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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재지음
초중교 교과서에 미술과목이 있다. 그때는 뭔지 잘모르겠지만 그냥 어떤 화가가 어떤 시대에 이런 그림을 그렸다. 화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보다 미술사에 더 치중해서 배운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을 보는 안목도 없고 뭘 봐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 책의 작가는 예술가의 숨소리를 들어보고 작가와 편하게 마주앉아 수다 떠는 것처럼 재밌게 작품을 바라보라고 한다.
미술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와 소통하고 작품과 대화하며 공감해나가는 경험이 하나 둘 쌓이다 보면 어느새 미술은 소울메이트가 되어 당신 곁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들어가며..>
에드바르트 뭉크
뭉크는 평생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어릴때 어머니와 누나를 잃고 사랑했던 여인들과의 헤어짐등으로 늘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뭉크는 자신의 정신병은 작품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81세까지 살며 평생 우울하게 죽음의 두려움으로 힘들어 했을 뭉크가 가엽기도 하다.
"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뭉크가 30세에 그린 <절규>는 본인의 어릴때 경험을 그린 것이다. 뭉크는 친구들과 산책하면서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고 공포에 휩싸였다고 했다. 사실 이 풍경은 일몰의 모습이었다.
일몰의 풍경은 아름답다. 하지만 뭉크에게는 늘 우울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일몰의 풍경이 공포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프리다칼로
멕시코의 국민화가로 유명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몇년전 프리다칼로 전시회를 다녀왔다. 그림에서 그녀의 고통스런 삶이 그대로 느껴졌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두번의 큰 사고를 당했는데 첫번째 사고는 경전철과 충돌한 것이고, 두번째 사고는 디에고와 만난 것이다."p34
"나는 원래 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지금 내 안에 흫러넘치는 에너지를 느끼고는 무언가 다른 걸 한다는 건 의미가 없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그림을 시작헸다."p35
에드가 드가
드가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등과 함께 인상주의자로 분류되지만 야외보다 전통적인 실내작업을 좋아했다.
그는 독신남으로 살았다. 예술이냐, 사랑이냐. 중간은 없었던 이분법적 사고의 틀속에서 드가는 둘 중에 하나밖에 취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 예술을 선택한다. 순수하고 완벽한 예술늘 투구하기 위해선 자신의 열정을 오로지 예술에만 불태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본능인 사랑을 포기한다.
드가가 그린 19세기 말 발레리나는 지금처럼 고고한 춤을 추는 그런 직업이 아니었다. 발레는 하루하루 어렵게 버티는 빈민가 소녀들이었다. 불우한 현실을 바꿀 유일한 빛은 발레리나로 화려하게 성공하는 것뿐이었다.
무대뒤 화려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발레리나. 그 뒤편의 삶은 어둡고 탁했다.
"일단 오페라에 들어오고 나면 창녀로서 운명이 결정된다. 그곳에서 고급 창녀로 길러지는 것이다."67p
드가는 부르주아 남성들에 의해 상처받은 하류층 여성들의 애환을 있는 그대로 직시했다.
빈센트 반고흐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노란색을 많이 사용해서인지 따뜻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노란색을 사용한 이유가 술 중독이었다니....
반 고흐는 노란색에 푹 빠진 화가라고 한다.
"노란 높은 음에 도달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를 속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이말을 알코올 중독 수준이 너무 심각하다며 자신을 나무란 의사에게 했다고 한다.
1805년 녹색요정이라고 불리우는 술 압생트는 당시 파리에서 대유행이었다. 반 고흐는 이 술에 중독되었다. 압생트의 주원료인 향쑥의 주요성분인 산토닌의 과다복용시 부작용은 황시증이었다.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거다.
노란색이 아닌것도 노랗게 보이고 노란색은 더욱 샛노랗게 보이는 것이었다.
예술혼을 불태운 것도 모자라 정신착란까지 일으켜 자신의 귀를 자르게 된다.
스스로 어쩔 수 없는 나. 내가 무섭다!
반 고흐의 아름다운 작품은 술중독과 정신착란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으로 가득찬 화폭, 마르지 않는 아름다움을 간직한 여성, 사랑의 황홀경이 모자이크 파도와 함께 넘실거리는 <키스>.
고급스럽고 우아한 작품을 그린 것과는 달리 그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의 미술계를 완전히 뒤집은 희대의 반항아'였다.
