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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38장1~18절
제목 : 여호와께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마침내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 욥을 만나주십니다.
하나님의 첫 말씀은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오히려 욥에 대한 반문(反問)입니다.
하나님의 질문들은 욥에 대한 꾸중과 질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등장(1~3절)
1)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십니다(1절)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야웨, 아도나이) - 하나님에 대한 이 칭호는 본서에서 오직 산문체로 쓰여진 서론(1,2장)과 말미 부분(42장), 그리고 40:1,3,6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전개된 욥과 친구들의 변론, 그리고 엘리후의 연설 중에 빈번히 사용되었던 '엘', '솨다이'등 대신에 '스스로 자존하시는 존재'이심을 강조하는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출현과 그분의 구원의 능력, 그리고 그의 거룩하심과 영원 불변하심의 특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폭풍 가운데로서(민 하세아라) - '...으로부터'(from)를 나타내는 전치사 '민'과 (비를 수반하지 않는) '폭풍'을 가리키는 '세아라'가 연결된 구절입니다.
팔레스틴에서 보기 드문 이 폭풍, 곧 '회오리 바람'(whirlwind or tempest)은 이미 엘리후가 하나님의 위엄과 관련하여 언급했듯이(37:9),
하나님께서 당신의 등장에 있어서 빈번히 동반 하시는 기상 현상입니다(출 19:9-20;삿 5:4,5;시 18:8-16).
그런데 이 '폭풍'이라는 단어에 히브리어 정관사 '하'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엘리후에게서 언급된 그 폭풍을 고려하고 있는 듯합니다.
한편, 본 구절에 언급된 이와 같은 현상은 하나님의 현현을 통해 계시가 확실히 구체적으로 주어졌다는 의미에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 하나님의 말씀은 욥이 그렇게 소원했던 바에 대한 응답으로 보입니다(31:35).
그러나 이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된 뜻이 성취되고 있음을 시사함과 동시에 지금까지의 논쟁을 종결시키고 욥의 무지에 대해 질책함을 가리킵니다.
2)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2절)
무지한 말로 - 이것은 지식이 없는, 즉 우둔하고 아둔한 말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지식이라 함은 다양한 경험에 의해 획득되어지는 성찰된 인식이나 분별력, 또는 일반적인 지식을 뜻하는 데 특별히 본절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언급입니다(호 4:1,6;6:6).
즉, 욥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계획의 다양한 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에 대해서 편파적으로, 그것도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친구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오히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자신의 고난이 들어 있다는 점에 대하여 난색을 표명하고, 하나님의 지배와 공의를 의심하기까지 했습니다(21, 31장).
따라서 본절은 비록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능력과 주권적인 섭리를 인간의 짧은 경험과 지식에 맞추려는 욥의 잘못된 태도를 견책하기 위한 질문으로 이해됩니다.
3)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3절)
허리를 묶고 - 이러한 행위는 어떤 어려운 일이나 사건을 대하기 전에 준비하는 노력을 나타냅니다(출 12:11;왕상 18:46;렘 1:17).
특별히 전쟁터에 나가기 위하여 용사가 허리띠를 졸라매는 모습을 연상시키는데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항변대로 욥과 논쟁하실 것임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10:2;13:22;23:4-7;31:35).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욥과 논쟁하시려는 의도는 욥의 교만을 꺾으시고, 우주 만물에 대한 당신의 통치와 섭리가 얼마나 기묘하고 위대한 것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 창조의 과정과 신비(4~18절)
1)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4절)
“[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 하나님의 처음 질문은 당신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여기서 '기초를 놓다'에 해당하는 '야사드'는 '세우다', '설립하다'란 뜻으로 본질적 기원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최초로 땅을 세울 때'(시 24:2;102:25;잠 3:19)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한편, 지구의 형성을 건축물의 기초에 비유한 표현은 본절 외에도 사 24:18;48:13;렘 31:37;히 1:10 등에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비유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근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네가 어디 있었느냐 - 욥이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동참하기는 커녕, 그때에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욥은 창조에 대해서 말로만 들었을 뿐, 창조의 계획이나 땅을 세우는 과정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 여기서 '깨닫다'란 말의 히브리어 '비나'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주관적인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리킵니다(대하 2:12,13;잠 4:1).
