 다녔는데도 등록을 하지 않았다. 혼자 마음으로 믿으면 되지 교회에 등록하고 간섭을 받는 것이 싫어서 무작정 다니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런 어려운 일을 당하고서야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간증하기를 ‘저는 이제부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합니다. 이 공장만 팔리면 빚을 다 갚게 될 것입니다. 무일푼으로 시작했다가 무일푼으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저는 너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제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된 사실입니다. 만일 사업이 계속 잘 되었다면 제 영혼은 영영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제 사업은 오늘로 폐업이지만, 제 신앙은 오늘부터 개업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배우자. 우리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헤를 받자. 여호수아의 결론은 이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조ᅟᅥᆼ으로 그를 섬길지어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러분, 부족한 점이 많았던 2000년이었지만, 새롭게 맞이하는 2001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섬기겠다는 결단과 각오로 새해를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200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