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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통들의 중국이야기빌어먹게 생겼다고 해고된 마윈, 소상공인의 신이 된 사연-8
마윈 어록 10선
1. 자아를 수립하려면 자신을 잊어라.
2. 기업 경영은 협객이 되는 것과 다르더라.
3, 오늘은 잔혹하다. 내일은 더욱 잔혹하다. 모래는 매우 행복하다. 단 절대다수의 기업은 내일 밤에 죽는다.
4. 아내가 어머니보다 중요한 이유: 어머니는 나의 3분의 1 인생을 책임지지만 아내는 나의 3분의 2 인생을 책임진다.
어머니는 영원히 나의 어머니지만 내가 잘못하면 아내는 남의 아내가 될 수 있다.
5. 말하기 전에 먼저 몇 초 생각하고, 화를 내기 전에 30을 세어라.
6. 속는 것은 타인이 교활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욕심이 많은 것이다. 자기스스로 속는 것이다.
7. 순간적인 열정은 돈이 되지 않는다. 집요한 열정만이 돈을 벌 수 있다.
8. 좋은 기업은 양질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는 창조적인 시스템과 룰에서 나오는 것이다.
9. 나의 꿈은 ‘중국의 세계화’를 넘어 ‘세계의 중국화’를 이루는 것이다.
10. 즉시 행동하라!
마윈은 불굴의 영혼을 지닌 이상적인 인간이다. -원자바오 전 중국총리
그는 기업종교를 창립했다. 마윈은 우리의 신이다. -알리바바 직원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은 몰라도 ‘알리바바와 마윈’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세상이 왔다. -문협
곤봉교육과 주입교육의 수레바퀴 아래서, 소년협객 마윈
마윈은 1964년 10월 15일 저장성 항저우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국공 내전시 장제스측 국민당군의 분대장으로 활약했다. 덕분에 1949년 중국공산화 이후 그의 집안은 지주, 부농, 반혁명 분자, 악질분자, 우파분자 등 ‘흑 5류’ 로 분류되어 감시와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집안에 드리운 먹장구름이 하얀 뭉게구름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아 아들의 이름을 ‘운’으로 지었다.
스물 이전 마윈을 단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여덟 살 전에는 개구쟁이, 초등시절은 말썽꾸러기, 중고교시절은 사고뭉치.”
마윈은 어릴 적부터 시키는 일은 잘하지 않으면서도 엉뚱한 일을 하길 좋아했다. 집에서는 아버지로부터 가혹한 체벌을 당하는 ‘곤봉교육’을, 학교에서는 오리주둥이에 모이를 강제로 밀어 넣는 식의 ‘주입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곤봉교육과 주입교육의 수레바퀴 아래서 소년은 현실세계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처리하는 무협지의 몽환세계로 침잠해들었다. 항저우 출신의 세계적인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의 모든 무협소설을 독파했다. 특히 '소오강호', '천룡8부', '의천도룡기'는 소년의 3대 애독서이자 교과서였다. 소년의 꿈은 강호를 호령하는 무림최고수 ‘마윈 대협’ 이었다.
마윈은 자신을 무협지의 주인공으로 동일시했다(지금도 거의 변함없음). 악당들을 제거한다며 또래 아이들과 백골이 드러나도록 싸웠다. 소년협객은 그날도 ‘정의를 위한’ 패싸움을 하다 살점이 찢기고 피범벅이 되어 병원으로 실려 갔다. 병원에 마취약이 떨어져 의사가 무마취로 13바늘을 꿰맬 때까지 소년협객은 무협지의 주인공을 연상하며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공부와는 담을 쌓고 허구한 날 패거나 맞거나를 반복하던 마윈은 결국 문제아만 모아 놓은 특수중학교로 강제전학 조치되었다. 부모와 교사, 이웃들 대부분은 그의 앞날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마윈이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영어인 반면에 제일 싫어하는 과목은 수학이었다. 아버지가 12살 생일선물로 사준 라디오를 무척 행복해하며 항상 영어방송을 틀어놓고 지냈다. 13살부터 자전거에 외국인관광객을 태우고 항저우시내를 싸돌아다녔다.
