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일영 선생님을 먼저 보내면서(靈前에)
어제 오후 3시경 핸드폰을 여니 윤언자 회장으로부터 견일영 선생님이 13일 오전 8시36분 작고 하셨다는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의 눈을 의심했다. 불과 열흘 전 선생님으로부터 新年賀禮 年賀 메일도 교환 했었고 지난 동짓날에는 나의 수필 “동짓날 밤”의 답신 까지 보내주셨다.
귀가 멀어 윤회장과 직접 확인 통화는 못하고 메일도 열어보고 카페도 들어 가 봤으나 견 선생님에 대한 다른 글은 보이지 안했다. 다음날 윤 회장에게 확인 메일을 보내려고 하는데 윤 회장으로부터 또 메시지가 왔다. “견일영 선생님 문상 지하철 2호선 임당 역 1번 출구 4시에 만나자,”고 했다. 잘 알았다고 답신을 하고 이글을 쓰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경북 선산 출생으로 한국문인 협회 회원이며 경고 교장 직에서 정년퇴임하신 후 영남 수필회장 등 여러 문학회에 참여 하시면서 향토 문학발전에 공헌하셨습니다. 대구문학상 등을 수상하셨고 그 바쁘신 가운데도 우리 청보리와 연을 맺고 18년을 봉사 하셨습니다. 10여 년 전에 혈액 암 이란 고질에 이환되어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수필집 아름다운 영혼,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 산수화 뒤에서, 장편소설 탁영금 등을 집필 발간 하셨다. 그리고 모두가 무서워하는 암과 끈질긴 투병으로 이겨내셨다. 그런 가운데 강산이 두 번 변할 세월을 우리 청보리 수필 강사로 봉사하시며 이끌어 와셨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 보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갑니다.
그동안 지난 이야기는 2018년 12월18일자 나의 글 “청보리 수필을 물러나면서”라는 글에 실려 있어 줄이겠습니다.
영전에 올리는 애도의 글
여기에 덧붙여 말씀드릴 것은 저 개인적으로도 선생님으로부터 입은 은해가 큽니다. 지난 2015년 초여름 견 선생님의 지도와 청보리 회원님들의 격려로“먹구의 푸념”이란 수상록을 내었습니다. 80평생 나의 삶의 片鱗을 한권의 책으로 내게 된 것은 오직 청보리 수필과 함께 하면서 선생님의 지도로 인한 얻음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有始有終이요 會者定離며 生者必滅라 했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맛나면 이별이 따르며 생물은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는 만고의 섭리는 聖人君子도 英雄豪傑도 피할 수없는 진리임을 잘 알면서도 이 시간 왜 이렇게 슬픈 통한을 달랠 수 없는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乙亥생으로 辛未생인 저보다 먼저 가시니 저승인 그곳에도 선생님과 같은 훌륭하신 분이 더 필요 했는지 아직도 인생 백세시대에 이승에서 선생님의 손길이 더 필요한데 염라대왕이 미워집니다. 그런데 선생님! 인생오복에 考終命이 가장 큰 복이라 했지요. 인생 백세 시대라지만 아무나 누리는 게 아니잖아요. 팔순 중턱을 넘기시고 모두가 무서워하고 기피하는 암과도 싸워 이기시고 많은 봉사를 하시면서 요양원 신세 안지고 입원도 안하고 편안하게 臥席終身 하셨으니 얼마나 행복한 마무리입니까. 그리고 財福을 타고난다는 돼지해(乙亥)에 나시어 같은 황금의 되지 띠인 己亥年에 돌아가셨으니 이 또한 범상치 않은 명복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마음을 돌리니 아픈 마음이 조금이나마 숙으러 집니다. 선생님 이승의 미련들은 말끔히 잊으시고 생로병사의 고통 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옵소서. 동짓날 밤 답신 글 과 열흘 전 선생님의 여하매일을 아래와 같이 올리면서 삼가 명복을 비 옵니다.
2019년 1월 14일
선생님 영전에 엎드려 삼가 한용유가 올립니다.
한용유 선생님께
글 잘 읽었습니다.
잠이 안 올 때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앞으로도 잠 안 올 때 쓰신 글 보내주세요. ㅋㅋ
총총 줄이며 선생님의 강녕을 빕니다.