아버지가 귀금속 세공사라 작품에서 황금빛 금박을 많이 사용한 것 같다. 가난했지만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한다. 그러나 30대에 가족을 잃으면서 기존 미술계의 답습을 거부하고 새로운 분리주의를 만든다.
"시대에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분리주의 전시관 제체시온을 세운다.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인간은 3단계로 정신이 진화된다고 말한다. 1단계은 삶에 놓인 고통이라는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사막을 걸어갈 수 있는 끈기정신을 가진 '낙타'이다. 2단계는 단순히 고통을 인내하는 것을 넘어 세상의 문제와 맞서싸우는 투쟁정신을 가진 '사자'이다. 궁극의 3단계는 1~2단계 정신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와 규범을 만들어내는 창조정신을 가진 '어린아이'이다. p118
클림트도 고난의 사막을 걷고 투쟁했고 마지막에는 아이와 같은 천진난만함으로 자신의 삶을 놀이로 승화시켰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기>였다.
폴 고갱
서머셋 모옴 <달과 6펜스>의 주인공이기도 한 폴 고갱은 평범한 증권사 직원을 그만두고 화가가 되었다. 안정된 싦을 과감히 버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다.
이기적인 면에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시선이 있지만 뒤늦게라도 자신의 꿈을 찾았다는 긍정적인 시선도 있다.
폴 고갱은 직장을 그만 두고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다.
"지금 나는 용기도 재능도 부족하다. 곡물 창고로 가서 목을 매는 게 낫지 않은가 매일 자문한다 그림만이 나를 지탱해준다."
고갱이 간절히 원했던 것은 '고갱만의 예술세계 발전'. 자신만의 개성넘치는 유일무이한 세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것은 고갱이다 '라고 말 할 수 있는 예술의 영역을 간절히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그 꿈을 이루게 된다.
고갱은 문명을 벗어난 '원시와 야생'이 살아있는 최후의 공간 타히티로 들어가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예술가의 삶은 기나긴 고난의 길이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도 바로 그런 길이리라. 정열은 생명의 원천이고, 더 이상 정열이 솟아나지 않을 때 우리는 죽게 될 것이다. 가시던불이 가득한 길로 떠나자. 그 길은 야생의 시를 간직하고 있다. p163
에두아르 마네
마네는 땅 부자 귀족의 자제로 전통방식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하지만 전통을 파괴한 그림 <올랭피아>를 그리는데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마네는 당시 <악의 꽃>을 쓴 시인 샤를 보들레르를 존경하며 사상적 스승으로 여겼다.또한 1855년 만국박람회가 파리에서 열렸는데 그때 일본 도자기에 쌓여 온 포장지. 목판화 우키요에(속세를 그린 그림)에 충격을 받았다. 이에 마네는 보들레르와 우키요에의 영향으로 전통을 탈피한 <올랭피아>의 거작을 탄생시켰다.
20세기 근대회화의 아버지 세잔은 "우리의 모든 르네상스는 <올랭피아>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했다. 세잔 뿐 아니라 모네, 르누아르, 드가 등 모든 인상주의 화가들이 마네를 드높이 치켜세웠다.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1860년대 부르주아들의 생활상을 풍자하는 그림으로 미술은 과거의 향수에서 벗어나 비로소 시대와 함께 호흡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네가 발견한 미래로 가는 문인것이다.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가 미래의 회화로 가는 문을 찾았다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이 바로 모네이다.
모네는 반항정신을 타고났다.
자연을 그린 바르비종파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관점으로 풍경화를 그리던 부댕과 용킨크 두 화가의 영혼 실린 가르침으로 '모더니즘'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모네는 마네로부터 새로룬 회화 코드를 전수받는다. 평면성과 단순성이다.
'캔버스는 평평하다. 원근법을 버리고 평평하게 그리자. 단순함은 아름답다. 디테일을 버리고 원색으로 그리자' 마네가 알려준 이 코드로 자신의 그림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물에 비친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사물이 지닌 고유의 색은 없다. 사물의 색은 '빛'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사물이 지닌 고유의 형은 없다. 사물의 형은 '빛'에 의해 변하는 것이다. 'p209
모네는 광학을 자신의 회화로 끌어렸다. 마치 카메라처럼 자연을 본 그대로 순수하게 그리고 싶어했다. 그리고 바람은 적의 심장, 즉 광학을 훔쳐오면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인상, 해돋이>는 그야말로 미술사에 빛나는 보물이다.
폴 세잔
20세기 회화의 씨앗!
