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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42
9월4일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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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있습니까?>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것도 모자라 벼랑끝까지 내몰리셨던 예수님이셨는데, 카파르나움에서의 상황은 정 반대였습니다. 예수님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분임을 파악한 군중들은 갖가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그분께 데려옵니다. 그분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도 한 사람 한 사람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하시며, 단 한명도 제외시키지 않고 치유의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충만한 은총과 자비가 예수님을 통해 당신 백성 위로 흘러넘치도록 퍼부어졌습니다. 은총의 소낙비가 아낌없이 쏟아 부어진 것입니다. 바야흐로 구원의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갖은 횡포를 부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던 마귀들은 예수님의 큰 빛 앞에 힘을 잃고 나가떨어졌습니다.
마치 혜성처럼 등장하셔서, 존재 자체로 위로요 기쁨이 되어주신 분, 평생 따라다니던 불치병을 낫게 해주신 분, 자상한 위로의 눈길로 희망을 주신 분, 깊은 슬픔과 고통 속에 머물러 있던 동네를 순식간에 축제의 고을로 바꿔주신 분, 예수님 앞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예수님만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는 자신들을 세세대대 지켜주실 영원한 보루요 희망이신 분임을 파악했기에,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꼭 붙들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놓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을 떠난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제발 떠나지 말아주십사고 간곡히 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볼때, 참으로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나자렛에서 겪으셨던 배척과 실망을 돌이켜보니,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환대는 참으로 큰 기쁨을 선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순례자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간절한 청을 뒤로 하고, 또 다른 미지의 세상을 향해 지체없이 떠나십니다.
예수님의 발길은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나자렛에서 카파르나움으로, 카파르나움에서 유다 지방으로, 유다 지방에서 팔레스티나 전역으로, 팔레스티나 전역에서 이방 세계 전역으로...
예수님은 애초부터 좁은 시냇물에서 머물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강으로, 더 넓은 바다로, 온 세상 전체로 나아가셔야 할 크신 존재셨습니다. 그분은 경계나 국경, 민족이나 인종 사이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존재셨습니다. 그분의 복음과 사랑의 메시지는 세상 방방곡곡 인류 전체에게 전해져야 할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카 복음 4장 43절)
혹시라도 오늘 우리는 이 좋으신 주님을 나 혼자만, 우리들만 독차지하고자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좋으신 분을 어떻게서든 전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우리 공동체의 사정은 어떠합니까? 발길 닿는 곳마다 예수님처럼 크게 환대받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 존재 자체로 행복해하며, 어떻게서든 우리와 같이 있고 싶어합니까. 우리를 보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옷자락을 붙들고 있습니까?
존재 자체로 환영받고 있습니까? 혹시라도 정반대 상황은 아닙니까?
우리가 존재 자체로 부담스러운 존재, 반대 표양으로 민폐를 끼치고 있지는 않은지요? 제발 우리가 빨리 떠나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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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떠나기 가장 완전한 때>
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한 선교사가 여러 해 동안 수많은 열정을 쏟았음에도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는 배에는 휴가를 얻어 아프리카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 미국의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되었을 때 은은하게 울리는 군악대들의 예포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부둣가에 나와 있었습니다. 배에서 대통령이 내려올 때 거기에는 붉은 주단이 깔렸고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을 맞이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지나가자 붉은 주단은 걷히고 군악대의 나팔소리도 멎었습니다. 그 뒤를 선교사 홀로 고독하게 내려왔습니다.
‘사냥을 갔다 오는 대통령은 저렇게 환영을 받는데, 큰아들과 둘째 아들 그리고 부인마저 잃고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나를 맞이하는 환영객은 아무도 없구나.’하는 생각으로, 고독감과 실패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 아들아! 네가 아직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군악대의 나팔 소리가 문제가 아니라 하늘의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내가 맞이해 주마. 붉은 주단이 문제가 아니라 황금의 유리길을 깔고 내가 친히 너를 마중 나오마. 사랑하는 아들아 끝까지 충성하라!”
이 말씀을 들은 선교사는 크게 뉘우치고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언제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그것은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였을 때일 것입니다. 외국에서 공부하는 분들은 학위를 따지 못하고 들어갈까 봐 공부하면서도 노심초사합니다. 결과물이 없다면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닌 것입니다. 선교사는 아직 떠날 때가 아니었음에도 지쳐서 먼저 그 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은 언제 그 자리를 떠야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카파르나움에서 시몬의 장모를 치유하시고, 병자들을 일일이 다 고쳐주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자 군중이 찾아와서 떠나지 말고 더 머물러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잡을 때가 바로 떠나야 할 때인 것입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영광을 받기 시작하면 이제 남은 것은 교만해지는 일뿐입니다. 나를 받아들이고 함께 머물기를 원한다면 이미 그 사람들에게 해야 하는 일은 다 한 것입니다. 그러면 또 내가 필요한 곳으로 가는 것이 낫습니다.
제가 첫 본당으로 부임하던 날 재밌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자분들이 약간은 저를 맞이할 준비가 안 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조금은 당황하는 기색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저를 맞이하기 위해 먼저 도착한 친구 신부님이 부임 축하를 이미 다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당신이 부임하는 게 아니라고 설득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도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짧은 기간이지만 신자들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었던 그 시기는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부임할 때 보다는 떠날 때의 느낌이 더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 때는 누구나 똑 같이 환영받지만 갈 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년 반 동안 함께 했던 신자들을 떠날 때 신자분들은 많이도 울어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저도 눈물이 나왔습니다. 떠날 때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또 나도 가기 싫지만 가야만 할 때가 가장 행복한 이별의 순간인 것 같습니다.