견일영 배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우롱 <hyu1232000@hanmail.net>
받는사람: popo2690 <popo2690@fatima.or.kr>
날짜: 18.12.23 11:38 GMT +0900
제목: FW: 첨부파일 열어보세요.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우롱 <hyu1232000@hanmail.net>
받는사람: 한용유 <hyu1232000@hanmail.net>
날짜: 18.12.23 11:28 GMT +0900
제목: 첨부파일 열어보세요.
첨부파일: 동지날 밤.hwp
메일 친지 여러분 동지 팥죽 맛있게 잘 드셨습니까? 며칠 후면 양력 그믐이 코앞에 닥쳤네요. 옛날 어릴 때 팥죽을 먹으면 한 살을 더 한다며 제 나이 숫자만큼 수제비를 먹는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요. 그 때 나는 내 나이보다 찰 수제비를 더 많이 먹었으며 긴긴밤 시원한 통김치에 밤참까지 먹고도 며칠을 두고두고 먹으며 이웃끼리 서로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아스라합니다. 그런데 올해 나는 팥죽을 먹지 안했어요. 아내가 시장에 가서 사올 까 하는 것을 당신 먹고 싶으면 사오고 나는 별생각 없다고 했더니 자기도 생각 없다면서 그만두기로 했어요. 아이들 모두 다 나가고 우리 내외 함께 살아 온지가 오래 되었으니 우리 둘만 뜻이 맞으면 되고 아직도 아내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있으니 신혼부부처럼 행복합니다. “팥죽을 안 먹었으니 한 살 더 먹지를 않겠네.” 하고 서로 주름진 초췌한 얼굴을 마주보며 웃었습니다.
지난밤 소피를 두 번이나 보고 잠이 깨어 다시 누었으나 잠이 안와 첨부 파일과 같이 “동지 날 밤” 이란 글을 쓰면서 불면의 고비를 넘겼습니다.
시간 나시면 열어보시고 送舊迎新 謹賀新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 하시기를 빕니다.
※ 첨부 파일 “동지 날 밤”
2018년 12월 23일 愚聾 한용유
동지 날 밤
지금시간 동지 날 밤 4시.
어제 밤 9시에 잠자리에 들어 尿意로 잠이 깨어 시계를 보니 10:55 이었다.
2시간을 잔셈이다. 소피를 보고 다시 이불속에 몸을 숨겼다. 바로 잠이 오지 안 해 누운 채 발끝치기를 하면서 상염에 젖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든 모양이다. 희미한 꿈길 속을 헤매다가 잠이 깼다. 방광에 고인 오줌이 화장실로 떠밀었다. 시원하게 나올 오줌이 끙끙 거리며 쥐어짜듯 했으나 깨끔치가 않다.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또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03:00이었다. 4시간을 더 잤다. 앞서 2시간을 합치면 6시간을 잔셈이다. 전립선 비대증 완화 약을 복용한지가 15년이 넘었다. 매일 밤 평균 2번식 소변을 봐야한다. 약의 효험인지 더 심해지지는 않고 소강상태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가끔 한번 정도이고 대개 2번은 잠을 깨우게 한다. 오늘 밤이 동지라 밤 시간 길이가 일 년 중 가장 긴 밤이다. 아직 날이 새려면 4시간이나 남았다. 다시 잠자리에 들었으나 바로 잠이 오지 안 해 발끝치기를 하면서 뒤척였다. 발끝치기는 4년째 계속하고 있다. 잠이 안 올 때 몸부림치기보다 발끝치기를 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들게 되고 혈액순환과 건강보전에 좋다 해서 계속하고 있는데 그로 인함인지 아직도 걷는 데는 지장이 없다 올해도 지난 10월25일 새벽 산책을 함께 하는 지인과 같이 팔공산 단풍구경 나들이로 1,167m의 동봉에 올라가서 표지 석을 만지며 내년에는 못 올 것 같다고 꼭 껴안고 카메라에 담았다.
