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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귐의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운영진
더불어 살기 위해 힘쓰는
‘송학 공동체’
글: 김현진 목사님
복음과 상황 1994. 6월호
성도(聖徒)의 교통(交通)은 교회의 본질이다. 그래서 교회는 공동체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기존 교회가 너무나 공동체성을 상실한 나머지 그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공동체 교회’(Community Church)라고 부르는 교회들이 한국에도 많이 생겼다. 송학감리교회도 교회의 공동체적 본질을 강조하는 공동체 교회 중의 하나다. 스스로 ‘송학 공동체’라고 부른다 .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농촌 교회는 우루과이라운드 때문에 방향을 못 잡고 갈팡질팡 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농촌 현실의 상황 속에서 교회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하면서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가고 있는 희망적인 공동체 교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중 하나인 의림지로 유명한 제천시에서 북동쪽으로 약8km 떨어진 충북 제원군(提原郡) 송학면(松鶴面) 시곡리(柴谷里)에 위치한 기독교감리회 송학교회.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 신림면과 남쪽은 제천시와 접해 있다. 송학마을은 중부 산간의 농촌 지역으로 경지 면적도 많지 못하며 대부분이 빈농으로 이상적인 농촌 목회를 할 만한 곳이 못되는 지역이다.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는 이 마을의 중앙에 들어 선 송학교회. 주위에는 교회에서 운영하는 비닐하우스 단지가 있다. 그 앞마을 쪽으로 송학 유아원과 송학마을 전체가 더불어 함께 사는 ‘한 살림 마을’ 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의 송학교회가 있기까지 엄태성 목사(62세)의 지도력과 노고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전 감리교신학교를 졸업반 때, 신앙 체험을 통해 농촌 목회를 결심한 엄 목사. 그는 당시 대전에서 배민수 목사가 운영했던 한국 기독교 농민학원에 자원 입학해 농촌지도자 전문과정을 마쳤다. 농촌 선진 지역 현지답사 프로그램에서 지금의 안산시가 된 반월의 청석골에 채영신 여사의 묘지를 참배케 되었는데 그때 엄 목사 자신도 농촌에 뼈를 묻기로 작정했다.
기독농민학원을 졸업, 대전 시내 판자촌에서 근로자를 위한 목회를 했다 ´64년에 자원하여 오지인 소백산의 하늘 아래 첫 동네 용진교회에 부임한다. 부임 한 달 만에 그곳 오지가 너무 희망이 없어서 도망 나왔다가 한 달 만에 다시 들어가서 종으로 섬기는 훈련을 했다. 그 후 그는 대전 감신 학장 이호운 목사의 추천으로 일본에 있는 아시아 농촌 지도자 양성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농촌 목회에 필요한 전문 기술과 훈련을 거친다. 그때 그는 배낭을 메고 일본 전역에 있는 선전 농촌의 구석구석을 돌면서 그 특징과 프로젝트를 연구했다. 그때 엄 목사는 발전하는 지역과 교회에는 오랫동안 헌신한 희생적인 지도자와 그를 뒷받침 하는 협동 그룹, 그리고 종교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농촌 공동체 교회를 시작하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그는 농촌교회는 어느 곳이든지 가겠다고 교단 사무국에 자진 요청했다. 그리하여 ´67년 8월 35세의 나이로 오늘의 송학감리교회오 부임하게 되었다. 송학교회는 50년대 초에 개척되어 ´67년까지 네 명의 교역자가 거쳐 갔다. 엄 목사가 부임할 당시 전임 교역자의 스캔들로 인해 교역자와 교인 간에 심한 마찰로 이미 폐교된 상태였다.
엄 목사는 우선 지역사회 안에 있는 교회가 종합적인 센터 구실을 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지역 사회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 당시 송학마을 제천시에서 8km 떨어진 근교이며 인구는 7백96명, 1백28호 중 1백4호가 농가였다. 경지 면적은 호당 0.9 ha로, 이것으로는 생활 유지와 자녀 교육, 문화생활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감자, 고추, 마늘, 양잠, 옥수수, 담배 등이 주요 농산물이었다. 부락민들은 거의 고리채가 있고 자포자기에서 오는 음주 행위와 가정불화가 많았다. 인근 생활 경제권인 제천 시민들은 모두 소비 인구들로서 주·부식과 일용잡화는 전부외지에서 반입하고 있었다. 송학마을은 근교에서 농사를 짓고 있으면서도 상업적인 농사를 못하고 있었던 것 이었다.
지역조사 결과 엄 목사는 주민들이 머리를 써서 필요한 농산물을 알맞게 생산하다면 소득증대의 전망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엄 목사의 구상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들의 동의를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교인 배가 운동, 교회와 지역사회를 위한 지도자 양성, 자주자립 기반 조성을 위한 신용협동체 조직, 농외소득 사업의 연구와 개발, 영육 생활 향상으로 사회봉사 활동 전개 등의 다섯 가지 당면 목표를 정했다. 이와 같은 기본 목표 달성을 위해서 엄 목사는 자신부터 가나안 농군학교와 신용조합 연수원, 국립 사회복지 연수원에서 전문교육을 받았다. 교회신도들 가운데서 지도력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 비용을 들여 양성했다. 그들은 현재 송학교회와 지역사회의 핵심적 일꾼으로 활동하고 있다.