만약 너무 오래있어서 ‘올해는 안 가시나?’라는 신자들의 표정을 본다면 이 얼마나 마음이 안 좋겠습니까? 혹은 아직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서 떠날 때 신자분들이 별로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슬픈 이별일 것입니다. 떠나기 위해 가장 완전한 때는 바로 서로 눈물 흘릴 수 있는 때인 것 같습니다. 그러려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인정받기 시작할 때 떠나야합니다. 우리는 그 일을 하러 이 세상에 보내진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 나만 울고 많은 사람은 웃었습니다. 내가 죽을 때 나만 웃고 많은 사람은 울 수 있도록 사십시오.”
참으로 어떻게 떠나야하는지 잘 말씀해주신 것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떠나는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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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지혜가 아닌 믿음>
어떤 수녀님이 입회하여 애기 수녀님이었을 때의 일이랍니다. 당시에는 일이 많아서 그 수녀원에 거의 남아있는 사람 없이 소임 때문에 바빴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수녀님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게 된 것입니다.
원장 수녀님은 그 아픈 수녀님을 병원에만 두는 것이 가슴 아파서 다시 수녀원에 모셔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수녀님들이 다 모인 가운데 좋은 지혜를 청했습니다. 대부분의 수녀님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하면서 그 수녀님의 병수발을 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계속 모셔두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원장 수녀님은 수녀님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그래도 아픈 수녀님이 우리 가족인데, 가족이 돌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하면서 안타까움의 표현을 했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대부분의 수녀님들 마음에 그 수녀님을 수녀원에 모셔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바쁜 와중에서도 조금씩 고생하며 그 수녀님 병수발을 들 결심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원장 수녀님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병원에서 수녀님이 사망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든 수녀님들은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수녀님들의 지혜가 아니라 원장 수녀님을 통해 밝혀준 하느님의 뜻을 따라주기만을 원하셨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란 것이 얼마나 하찮으며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지 깊이 뉘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의 능력치를 최소한으로 낮추어 모든 일이 당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시려 합니다. 바오로도 이것을 깨닫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답지 않게 코린토인들에게 갔을 때 약하고 두렵고 떨렸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를 통해 큰일을 이루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며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그저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하기만 하면 당신의 수액으로써 열매를 맺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왜 그러냐, 본당 신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냐, 주교님이나 교황님이 왜 그러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이 얼마나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습입니까?
대부분의 하느님 뜻은 우리의 ‘머리’를 통해 옵니다.몸이 원하는 것대로만 하면 망하고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가정은 가장을 통하여, 성당은 본당 신부를 통하여,교구는 교구장님을 통하여, 전 교회는 교황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지혜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머리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도 유학을 가라고 할 때부터 지금 교구청에 들어오는 것까지 저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발령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그런 발령을 받으면 그 명에 순명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내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보고 나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결과를 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래서 자기 생각을 버리고 당신 지혜를 따라주는 이들을 통해 당신 구원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구약의 요셉은 끊임없이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감옥에 억울하게 갇히는 등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당합니다. 그렇게 외국에 끌려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왔을 때 그를 통해 이스라엘 온 백성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지혜는 당장의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를 나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버리고 순명하는 정신을 기를 때 그 사람을 통해 깜짝 놀랄 일을 우리에게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도록 우리 자신의 능력을 믿지 말고 오롯이 그분의 뜻에 순명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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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4,38-44 :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심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고 육신의 병고를 완치시켜 줌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을 알게 해주는 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수님의 치유기적을 통해서 알게 된다. 병의 치유의 의미는 바로 하늘 나라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미 조금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궁극적인 의미는 당신이 바로 참된 구원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분임을 알려주시는 가르침이다. 그래서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에 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가셔서 열을 꾸짖으시자 열이 가셨다고 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으로서 모든 것을 주재하신다는, 다스리신다는 증거이다. 우리도 모두 죄의 열병을 앓고 있다. 이 열의 종류도 다양하다. 성을 내는 열, 죄악과 불륜이라는 열병의 종류도 많이 있다.