수학시간은 마윈이 무협지를 몰래 읽는 시간이었다. 그는 수학을 정해진 공식에 뻔한 답을 꿰맞추는, 재미없는 숫자놀음으로 여겨 내팽개쳤다. 그의 중고교시절 수학성적은 100점 만점에 10점 이상을 받아 본적이 드물었다. 마윈을 고입 재수생, 대입 삼수생이라는 고난의 청소년시절을 감수하게 한 원흉은 수학 때문이었다. 첫해 고입시험에서 수학을 0점 받은 탓에 낙방했고, 이듬해 31점을 받아 3류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고3시절 수학교사는 “너 같은 수학 백치에게는 고등학교도 과분하다. 만일 네가 대학생이 된다면 내 이름을 거꾸로 불러도 좋다.”라고 대놓고 기를 죽였다. 그 수학교사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1982년 마윈은 첫 대입시험에 낙방했다. 수학성적은 100점 만점에 1점으로 거의 꼴찌수준이었다.
‘수포자(수학포기자)’를 넘어 수의 백치, ‘수치’라고나 할까. 오늘날 글로벌IT업계의 거두 마윈이, 특히 이공계를 중시하여온
사회주의국가의 ‘황제과목’이나 다름없는 수학에 젬병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마윈이 해고당한 사유, ‘너무 작고 못생겨서 혐오감을 주기에’
대학입시에 떨어진 마윈은 사촌동생과 함께 시후호반의 한 3성급호텔에 일자리를 구하러 갔다. 사촌동생은 정규직으로 취직되었지만 마윈은 임시직, ‘알바’로 취직되었다. 하지만 그마저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해고 되었다. 마윈이 해고된 사유는 이렇다.
“키가 너무 작고, 얼굴도 너무 못 생겨서 고객들에게 혐오감을 주기 때문.”
호텔 알바직에서도 쫓겨난 마윈은 사무보조원도 하고 짐꾼도 했다. 쓰리쿼터를 타고 책 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왜소한 체격으로는 주로 어깨와 허리힘에 의지하는 육체노동으로는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것 같았다. 완력이 아닌, 필설의 힘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숙명을 절감했다. 그는 이듬해 대학입시에 응시했으나 또 낙방이었다. 낙방의 원흉은 역시 수학. 점수는 불과 19점, 과락이었다. 수학교사의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마윈의 부모는 그에게 대학진학을 단념하고 기술을 배우라고 권했다. 그러나 마윈은 “이제 와서 무슨 기술을 배우지?” 주걱턱을 내밀며 자전거를 타고 항저우 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그러다가 외국인을 만나면 통역을 자처하여 군것질을 할 만큼의 용돈을 벌었다.
1984년 마윈은 부모의 만류를 무릅쓰고 3번째 대학시험에 도전했다. 마윈이 당시 중국에서는 희귀한 대입3수생이 되었던 까닭은 큰 꿈을 품었기보다는 대학을 나오면 세치 혀로 먹고 살 수 있는 직종에 취직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도 마윈은 그해 대입시험 문제가 유난히 쉽게 출제되었던 덕분에 수학과목에 89점을 맞았다. 그러나 생애최고의 수학성적에도 불구하고 종합성적이 커트라인에서 5점 미달하여, 또 다시 낙방했다.
대입3수에도 실패하자 절망한 마윈은 며칠을 골방에 쳐 박혀 나오지 않았다. 무협지도 접어둔 채 ‘티베트, 사후의 서’ 등 심령학서적을 읽다가 졸음이 밀려오면,‘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았으면, 내세에는...’ 하며 잠만 내리 잤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그의 골방에 항저우사범학원(단과대학)영어과의 입학통지서가 날아들었다. 그 대학 영어과는 입학생수가 정원에 미달되자 영어시험성적 100점을 맞고도 불합격한 마윈을 보결합격자로 선정하였던 것이었다. 입학통지서가 날아든 그 날을 기준으로 마윈의 생애는 구 마윈과 신 마윈으로 구분되어지는 신세계가 펼쳐진다.
‘구 마윈’에서 ‘신 마윈’으로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I am not what I was).”