인상주의 매너리즘에 빠진 파리 미술계에 인상주의를 넘어 전혀 새로운 미술을 하겠다는 화가들이 등장한다. 쇠라, 고갱, 고흐, 툴루즈 로트레크, 그리고 세잔이다. 이들을 후기 인상주의자라고 부른다. 20세기 전반기 회화의 양대산맥인 마티스와 피카소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선배가 바로 세잔이다.
세잔은 제대로 된 미슬 교육을 받지 못했고 오로지 독학으로 배웠다. 박물관에 있는 대가의 그림을 모사하며 대가의 기술적 노하우를 체득했다. 또한 자연과 빛을 그림의 주제로 볼 수 있게 영향을 준 사람은 바로 피사로였다.
세잔은 피사로를 '너그러운 신 같은 사람'으로 추앙했다.
"나는 견고하고 영원한 인상주의를 만들고 싶었다. 박물관의 예숥처럼."p230
'자연의 본질과 조화와 균형' 세잔이 만들어 낸 작 품 <사과와 오렌지>
세잔은 사과의 겉이 아닌.속을 통찰하고자 했다. 모든 사물은 원기둥, 구, 원뿔 등으로 꿰뚫어보았다.
노인이 된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 산>을 통해 자연의 본질만을 담아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정신적인 만족, 그것은 작업만에 내게 줄 수 있는 것.' p240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발전하지 못했고 자연에 불어넣는 풍부하고 멋진 색이 내 그림에는 부족하다."
대가들도 자신의 작품에는 항상 부족함을 느끼는 것 같다.
파블로 피카소
미술계의 천재, 파블로 피카소는 야수주의 리더 앙리 마티스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마티스는 피카소의 천재성을 알고 자기보다 12살이나 어린 후배에게 아프리카 조각을 알려줬다.
피카소는 마티스가 추구한 세잔과 원시를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에 그려넣었다. 그것이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다. 세잔의 <수욕도>와 마티스의 <푸른 누드>의 영향을 받았다. 또한 세잔의 다시점 형태를 분해해서 그린것이다.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람."
피카소는 세잔을 매우 존경했다. 입체주의의.창시자, 세잔의.진정한 후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나는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는 이들을 혐오한다. 회화는 탐구이며 실험일 뿐이다." p255
한편 마티스는 피카소가 '형태'연구를 할 때 그가 연구한 것은 바로 '색'이었다. 하지만 피카소가 승승장구할 때 마티스는 절망하고 있었다.
" 침대가 흔들리고 목에선 조금 높은 톤의 울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p258
마티스는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빠졌다. 1910년 38살에 스페인으로 떠난다. 그곳에서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가지가 있는 실내> 작품으로 새로운 영감을 승화시킨다.
피카소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작품세계에서 마티스의 <가지가 있는 실내>에서 돌파구를 찾는다. <기타>라는 작품에서 종합적 입체주위라는 타이틀을 얻게된다.
아방가르드 선도자인 마티스와 피카소는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 결쟁자이면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기본적으로 오직 마티스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은 여건이 허락하는 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해. 우리 둘 중에 한 사람이.죽으면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결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를 잃게 될 테니까."p283
마르크 샤갈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 그는 1887년 러시아의.작은 마을 비테츠스크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당시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였다.
"아버지의 눈은 파란색이었다. 하지만 손은 굳은살로 덮여있었다.(중략) 나도 벽에 기대앉아 일생을 그렇게 살 운명이었을까? 혹은 물건이 담긴 통을 운반하며 살아야 했을까? 나는 손을 보았다. 내 손은 너무도 부드러웎다. 나는 특별한 직업을 찾아야 했다. 하늘과 별을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일. 그래. 그것이 내가 찾는 것이다.(중략) '예술가란 무엇인가?' 하고 나는 내게 물었다."p269
"파리에서 나는 미술학교를 다니지고 선생을 찾아다니지도 않았다. 그 도시는 그 안의 모든 것, 하루의 모든 순간들이 그 자체로 선생이었다."
상상과 꿈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이것을 고민하던 그에게 사물과 풍경을 이리저리 조각내어 그리는 표현방식은 안성맞춤이었다. p272
샤갈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영원한 스승 '빛의 화가' 렘브란트를 만난다.
샤갈은 인상주의에서 밝고 다체로운 색을, 야수즈의에서 원색의 힘을, 입체주의에서 수정같이 아름다운 표현을, 마지막으로 렘브란트를 통해 화폭에 빛을 만들어 내게 된다.