그리고 '알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선험적이라기 보다는 '경험에 의해 습득하게 되는 지식'을 말합니다(사 48:8).
그러기에 본절에서 '깨달아 알다'라는 표현은 신(神)과 함께한 경험으로 인식된 지혜나 지식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통찰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욥은 창조에 관한 이 같은 지식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욥은 하나님께서 땅의 기초를 세우는 것을 목격하지 못했으며, 엘리바스의 말처럼 창조 전에 출생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15:7).
한편,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유일한 동반자는 '지혜'(호크마)였습니다(잠 8:22-31).
따라서 욥은 하늘로부터 오는 진정한 지혜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논쟁할 자격조
차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네가 아느냐(5절)
“[5]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 '도량'의 '밋다'는 '측량하다'란 말의 '메마드'에서 파생한 명사로 '치수', '측량', '척도'란 뜻이다. 그리고 본절의 '정하다'에 해당하는 '숨'은 원래 '놓다', '두다', '지정하다'란 뜻으로 '표시하다', '한정하다', '그리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본절은 '이땅의 둘레와 넓이와 길이 등의 치수를 누가 처음부터 표시하여 그토록 정확하게 그려 놓았는가?'란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답은 두말 할 나위없이 '하나님밖에 없다'입니다.
세계 만물의 창조는 하나님의 신적(神的) 작정과 의지에 따라서 매우 질서 정연하게 확정된 것입니다(Rawlinson).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 본절의 표현은 건축 공사에 들어 가기에 앞서 평면을 헤아려 보기 위해 먹줄을 치는 것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지구의 창조가 하나님 당신의 정확한 의도와 작정에 따라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네가 아느냐 - 원문에 나오는 '키'라는 불변사 때문에 본구절은 다양하게 번역되거나 해석되어 왔습니다.
즉, (1)'그러므로 네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Lange).
(2)'네가 확실히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Schlottmann).
(3)'만일 네가 안다면'(70인역, 벌게이트역, Umbreit, Rosenmuller, Pope) 등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해석에 따라 본문의 뜻이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절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같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은 욥이 하나님처럼 지구를 자신의 의지나 계획에 따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3)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6절)
그것의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 '주초'에 해당하는 '에덴'은 '받침'을 가리키는 것으로(출 26:19;아 5:15) '건물의 기초' 또는 '주춧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와 같이 땅에 주초가 있다는 사상은 이미 욥의 변론에서 발견된 바 있습니다(9:6).
그러나 욥에게는 이와 동시에 땅이 공간에 자유롭게 달려 있다는 사상도 있었습니다(26:7).
따라서 본절은 지구를 공중에 견고하게 매달은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성과
신묘불측(神妙不測)함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창조가가 하나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상기시킴으로써,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피상적 이해가 아닌 구체적인 인식을 통하여 깨닫도록 요구합니다.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 '놓다'의 '야라'는 원래 '던지다', '쏘다'란 뜻이나, 여기서는 특별히 기초를 세우는 것에 관계해서 언급되었습니다(스 3:10,11).
이것은 땅을 세우는 일의 완성, 즉 그 마지막의 장식(Lange, Rawlinson)을
의미하는 것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완벽한 창조 사역을 나타냅니다.
4) 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7절)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 고대의 공동체에서는 신전(神殿)과 같은 건물의 주초를 놓거나(스 3:10,11) 머릿돌이 놓여질 때(슥 4:7), 그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축제적인 의식을 가지고 즐겁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와 같이 지구의 모통잇돌이 놓여졌을 때엔 하늘의 새벽 별들이 하나님의 창조 솜씨와 그 능력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시 19:1;사 12:6;24:14).