이는 영문학과 신입생 시절 마윈이 항상 되뇌던 영어구절이다. 폐인의 벼랑 끝에서 구사일생으로 대학생이 된 마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마치 기원전(BC)의 구 마원에서 기원후(AD)의 신 마윈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그의 이름 운의 먹장구름은 뭉게구름으로 변했다. 명랑·쾌활하고 이지적 사고방식에 융통성이 풍부하고 결단성이 있으며 다정다감한 젊은이로 변했다. 품행이 단정하고 학업성적도 우수한데가 영어실력은 미국인교수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특출했다. 마윈은 자기 자신에 확신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움직이게 했다. 자신의 생각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마윈은 타고난 웅변실력으로 대학 총학생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2회 연속 항저우시 대학생연합회 총회장을 맡기도 했다. 마윈은 대학시절 천재적 창조력과 독창성으로 능동적인 행동과 연설을 하는 ‘행위자’ 로 변신했다.
1988년 마윈은 대학졸업과 동시에 항저우전자공업학원 영어 및 국제무역강사가 되었다. 그의 강의실은 수강생들로 항상 만원이었다. 일반시민까지 몰려들어 선채로 수업을 듣는, ‘입석 청강생’들로 넘쳐났다. 그의 수업방식은 교사는 읊고 학생은 듣는 수업이 아니었다. 교사는 칠판에 적고 학생은 받아쓰는 수업이 아니었다. 인터랙티브쌍방형, 학생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모두 즐기는 수업이었다.
항저우시 10대 우수청년교사로 선정된 1992년, 마윈은 퇴직교사 몇몇과 함께 번역전문회사 하이보를 설립했다. 그러나 개업 첫 달 총수입은 700위안, 번역사 월급은커녕 건물임차료 월 2400위안도 어림없었다. 마윈은 유명한 소상품 다품종 도매시장, 이우(필자 주1)로 가서 손전기, 내의, 공예품 등을 사서 항저우시내에 내다 팔았다. 그 무렵 마윈의 직업은 영어강사 겸 번역회사 사장 겸 보따리장사를 겸한 ‘스리잡스’였다.
'007 카지노 로열'도 저리 가라는 마윈의 첫 미국여행기
“당신의 인생일대의 전환점은 알리바바를 창설한 1999년인가?”
한 인터뷰에서 기자는 마윈에게 확인차 물으며 계속 질문을 이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윈은 기자의 말을 끊으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다. 내 나이 만 31세 시절, 1995년이었다.”
그 해 마윈은 혼이 양탄자를 타고 날아가고 넋이 마술 램프의 연기로 흩어질 만한, 엄청난 사건을 겪었다. 1994년 초 항저우 시정부는 미국측 투자자 J와 고속도로건설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였으나 투자금 입금 예정일이 1년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애가 탄 시정부는 항저우바닥에서 영어 최고수로 알려진 마윈에게 투자계약서의 번역상에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줄 것을 의뢰했다.
마윈은 영문본과 중문본을 면밀히 대조한 결과 번역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한 미국인으로부터 미국측 투자자 J가 국제사기꾼이라는 제보를 받고 이를 시정부에 보고했다. 시정부는 마윈에게 현지조사임무를 맡겨 그를 J의 주소지인 미국 라스베가스로 출장을 보냈다.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의 라스베가스 공항에 마중 나온 J를 본 순간, 마윈은 심장을 달아맨 힘줄이 끊어질 정도로 놀랐다. “이 자는 사기꾼이 아니라 조폭 보스로구나!” 직감했다. 더구나 영화 '대부'의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 역)의 음성을 흉내 낸 듯한 J의 음침한 음색이 마윈의 확신을 더했다. J는 사업일은 내일 천천히 이야기하자며 마윈을 시내의 한 카지노장으로 데려갔다.
미국에 간 것도, 카지노에 간 것도 처음인 마윈은 얼떨결에 25달러를 배팅하여 600달러를 땄다. 다음 날 아침 J는 한층 더 음침한 목소리로 마윈에게 자신이 ‘사막의 자칼’이라는 폭력조직의 보스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 도시는 오기는 쉽지만 그냥 돌아가기는 어려운 곳”이라며 그 왜소한 동양인을 감금할 의향을 비쳤다. 하지만 마윈이 누구던가, 또 하나의 중국사로 불릴 만큼 방대한 김용의 무협소설 속의 온갖 초식을 필살의 혀로 내공화한 그가 아니던가, 마윈은 중국 흑사회의 은어와 미국암흑가의 슬랭을 동시에 고급영어로 전환시키며 협객풍의 어조로 호쾌하게 응수했다.