예수님을 모시고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십사고 간청하자. 그러면 우리의 열병이 곧 가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우리가 머리와 가슴으로 그분을 모시면 그분은 우리 안에 있는 쾌락의 열을 식혀주실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당신을 기쁘게 해드릴 일을 할 수 있도록 영적인 것들도 강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손을 잡도록 하자. 그래서 그분 손이 우리를 마음의 병과 마귀의 사나운 공격에서 해방해 주시기를 바라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의 명으로 자신의 병이 완치되자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39절)는 것이다. 즉 자신의 병이 예수께서 베푸신 은혜로 낫게 되자 즉시 일어나 예수님과 주위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우리가 더욱 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부인은 건강의 회복이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이 쓰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이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이 역경을 딛고 지난날의 처지보다 더 나은 생활의 처지, 학식이나 재능, 지위에 있어 더 나은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편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우리는 그 표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의 모습이며,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의 삶이 이웃을 생각하고 또 더 나은 처지가 되었을 때에 진심으로 봉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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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수원영성관 관장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알렉산드로스 임금은 이집트를 정복하고 한 곳을 바라보며 “저 곳에 내 이름을 따다 붙인 도시가 하나 생기면 좋겠다!”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얼마 뒤 다시 그곳을 방문하니 ‘알렉산드리아’라는 커다란 도시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신하들이 임금의 말을 듣고 그의 뜻대로 임금의 이름을 따다 붙인 도시를 세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권위가 있으셨다고 말합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다는 뜻은 그 말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만듭니다. 새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만큼 큰 권위는 없습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말을 한다고 해서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30년 동안 같은 이유로 부부 싸움을 해도 하나의 버릇도 바꾸지 못할 수 있습니다. 말에 권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이 어떻게 권위를 지니게 되는지 그 비밀을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십니다. 마귀는 은근히 주님을 찬미하듯,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사람들 앞에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베드로는 같은 고백을 해서 교회의 수장이 되고 하느님 나라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군가의 칭찬으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시는 분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지키려면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초탈해야 합니다.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그 성령의 불은 세속과 육체의 욕망으로 약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애착을 벗어난 사람의 한마디 말이 수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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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루카 4,38-40)
복음서들에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들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주신 일이기도 하고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계시하신 일이기도 하고),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는”(묵시 21,4)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신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병자들을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도 복음을 선포하셨고, 치유나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기서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자를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은 단순히 ‘병을 잘 고치는 의사이신 분’이 아니라,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만물의 주님이신 분’이라는 계시입니다.) 사람들이 ‘해 질 무렵에’ 온 것은, 안식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을 각각 따로따로, 특별하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손을 얹으시어’ 라는 말은 안수를 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랑이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요한 10,3)
목자가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다는 것은, 양들을 하나하나 다 알고 있고, 하나하나를 제각각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만 언급되어 있지만, 목자에게 초점을 맞추면,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하나하나 다 알아듣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즉 ‘내 이름을’ 알고 계시고, ‘내 사정을’ 알고 계시고, ‘내 기도를’, 또는 ‘내 목소리를’ 알아들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기도할 때, 내가 누구인지 소개할 필요가 없고, 내 사정을 세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 기도를 왜 하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기도’란, 내 사정을 모르고 계시는 주님께 그것을 알려 드리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내가 잘 듣기 위해서 하는 것이고, 또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내가 잘 받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이 좋은 예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아파서 누워 있다는 것은 누가 알려 드리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으로 가신 것은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고, 시몬의 장모는 식사 준비를 지휘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집이 대단히 크고 넓은 집은 아니었을 것이고, 가족 중에 누군가가 아파서 누워 있으면 금방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를 위해서 예수님께 청한 것은, 자신들이 시몬의 장모를 걱정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즉 사랑을 나타내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함께 받을 준비를 한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병자 자신이 청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청했다는 것은, ‘사랑’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40절의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병자 자신이 스스로 걸어서 온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병자들은 가족이나 친지나 친구가 데리고 왔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치유의 은총’은, 병자들만 받은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받았습니다. (치유의 기쁨은 병자들만 누린 것이 아니라, 병자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병자 치유’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병자들을 고쳐 주시기만 하고, 병 자체를 없애지는 않으셨을까?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주님이시니까, 병 자체를 없애실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해 주셨다면 인류 전체가 병고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인간이 겪는 생로병사의 고통은 여전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안 믿는 사람들만 하는 질문은 아니고, 믿는 사람들도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곧장 옮겨 놓으시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온갖 고생을 하게 하셨을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가시면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지켜 주셨고, 인도해 주셨습니다.(탈출 13,21) 그러나 가나안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신들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여정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시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은 우리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고,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과 고통이 사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대단히 불공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숙제 같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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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해주신 어머니께서, 제가 사제서품을 받을 때 신신 당부하셨던 것은 "기도는 구걸하는 것이다"라는 것과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청해야 많은 기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 기도를 바탕으로 사제로서 잘 지낼 수 있으니 항상 겸손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어머니의 말씀은 더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사제로서 신자들의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얼마나 도움을 받고 있는지, 그리고 무언가가 이뤄진다면 그것은 결코 저의 개인적인 능력 때문이 아님을 나날이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 복음에서도 병고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시는 예수님의 기적을 들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범을 바라보게 됩니다.
첫째는, 많은 사람들이 합심해서 장모의 병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저희 어머니의 가르침대로, 주님께 다가가 결정적인 기도를 청하는 겸손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독의 행동이 아닌 단체의 행동일 때 그 힘을 더욱 크게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고나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뿐 아니라 아는 이들이 합심해서 기도해야 쉽게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병이 나은 부인이 중병에서 완치되자 “일어나서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부인은 은혜를 받았다고 소란을 떨거나, 개인적으로 만족해하며 평안히 안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겸손하게 봉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우리는 종종 개인의 소망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지만,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는 마음을 하느님께 표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무언가를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 보다 더 크게 봉사하기 위해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고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선사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랑이신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기쁜 소식을 들고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며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이러한 희망을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증언합니다
“이 복음은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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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승환 베드로 신부님]
<내가 가장 아끼는 보석>
오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에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유다의 여러 회당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십니다.
우선 예수님은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시몬의 장모를 치유해 주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열이 떨어지라고 '명령'했다는 보기 드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열을 적대적이고 반항적인 하나의 권능으로 보셨고, 그 악의 세력을 어제 복음에 이어 물리치고 계십니다.