여기에 언급된 '새벽 별들'은 금성이나(사 14:12) 오리온 성좌 같이(사 13:10) 밝고 빛나는 별들을 의미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천상의 군대, 곧 천사들을 비유하기도 한다(사 40: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별들의 노래는 침묵의 함성이었음이 분명한 듯합니다(Rawlinson).
하나님의 아들들(베네이 엘로힘) - 1:6과 2:1에서처럼 천사들을 나타내는 관용적 표현입니다.
5)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8절)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 본절에 언급된 '태'(라함)는 태아를 품고 있는 여자의 자궁을 말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지구의 내부를 비유하는 것 같습니다(Lange).
바닷물이 땅 속에서 솟아올라 땅 위로 넘쳐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창 7:11;8:2).
따라서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마치 땅과 물이 혼돈 가운데서 뒤섞여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고 있는 듯합니다.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 '문'(데레트)은 일반적으로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로서의 두 짝의 문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막다'의 '사카크'는 '울타리를 두르다', '뚜껑을 덮다', '방어하다'란 뜻으로 바닷물의 경계를 한정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다와 땅을 구분하기 위한 창조 작업을 나타내는 듯합니다(창 1:9).
즉, 물의 경계를 정하여 그 정해진 처소에서 넘치지 못하도록 한정하신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시 104:6-9).
한편, 본절의 표현과 유사하게 예레미야는 모래를 두어 바다의 계한을 삼았다고 기록합니다(렘 5:22).
때문에 파도가 흉용하고 바닷물이 뛰놀더라도 그 정해 놓은 경계를 뛰어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기자들은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해 그분의 권능과 능력을 나타냅니다.
6)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듭니다(9절)
“[9] 그 때에 내가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구름으로 그 옷을 만들고 - 갓 태어난 어린아이로 비유된 바다가 구름으로 옷을 입히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욥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와 관심을 묘사한 것으로, 창1:6이하의 사건을 시적(詩的) 어법(語法)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흑암으로 그 강보를 만들고 - 여기에서 '강보를 만들다'에 해당하는 '하탈'은 '강보로 싸다'란 의미로 하나님께서 바다를 매우 세심하게 다루시고 돌보신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겔 16:4).
이는 곧 모든 바다가 처음부터 하나님께 예속되어 지배받고 있음을 반증하는 말입니다(Rawlinson).
7)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10절)
한계를 정하여 - '한계'에 해당되는 '헤크'는 어떤 특정한 '경계' 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하다'의 '솨바르'는 원래 '깨뜨리다'(KJV), '산산히 부숴지다'란 뜻이나, 여기서는 '선을 긋다'(F.Perles), '한계를 지정하다', '규정
하다'(KJV, RSV)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절의 이러한 표현은 바다의 한계를 설정하여 놓으신 하나님의 정확한 의도를 암시하는 듯합니다.
문과 빗장을 지르고 - '문과 빗장'은 큰 성문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대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도구로 언급됩니다(Lee).
그래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바닷 물이 땅 위에 넘치지 않도록 그 한계를 지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바다의 넘침을 막기 위해 도구를 설치해 놓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잠 8:29;렘 5:22).
이것은 바다를 마음대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며, 동시에 그의 섬세한 계획과 섭리를 시사해 줍니다.
8)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11절)
“[11]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 '그칠지니라'에 해당하는 '쉬트'는 원래 '두다', '놓다', '배열하다'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기에 있게 하라', 또는 '멈춰 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절은 바닷물이 폭풍으로 인하여 아무리 거세고 흉용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해안선을 넘지 못하도록 명령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바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거듭 강조하는 것으로 바다가 그의 명령에 굴복하고 순종할 수밖에 없음을 나타냅니다(시 89:9).
이와같이 넓고도 거대한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 한계가 운명지어졌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정하신 섭리와 경륜에 복종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9)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12절)
“[12]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 본절은 '네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너의 명령에 따라 아침이 매일 어김없이 찾아오느냐?'란 질문입니다.