“우하하, 과연, 대붕은 대붕을 알아보는군! 그렇지, 라스베가스 협객 보스가 중국 전통비밀결사 홍방 지파 수령을 몰라볼 리가 없지, 나는 오랜 세월 항저우 호반에 은거하며 귀형을 흠모해왔던 터. 이렇게 여기 사막의 성채를 친히 배알하게 되었다. 요즘 세간에는 천라지망, 즉, 하늘의 그물과 땅의 그물이라는 ‘인터넷’이 풍미하고 있다. 귀형과 함께 이 인터넷사업을 크게 벌리고자 한다. 우리 서로 손을 맞잡고 큰일을 한번 도모해보자, 중국에는 널린 것이 호구들이다. 우선 나는 항저우의 호구 하나를 물색해놓았다. 그렇지 않아도 예서 더 머물며 귀형을 배우고 싶었다. 불감청고소원이라. 나의 귀국을 만류하는 귀형의 호의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어지러웠다. 조폭보스 J는 “ㅤㅎㅓㅎ, 이 볼품없는 쿨리의 정체는 뭐지, 동부지역 백인들도 영어를 이토록 현란하게 구사하기 힘든데, 눈빛이 예사 아닌 게, 어제 카지노에서 배팅한 돈의 몇 십 배를 딸 때도 흔연한 태도하며, 어쩌면 이 괴인은 전설적인 홍방(Gong Bang)의 수령일 수도 있겠다. 그게 아니라면 속임수 개수작일수도,” 생각하며 액션을 잠시 망설였다.
마윈은 조폭보스J의 집중력이 떨어진 틈을 타서 몸만 빠져나가 공항으로 내뺏다. 창졸간에 귀국 비행기 티켓마저도 짐 속에 두고 나왔다. 수중에 가진 거라고는 여권과 카지노에서 딴 돈에서 다시 택시비를 주고 남은 몇 백 달러 뿐. 중국행 비행기티켓을 살 수 없었다. 마윈은 국내선 터미널로 달려갔다. 아무 비행기나 제일 빨리 이륙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LA발 델타항공 여객기에 황급히 몸을 실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마윈은 한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고하며 몸을 떨었다.
“그 때 조폭보스J에게 꺼냈던 ‘인터넷’은 사실 그게 뭔지도 모르고 던진 미끼였다. 인터넷이라는 단어는 영어강사시절 우연히 주워듣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인터넷이 컴퓨터 부품의 일종인 줄로 알고 있었다(웃음).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조폭보스J는 부하들을 공항으로 보내 나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할 것을 명했다. 지금 생각하여도 내가 그때 무작정 제일 빨리 이륙하는 여객기를 잡아탄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던 같다. 한 발 빨라 목숨은 구했으나 그때 라스베가스에 두고 온 짐은 아직 구해내지 못했다.”
마윈은 LA에서 다시 시애틀로 날아갔다. 시애틀에 사는 친구를 만나 중국행 티켓을 살 돈을 빌리기 위해서였다. 친구는 시애틀에서 아주 조그마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마윈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진짜 인터넷’을 접했다. 친구가 마윈에게 무엇을 찾으려면 컴퓨터에 무엇을 입력한 후 엔터자판만 두드리면 그 무엇이 모니터에 즉시 나타난다고 알려주었다. 마윈은 ‘Beer’를 입력했다('Beer'는 마윈 생애 최초로 인터넷에 사용한 단어).금방 독일맥주, 미국맥주, 일본맥주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중국맥주는 단 한 병도, 단 한 캔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11월 12일 중국의 최대 쇼핑행사인 광군제를 맞아 광저우 반위구의 전자상가 앞에는 상인들이 광군제 전야제를 열고 마윈 알리바바 회장과 류창둥 징둥 창업자을 위한 2개의 제단을 차려놓고 '대박'을 기원했다.ⓒ연합뉴스
하늘을 나는 인터넷 실크양탄자, 차이나엘로페이지
“무슨 007영화 찍느냐며, 아무리 내가 정색하고 이야기해도 곧이듣지 않겠지. 누가 믿어 줄까나.”
마윈은 시애틀발 베이징착 중국민항CA 이코노미클래스에서 앉아 라스베가스, 카지노, 조폭보스, 탈출, 인터넷으로 이어지는 거짓말 같은 첫 미국여행길을 반추했다. 마치 자신이 아라비안나이트속의 양탄자를 타고 과거와 미래, 실체와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것 같았다.