병은 죄와 함께 이 세상에 들어왔고, 이제 예수님은 그 원래의 상태를 복구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영혼과 육신은 온전히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따라서 시몬의 장모를 비롯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부터 치유를 받아야 할 존재이고, 주님과 함께 미구에 영육으로 고통이 없는 영광에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은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고통 중에 시달리던 그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구원의 손길이 그들 앞에 서 계심을 직감하고 주님께 달아드는 것입니다.
마치, 바르티메오처럼 육신과 영혼의 눈이 뜨이기를 희망하면서... 이제 안수를 통해서 놀라운 치유의 기적이 벌어집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리 덮는 것은 이 치유의 원천이 저 높은 곳,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리키며, 이 은총의 내적 효과는 바로 성사를 상징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허약하고 병든 육체를 고쳐주시고 나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시고자 그 동네를 떠나게 되십니다.
고향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한데 비해 카파르나움의 군중은 예수님을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그러나 그분은 떠나셔야했습니다.
당신의 사명은 아버지의 나라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기에 다른 이들에게도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의 말씀처럼 복음은 온 세계에서 열매를 맺으며 널리 퍼져 나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오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나의 생활은 과연 어떠한지를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시몬의 장모나 가파르나움의 병자들처럼 우리 모두는 불완전한 인간들이며 주님의 자비로움과 사랑 안에서 치유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늘 감사하면서, 언제나 평화를 전하면서 시몬의 장모처럼 봉사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주님께서 한 곳에 안주하지 않으셨듯이, 폐쇄적인 자아를 부수고 사람들에게 다가가 주님을 증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 신앙인이 아니라, 참으로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주님을 가슴 가득 품고 세상을 향해 그분의 사랑을 외쳐야 할 것입니다. 육체적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 그 깊은 곳까지 치유해 주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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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는 많은 이가 몰려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곳까지 찾아와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응대하지 않으시고 길을 떠나십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다 보면 복음 선포의 사명보다 편안한 신앙생활을 바라게 됩니다. 신자의 사명과 책임은 외면한 채, 그저 복을 받기만 바라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온갖 병이 치유되고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곤 하지요. 그러다 보면 이기적인 신앙심이 생기게 되어 자신만, 자기 집단만 잘되도록 기도하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은 없어지게 됩니다.
이 사회가 어떻게 되든지, 옆 사람이 굶든지 아프든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되지요. 오늘날에도 많은 이가 이런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늘 새로운 길을 떠나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만 청하는 기도의 자세를 정화해 나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내가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다고 여겨질 때, ‘주님을 원망하기보다는 그 아픔 속에서도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이웃을 관심 있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 말씀처럼 우리도 안정된 현실에만 머무르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확산하려고 늘 길을 떠나는 순례자의 자세를 지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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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늘로부터 파견되시고, 세상으로 파견되신 주님, 그러니까 아버지에 의해 하늘로부터 세상으로 파견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을 따라 이러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겁쟁이거나 이기주의자이며 심지어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고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파견되어 가야 합니다.
▪먼저 주님처럼 하늘로부터 파견을 받아야 합니다.
파견을 받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자기의 결정으로 가는 것이고 그것은 선교가 아니라 자기사업을 위한 출장이거나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파견을 받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파견을 받아야 임무수행을 위한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루 종일 고된 복음 선포를 하신 후 꼭 사람들을 떠나 외딴 곳으로 가 기도를 드렸고 거기서 힘을 얻으셨습니다.
우리도 기도 안에서 매일 주님의 파견을 받고 기도 안에서 매일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것은 파견 받지 않고 셀프파견 하는 것, 다시 말해서 갈까 말까, 간다면 어떻게 갈까 혼자 궁리하다가 자기 결정으로 가는 것이고 그래서 곧 힘을 잃게 됩니다.
선교를 포함하여 하느님의 일을 아주 열정적으로 하다가 Burn out(소진)되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런 분들은 백이면 백 기도하지 않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인 줄 알고 했는데 어느 새 자기의 일이 되었고, 하느님께 힘 받지 않고 자기 힘만으로 하다가 소진된 겁니다.
우리의 힘은 힘이 있을 때는 마냥 갈 것 같지만 소진되게 마련인데 청춘의 착각과 자신自信의 착각, 곧 자기를 믿는 착각을 합니다.
▪다음은 우리도 파견되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떠난다는 것이고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성당에만 가두고 우리도 성당에만 머뭅니다. 매일 미사가 끝날 때마다 ‘주님과 함께서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이렇게 파견을 받는데 우리는 종종 주님은 성당에 놔두고, 복음은 들지 않은 채 그냥 집으로 들어와 머물다가 주일이 되면 또 다시 성당에 가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으로 가족들에게 파견되지 않았고 하여 아직까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아이들과 배우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직장으로 동료 직원들에게 파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했어도 영세자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신 다음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셔서 장모를 고쳐주시고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수많은 병자와 악령 들린 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 사람들이 붙잡는데도 다른 마을로 떠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회당에 칩거하거나 한 마을에 안주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한 회당의 회당장이 아니라 선교사이시고, 한 고을의 의원이 아니라 흩어진 양떼를 찾아가는 목자시기 때문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주님과 함께 복음을 들고 떠나는 우리가 되고 떠나는 오늘이 되게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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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루카 4,38-44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전도 여행을 떠나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가지 마세요.’
매달리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환한 웃음 지어주며
‘고마웠습니다.
당신의 사랑 잊지 않을게요.
