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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린도전서12장1~11절
제목 : 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
초대교회의 거의 대부분이 모든 교리적 이해가 부족하고 여러 가지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현대의 교회에서도 이 은사의 부분에 대하여는 많은 혼란이 야기되고 있습니다.
본문 내용으로 보아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은사의 우선순위,
또는 은사에 대한 개인적 자랑, 은사의 원인, 은사를 주신이유, 은사의 종류 등에 대한 이해들이 엇갈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혼란이 있었고 이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물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앞에서 그리스도인이 나보다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행동할 것을 가르쳤듯이, 은사도 개인이 아닌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이 질의한 은사의 문제점에 대하여 답변하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은사를 바로 알아 교회의 공동체의 유익과 서로 봉사하며 덕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1. 은사 분별의 표준(1~3절)
1) 신령한 것의 본질(1절).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고린도 교인들의 서면(書面) 질문에 답하는 말입니다.
“신령한 것에 대하여” 이는 이미 독자들이 제기된 문제점에 관하여,
바울이 알고 있음을 전제합니다.
본문의 문맥과 주제 상 '신령한 것'의 의미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바울의 희망을 분명히 천명(闡明)하면서도 그 대상에 대하여는 친근한 호칭을 사용함으로써 감정적인 문제로 비화될 여지를 최소화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성령의 은사의 목적과 그 기원에 대하여,
그리고 은사의 다양성에 대하여,
무지한 결과 초래할 수 있는 오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2) 믿기 전, 후의 생활 상태 비교(2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고린도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방인 출신으로 이방의 우상 종교를 좇아갔던 과거 상태를 상기시켜줌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있는 현재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현현(顯現) 이전과 이후를 이방인이란 단어로 분명히 구별 짓고 있습니다.
본 구절은 이방 종교의 허구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표현으로,
우상은 생명이 없어서 사람의 요구에 반응할 수도 없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나타 낼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과거에 섬겼던 우상의 본질을 말함으로써,
그들이 이런 헛된 우상을 섬긴 것은 우매함과 세속적 탐심의 결과이고,
그 상태는 비극적인 것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이는 과거의 고린도 교인들이 헛된 우상의 요구대로 이끌려 자기의 판단과 결정과는 무관하게 비인격적인 숭배를 하였음을 보여줍니다.
3)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3절)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논하기 전에,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에 대해 언급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는, 누구나 성령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 즉 성령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1)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합니다.
'저주할 자'는 '신에게 드려진 것'(눅 21:5) 혹은 '신의 저주 아래 놓인 것' 등의 의미입니다.
바울은 저주의 대상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16:22; 롬9:3; 갈1:8). 본 절에서 바울은 '저주받은 예수'와 '주 예수'를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저주받은 자로 인식하는 부류들과
기독교적 그리스도 관을 가지고 예수를 ‘주 예수’로 고백하는 자들을
비교하여 핵심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 '그리스도'라 하지 않고 '예수'라 지칭하고 있는 이유는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인간 예수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신 후 인류 역사에 종속되어 자발적인 삶을 영위하시다가,
그의 택하신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습니다.
한편 예수를 '주'시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성령으로'라고 정한 것은
고후 11:3,4에서 제시한 것처럼 '다른 예수','다른 영' 그리고 '다른 복음'으로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후11:4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다른 예수'란 바울의 증거에 위배되는 것으로,
바울은 예수님을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인간으로서 이해하였습니다.
본장 10절에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를 언급한 것도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다른 신앙 고백 내용을 가진 '다른 영' 때문일 것입니다.
2. 은사를 나누어 주심(4~6절)
성령님은 우리로 예수를 주로 믿게 한 후(3절),
그 분을 섬기도록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런데 은사가 여러 가지고, 섬기는 일(직임)이 다양하고, 일의 결과(사역)도 모두 다르지만, 이 모두가 삼위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결국 은사의 발원지는 ① 하나님(6절), ② 주(5절), ③ 성령 (4절)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습니다(4절).
“[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은사('카리스마톤')는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은혜의 선물'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바울 서신에 16회 나옵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특별한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어떤 신기하고 특별한 은사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여러 가지’라는 것은 은사의 '다양성'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5, 6절의 '여러 가지'와도 동일 합니다.
성령은 같고. -예수님을 주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어떤 특정한 것 들 만이 아니라 매우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다양성 위에 한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알아야 분쟁이나 다툼 따위의 문제가 사라질 것입니다.
2)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음(5절).
(1) 직분의 의미는 여러 가지입니다.
“[5]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직분('디아코니온')은 섬기다, 봉사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여러 가지 의미를 포괄합니다. ‘직분-섬기는 일’은 다양합니다.
① 이 말은 '사랑을 밑바탕으로 한 섬김'을 뜻하고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봉사를 가리킵니다.
②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어떤 의무의 수행'을 뜻하여 사도들이나 전도인들 이나 마가 같은 조력자들이 맡은 책무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③ 때로는 연보하는 일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롬15:31; 고후8:1).