그로부터 20년 후, 2015년 9월 23일 미국을 국빈방문중이던 시진핑 주석은 시애틀의 보잉공장을 찾아 연설하면서 중국민항CA가 보잉기 300대를 구입하는 계약을 했다고 밝혔다.
그때 시진핑 바로 뒷줄 단상의 중국기업사절단 대표로 임석했던 마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시 20년 전으로 되돌아간 1995년. 귀국의 하늘길에서 마윈은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신드바드의 모험', '알라딘과 마술램프', 부와 권력과 미녀와 마법 등이 살아 움직이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방불케 하는 기발한 상상력의 실크양탄자 한 장을 짜내었다.
땅의 천당, 항저우로 내려온 마윈은 곧장 주변의 친구와 제자들 모두 24명을 모았다. 자신의 상상력의 실크로 짠 실크양탄자, ‘중국최초의 인터넷회사’ 설립구상에 열성을 다해 설명했다. 하지만 대부분 “샌님이 미국을 한 번 갔다 오더니만 정신이 좀 이상해진 건 아닌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한 제자만이 그게 뭔지 몰라도 한번 시험 삼아 해보고 안 되겠다 싶으면 금방 빠져나오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나 마윈은 우선 치고 달렸다(Hit and Run). 그러자 24명 모두 뒤따라 달렸다 엉겁결에.
1995년 4월, 마윈은 여동생과 제부,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2만 위안을 추렴하여 중국최초의 인터넷회사 ‘하이보 인터넷’를 창업했다. 곧 이어 뒤따라온 24명의 친구 및 제자들과 함께 중국최초의 홈페이지 서비스 사이트 ‘차이나엘로페이지’를 개설했다.
마윈표 인터넷 양탄자 ‘차이나엘로페이지’의 주요 사업은 중국기업들의 홈페이지를 제작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창업당시 중국에서 인터넷은 어디까지나 믿으면 있는 것이요 믿지 않으면 없는 것이었다. 3개월 후 상하이를 필두로 중국전역에 인터넷이 보급되기 전까지 의심 많은 중국인대부분은 마윈을 허무맹랑한 사기꾼으로 취급했다. 초창기 차이나엘로페이지는 미국의 지인에게 연락을 하여 인터넷상의 해당내용을 인쇄하게 한 후 그것을 다시 중국으로 팩스로 보내달라고 해서 확인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외판원 체구와 얼굴 보세요, 꼭 빌어먹게 생겼지요”
1996년 인터넷이 중국 전역에 널리 보급되자 홈페이지제작업체 선두주자 차이나엘로페이지는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마윈의 주 수입원은 1페이지당 2만 위안씩을 받는 홈페이지제작 수수료와 도메인과 웹 호스팅 서버 임대수입이었다. 첸장 율사사무소, 항저우 제2기 공장, 우시의 샤오홍엔, 베이징의 궈안축구팀이 차이나엘로페이지의 대문페이지 광고주가 되는 등 하이보 인터넷의 영업이익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해 9월 대형국유기업 항저우전신이 등록자본금 3억 위안으로 인터넷사업에 뛰어들었다. 알라딘의 요술램프라면 모를까, 마윈의 회사는 등록자본금의 1만 5천배에 달하는 거인 항저우전신과 경쟁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마윈은 협상 끝에 차이나엘로페이지를 항저우전신에 흡수합병시키는 대신 자신은 항저우전신의 전체지분의 21%를 차지했다. 그런 후 마윈은 항저우전신의 인터넷부문 영업부장 자격으로 중국 각지를 떠돌며 판촉활동을 벌렸다.
중국중앙TV 다큐프로그램 '마윈서생'에는 2 대 8로 빗은 머리에 배낭을 어깨에 걸친 마윈이 중국중앙TV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장면이 나온다.
“저는 차이나엘로페이지를 팔러온 사람인데요...”
직원 하나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일어나서 마윈을 문밖으로 밀쳐내며 투덜댄다.
“경비원들은 도대체 뭐하는지 모르겠다. 저 따위 외판원이 함부로 들락날락하게 놓아두다니”
그 다큐프로그램에는 간부직원 하나와 방문객이 차를 마시며 나누는, 다화(茶話) 한 토막이 흘러나온다.
“저 외판원 체구와 얼굴 좀 보세요, 꼭 빌어먹게 생겼지요.”