다른 이들에게도
주님 사랑 나누어야지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기쁘게 내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 발걸음마다
주님 축복 가득하기를.
지치고 외로울 때
나와 함께 했던 시간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세요.’
자꾸 자꾸
뒤를 돌아보는 떠나는 이에게
힘과 용기를 주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 속 따뜻한 자리
언제나 그 안에 머물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주님께서 머무셔야 할 자리
주님께 내어드리고,
주님 손길 필요한
누군가 마음의 자리를 찾아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함께 있고픈
마음 간절하지만,
부르심 받아 떠나는 길에
행여 마음 무거울까,
안녕히 가시라고
웃음 머금은 인사 나누며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애틋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주님을 향한 서로의 눈빛 안에
언제나 가득할 것이기에
기쁘게 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에게 주어질
새로운 사랑의 만남을 축하하며
환한 낯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작은 헤어짐은
또 다른 작은 만남으로 이어지고
헤어짐과 만남이 모이고 모여,
떠나는 이 보내는 이
서로를 이어주며
모두가 우리가 될 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울려 퍼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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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하느님의 뜻이 뭘까요? 저 두레박 사제는 이렇게 알아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한없이 사랑과 축복을 주시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과 축복은 밑이 없는 컵”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고민과 갈등이 있더라도 입술로 하느님을 찬양하고, 마음으로 감사하고,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다음에 하느님의 뜻이 고운님들에게 이루어지기를 참고 또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테살로니카 1서 5장 16-18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고운님 모두에게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해 질 무렵에 당신께 나아온 질병을 앓은 한 사람, 한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병 고침을 받고, 또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다스림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질병은 원망의 대상이 아니라, 은총의 대상으로, 질병은 고통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 나아와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의 능력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입기 위하여….
첫째,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분한마음(분심) 들지 말고 졸지 말고 똑바로 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 들으라고 한 말씀이 아니라, 고운님 자신에게 들으라고 한 말씀입니다.
둘째, 오늘 주님의 성체를 모시면, 내가 예수님을 닮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의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모시고 자리에 들어가 예수님이 되어 스스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능력을 입을 수 있는 순간은 옵니다. 반드시 꼭 옵니다. 아멘.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참고 견디면서 간절하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 신앙인인 고운님들은 신앙으로 싫증 났던 사랑이, 지루했던 노래가, 무료했던 기다림을 눈물로 마침표를 찍는 것, 그리고 감사로 회심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주님, 이 성수로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보호하시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한 사람 한 사람 축복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이여! 오늘 성수를 찍고 성수의 기도를 똑바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은총이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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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44)
♧♧ 시편 47편 2절…
"모든 민족들아,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하느님께 환호하여라."
* 모든 민족들아...
야훼 하느님을 찬양해야 할 이들로 이스라엘 백성을 포함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시편 47편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가 곧 온 세상 사람들의 임금이심을 찬양하는 노래임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 손뼉을 쳐라. 기뻐 소리치며...
여기서 ‘손뼉을 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하는 외면적 행동입니다.
그리고 ‘기뻐 소리치며...’ 이라는 말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의 감정을 못 이겨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뜻합니다. 한편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자발적으로, 그리고 역동적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라고 촉구하는 다윗의 말은 메시아로 말미암아 온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나아가 순명하게 됨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47편 3절…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경외로우신 분,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 주님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고 경외로우신 분...
여기서 ‘경외롭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레’는 ‘두렵다’ 또는 ‘두려워하다’ 는 말입니다. 이는 곧 하느님께서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분이시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마땅히 경외해야 할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시편 68편 36절. 참조)
* 온 세상의 위대하신 임금이시다...
‘위대하신 임금...’이란 문자적으로 ‘임금의 임금’이란 의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니 오직 하느님만이 온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온 누리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라는 것입니다.(말라키서 1장 14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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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분이 자동차 사고로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환자가 깨어나기 힘들 것으로 예측했고, 상태는 점점 더 나빠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말씀과 달리 점점 호전되었고 어느 날 드디어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이 환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군가가 계속 손을 꽉 잡아주었습니다. 이 신체접촉을 느끼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고 이렇게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손을 꽉 잡아준 사람은 당시에 실습 나오는 의대생이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깨어나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서 매일 저녁 병원을 마칠 때 들려서 손을 꽉 움켜쥐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작은 신체접촉이 삶을 붙잡는 힘이 된 것이지요. 신체적 접촉은 그 어떤 치료 약보다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한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손길 한 번이 더 큰 효과를 본다고 합니다.
1960년대, 새끼 원숭이가 엄마의 신체접촉 없이 잘 자랄 수 있는지를 실험했습니다. 비록 엄마 원숭이의 신체접촉은 없었지만 모든 환경을 완벽하게 마련해주었지요. 그러나 이 새끼 원숭이는 잘 자라지 못했고 심지어 다른 원숭이보다 빨리 죽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요? 인간 역시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신체적 접촉은 생명의 영약입니다.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치유해주었습니까? 복음은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셨다고 말합니다.