그러나 아침은 욥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 왔고 그가 죽은 후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침은 욥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며, 더욱이 욥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욥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자기의 생각에 따라 변경시키려고 하는가(M.Henry)?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 '새벽'은 동트기 직전을 가리키는데, 혹자는 이것을 루가릿 신화에 나오는 새벽별 신과 연관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분명히 '여명을 가져오는 새벽'에 대한 표현입니다.
한편, 본절에 언급된 '처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콤'은 어떤 사물이 있어야만 하는 장소, 곧 본절에 의하면 새벽의 위치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본문은 새벽이 자기의 정해진 위치를 알고 그곳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으면서 아침의 빛을 비취게 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비록 동트는 시각과 장소가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새벽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알기 때문에 어김없이 아침이 오게 하는 것입니다.
10)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13절)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 '땅 끝'에 해당하는 '카네포트 하에레츠'는 원래 '땅의 옷깃'(RSV, skirts of the earth)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땅이 옷을 입는 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아마 밤이라는 옷이 땅을 덮어서 가리우는 것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본절은 어떤 것을 떨어내기 위한 준비 작업을 암시하는 데, 이는 새벽이 오므로 날이 밝아와 온 땅까지 순식간에 다 볼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 이것은 방의 옷이 땅을 가리워 어둡게 되었을 때 악인들은 온갖 죄악을 범하게 되지만(24:13-17), 새벽의 여명이 온 땅에 비치게 되면 그들의 정체가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놀라서 요동하게 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새벽은 어두운 밤의 옷을 빛으로 벗겨냄으로써, 마치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처럼 악인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12)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습니다(14절)
“[14]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땅이 변하여 진흙에 인친 것 같이 되었고 - 즉, 밤에는 일정한 형태가 없고 명료하게 보이지 않았던 지구가 새벽의 여명이 비췸으로써 그 모양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진흙'(호메르)에 도장을 새긴 것처럼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은 옷 같이 나타나되 - '나타나다'에 해당하는 '야차브'는 원래 '서다', '자신을 보이다'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KJV, stand).
그래서 몇몇 학자들은 '야차브'의 주어를 13절의 '악인'으로 보고서 악인들이 옷처럼 서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절의 주어는 새벽빛에 의해 드러나게 된 지구의 형체 또는 그 안에 있는 만물들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 경우엔 동사 '야차브'가 주어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혹자는 '차바' 곧 '채색하다'(RSV, dyed)로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Dhrome).
그러나 본절이 찬란하게 수놓은 화려한 옷을 언급한 것이라면 동사를 수정하지 않아도(Rawlinson) 본절의 의미는 통합니다.
즉 새벽빛으로 아침이 오면 지구의 만물은 자신을 내보이는데, 찬란한 옷과 같이 알록달록하게 물들이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Lange).
이처럼 새벽은 만물의 모양과 색깔을 어두움에서 빛으로 빛나게 합니다.
13)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됩니다(15절)
“[15]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그들의 높이 든 팔이 꺾이느니라”
악인에게는 그 빛이 차단되고 - '차단되고'에 해당하는 '마나'는 '부정하다', '허락하지 않다', '삼가다'란 뜻으로 어두움을 사랑하는 악인들에게는 빛이 금지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광명의 아침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빛인 어두움 속으로 도망쳐서 숨습니다(24:16).
14) 네가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16절)
“[16]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여기서는 바다와 연결된 감추인 수로(channel), 또는 원천이나 심연을 가리킵니다(창 7:11;49:25).
이것은 욥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지하 세계의 신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입니다.
깊은 물밑 - 여기에서 '깊다'란 말은 주로 바닷속의 깊은 수원지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겔 26:19;욘 2:5).
그리고 '물밑'으로 번역된 '헤케르'는 원래 '찾다', '탐구하다'란 뜻의 '하카르'에서 파생된 단어로(8:8;11:7) 탐색되어야 할 어떤 영역을 가리키는 데 종종 사용되었습니다(시 95:4).
