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이 내려앉았다가 쫓겨가버린 진주 봉강리
경상남도 진주시 집현면(集賢面) 봉강리(鳳降里)는 대부분이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북쪽으로는 ‘지내천(池內川)’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아랫골, 새몰, 원동, 배실 등이 있다.
‘아랫골’은 아래쪽에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새몰’은 1955년에 면사무소를 신축한 마을이라 하여 붙은 명칭이며, ‘원동(院洞)’은 원님이 서재에 다녀갔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배실’이라는 지명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 갈래로 뻗은 배나무 가지가 가리키는 자리마다 명당이 되었다고 해서 ‘배실’이라고 불렀다는 설과, 어느 해 큰 비가 내려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뒷산이 배(船)처럼 보였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봉황새 봉(鳳) 자에 내릴 강(降) 자를 쓰는 ‘봉강리’는 말 그대로 봉이 날아와 앉았다 하여 봉황골(鳳凰谷), 또는 봉강골(鳳降谷)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봉강마을이라 불리는 곳에 어느 날 커다란 봉황 한 마리가 날아왔다.
마을을 휘휘 둘러보던 봉황은 좋은 자리를 찾아 둥지를 짓기 시작했다.
정성을 들여 아늑한 보금자리를 마련한 봉황이 알을 낳으려고 할 때였다.
마침 한 할머니가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다.
평소 심술궂기로 소문이 자자한 이 할머니는 알을 낳으려는 봉황을 보자 다짜고짜 소리부터 질렀다.
“훠이~ 이놈의 새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둥지를 틀고 알을 낳느냐. 훠이~ 저리로 썩 가버려라!”
할머니의 고함에 깜짝 놀란 봉황은 푸드덕 날아올랐다.
“이놈의 새, 썩 가버려라!”
할머니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봉황은 애써 마련해둔 둥지를 그대로 두고는 진주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봉강마을을 떠난 봉황은 훨훨 날아 지금의 상봉동(上鳳洞)에 다시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조용하고 아늑한 자리를 골라 둥지를 틀고 그곳에서 알을 낳았다.
마을 사람들은 봉황이 날아와 알을 낳았다 하여 그곳을 ‘봉알자리’라고 불렀다.
‘봉알자리’는 지금의 상봉동동(上鳳東洞)에 있는 봉란대(鳳卵臺)이다.
한편 봉황을 쫓아내 버린 봉강마을 사람들은 뒤늦게 그 잘못을 알고는 후회를 했다.
그리하여 마을 이름은 봉이 날아와 내려앉았던 곳이라는 뜻으로 ‘봉강’이라고 이름 붙이고 봉황의 자취를 기억하고자 했다.
봉강마을은 지금 집현면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지만, 만약 그때 당시 봉황이 봉강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길렀다면 지금보다 더 잘 사는 마을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마을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한편, 봉란대에 관해서는 진양 강씨들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고려 시대 진주 지역을 중심으로 진양 강씨들이 세를 키우고 있던 때의 이야기이다.
강구만(931~975년)이라는 이의 집 뒤에 기이하게 생긴 바위가 있었다.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얹혀 있는 모양으로 봉황의 모습을 닮았다 하여 사람들은 ‘봉바위’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강씨 문중의 흥성함이 이 바위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했다.
이후 후손인 강흥(1010~1122년)의 시대에 이르러서 그 세력이 꼭대기까지 이르자, 이지원이라는 사람이 이들을 모함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몰래 봉바위를 부숴버리도록 했다.
그러자 그 바위 속에서 흰 돌 네 개가 나왔는데, 이를 깨뜨리니 새빨간 피가 철철 흘렀다고 한다.
이후 강씨 문중에서는 날아가 버린 봉을 다시 불러 앉히기 위해 지금의 ‘봉알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