엄 목사는 교역자아기보다는 농사꾼의 한 사람으로서 밭에서 함께 일하면서 교회를 이끌었다. 첫 농촌 교회 프로젝트로 양계를 시작하여 십일조 양계회를 조직했다.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가리키고 계란 판매로 교회 건축을 시도하고자 함이었다. 그때 교인들은 엄 목사를 보고 “당신 닭목사요?” 라고 하면서 반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건축. 협동정신, 철저한 신앙생활을 고취시키면서 부임 3년 만에 20여명의 교인들을 독려하여 첫 번째 목표였던, 7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교회당을 자력으로 건립했다. 그 재원은 바로 양계였다. 이때부터 송학교회는 송학 지역에 복음의 뿌리를 깊숙이 내리면서 교인들과 마을 사람들을 위하여 같은 사역을 전개해 왔다.
인격을 담보로 대출 해 주는 송학 신협
신용협동조합은 서로 잘 아는 사람들끼리 사회적 경제적 지위향상을 위해 상부상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데, 송학마을에서는 ´69년 8월, 12명이 1천1백 원의 자금을 가지고 송학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주민들의 경제적 빈곤을 극복하여 악성 고리채를 추방하고, 생산자금 확보, 자녀 교육비와 보건비 지원, 교인 상호간에 공동체 의식 함양, 비뚤어진 인생관을 바로 잡기 위함이었다. 처음 2년간은 잘 되지 않았으나, 지도자를 양성하고 월례회 교육에 힘쓰고 정식 인가를 받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산협이 잘되자 마을에 있던 새마을 금고가 스스로 해산하고 송학 신협과 합치게 되었다 초기에는 엄 목사의 사모인 안양자 사모가 경리를 보기도 했다. 나중엔 불신자들끼리 문호를 개방해 달라고 건의해 와서 정관을 고치고 조금씩 성장해 왔다. 1천1백 원으로 시작한 신협은 모범 농촌조합으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조합원 4백51명이 4억 원을 저축하여 매월 1억 6천여 만 원이 수납되면서 4백51만원의 이자가 생기고 있다. 현재는 신협 자산이 20억 원이며 조합원은 8백여 명에 이른다. 전담 직원3명이 있으며 이들은 교회를 위해서도 봉사하고 있다.
송학 신용조합은 신협장학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총 3백61명에게 장학금을 수여했다. 신협 영농회를 구성, 영세조합원의 자립 기반 조성을 위해 한우 양돈, 양계, 양토 특용작물 자금을 “인격을 담보”로 대출해 주고 있다. 송학 신협의 모든 행사는 반드시 교회에서 하고 있다. 선교 목적으로 조되었기 때문에 임원진 구성과 조합원 분포도 교인 대 비교인의 비율을 3대1로 하거 있다. 또한 교인들의 어지간한 금전문제는 신협에서 거의 다 해결해 주고 있다. 이를 통해 비신자이던 조합원이 교회에 나오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감리교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 또한 빈민은행(Poor Bank)의 창시자였다. 그는 소액의 자금을 모금하여 빈민은행을 설립하고 근면한 영세민에게 저리로 융자해 주었으며 매년 5천 파운드의 매상고를 낼 만큼 큰 사업가가 되었다. 엄 목사는 웨슬리와 같이 마음이 뜨겁고 구령열에 불타는 전도자는 지금도 웨슬레 같은 목회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어린이들의 보금자리 ‘송학 유아원’
송학유아원은 일손이 많이 달리는 농번기에 각 가정의 취학 전 어린이들에게 교회 시설을 개방해서 하루 종일 보살펴 주는 어린이 복지 사업으로, '68년부터 시작 되었다. 그 당시는 교회 재정이 빈약하던 때라 점심은 도시락을 가져오게 하고 보모는 교회학교 여교사가 교대로 맡았다. 마을 사람들이 이 일로 인해 매우 고마워 했다고 한다. 그러기까지 많은 봉사와 희생이 따랐다. 그러다가 69년 아동복리법이 제정되면서 정식 인가를 받아 지금까지 운영되어 오고 있다.
'76년 80평의 교육관을 신축할 때 몇 달간 중지된 때가 있었다. 당시에 아이들이 ‘자기들의 집’ 이 없어졌다고 세수도 하지 않고 밥도 안 먹는다며 부모들이 찾아 와서 빨리 짓자고 건축을 거들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일로 인해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마을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서로 간에 담이 허물어졌다고 한다. 현재 80여 명의 어린이와 3명의 직원이 있으며 개원 이래 수료생이 8백여 명이나 된다. 이젠 이곳 유아원 졸업생이 교사를 맡고 있다. 신선화 교사는 “이곳 마을의 학부모와 어린이들이 매우 좋아하고 있다. 이곳에서 봉사 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고 말한다. 유아원을 통해 송학교회의 교회학교 유년부는 부흥되고 있는 편이다.