샤갈의 대표작 <생일>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두둥실 떠오르게 만든다."나는 그냥 창문을 열어두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그녀가 하늘의 푸른 공기와 사랑과 꽃과 함께 스며들어왔다. 온통 흰색으로 혹은 온통 검은색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내 그림을 인도하며 캔버스 위를 날아다녔다."
연인과의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줄만 알았던 샤갈은 유대인으로 차별과 핍박에 시달려 어둡고 슬픈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샤갈은 생애 끝에서 인류애와 평화로 빛날 미래를 그렸다.
바실리 칸딘스키
최초의 추상미술의 창조자. 그는 화가 뿐만 아니라 미술이론가이자 교육자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팔방미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생활에 있어서는 좋은 평판을 얻지 못했다. 유부남이면서 13년을 사귄 제자 가브리엘 뮌터를 말없이 냉정하게 떠나버린 바람둥이었다.
엄친아였던 칸딘스키는 1896년 서른살에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열린 프랑스 인상주의 전시에서 모네의 <건초더미>연작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모네가 사용한 다채로운 색채들에 무척 감탄하고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미술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과거와 현재, 전통과 새로움, 보수와 진보, 미래의 패권을 위해 끝없이 전투를 벌이는 때에 칸딘스키는 전통과 분리를 모두 거부한다. 그는 팔랑크스 미술학교를 세웠고 그곳 학생으로 뮌터가 입학하면서 만나게 된다.
1903년부터 1908년까지 5년간 유럽을 여행하며 칸딘스키는 <푸은산>과 뮌터는 <아즐렌스키와 베레프킨>을 그린다. 당시 가장 핫했던 야수파스타일을 적용했고 뚜렷한 검은 윤곽선과 고정관념을 파괴하는 색체를 사용했다.
그들이 원하던 예술과 자연,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찬 시간과 공간 속에서 5년간 여행으로 숙성된 칸딘스키의 영감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 다.
"화실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말할 수 없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림 한폭을 대하게 되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것에 매료되어 그 자리에 멈추어섰다. 그 그림에는 주제가 없으며 유추할 만한 어떤 오브제도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화면은 색체의 찬란한 얼룩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이젤 옆에 비스듬히 세워 둔 나의 그림이었다. 그때 한가지 생각이 뚜렷해졌다. 사물의 객관성과 묘사는 나의 그림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것들은 나의 그림에서 해롭기까지 하다는 점이었다."
칸딘스키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구상회화가 아닌 '마음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추상화를 그리게 된다. 화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을 그리는 것은 오히려 감정 표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 클래식을 들을 때 정체불명의 형태와 색이 마음속에 춤추며 떠돌아다니는 그 느낌 그대로 회화를 옮기고 싶었던 거다. p305
마르셀 뒤샹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따라하는 건 체질에 맞지 않았던 뒤샬른 갓 태어난 잊체주의에 변형을 가한다. 입체주의에 '움직임'이라는 요소를 추가로 집어넣은 것이다. <계단을 내려오는 나체II>에서 움직이는 입체주의를 선보였다.
하지만 이 작품은 당시 새로운 미술을 하겠다는 입체주의, 야수파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외면당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방세를 내고 식비를 대고 여가 시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그런 작고도 조용한 작업이었어. 예술가들의 세계에 질려버렸거든. 정말 지긋지긋했지"
이에 뒤샹은 수많은 미술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분석하고 이를 통해 '안티 미술'을 실현한 자신만의 '미술콘셉트'를 창조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는 우연히 항공기 전시회를 보고 "이제 회화는 끝났어. 누가 이 프로펠러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는.미술', 즉 개념미술을 탄생시킨다.
"예술가만이 유일하게 창조 행위를 완성시키는 것은 아니다.작품을 외부세계와 연결시켜주는 것은 관객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품이 지닌 심오한 특성을 해독하고 해석함으로써 창조적 프로세스에 고유한 공헌을 한다.".p326
뒤샹은 리처드 머트라는 이름으로 <샘>을 출품 하지만 반응은 냉정했다.
"그는 평범한 물건을 가져와 새로운 관점과 제목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것이 원래 가지고 있던 기능이 상실되는 장소에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는 이 오브제로 새로은 개념을 창조한 것이다. "p331
<샘>으로 대표되는 레디메이드 개념이 뉴욕 미술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