“그러게요.”
줌인-줌아웃하며 숲과 나무를 함께 보는 법에 달통하다
마윈은 신이 나지 않았다. 부모 친지들은 마윈이 철이 들어 국유기업의 중견간부가 되었다고 대견해 했지만, 스스로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비효율 저생산성의 국유기업 철밥통 수뇌부는 마윈의 참신한 개혁안을 번번이 묵살했다. 마윈은 자신이 용의 꼬리로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뱀의 머리가 되어 그 뱀을 천하제일의 용으로 웅비시키는데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1997년 9월 마윈은 베이징의 국무원 대외무역경제합작부(필자 주2)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으며 항저우전신에서 완전히 손을 털기로 결심했다. 항저우전신에 자신의 지분 21%를 주당 0.23위안의 염가로 매각해버렸다. 항저우전신에 7백만 위안이나 벌게 해주었는데 그의 수중에는 단돈 10만 위안만 떨어졌다.
인터넷 실크양탄자, 차이나엘로페이지를 가슴에 묻은 마윈은 세상 끝까지 그를 따라가겠다는 충성파 직원18명을 이끌고 상경했다. 마윈팀은 중국IT영재의 메카, 베이징 중관춘 아파트에서 합숙하며 대외무역경제합작부의 홈페이지개발에 몰두했다. 중국의 모든 것을 DB화하여 부활하는 중화의 굴기를 세계만방에 선양한다는 사명감에 부풀었다. 1998년 말 대외무역경제합작부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한 최초의 국무원 중앙부서가 되었다(지금도 대외무역경제합작부의 후신인 상무부의 홈페이지는 국무원 각부 위원회 중 최첨단 홈페이지로 정평이 나있다.)
마윈은 베이징생활 15개월 동안 중앙핵심부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거시미시적 사고방식을 체득했다. 카메라로 줌인-줌아웃을 하듯 거시적 시야와 미시적 시각을 오가는, 특유의 다이내믹한 경영전략전술을 함양했다. 마윈은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프로의식과 장인정신을 가진 스페셜리스트인 동시에 거시적 시야와 폭넓은 지식을 습득하여 나무와 숲을 함께 볼 줄 아는 힘을 가진 제너럴리스트로 성장했다. IT강국 중국과 자신의 미래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만리장성의 낙서에서 노다지 인터넷 금맥을 발견하다
“만리장성에 오르지 못한 자는 사나이가 아니지." -마오쩌둥
“만리장성에 올라서도 한쪽 면만 보면 사나이가 아니지" -문협
1999년 1월 1일 아침 마윈은 18명의 직원들을 이끌고 베이징 동북부 빠다링 만리장성에 올랐다. 빠다링 명칭은 원래 사통팔달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베이징체류 15개월 동안 한 번도 시가지를 벗어나지 않았던 그들인지라 모처럼의 외출에 신바람이 났다. 일행 중 하나가 만리장성 벽돌에 각인된 “000여기에 오르다”, “사랑해QQ” 등 무수한 낙서들을 가리키며 뭐라고 외쳤다.
순간, 마윈은 낙서들에서 노다지 인터텟 금맥을 발견했다. 천리, 만리, 수만리, 수억 만리, 사통팔달로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가는 금맥. BBS(전자게시판)(필자 주3)시스템을 보았다. 소상인 소기업은 벽돌을 구성하는 모래흙과 같다. 무수한 모래흙알갱이를 인터넷으로 뭉치면 벽돌이 되고 다시 벽돌들을 사이트로 접착시켜 쌓으면 사통팔달 IT만리장성이 된다. 인터넷경제의 특색은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무찌르고 빠름으로 느림을 압도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고래라면 소기업은 새우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영에서 소기업 새우는 대기업 고래의 먹이가 되거나 고래가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먹고 산다. 수많은 영세 무역상들이 거대무역회사에 도태되고 있다. 다양성과 변화, 개성화의 인터넷 세계에서는 다양하고 다채롭고 독창적인 제품과 서비스로 승부를 건다.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듯 인터넷 앞에 만업은 평등하다. 인터넷의 가치단위 페이지뷰앞에 대기업과 소기업도, 국유기업과 민영기업도, 외자기업과 내자기업도 모두 평등하다. 인터넷이야말로 돈도 정보도 인맥도 없는 소상인 소기업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블루오션이다. 인터넷의 블루오션은 경쟁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얻어지며, 여기에는 높은 수익과 빠른 성장을 가능케 하는 어마어마한 기회가 존재한다.