농한기 부부싸움을 없앤 부업
송학교회의 당면목표와 기본계획 가운데 네번째가 농외소득 사업의 연구와 개발이다. 이 과제를 위해 송학농가 부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몇몇 업종들을 농가 부업 형태로 운영해 왔다. 현재는 상당한 기술 축적과 착실한 기반이 다져져 농외소득에 적지 않은 보탬이 되고 있다.
겨울철에 농민들은 일감이 없는 고로 화투와 술로 싸움이 벌어지고 가정 파탄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 목사는 자신의 닭과 닭장 시설을 전부 처분한 후 시설을 개조해서 부녀자들을 위한 편물 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이 나중에 송학농가 부업단지가 되었다. 중고 편물기 10대를 구입하고 강사 2명을 초빙하여 마을 부녀자 20명에게 74년2월부터 기계 편물 기능 교육을 시작했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수출품 보세 가공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은 자기 집에 기계를 설치해 놓고 틈나는 대로 하는데, 남편들이 그러한 아내의 내조에 매우 고마워하고 있다고 한다. 어려운 살림에 맞벌이를 해거 가계에 보탬이 되는 것도 있겠지만 농한기에 바쁘게 지냄으로써 보다 건전한 생활이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산업사회는 기계로 만들 수 없는 수공예 제품의 경우 부가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기에 전망이 밝다고 한다. 현재 20여명의 가전주부들(20-30대)이 집안일을 하념서 틈틈이 일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송학교회의 농가에서는 신도들의 공동체 운동으로 ‘자연란’ 이라고 부르는 계란을 생산하고 있다. 자연란은 농촌의 자연환경에서 약품이나 첨가제를 섞지 않고 만든 톱밥 발효 사료와 신선한 풀을 먹이며 재래식으로 키운 닭들이 낳은 달걀을 말한다. 자연란은 고소한 맛이 뛰어나며 단백질과 철분이 많고 콜레스테롤 함량은 적은 이상적 영양식품이다. 일본의 기후현 나가지마 씨가 30여 년 전부터 경영하는 독특한 양계법이다. 엄 목사가 '84년부터 시험사육에 성공한 후 회원을 모집하여 기술교육을 마치고, '86년 5월부터 시작했다. 현재 20여 가정에서 매일 5 천 개의 자연란이 생산된다. 서울, 대전, 수원, 제천의 소비자들에게 직거래 형식으로 공급되고 있다. 자연란 양계로 생기는 발효계분은 무공해 과채류를 생산하여 소비자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자연란으로 인해 송학 마을로 들어오는 돈은 매월8백-1천여 만 원 정도 이며 십일조 예상액은 매년 1천만 원 이상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발효 사료는 본부에서 만들어 농가까지 배달하고 계란을 수집하여 엄선한 후 출하된다. 인근 농촌 교회가 추천하는 농가에도 보급하여 지도해주고 있다. 엄 목사는 이 과제를 송학에 정착시키기 위해서 일본의 나가지마 농장을 세 번이나 방문하여 전문 기술을 익혀 왔다. 앞으로 자연란에서 양질의 난황유를 만드는 일과 반숙계란으로 만들어 시중에 출하하는 문제도 연구 중에 있다. 소비자들의 요청에 의해 자연란 양계 방식으로 사육한 육계도 한 가정에서 사육하여 공급하는데 호평을 받고 있다. 일본의 경우 자연란은 자동판매기로 구입이 되며 소포로 배달도 한다. 우리나라도 점차 소요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자연란 양계는 현대인들의 건강문제에도 기여한다.
무공해 농촌사랑, 애농 공동체
현재 송학교회 내에는 ‘애농공동체’(愛農共同體) 라는 모임이 발족되어 있다. 우리 농토와 농업을 사랑하는 농민들이 송학교회를 중심으로 상부상조하여 무공해 유기 농산물을 가공하고 판매하는 사업 공동체. 그동안 엄 목사의 지도로 교인들이 무공해 농산물들을 판매하여 농가 소들을 올려 왔는데, 그 기술과 농산물이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자 ‘송학 애농공동체’를 통해 보다 조직적으로 곡류와 잡곡, 채소 등의 무공해 농산물을 가공 판매하고 있다. 회원들은 송학교회 교인들과 강원도 등 외지에 있는 사람들로, 품목별로 각자가 생산 한 대 모아서 ‘송학 애농공동체’ 의 상표로 도시에 직거래 출하한다.
또한 애농공동체의 회원이 되면 유기농법에 대한 전문적인 기술지도와 정보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소규모 농가라도 전문 유기 농산물을 생산하여 ‘송학 애농공동체’로 보내면 애농 공동체가 판매 유통을 담당한다. 소농가로서도 안전한 성장을 꾀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서울 이랜드 유통 사업부에서 애농공동체의 농산물을 대량 입수 하고 있다. 이외에도 경실련, 미우회, 한삶회, Y.M.C.A.등지에도 나가고 있다 물품이 달려 다 응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