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와 만리 사이
정선희
오른쪽에는 천리
왼쪽에는 만리
천리와 만리 사이에 서 있다
눈앞에 있는 천리
등 뒤에 있는 만리
가까이 두고도 못 만나는 천리
지척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만리
눈앞에서 손이 사라지고
눈앞에서 길이 끊어지고
오른쪽에는 천리
왼쪽에는 만리
턱을 고이면 생각나는 거리
눈을 감으면 잡히는 거리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할 때
천리와 만리 사이에 서게 된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회의가 밀려올 때 만나는 천리
어떤 게 진짜 나인가?
의심스러워질 때 만나게 되는 만리
안다고 생각했는데 더욱 모르는 천리
가까운 사이가 가장 먼 만리
천리와 만리 사이에 내가 서 있다
얼음으로 살자
입을 꼭 다문 냉동실이 있어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냉동실이 있어
문은 열리지도 않고 닫히지도 않아
흘러 내리다가 그대로 얼어버린 문
미처 변명할 새도 없이
용서를 구할 새도 없이
닫아버린 마음 같아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할 데가 없어
그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고
울면서 애원할 수도 없어
잘못이 아니어도 잘못했다고
빌고 싶어도 빌 수가 없어
문이 없는 문
열쇠도 없는 문 앞에서
혼자 울고 있어
발 동동 구르고 있어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시간을 편집하고 싶어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야
느낄 수 없다면 더 편리한 세상
제 안의 냉기로 꽁꽁 얼어버린 문
나를 위해서
입을 없애버린 냉동실이 있어
속을 다 보여주면 안 돼!
사람 너무 좋아하지 마!
얼음만 보여주고
얼음으로 살자고
오늘도 다짐하는 냉동실이 있어
뜨거운 택배
택배가 왔다
프랑스로 떠난 그녀가 마지막까지 가슴에 안고 있었던 것,
그것은 내게 올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간직할 물건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장을 떼어놓고 가듯
그것을 내게 보내고 갔다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은 심장,
말을 못해 터질 것만 같은 심장,
여기가 아파요, 죽을 것만 같아요!
그녀는 죽기 직전의 환자가 급속냉동을 시켜
먼 훗날 깨어나기를 바라는 것처럼,
내게 심장을 맡기고 떠났다
그대와 나, 라는 글자가
유리파편처럼 눈에 꽂혔다
사랑이 밥 먹여주냐?
좀 쉽게 살면 될 것을 왜 그리 어렵게 사느냐? 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따질 수 있으면 따지고 싶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쉬운 사랑이 왜 누군가에겐
그토록 아픈 상처인가?
어떤 사람에게는 낭만이고 추억인 사랑이 왜 누군가에겐
목숨을 건 도박인 것인가?
사랑 때문에 황진이를 사랑한 이웃 총각은 죽었고
사랑 때문에 내가 아는 친구는 비구니가 되었고
사랑 때문에 그녀는 지금 떠나려 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아픈 사랑만 하는가?
그가 아니면 안 될 필연적인 무엇이 있단 말인가?
그는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였다
5살 때 바람난 엄마가 버리고 간 아이,
그녀에게 그것은 가장 큰 상처였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주문을 외우듯 다짐하곤 했다
엄마처럼 될까봐 사랑 같은 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는 남자를 멀리 했고 절대 가까이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심하면 할수록 사랑은 더 위험한 것,
그녀는 자신의 나쁜 피를 탓해야만 했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피,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엄마가 따라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에게 엄마는 상처이고 죄이고 그리움이었다
결국 그녀는 오이디푸스왕이 자신의 눈을 찌른 것처럼
심장을 도려내기로 했다
그녀는 심장을 내게 맡기고 먼 길을 떠났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떨리는 손으로 나는 그녀의 심장을 다시 싸서
먼 훗날을 기약했다
* 정선희
경남 진주 출생. 2012년 『문학과의식』,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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