백단위로 손가락 열 개를 접어도 머리는 말똥말똥했다. 다시 불을 켰다. 시계를 보니 03:50분, 50분을 발끝치기와 잡생각에 시달린 셈이다. 날이 새려면 앞으로 4시간. 6시간을 잤으니 수면시간은 평균치를 채웠으니 억지로 더 잘 필요는 없어 벌떡 일어났다. 책상위에 읽다 덮어놓은 에세이스트 81호를 펼쳤다. 신인 수필 당선작 권영희의 “아들아, 괜찮다.”를 읽었다. 말미에 10월 11일 감명 깊게 읽었다는 내 연필 싸인 이 적혀있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더 읽으면서 읽은 같기도 하고 아닌 같기도 하며 기억이 희미했다. 읽은 지 가 두 달 남짓한데... 이제 나의 뇌 작용도 서서히 한계점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60 여 년 전 해방직후 내 나이 10대 후반일 때 이웃집 친구가 천석을 하는 외가에서 가져온 순애보, 단종애사, 마의태자, 운현궁의 봄, 금삼의 피, 무정, 불로초, 등 일제 때의 소설을 호롱불 밑에서 밤 새워 읽고 난 후 이튼 날 새벽 거울을 보면 콧구멍이 까맣게 끄시른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불과 두 달 전에 읽은 글이 알송달송 하니 나의 뇌기능도 이제 한계점에 이른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졌다. 삶의 섭리로 받아드리기엔 섭섭했으나 望九의 나이에 아직 책을 가까이 할 수 있으며 무료한 시간을 때울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하게 받아드리고 싶다. 내가 만약 이 독서의 취미라도 없었다면 잠 안 오는 오늘 밤 같은 동짓달 긴긴밤을 어이 새울 것인가? 나에게 독서의 취미를 아직 거두어가지 안한 신에게 무한 감사를 드린다. 독서는 10대에서 20대 전후 뇌 세포기능이 가장 왕성 할 때 해야 한다고 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듯 흡수력이 강할 때 말이다. 그래서 젊음은 늙기 쉬우나 배움은 이루기 어렵다고 한 (少年易老學難成하니 一寸光陰不可輕이라. 未覺池塘春草夢하니 階前梧葉已秋聲) 성인의 勸學詩를 되뇌어본다.
이글을 초안하다 보니 새벽 6시50분 해 뜰 시간이 1시간 남짓 남았다. 동지 날 기나 긴 밤도 어느새 지나가버렸다. 동지 날 밤은 낮 시간보다 3시간26분이 긴 일 년 중 가장 밤이 길다. 대문간에 배달된 조간 신분을 거두어와야겠다. 아직까지도 신문 7매 28면을 다 읽고 오퍼니언, 사설 등 톱기사는 일기장에 스크랩을 하곤 했는데 이제 버거워진다. 대충 읽기로 줄여야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 할는지? 오직 신에 모던 것을 맡기고 삶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훨훨 떠나고 싶다. 신문을 거두려 현관에 나갔더니 비가 뿌리고 있었다. 영하 7도까지 내려갔던 추위가 풀리더니 때 아닌 비가 모과 잎을 적시고 있다. 이 비가 그치면 또 추위가 몰아닥친다는 일기예보다. 오늘은 일요일이라 신문 휴간인줄 미처 몰랐다. 자욱한 비안개가 앞산 허리를 감싸고 있다. 긴긴 동지 밤이여 안녕!
~2018년 12월 23일 07:30~
추신
동봉한 사임당 한 장 저승길 旅路에 목마르시면 커피 한잔 하세요. 이승에는 커피점이 발끝에 채일 정도로 많은데 그 곳에도 있을는지?
위 글을 프린트해서 약속한 시간 오후 4씨 10분에 임당지하역에서 일행을 만나 919번 버스로 (윤회장, 윤상희, 맹영숙, 박추자)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오후4시 30분이었다. 합동 묵념을 올리고 유족에게 위로의 조의를 드렸다. 미망인 부인에게 갑자기 돌아가신 사유를 물었다. 화장실에서 졸도 그길로 의식 혼수로 바로 가까이 있는 정평 세명병원으로 급송 응급처치 했으나 깨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했다. 유족의 허락을 받고 아래 와 같이 영전 사진을 찍고 프린트 해간 애도의 글을 영전에 올렸다. 다과를 나눈 후 돌아 왔다. 발인은 내일 15일 오전 10시 장지는 고향 선영에 모신다고 했다. 집에 도착하니 오후 6시15분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