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파병(1354년)과 안우
1354년
1354.06.07 안우를 전리판서(典理判書)로, 경천흥을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임명하였다.
1354.06.13 원(元)이 유탁·염제신·권겸·원호·나영걸·인당·김용·이권·강윤충·정세운·황상·최영·최운기·이방실·안우 등과 서경(西京)의 수군(水軍) 300명을 불러들이고, 또한 날랜 군사를 모집하여 8월 10일까지 연경(燕京)에 집결시켜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라고 지시하였다.
참고) 유탁, 염제신이 파병군의 리더이다.
1354.06.21 파병장수들 봉군을 받다. 인당(석성부원군), 이권(오원부원군), 나영걸(금성군), 손불영(돈성군), 김경(의성군), 김용(안성군), 안우(오성군), 최원(용성군), 인안(연성군), 최안수(함성군), 구정(면성군), 조충신(상원군). 그 나머지 다른 장졸에게도 모두 작위와 직급을 올려주고, 자원해서 응모한 군사들은 모두 3등급을 승급하여 벼슬을 주었으며,백관(百官)들과 각 종파의 승도(僧徒)들에게는 차등을 두어 말을 내게 하여 군사들이 싼 값으로 말을 살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출정하는 군관(軍官)들이 백성들의 말을 빼앗거나 혹은 강제로 말을 사는 일이 많았으므로 행성(行省)이 금지하였지만 그치지 않았다. 최영은 호군에서 대호군으로 승급.
* 봉군을 내릴 때 지명의 앞글자에 성군(城君) 을 붙여 내리는게 가장 흔하다.
* 오성군(鰲城君) 에서 오성은 오산(탐진)을 지칭함. 봉군을 주면서 진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적이 있는지 의문시됨. 조사 필요.
1354.07.04 유탁과 염제신 등 40여 명이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元)으로 가는데 왕은 영빈관으로 행차하여 친히 열병하고 이들을 전송하였다. 원의 황제가 부른 사람들은 모두 명망이 있는 장상(將相)들이었으며 또 정예병이 모두 원정에 나섰으므로 숙위(宿衛)가 허약해졌다. 왕은 이를 우려하여 서해도(西海道)에서 궁수(弓手)를 모집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 한편 심양과 연경에 거주하는 고려인 중 23,000명을 모병하여 고우의 장사성 토벌에 참여 (그 당시 엄청 많은 고려인들이 원나라에 거주한 듯함)
1354.10.22 전 우정승 염제신 귀국
1354.11.30 파병장수 인안이 원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태사 탈탈(톡토)이 군사 8만 명을 이끌고 고우성(高郵城)을 공격하면서 유탁등 우리 원정군과 연경에 거주하는 본국인 총 23,000명을 선봉으로 삼았습니다. 성이 곧 함락될 즈음에 달단(韃靼)의 지원노장(知院老長)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공을 독차지하는 것을 꺼려서 명령하기를,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이 성을 취하자.’라고 하면서 군사를 지휘하여 퇴각시켰습니다. 그날 밤에 적이 성을 굳게 지키면서 방어 설비를 하였기 때문에 다음 날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탈탈을 참소하여서 황제가 회안(淮安)으로 유배보냈습니다."라고 하였다.
○인안(印安)이 원(元)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태사(太師) 탈탈(脫脫, 톡토)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우성(高郵城)을 공격함에, 유탁(柳濯) 등 정벌에 나간 장수와 사졸 및 우리나라 사람으로 연경(燕京)에 있는 자 총 23,000명을 선봉으로 삼았습니다. 성이 함락되려 하는데, 달단지원로장(韃靼知院老長)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공을 오로지 하는 것을 꺼려하여 명하여 말하기를, ‘오늘은 날이 저물었으니, 내일 성을 취하자.’라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지휘하여 물러났습니다. 그날 밤에 적이 벽을 견고하게 하고 준비를 갖추었으므로, 다음날 그를 공격하였지만 공략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어떤 사람이 탈탈을 참소하여 황제가 탈탈을 회안(淮安)으로 유배를 보내니, 이후로 남쪽의 적이 날로 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는 육합성(六合城)을 함락시키고, 또 회안로(淮安路)로 옮겨서 방어하다가 이관(李權)·최원(崔源) 등 6명이 전사하였고 최영(崔瑩)은 힘껏 싸우다가 몸에 창을 여러 번 맞았습니다.”라고 하였다.
1355년
1355.05: 정남만호 권겸(權謙)과 원호, 인당이 원에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남쪽 지방의 적이 나날이 강성해지고 있으며, 우리 군대는 육합성(六合城)을 함락시킨 후에 회안로(淮安路)로 이동해 방어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1355년 5월 안우는 현지에 장수로 복무 중리하 추정. 최영은 1355년 귀국. 대부분 장수는 1355년 5월 귀국한 듯함.
1356년
4월18일: 지도첨의 차포온이 황제가 왕에게 하사한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에서 돌아왔다.
5월 3일 정원군 왕균과 대호군 김진이 황제가 왕에게 하사한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에서 돌아왔다.
5월 7일 전 밀직 안우가 황제가 왕에게 하사한 의복과 술을 가지고 원에서 귀국하였다.
* 장사성 파병(1354년 7월 )후 1년 10개월 만인 1356년 5월 귀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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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7년 장사성은 1357년 원에 투항하여 스스로 태위가 됨
1358.07 강절행성 승상 장사성이 공민왕에게 예물을 바치다
1359.07 태사 장사성은 고려에 예물과 사신을 보냈고 이에 공민왕은 친절하게 접대함.
1368년 장사성은 주원장에게 포로로 잡혀 처형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시대 사료 DB (https://db.history.go.kr/goryeo.main.do) → 고려사, 고려사 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