그렇다. 인터넷을 소상인의 구원자, 소기업의 수호신으로 만들자. 의리의 협객은 힘없는 약자들을 위해서 사악한 고수들을 제압하고 무림천하를 평정한다. 영원한 무협지마니아 마윈은 스스로를 소상인 소기업들을 독과점 거대기업의 횡포에서 구해내는 상림천하의 협객, 즉 상경계의 상협으로 자리매김했다.
소상인 소기업을 위하여, 상협 마윈, 길을 나서다
하얀 눈이 21세기 상협 마윈 일행의 하산 길을 차렵이불처럼 덮기 시작했다. 만리장성에서 내려오는 계곡 길 옆 솔가지위에 소복소복 눈송이가 내려앉은 모습은 의외로 아름답다. 눈 내리는 날이 귀한 장강 남녘 항저우 청년들은 서설의 아름다움에 함몰되어갔다. 어느새 발길이 숙소로 정한 여관에 닿은 줄도 몰랐다. 그들은 큰 방 1개를 빌어 합숙하기로 했다. 저녁식사 후 마윈은 직원들을 모아놓고 오래전부터 생각한 바를 토로했다.
“지난 15개월 동안 여러분의 노고를 충심으로 치하한다. 대외무역경제합작부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제 여러분은 세 갈레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첫째, 야후(yahoo.com.cn)로 가는 길이다. 여러분이 야후로 간다면 내가 강력 추천할 것이며 야후는 반드시 여러분을 채용할 것이다. 더구나 야후의 보수는 최고수준이다.
둘째. 신랑(sina.com.cn)이나 소후(sohu.com.cn)로 가는 길이다. 여러분이 원한다면 추천할 것이다. 거기의 대우 역시 정상급이다.
셋째, 항저우로 돌아가 나와 함께 일하는 길이다. 일단 회사는 내 집에다 차린다. 월급으로 800위안만 주겠다. 회사에서 도보로 5분 이내의 위치에 방을 구해라.
여러분에게 3일 동안 생각할 시간을 줄 테니 각자 세 길 중에서 한 길을 택하라.
마윈이 말을 끝내자마자 직원들은 하나 둘 자리를 뜨더니 18명 모두 밖으로 나가버렸다. 큰 방에 홀로 남은 마윈은 실망과 고독의 심연으로 급전직하했다. 큰 방이 사막 같았고 자신은 그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마른우물 같았다. 차 한 잔 마시는 만큼의 시간이 흐르자 18명이 한꺼번에 방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마윈을 에워싸고 일제히 외쳤다.
“우리는 모두 그대 마윈에게로 간다.”
마윈은 눈물을 쏟으며 그들을 포옹하며 포효했다.
“동지들이여, 나는 영원히 여러분께 절대 미안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우리 모두 고향 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0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자. 우리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한평생 한 번도 후회하지 않는 한세상에서 하나뿐인 회사를 만들어보자.”
창밖은 눈이 쌓여 몽환의 은세계를 이루었다. 그들은 베이징 배갈 이과두주 한 병씩을 들어 건배를 외치며 병째로 들이켰다. 모두 머리를 싸매고 장중한 가사 ‘진심영웅’을 목 놓아 불렀다. 그들은 통음하면서 통곡했다. 그들은 그날 밤 언행을 전혀 기억 못한다. 항저우로 돌아가 다음날부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도 몰랐다. 그러나 그날 밤, 술도 뜨겁고 마음도 뜨겁고 노래도 뜨거웠던 것만을 기억한다. < 계속 >
1) 지금 저장사람들은 ‘마윈 총재’와 ‘이우 시장’이 저장성을 대표하는 양대 명물이라고 자랑한다.
2) 2003년 3월, 후진타오 정부는 대외경제부문을 관장하던 대외경제무역합작부와 국내산업업무를 관장하던
국가경제무역위원회를 통합, 상무부로 확대 개편했다.
3)불특정 다수의 사용자들이 컴퓨터를 통해 정보와 편지를 교환하고 대화하거나 프로그램을 서로 공유하기 위한 시스템
글/강효백 경희대 중국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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