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꽃 향보다 진한 매력에 취하다 / 송덕희
경기도 가평에 사는 딸 집에서 추석 연휴를 보냈다. 사위가 직장 일 때문에 내려올 수 없다고 했다. 딸도 임신 초기인데 입덧이 심해서 안정이 필요하다. 세 돌이 지난 손자는 요즘 말이 폭풍처럼 늘었다. 입술을 달싹이며 쏟아내는 단어와 문장에 놀란다. 아이를 키워보면 이런 시기는 짧게 지나고 만다. 곁에서 보고 듣고 안아주고픈 마음이 간절하다.
손자는 몇 주 전에 삼촌이 사준 세발자전거에 재미를 붙였다. 발도 제대로 못 구르면서 자꾸 밖에 나가자고 조른다. 시원한 바람도 쐴 겸, 딸과 가까이 있는 종암천으로 산책하러 갔다. 집을 나서자마자 눈에 보이는 오만가지에 말을 걸고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서 있다. 화단에 떨어진 산수유 열매 한 알을 줍고 나서 발길을 돌린다. “인도는 자전거 타기 어려워요. 그러니까 지율이가 발을 막 굴려야 돼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을 지날 때면 자기 생각까지 더한다. 뒤따라오는 줄 알았더니 엄마랑 한참을 대화 중이다. 풍차가 있는 양어장을 지나면서다. “풍차 날개가 뱅글뱅글 돌아요. 바람이 돌려요. 개는 어딨지?” 자주 다닌 길이라 울 안에 있던 개 안부까지 묻는다. “저기 개 집에서 자고 있네.” 하니까 “왜 자고 있어요?” 자전거에서 내려 반쯤 주저앉아 개를 눈으로 찾는다. 한참을 기다리다 먼저 가겠다고 앞서 가니까 서운했는지 “할머니는 광주 집에 가!” 한다. 그러면 진짜 가버린다고 서너 발짝 되돌아갔다. “아니, 지율이 집에 가라고.” 하고 운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로 가라고 하는 줄 알고 섭섭할 뻔했다. 꼭 안아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금세 밝아진다.
개천 언저리는 처음 본 덩굴이 점령했다. 긴 꽃자루에 노란빛이 도는 흰 꽃이 댓 송이 모여 피었다. 오이나 호박 줄기처럼 뻗어서 다른 풀을 칭칭 휘감아 덮었다. 기세가 대단하다. 이름을 검색해 보니 가시박이라는 귀화 식물이다. 강원도와 경기도에 흔하다고 나온 걸 보면 남도까지 번지는 건 시간 문제겠다. 들머리 밭에는 부지런한 텃밭 주인 덕인지 배추가 어른 팔뚝만큼 자랐다. 윗녘의 시절이 빠르다는 걸 실감한다. 밭 경계를 따라 가지런히 채송화를 빼곡히 심어 놓았다. 여름이 제철인 채송화는 영양가 좋은 흙에서 굵게 뻗은 줄기마다 분홍, 노랑, 보라색 꽃이 탐스럽다. 건너편에는 조가 너른 땅에 가득 자라고 있다. 키 큰 강아지풀처럼 생긴 구황작물이다. 어릴 적에 보고 오랜만에 마주하니 반갑다. 작은 알갱이가 총총히 박혀 고개를 숙인 채 땡볕을 받고 여물다. 손으로 만져보고 가는 털을 손바닥에 비벼 보았다. 간지럽다면서도 자꾸 매만지는 손자의 통통한 손과 조 이삭을 가까이 당겨 찍었다. 멀리 산 아래 뭉게구름과 푸른 하늘, 조 밭을 함께 사진에 담았다. 풍경화처럼 평화롭다.
조금 걷다 보니 어디선가 진한 향내가 풍겨와, 발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칡덩굴이 무성하게 자란다. 전봇대를 감고 하늘 끝까지 올라갈 것처럼 등등하다. 가까이 보니, 타래 모양으로 붉은빛이 도는 자주색 칡꽃이 피어 있다. 여기에서 나는 향이다. 꽃대의 길이는 한 뼘 정도로 잎겨드랑이에서 길게 나온다. 총상꽃차례 모양으로 숭어리가 촘촘하다. 아래서부터 먼저 핀 송이는 진한 자줏빛이고 아직 덜 핀 것은 연한 보라색이다. 코에 가까이 대보니 달큼한 냄새가 진동한다. 내가 좋아하는 치자꽃처럼 사방으로 퍼져서 지나는 사람을 사로잡았다. 산어귀를 돌아서며 맡은 더덕 향 같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진하다. 고선애 시인이 ‘찬란하고 화려한 향기로 화답하는 주황색 다발의 미’라고 노래한 금목서꽃과 가장 비슷하다. 샤넬을 대표하는 향수 5번(NO. 5)의 원료를 여기에서 뽑는다고 한다. 칡꽃도 이와 견줄 만하다. 오래도록 맡아도 질리지 않을 고상한 멋을 품었다. 칡뿌리는 간에 좋고, 에스트로젠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갱년기를 겪는 여자에게 좋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꽃은 어떻게 활용되나 궁금해서 찾아보니, 차나 효소를 담그는 법이 쫙 나왔다. 효능을 아는 사람들은 잘 이용하고 있었다니 새로운 사실이다. 한발 더 나아가 향수도 상품으로 나온다면 좋겠다고 딸과 대화를 이어갔다. 작은 진딧물이 진액을 빨아먹은 걸 보면 우리만 좋아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흰나비도 날아와 꿀을 빠는지 여기저기 분주하게 옮아 앉는다. 손자는 한 송이에 코를 들이밀더니 얼굴을 감싼다. "아이, 진하다. 진해." 한다.