질병을 앓는 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어떻게 고쳐주셨습니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고쳐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과 말씀 한마디로 아픈 사람을 충분히 고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시고 또 손을 얹으면서 고쳐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한 번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또 아픈 곳을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도 아니겠지요. 단순히 병이 치유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치유의 손길을 받은 사람이 그 뒤로 어떠한 질병의 고통 없이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질병의 고통도 있었을 것이고, 결국은 이 세상의 삶을 마치는 죽음의 고통도 겪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병이 치유되는 것 자체에는 큰 의미를 두기 힘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당신에게 생명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어렵고 힘들 때 당신의 손을 우리가 꼭 잡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손을 꽉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떤 어려움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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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마음}
아마 사람들은 비관론자보다는 낙관론자를 더 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관론자가 낙관론자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아마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분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80세가 넘을 때까지 비관론자로 살았다면 어떨까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변화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매일 내용을 달리해서 21일 동안 계속하면 비관론자도 낙관론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을 비관론자로 살아왔던 84살의 남자가 이 방법을 통해 낙관론자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인간의 성격 구조까지 바꿉니다. 감사의 놀라운 힘을 굳게 믿으면서 매일 아침 눈을 떠서 3가지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해보면 어떨까요? 새로운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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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중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우연히 윤동주 시인의 ‘서시(序詩)’를 읽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단어 하나하나가 제게는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부끄러움이 없지만 이웃의 아픔, 망국의 아픔을 괴로워했던 젊은이의 고뇌, 그러나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굳은 결의가 드러나는 시입니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초판이 경매에 나왔다고 합니다. 비록 짧은 생을 살았지만, 시인의 마음은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윤동주 시인과 비슷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습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박해의 엄중한 상황 속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이 가득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라면 시련도, 아픔도, 고통도,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있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교우분이 빛바랜 신문 하나를 제게 주었습니다. 1988년 발행된 ‘미주 평화신문’ 초판이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의 초청 강연 기사가 있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한 사람의 기행문이 있었습니다. 미주 평화신문을 발간하는 이유를 사설로 밝혔습니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신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각계각층의 격려와 축하의 글이 있었습니다. 통일에 대한 열망, 인권과 정의의 실현을 촉구하는 글이 있었습니다. 신문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의와 각오가 담겨 있었습니다.
제게 평화신문 초판을 주신 것은 그런 열정과 각오로 신문을 제작하라는 염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 홈페이지에 저의 인사말을 올렸습니다. 인사말이면서 저의 다짐이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에파타(열려라)’ 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심어놓으신 보물을 찾아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충실하게 전하겠습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겠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열리고, 우리의 귀가 열려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근심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열등감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 많습니다. 거짓된 자아는 참된 자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은 예수님처럼 ‘탈리타 쿰’하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짓에서 진실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처럼 사랑의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가톨릭 평화신문이 ‘탈리타 쿰(일어나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합니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되었습니다.”
나의 삶이, 나의 신앙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면, 타성에 젖어있다면, 열정이 식었다면,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새롭게 신발 끈을 매면 좋겠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뜨거운 삶, 바오로 사도의 지칠 줄 모르는 선교의 열정,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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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혼의 쉼터>
-주님과의 만남과 치유-
-“나무에게/하늘은/가도 가도/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1997.3
아주 예전에 써놓은,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좋아하는 제 짧은 자작시입니다. 때로 하늘 임 찾는 일에 지칠 때는 아예 고요한 호수가 하늘을 담아 버리는 관상기도의 휴식이 참으로 필요한 시절입니다.
어제는 요셉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님들 모임인 코이노니아 자매회 142차 만남의 날이었습니다. 매월 1회 연중 12회, 영혼의 쉼터 수도원을 찾기 시작한 지 무려 12년쯤 되었으니 그 자체가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떠날 때는 뜻밖에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부활상 앞에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일터에서의 일도, 배움터에서의 공부도 필요하지만 쉼터에서의 휴식도 중요합니다. 쉴줄 모르는 일중독도 큰 병입니다. 머물줄 모르는 것과 끊임없이 말하는 것, 바로 현대인의 두가지 영적 질병입니다. 활동주의는 현대판 이단이라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멈출줄 모르는 영적 질병은 내적 두려움과 불안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우리 삶의 중심인 주님 안에 머물 때 참된 휴식에 치유입니다. 8월 경향잡지 ‘경향 돋보기’ 특집은 생명을 살리는 휴식, 어떻게 쉬어야 하나, 그리스도인의 참된 휴식에 대해 다루고 있었고, ‘기도는 참된 휴식’이란 제하의 권두언 글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기도야말로 참된 휴식이 될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위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은 제가 보속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영혼의 식食이자 약藥인 말씀 역시 영혼의 휴식과 치유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쉬어야 합니다. 살기위하여 일도 해야 하지만 살기위하여 쉴줄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흡사 예수님의 하루의 축소판 같습니다. 하여 예수님은 움직이는 우리 삶의 중심이 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된 치유요 휴식임을 깨닫습니다.
복음의 구성을 보십시오. 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신 후,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전도여행을 떠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참된 치유에 참된 휴식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세상에는 죄도 많고 병도 많습니다. 참으로 영육으로 건강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나하나 주님을 만날 때 진정 영육의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을 만나자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하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참된 영육의 치유요 휴식임을 깨닫습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끊임없이 평생, 매일, 일상의 일터, 배움터, 쉼터 모두에서 만나야 하는 주님이십니다. 특히 쉼터에서의 만남은 절대적입니다. 우리의 쉼터이신 예수님 역시 외딴곳에서 아버지와의 친교시간을 마련하십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하루종일 일하신 예수님께는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함께 머물며 영육을 충전시키십니다. 참으로 많은 형제들이 영혼의 쉼터인 수도원을 찾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외딴곳이 상징하는 바 영혼의 쉼터, ‘힐링센터healing center’입니다.
