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우리말 반야심경 <본문> 선문답과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2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참된 말씀(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앞에서 색과 공에 관해 설명으로 이해를 해 봤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실제의 색과 공을 체험해 보자.
누가 나에게 질문을 한다.
색(法)이 무엇입니까?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다.
색이란 모든 만상의 경계(境界)다.
즉 나타나 있는 자체의 형색(形色)이 색이다..
그래서 손을 들어 보여준 것이다.
그러면 공(法)은 무엇입니까? 질문하면
다시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여준다.
공은 무엇인가? 하는데도
어째서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였을까.
어떤 스님이 숲속에서 변을 보고 나오는 운문스님에게
'부처(색)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운문스님은 '마른 똥막대기(乾屎橛)'라고 한다.
당시는 화장실이 없이 특정 숲에서 볼일을 본 모양인데
그러니 옆에 많은 마른 똥무더기를 보고 있는 그대로 알려준 것이다.
귀종선사는 무엇이 부처(색)입니까? 라는 제자의 질문에
질문하는 그놈 '네가 곧 부처이다.'.라고 했다.
나타나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알아차리면
모든 것이 모두 부처(색)라는 말이다.
구지선사는 법(공)이 무엇입니까? 하면
손가락을 하나 들어 보였다.
임제선사는 '할!'이라고 고함을 치고
덕산스님은 방망이로 때린다.
조주스님은 개의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문에 '無'라고 했다.
이 질문도 분별없는 공이 무엇입니까? 라는 것과 같다.
無는 있다는 반대인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직 지금 성성한 '無'일 뿐이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불법을 직접 체험하고
알아차리는 문답들이다.
색과 공의 실제는 관념적인 이론이나 설명이 아닌
오직 지금 활발발한 알아차림이 참 진리이다.
만약 이러한 문답을 척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면
색이나 공에 대한 진리를 아무리 많이 외우고 이해하고 있다 해도
반야의 참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목이 마른 자가 직접 물을 먹고 알아차리는 것과
물을 먹으면 갈증이 해소된다는 것을 아는 차이다.
그래서 부처님도 진리를 알고 싶으면 직접 와서 체험하라고 했다.
혹자는 고리타분하게 옛날 선사들의 문답을 왜 들춰내느냐고 한다.
선사들의 문답을 생각으로 이해했다면 그런 말이 나온다.
하지만 참 진리인 깨어있는 소식으로 알아차렸다면
스스로 무식한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선사들이 똥막대기라 하고, 주먹을 쥐고, '할'을 하고, 때리며 '無'하는
그 순간순간은 과거가 아닌 오직 지금 여기서 성성하게 살아 있다.
참 진리는 시공간을 초월한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존재한다. 살아 있다는 시공간은
오직 지금 그대가 알아차리는 순간밖에 없다.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생각일 뿐이다.
물론 지금이라는 현재도 가정한 설명이지 실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고개가 갸우뚱한다면 덧말을 좀 더 붙여본다.
색(色)이 나타내 보이는 만상이라면
그 만상이 나타나 보이게 하는 작용이 공이다.
즉 색과 공은 동시에 연기작용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색으로 보이게 하는 작용성은 공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색과 공은 드러남과 감춤으로 이사(理事)로
혹은 상즉입(相卽入),쌍차조(雙遮照) 등으로 설명을 하는데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다시 말해 나타나 보이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변하는 작용만 있다.
그 작용하는 것이 공한 성품이기에 색도 거짓(假)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과 공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뜻이 된다.
공은 작용성이기에 머문 없이 변하여
이름과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色)은 시시때때로 변하고 없어진다(空).
그래서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 한다.
성주괴공은 나타나 있는 것은 모두가 무너져 공하다는 뜻이며
생주이멸은 나타나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법은(製法) 무상(無常)하다.
있다. 없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세계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空卽是色)인
색이 공이 되고 공이 색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