칡꽃 향에 취해 있다 보니, 어느새 건너편 벚나무에 걸린 거미에 정신이 팔렸다. 정육각형으로 정교하게 지어진 가늘다란 집이 가지 끝에 매달려 흔들린다. 이슬방울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주인은 한 귀퉁이에서 잠을 자는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요리조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피더니 눈을 마주보며 “거미가 있어요. 거미가 거꾸로 서 있네요.”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렇구나. 거꾸로 매달려도 잠이 오나 보구나.” 하니까 "왜 거꾸로 자도 잠이 잘 와요?" 기특하게 묻는 손자의 볼에 뽀뽀하고, 하늘 높이 안아 주었다. 칡꽃 향이 바람에 실려 오고 벚나무 누런 잎이 하나, 둘 떨어졌다. "잎이 왜 떨어져요? 어? 이제 안 떨어지네?......”
추석 연휴 내내 손자와 같이 지내면서 부쩍 자란 걸 보니 뿌듯하다. 딸과 사위가 아이를 잘 키우고 있구나 싶어서 고마웠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타지에서 추석을 쇠고, 돌아오는 열차에서 함께 찍은 사진을 본다. 벌써 손자가 보고 싶다. 칡꽃 향보다 진한 손자의 매력에 취했다.
첫댓글 넝쿨이 징그럽게 뻗고 이파리가 넓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칡꽃 발견하기 쉽지 않은데 용케 봤네요. 사람들 눈길을 별로 받지 못해 그렇지 향도 좋고 땋은 머리를 연상하게 하는 꽃도 참 예뻐요.
칡꽃 모양과 향기를 표현하기 힘들었는데, 머리를 땋은 모양이라... 좋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칡꽃 좋아하는데 향을 맡아볼 생각은 못했네요. 선생님 글 읽고 나니 향이 더 궁금해집니다.
요새 숲을 지나는 길에 향이 난다면, 칡꽃에서 나는 게 아닐까 싶네요. 오래 맡을수록 뇌 깊숙하게 박혀 저장될 향이더라고요.
섬에서 자랄 때 칡이 많았어요.
그 뿌리는 질겅질겅 자주 씹었던 기억은 있는데
꽃은 생각이 안 나요.
한 번 찾아 봐야겠어요.
칡뿌리는 어릴 때 캐 먹었는데, 씹으면 꼭 껌처럼 달짝지근한 맛이 났죠. 지금도 칡이 좋다고 해서 말린 뿌리를 사서 씹기도 하더라고요. 꽃을 찾아보면, 어릴 적 추억이 더해지겠죠.
손주와 조잘조잘 재밌는 시간 보냈네요.
저보다 칡꽃을 자세하게 표현하셨네요. 숲해설가 자격증 따도 되겠네요.
선생님처럼 숲해설가 되고 싶습니다. 하하하. 칡꽃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어서 힘들었는데 칭찬 받으니 기분 좋습니다.
손자가 정말 똘똘해요. 표현도 풍부하고요. 영재인가요? 정말 사랑스러우시겠습니다.
영재는 아닐거고요. 하하하. 딱 언어능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아닐까요? 세상 것이 다 궁금하고 신기할 다름. 정말 사랑스러워서 깨물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이 맘을 한참 후에나 아실 송선생님이 공감해 주셔니 더 고맙군요.
그 녀석들이 하는 행투로 봐서는 정말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꽃이 칡꽃과 돼지감자 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향을 손자에 빚대어 이야기를 잘 쓰셨네요.
손자의 앞날을 축복합니다.
돼지감자 꽃은 제가 못봤네요. 한번 찾아봐야겠군요.
칡은 줄기와 잎이 무성해서 꽃이 잘 보이지도 않더군요. 그들 행투와 어울리지 않은 향이지만 기가 막히구요. 칭찬과 축복에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손주보다 더 진하고 귀한 향기가 어디있겠어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손주를 가까이서 돌보신 선생님도 날마다 행복한 일상이 글에서 읽히더군요..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향은 사람에게서, 특히 손주에게서 나는거고요. 고맙습니다.
오가는 길 마음이 새로우셨겠습니다. 칡향보다 더 진한 울림.
정선생님도 보고싶은 얼굴들 보면서 추석 잘 보내셨지요? 사람의 향기가 최고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