참된 휴식은 기도이며 참된 쉼터는 기도처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성전이 바로 외딴곳의 쉼터이자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기도 시간이 바로 휴식시간입니다. 예전 수도형제들이 장상에게 레크레이션 시간을 달라 했을 때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여러분이 성전에서 기도시간이 바로 레크레이션 시간이자 하느님 찬미시간의 일거양득 시간인데 새삼 무슨 레크레이션이 필요하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레크레이션recreation’ 영어 뜻대로 ‘재창조’의 시간이 바로 기도의 휴식시간입니다. 그러니 외딴곳의 쉼터도 중요하지만 잠시 멈추어 일터를, 배움터를, 쉼터로 바꾸어 기도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정말 하루중 가장 중요한 쉼터는 밤시간이요 잠시간입니다. 쉬면서 영육을 충전시키라 있는 밤시간이요 잠시간입니다. 그러니 밤시간이란 외딴곳의 쉼터를 잘 활용하는 것이 지혜중의 지혜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밤시간은 오로지 기도와 잠자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합니다.
저역시 끝기도가 끝나자 마자 8:30분경 잠자리에 들면 밤 1:30분 쯤 일어나 침묵중에 묵상하며 강론을 준비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무는 가장 행복한 밤시간입니다. 하여 수도자들이 가장 기다리며 해방감을 느끼는 자유로운 시간은 끝기도가 끝난 이후의 밤시간입니다. 하여 수도자들은 특히 밤시간을 사랑하고 기다립니다. 끝기도 이후의 밤시간의 수도원은 말 그대로 대침묵의 외딴곳이 됩니다.
수도원뿐 아니라 내 집도, 방도 밤에는 외딴곳의 쉼터로 만들어야 합니다. 결코 이런저런 일로 거룩한 밤시간을 낭비하며 영혼을 고갈시키거나 피로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 말씀은 긍정적인 말마디로 가득합니다. 주님안에서 영육을 충분히 충전시켰기에 이런 밝고 활력을 주는 긍정적인 말마디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기도의 대가일뿐 아니라 휴식의 대가임을 깨닫습니다. 기도가 바로 참 좋은 휴식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빔터’는 휴식의 ‘쉼터’가 되는 것입니다.
은총, 평화, 감사, 믿음, 사랑, 희망, 진리, 말씀, 복음, 진리, 열매, 성령, 일꾼 등 온통 밝고 생명 가득한 긍정적인 말마디들입니다. 바로 주님과 만남의 참된 휴식의 열매들인 긍정적인 말마디들입니다.
미사보다 더 좋은 휴식의 쉼터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영육을 치유해 주시고 새롭게 충전시켜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형제자매님들 모든 분들에게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주님, 저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 길이길이 하느님 자애에 의지하리라.”(시편52,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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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깨어있어서>
“사랑을 받게 되면 버림받을 때를 생각하고 편안하게 있을 때는 위태로움을 생각하라"(명심보감).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자기의 때를 알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가면서 연연해하고 집착하면 결국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버림을 받기 전에 떠나면 그를 기리고 아쉬움도 남는 법인데 그 때를 못 맞춰서 결국 명예도 잃고 추하게 됩니다. 아쉬움이 남을 때 그 때야말로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을 받을 때, 그 때가 떠나야 될 때입니다. 칭찬은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 쉽습니다. 영국 속담에는 “바보를 칭찬해 보라. 그러면 훌륭하게 쓸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칭찬 받은 사람은 하나같이 바보처럼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는 떠나야 될 사람은 안 떠나고 떠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떠나서 희망이 없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자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붙들었습니다.”(루가4,42) 치유와 말씀에 사로잡혀 예수님과 오래도록 머물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쉬움을 남긴 채 떠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루가4,33).하시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찾으셨습니다.
“성인은 언제나 깨어 있어서, 하늘이 명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다.”(이현주) 주님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의 뜻 안에 계셨습니다. 밥을 드실 시간이 없이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한적한 곳을 찾고, 이른 아침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한 덕분입니다.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할 때, ‘네가 꼭 필요하다고 할 때’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그 얘기가 진심으로 하는 얘기인지, 아니면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지를 잘 파악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가 떠난 자리가 빛나고 아름답습니다. 어디에든 연연해하지 말고 단순하게 훌훌 털어버릴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고 싶은 유혹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요한 세례자를 기억해 봅니다. 그는 인기가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나는 작아 져야 하고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한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주제파악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수를 알고 뒤에 오실 분을 위해 자리를 뜨게 됩니다.
바로 우리가 드러내야 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재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증거 됩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삶의 모범과 표양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많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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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단면이 보여집니다. 그분 동선을 따라가다 보면 복음 선포의 길, 선교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루카 4,38)
예수님께서 공적인 공간인 회당을 떠나 사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한 개인의 집으로 가십니다. 물론 그곳에도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한 이, 심한 열에 시달리는 시몬의 장모가 있어 예수님의 치유는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주셨다."(루카 4,40)
소문을 들은 이들이 병자들을 데려오니 시몬의 집은 공적인 공간으로 변해버립니다. 물론 제도적으로 회당과 같은 공적인 공간이라 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이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거룩한 만남과 모임의 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매우 개별적이고 친밀한 손길을 내미십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이처럼 공동체성과 개별성 둘 다 중요합니다. 함께 신앙을 고백하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공동체의 공적 예배와 모임도 중요한 동시에, 각자 자신의 인격과 소명에 걸맞게 맺는 주님과의 접촉과 사랑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루카 4,42)
예수님께서 지극히 내밀한 사적 장소를 찾아 외딴곳으로 나가십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머물며 사랑을 나누고 일치를 이루는 침묵과 고독의 시간입니다. 외부를 향해 활짝 열어젖혀진 공간에서 구마와 치유, 설교로 분주한 시간을 꾸려가실 힘은 이 뿌리에서 나옵니다.