*고후8:1,2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연보는 부수적인 활동이 아니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오는 참된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본절에서의 직임은 이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입니다.
(2) 주는 같습니다.
직임은 개개인의 공명심으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주(主)'를 위한 것입니다.
성도가 그 직임에 따라 각자에게 부여된 영역 속에서,
봉사하는 것은 곧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직임의 열등성 또는 우월성을 따지고 그에 치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을 잊은 처사입니다.
3) 사역은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같음(6절)
“[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본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사역하시는 작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은사를 일관성 있게 주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성령의 은사는
성도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다양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상호 은사의 상이성을 인정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은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마치 나의 전유물인양 자랑하거나 우월감을 가지거나 경쟁하거나 하면 안됩니다.
3. 은사를 주신 목적(7절).
“[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은사 주신 목적과 이유입니다.
1)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2)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벧전4:10).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3) 형제들을 세우기 위함입니다(고전14:12).
*고전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여기서 ‘그것’은 은사를 말씀합니다.
성령의 나타남. -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거가 은사임을 보여줍니다.
4. 은사의 종류(8~10절).
성경에 나타난 은사의 종류를 27가지가 있습니다.
롬12장(7가지): 예언, 섬기는 일, 가르치는 일, 권면, 헌금, 지도력, 긍휼.
고전12장(11가지):지혜, 지식, 믿음, 신유, 기적, 영분별, 방언, 방언통역, 사도,
서로 돕는 일, 행정. (11가지. 롬12장, 엡4장에서 중복되는 것은 빼고서)
엡 4장(2가지): 복음 전하는 일, 목사 (2가지, 중복은 빼고)
그 외에(7가지): 독신, 자원하여 궁핍하게 되는 일, 순교, 대접하는 일, 선교사, 남을 위한 기도, 귀신을 쫓아 내는일.
여기서는 본문에 나온 9가지 은사를 살펴 봅니다.
1) 지적 능력에 관한 은사 (8절)
“[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① 지혜의 말씀 : 교리적 진리를 볼 수 있는 통찰력(2:6~8)입니다.
지혜는 성령의 조명에 의하여 나타냅니다.
② 지식의 말씀 : 교리적 진리들을 생활에 적용 할 수 있는 능력(3:16).
*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지식'이 성령의 기준 내지 결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냅니다.
혹자는 '지혜'와 '지식'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바울은 그들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실제적인 적용을,
‘지식’는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합니다.
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 5)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6)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3:8)입니다.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결합되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됩니다.
(고전2:6-13; 엡1:8,17; 골2:3).
혹자는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들고,
'지식'은 '교사'를 만든다고 합니다.
이 점을 수용 한다면,
'지혜의 말씀'은 본서 28절에 나오는 직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되고,
'지식의 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견해는 '지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이나 '구원의 내용'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이해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2) 믿음의 은사와 병 고치는 은사(9~10상반절).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③ 믿음(πιστισ)의 은사 :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롬1:17;3:22),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본절의 '믿음'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의미합니다. 이는 바울이 8:2에서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본절에서의 '피스티스'('믿음')는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발휘하는 능력의 개념을 내포합니다.
믿음의 능력은 예언하고(히11:3), 기적을 행하는(마21:21; 고전13:2)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됩니다.
*히11: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마21:21“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일반적으로 '피스티스'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는 보다 영향력있게 행사(行使)될 수 있습니다.
④ 병 고치는(신유) 은사. :건강을 회복시키고 일시적으로 죽음을 유보시키는 능력입니다(행 9:40).
*행9:40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병 고치는'은 복수 명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 포괄하는 말입니다.
⑤ 능력 행함 : 귀신을 내어 쫒거나(행19:12), 불구로 만들거나(행13:10), 죽음 까지도 가져오는 것입니다(행5:5).
능력 행함 은사는 '믿음'과 '병고치는 은사'와 본질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肢體)들에게 주신 특별한 역량으로서,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기적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도록 하여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사는 '병 고치는 은사'보다 더 포괄적인 힘을 지닙니다.
이것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행 5:1~5.),
마술사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든 일(행 13:11)등과 같이 마귀를 대적하며,
그 추종 세력을 축출하는데 사용되는 능력입니다.
이러한 ‘능력 행함’으로 나타나는 기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방편이 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을 계시하는 수단이 됩니다.
⑥ 예언의 은사 :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14:3).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예언함은 하나님의 계시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은사로 하나님에 의해 수여된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래에 일어나리라고 예측되는 상황과 현재 일어난 사건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언'을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르치기 위해서 베푸신 가장 큰 은사 중의 하나로 보았습니다.
예언은 교회를 신앙의 기초 위에 세우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을 설명해 줍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언'이란 구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가 완결된 현재에 있어 '예언'이란, 예언의 말씀인 성경을 바로 이해하여 가르치며, 현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리킵니다(계1:3).
*계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⑦ 영들 분별함 : 참 선지자들에 의해서 외쳐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사탄에 의해서 주어진 말을 구별하는 능력입니다(고후11:14).