따라서 이러한 표현은 바다 밑의 우묵한 곳(NIV, RSV, recesses)이나 심연을 묘사하는 듯합니다.
14)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17절)
“[17]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사망의 문 - '깊은 물밑'을 언급한 뒤에 바로 '사망의 문'으로 이어지는 것은 26:5,6의 경우와 같습니다.
여기서 '사망의 문'은 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음부 앞에 있는 문, 즉 '음부의 문'입니다(시 9:13;107:18;사 38:10).
이것은 '깊은 물밑' 저편에 있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었느냐 - '그늘진'의 '찰마웨트'는 '죽음의 그림자'(KJV, NIV, the shadow of death) 또는 '짙은 어두움'(RSV, deep darkness)으로 해석됩니다(3:5;시 88:12).
이것은 사망의 문으로 가는 길이 죽음의 그늘로 덮여서 흑암과 같이 캄캄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 시사합니다(10:22).
또한 사망의 문을 보기 위해서는 그 길을 지키는 죽음의 그림자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도 더불어 암시합니다.
그러나 욥은 사망의 문을 보기는 커녕 그 문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조차도 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지하 세계에 관하여 통달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며, 더욱이 죽음의 영역에 대해 손끝만큼의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15)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18절)
“[18]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네가 그 모든 것들을 다 알거든 말할지니라”
'넓이'라는 말이 당의 공간이나 영역을 가리키기 때문에(36:16),
혹자는 '땅'(아레츠)을 지하세계, 곧 음부의 거대한 공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Anderson).
그리고 본절에 언급된 '측량하다'에 해당하는 동사 '빈'은 무엇을 심사 숙고하여 엄밀하게 관찰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완전한 이해나 지각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지구의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사하여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느냐?' 또는 '음부 세계의 영역에 대하여 세밀히 관찰하고 그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고 있느냐?'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폭풍 속에서 나타나신 ‘여호와’는 고난 중에 신음하며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구원하신 출애굽의 하나님이십니다(1절, 출애굽기 3장 14~15절).
욥은 그토록 만나고 싶던 분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욥에게만 향합니다.
욥의 세 친구는 대답을 듣지 못합니다.
욥은 목마른 사람처럼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구했기에 얻었고, 찾았기에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요즘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묻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은 질문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이 듣고자 했던 것에 대해 차근차근 대답하지 않으십니다(2,3절).
오히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되레 물으십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께 따지는 너는 누구냐’며 욥의 정체성을 물으십니다.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의 일부조차 알지 못하는 욥의 한계를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허리를 동여매라면서 욥의 사명감을 고취시킵니다.
하나님은 욥을 책망하면서도 책임 있는 자로 부르십니다.
묻지만 말고, 달라고만 말고 내 책임과 사명을 감당합시다.
3) 만물을 돌보시는 분입니다(4~11절 ).
하나님은 욥에게 세상의 기원에 관해 물으십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기 때문입니다(3장).
그래서 하나님은 우주가 태어난 이야기를 하십니다.
혼돈으로 상징되는 바다도 하나님 앞에서는 갓난아이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 내에 갇혀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내 삶도 아기를 강보에 싸서 어르고 돌보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시작부터 지금까지 나를 돌보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4) 욥은 악인이 번영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기 때문에 자신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12~18절).
그러나 하나님은 어둔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악인의 삶이 만천하에 드러날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둠만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땅의 너비조차 측량 못하는 우리가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헤아리겠습니까?
기도
공동체-주님, 제게도 나타나셔서 혼란스러운 제 삶을 품고, 허리를 동여매는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열방-전 세계적으로 야생동물 밀렵으로 발생하는 불법 자금은 8조 원 이상이고, 이 자금은 무기와 마약 밀매로 이어진다. 국제 사회와 관련 국가들의 공조로 동물 밀렵이 근절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