"나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화답송)
하느님과 깊은 만남과 사랑의 일치로 그분께 단단히 뿌리를 내린 영혼의 모습을 시편 저자가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했지요. 사람들 사이에서 활기차게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싱그럽고 생명력 넘치는 젊은 올리브 나무 같은 이유가 바로 이 시간, 이 공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43)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붙드는 이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반해 그분을 소유하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얽힐 수도 있는 순간에 당신 사명의 본질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누구에 의해서도 안주하거나 고착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에게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을 관상하며 그 역설적 아름다움에 매료된 영혼 외에는 결코 그분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예수님을 다른 고을로 떠나보내면 그분을 그냥 놓치고 마는 걸까요?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과 자기 고장의 이익에 갇혀 그분을 독점하려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시는 예수님과 함께 마음과 생각이 열려 발걸음을 합하면 결국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고, 또 영원히 그분을 소유할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콜로새 성도들에게 그들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치하하며 편지를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콜로 1,7)
콜로새 성도들을 위해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인 동시에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사랑을 사도들에게 알려 준 사람"인 에파프라스는 성도들과 사도들 사이의 가교이면서 선하고 충실한 목자임을 사도 바오로가 증언합니다. 성경에 몇 차례 등장하지 않는 에파프라스이지만 우리는 그가 사도 바오로를 닮았고 예수님을 닮았다는 걸 느낍니다.
이처럼 복음은 예수님의 발걸음을 따르는 이들이 예수님에게서 배운 대로, 그분의 마음과 그분의 손길과 그분의 목소리가 될 때 "열매"(콜로 1,6)를 맺으며 퍼져가는 살아있는 실체입니다.
다시 복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루카 4,44)
예수님의 동선이 더욱 넓게 확장됩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신앙 선조들, 미약하나마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우리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큰 탄력을 받아 이어집니다. 주님에게서 시작된 동선은 아직 마침표가 찍히지 않은 미완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목소리와 발걸음이 그 선을 이어서 온 세상 곳곳으로 연결되고 연장되고 퍼져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는 푸르른 올리브 나무처럼 한없이 퍼져나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사제서품을 받은지 30년이 되는 날입니다. 늘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를 위해 작은 기도 올려주시길 벗님께 청합니다. 더욱더 말씀과 성체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도록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늘 벗이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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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가난한 사람’은 누군가 그에게 채워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텅 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사람’은 가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필요한 사람이며, 누군가 그에게 다가가 채워주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텅 빈’ 사람이다. 참 행복의 주인공인 ‘가난한 사람’을 생생히 대변해 주는 인물이 있다. 바로 어린이이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자주 예로 드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4)
♣성경에서 어린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어린이들은 어른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아이의 삶이 다른 사람 손에 달려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어린이 같이 되라고(어린이가 되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유일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고,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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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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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루카 4,39)
의사들의 우두머리이신 예수님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들 집에 들어오시어, 당신의 명령으로 우리 죄의 열병을 고쳐주시게 합시다. 우리는 누구나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성을 낼 때마다 열이 나지요. 죄악과 불륜이 다양한 만큼 열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사도들에게, 예수님을 우리에게 모시고 와서 우리 손을 잡으시게 해 달라고 간청합시다. 그분께서 그렇게 해 주시면 우리의 열이 곧바로 가십니다. 그분은 뛰어난 의사시오, 진정 의사들의 우두머리이십니다. 모세도 의사고 이사야도 의사고 모든 성인도 의사입니다. 그러나 최고의 의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히에로니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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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전부를 위하여>
"기쁜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예수님의 인기가 급상승!
병을 치유받고자 하는 이들이 밤낮없이
찾아오고 떠나지 말아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가 아니라
전부를 위해 파견되셨음을 밝히십니다.
제가 본당에서 소임이동하게 되었을 때 ~
한 자매님이 '이럴 줄 알았으면 정 주지
말걸 그랬어요 흑흑 ~'
공인은 그렇습니다
예수님처럼 일부가 아닌
전부를 위해 살아야만 합니다.
일부에 푹 빠지면
주어진 소명을 살지 못하게 되니
아무리 예수님이 좋아도
아무리 신부님이 좋아도
아무리 수녀님이 좋아도
맡겨진 직무를 다할 수 있도록
적정 거리를 두는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소명의식을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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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루카 4, 43)
소명과
사명사이에서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생명과 사람
이 모두를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을 보여주십니다.
사랑을 원하는
자녀들에게 가득찬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소중한
전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가야할 길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치의 길임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고 실천하는
나라입니다.
사명과 소명의
목적지는 분명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나누고 전하며
선포되는
하느님 중심의
사명입니다.
그 기쁨
그 사명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기쁜 소식은
우리가 만나려 했던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에게 오신
기쁜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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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편집/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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