*고후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여기서 '영들'은 악한 영들을 의미하며,
'분별함'는 '구별', '인식', '가려냄', '심판' 등의 의미를 지닙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가 많았으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해 그릇된 가르침을 분별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해 볼 필요가 있었습니다(요일4:1).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하지만 당시에는 기록된 말씀이 없었으므로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가 필요했습니다.
이 은사는 교회를 거짓 선지자들의 미혹으로부터 보호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發露)였습니다.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는 어떤 현상의 이면에 있는 정신적인 영향력을 간파하는 능력으로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 있는 것을 알았고(행5:1~10-아나니아와 삽비라),
마술사 시몬의 마음이 '악독하고 불의한 영'에 얽매여 있는 것을 간파하였습니다(행8:23).
이러한 은사를 활용한다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하는 어떤 행위가 신적인 것인지 혹은 인간적인 것인지, 아니면 사단으로 부터 나온 것인지를 확실히 식별할 수 있습니다.
3) 방언에 관한 은사(10하반절).
“[10]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⑧ 각종 방언 말함 : 통용되고 있는 언어를 배우지 않았지만 말 할 수있는 능력입니다(행2:11).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각종 방언 말함의 '각종'은 '혈통', '민족', '종류' 등을 의미하므로 방언의 종류가 여러 가지임을 가리키고 각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였음을 시사합니다. ‘방언’은 고린도 교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았던 은사 가운데 하나로 교린도 교회에서의 방언의 형태는 각기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언어뿐만 아니라 어떤 종교적 흥분 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하는 것까지도 포함하였습니다.
⑨ 방언을 통역함 : 예배 모임에서 표현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옮기는 능력입니다(14:27).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방언들 '통역함'은 '번역', '해석'을 뜻하며,
이 단어는 신약에서 본절과 본서14:26에만 나옵니다.
이 특별한 방언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경우에 이 방언에서 유익을 얻고자 한다면 이 방언을 통역할 사람이 있도록 성령의 통역 은사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14:13).
*고전14:13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그런데 바울은 방언이 그 자체로는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으므로,
자제할 것을 권면합니다(14:28).
본절에서도 방언의 은사와 함께 통역함의 은사가 언급되는 것은,
은사가 교회에 유익을 도모할 수 있어야 함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각 은사의 중요성보다 이 모든 은사들이
“같은 성령”(한 성령;8,9,11절)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각자의 은사는 개인이 아니라,
교회 전체를 위해서 유용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성령의 행하심(11절)
“[11]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은사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기원을 가집니다.
6절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한 데 반해서,
여기서는 성령의 행하심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은사들을 발생(發生) 시키실 뿐만 아니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은사들을 자기들의 관점에 비추어 비교하여 열등의식이나 우월감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것들이며, 일시적인 것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이 은사는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은사가 무엇인지 개발하고,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하므로 교회공동체를 유익하게하고, 청직기 직분을 감당하며, 아름다운 덕을 쌓은 우리 모두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우상의 노예’로 살던 우리를 주의 백성으로 삼으십니다(1~3절).
진정한 회심은 인생의 주인이 바뀌는 것인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가능합니다.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누구도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참된 신령함을 판독하는 기준도 남다른 은사를 소유하는 데 있지않습니다.
‘주 되심’을 인정하고, 그 은사로 ‘주의 뜻’을 얼마나 받드는지에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게 있는 은사는 나를 높이고 나를 만족하게 하는 또 다른 우상일 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떠난 은사주의나 영성운동을 경계하십시오.
2)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 직분, 사역을 주십니다(4~6절).
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같기에’, 더영허자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목적’또한 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특정한 은사(방언, 예언, 지식)를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분쟁에 휩싸였습니다.
‘한 성령’안에서 주신 은사를 통해 ‘한 몸’을 이루기보다 각자의 은사를 견주다가 분열만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외면한 채 더 나은 은사, 더 주목받는 직분, 더 편한 사역만 찾고 있는 건 아닌지요?
3) 성령님은 ‘자기 뜻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눠주십니다(7,11절).
은사는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서로 은사를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랑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주신 것이요, ‘내 필요’가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주도권과 품으신 뜻을 외면하는 모든 은사의 사용을 경계하십시오.
4) 성령의 다양한 은사가 소개됩니다(8~10절).
가르침과 관련된 은사(지혜, 지식)와 초자연적인 능력의 은사(믿음, 신유, 능력 행함), 영감을 받은 언변의 은사(예언, 분별, 방언, 통변)로 나뉩니다.
받은 은사를 ‘적절하게, 질서대로’(14:40) 발휘 할 때 개인과 공동체에 유익이 있습니다.
은사주의는 경계해야 하지만 지나친 경계로 자칫 성령의 은사를 제한하거나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 합시다.
신앙과 교회의 유익을 도모하는 건전한 은사 사용에 대해 편협함 없이 지도하고 있습니까?
또 내가 받은 은사를 합당하게 잘 발휘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