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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마가복음16장1~13절
제목 :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신이 고난을 받고 수치를 당하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길이요 구원의 길임을 또한 말씀하셨습니다(10:45).
그리고는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계속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보면서 도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일어났던 특별한 일들을 보면서 변화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그 전에는 소극적으로 남몰래 주님을 따랐지만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나타난 특별한 일들을 보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신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사회적 특권과 지위를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도적으로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용기 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기에 자기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귀하고 좋은 매장지조차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신 이틀 뒤,
여인들이 향료를 준비해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시신은 보이지 않고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려주며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겠다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1) 무덤에 간 여인들(1~4절)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말씀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일” 곧 토요일 자정이 지나고 유대인의 새 날인 일요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인들은 향료를 준비했습니다.
향료는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를 막기 위해서 시신 위에 뿌려졌고,
이는 사랑의 헌신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열 만한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3절입니다.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마태복음에 보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시체의 도난을 우려하여 군사들을 배치하도록 요구해서 군인들이 무덤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그것도 모른 채 막연히 슬픔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덤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종종 슬픔이 너무 크면 구체적인 계획 없이 어떤 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들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돌이 이미 굴려져서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4절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마태복음을 보면 지진이 나며 천사가 돌을 굴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아주 자유스러운 몸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주님은 문을 닫고 여는 일 없이 제자들에게 홀연히 나타나시고, 홀연히 어디로 가셨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무덤 문이 열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덤 문이 열린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제자들에게 확실히 하기 위한 하나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덤에 들어갔는데 거기에 청년의 모습을 한 천사가 있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린 천사(5~7절)
(1) 여인들이 무덤에 들어갔습니다(5절)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여인들은 하나님의 사자와 만나자 깜짝 놀랐습니다.
(2) 천사는 주님께서 전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해 줍니다(6~7절).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여인들은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사람 예수의 시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미 예수님의 몸이 없었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는 부활하신 분이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며 동일한 역사적 한 인물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또한 빈 무덤이 그것을 증거해 주었습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하나님께 받아 천사가 전해 준 이 증언에 근거하며,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결단 앞에 서게 합니다.
여인들에게 하나의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과 베드로”라는 말은 베드로를 구별하는 마가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마가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베드로로부터 나온 것임을 반영합니다. 베드로가 탁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아 열 한 제자의 무리 속에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 법에 의하면 여인들은 신빙성이 있는 증인으로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활의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3) 놀란 여인들(8절)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접한 여인들은 심히 놀라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도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한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여인들은 십자가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알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면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마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는 심정으로,
그들이 예수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예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고 다시 갈릴리롤 돌아가리라고 하면서 무덤을 찾아 갔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슬픔과 허탈감을 가지고 무덤에 찾아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4)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9~14절)
(1)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9절)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예수님께서는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 준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즉 자신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부활 상태의 예수님을 인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들이 처음에는 두려워 떨었지만,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기쁨으로 뛰어가서 제자들에게 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10~11절입니다.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심(12~13절)
“[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12~13절은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처음에는 믿지 못했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부활을 믿고 기쁨으로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를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전했지만 그들도 역시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환영을 본 것으로 여겼습니다.
(3)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심(14절)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그 날 저녁 예수님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을 때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직접적인 증언을 듣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 요한복음20장17절 도마에게 나타 나시고,
(5) 고린도전서15장5~6절에 보면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우리의 구원 또한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은,
그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까?
1)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합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더라면 그는 평범한 종교가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병 고침도 요술로 취급되었을 것이고,
그의 죽음도 하나의 비극적인 순교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병 고침이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이 되었으며,
그의 죽으심이 인류를 구속하는 대속제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심을 보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은 인류의 죄 값인 사망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인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죄 값을 치르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살아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모든 죄 값이 다 청산되고 우리는 자유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3) 예수님의 부활은 장차 우리가 얻을 부활에 대한 확증이 됩니다.
고전15: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죽은 자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므로,
일반 신자들도 죽었다가 다시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벌써 된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성을 입으셨던 이로서 죽었다가 다시 살았으므로, 모든 다른 인간성의 소유자들도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모든 인간은 부활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으로 갑니다.
여러분도 부활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역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능력을 통하여 죄와, 죽음과, 마귀를 멸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차 다가올 부활은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소망이 됩니다.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증해 주는 것이요, 우리 죄 속함의 보증이 되며, 우리도 장차 부활할 것이라는 확증이 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절망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삶.
신앙생활이란 막연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과 삶에 활기를 넘치게 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서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해졌습니다.
물론 십자가 없는 부활도 큰 의미가 없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을 더욱 분명히 알게되고 십자가에 감격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확인시켜 준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때 예수님께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먼저 우리의 신앙이 분명해집니다.
신앙생활이란 막연히 교회에 다니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은 십자가의 진리 앞에 무릎을 꿇을 때,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우리도 오늘 본문의 여인들 처럼 복음의 확신 없이 인간적인 신실함과 사람들의 정 때문에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으면 극한 상황에서 우리의 인격적인 신실함으로 우리의 신앙을 유지할 수 없으며,
또한 아무리 기적을 많이 체험해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많은 기적을 체험 했습니까?
그러나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신앙과 삶에 활기를 넘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첫 열매라는 것은 다음에도 같은 열매가 맺힐 것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나아가 우리도 나중에 부활할 것이라는 살아 있는 소망을 줍니다(벧전1:3).
그리고 그 산 소망은 우리의 신앙과 삶에 진정한 기쁨과 생동감을 주는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진정한 헌신이 가능합니다.
인간적인 열심과 헌신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언제 어떻게 제자들처럼 우리의 소망과 바람이 무너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부활을 믿으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철저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특별히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이 뜨거워졌을 때부터 그들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성공과 명예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주 되심과 메시아 되심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헌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의 신앙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변화가 됩니다.
분면 기독교는 도덕이나 윤리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단순히 ‘착하게 살아라’, ‘나쁜 짓 하지 말아라’, ‘정의롭게 살아라’만을 강조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이나 윤리만을 위한다면 반드시 신앙생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다만 부활을 믿는 사람은 정직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은 권력과 재물, 그리고 어떤 세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살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정의롭게 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부활과 영생의 소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분명하게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들 도망했고 허탈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다음에 그들의 신앙과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이 견고해 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만남이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지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소망할 때 우리는 주님께 온전히 헌신할 수 있고 우리의 매일의 삶도 바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기쁨과 감격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첫댓글 퍼갑니다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먹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