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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朝鮮賦)
명나라 동월(董越) 저
조선부 머리말(朝鮮賦引)
홍치 원년(1488년) 봄에 선생이신 규봉 동공이 우서자 겸 한림시강으로서 조서를 받들고 조선국에 사신으로 가셨다가,
여름 5월에 돌아와서 사신으로 임금의 명을 받들고 갔던 수미(首尾)를 아뢰었다. 그 나라의 서울에 머문 지 열흘도 안 되어
왕명을 선포하고, 그 군신을 맞이하는 사이에 일을 돌아보고 주고받은 말을 살펴 좋은 것을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였다.
나머지는 길에서 왕래하는 사이에 두루 묻고 찾아 얻은 것이 더 많다. 이에 그 얻은 것을 모두 모으고 평소에 들은 바를
참고하여, 사실대로 글을 지어 『조선부』 한부 만천언을 만들었는데, 상께 헌납한 것도 모두 이 뜻이다.
편이 이루어지자 사대부들이 그것을 전해가며 외우면서 아름답다고 탄식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모두들 생각하기를
깊고도 깊어 믿을 만하고, 빛나고 빛나 문채가 있다고 했다. 『시경』의 전에 “부라는 것은 그 일을 펴서 바로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선생의 문체가 이런 점이 있다. 숙손목자가 “사신이라 직임은 시경에서처럼 일에 대해 묻고,
어려운 것에 대해 묻고, 부모에게 여쭈어보고, 예를 묻고 것과 같이 하여 반드시 두루 물어야 한다”고 한 것은 언표에
갖추어 나타나 있다. 옛날 성왕의 고아한 노래에서 늘어놓은 말도 이것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이 길을 떠나가실 때, 내가
일찍이 남 몰래 드린 말 가운데, “산하를 묘사하고 태평을 노래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대개 선생께서 반드시 국가의
융성함을 크게 떨치기를 바란 것이다. 선생이 조정으로 돌아오심에, 나는 부모의 상을 당하여 지은 글에 대해 더불어
이야기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는데, 지금 다행히도 이 부를 읍사훈 왕본인 군에게 얻어 서너 번 받들어 읽어보니, 소리가
커가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왕본인이 삼가 나의 동년 오대윤 덕순과 더불어 판각하여 길이 보전하고자 나에게 그 머리에
서를 부탁하였다. 이때는 바로 제자로서 부지러힌 배워야 할 때이니, 마침내 감히 보잘것없는 글을 사양하지 못한다.
때는 홍치 30년 섣달 여드레,
사진사 한림원 서길사 문인 태화 구양봉은 받들어 쓴다.
봉의대부 우춘방 우서자 겸 한림시강 영도 동월 찬
사진사 문림랑 지태화현사 석태 오필현 간행
길안부 태화현 유학훈도 계림 왕정 교간
부라는 것은 그 일을 펴서 바로 말하는 것이다. 내가 조선에 사신으로 가서 그 땅을 지나친 것이 달포가 넘는다. 무릇 산천,
풍속, 인정, 물태를 날마다 둘러보고 물어보다 얻는 것을 밤이 되면 문득 종이 쪽지에 기록하여 상자에 넣어두었다. 그러나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오히려 많았다. 일을 마치고 요동을 지나오면서 공서에서 묵은 것이 무릇 이레이다. 동쪽은 8참이나
되고 아울러 길도 험하였는데, 게다가 따라오는 자가 옷을 빨았기 때문이다. 이에 동사인 황문 왕한영 군이 기록한 것을
고치고 바로잡았다. 무릇 사신의 일에 무관한 것은 모두 버렸지만, 아직 간략하게 쓰려는 뜻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대개 곧이곧대로 일을 쓰다 보니, 진실로 그 말이 번거롭고 많아지게 된 것이다.
부는 다음과 같다.
1.
저 동국을 보건대, 조가(朝家:중국)의 바깥 울타리라.
서쪽은 압록강까지이고, 동쪽은 상돈에 닿아 있다.
천지는 자못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
그 나라의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서북쪽은 건주이며, 정북쪽은 모련해서(毛憐海西)이다.
팔도의 성분은 경기가 홀로 높고, 충청, 경상, 황해, 강원으로 날개를 삼았다.
이름을 영안(함경도)이라고 한 것은 국경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뜻이다.
평안은 땅이 조금 메마르고, 전라는 물산이 가장 풍부하다.
경기, 충천, 경상, 황해, 강원, 영안, 평안, 전라는 모두 도의 이름이다. 평안은 곧 옛날 번한의 땅이요, 경상은 곧 옛날
진하의 땅이며, 전라는 곧 옛날 마한의 땅이다.
그 너비는 2천리요, 길이는 너비의 두 배나 된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리이고, 남북은 4천 리라고 지서(志書: 작가 미상)에 전한다.
옛날에는 나라가 서너 개 있었으나, 지금은 오직 하나뿐이다.
신라, 백제, 탐라가 모두 조선의 소유가 되었다.
생각건대, 그 나라가 앞시대 사람들의 전철을 밟지 않고 국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소대(昭代 : 자기 시대 임금을
지칭하는 말)의 깊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2.
조서로 나라 세울 것을 허락하니,
스스로 성교(임금이 백성을 교화하는 덕)를 이루었다.
본조 홍무 2년(1369년)에 고려의 국왕 왕전(공민왕)이 표를 올려 즉위를 축하하므로, 조서를 내려 스스로 황제의 교화를
이루었다고 인정하였다. 그래서 구뉴(龜紐:거북의 형상을 새긴 도장의 꼭지)와 금인(金印:제후, 장군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
을 하사하였다.
시경을 말하고, 서경을 말하며, 상(庠:은나라 학교)을 보고 교(校:주나라 학교)를 본다.
선비가 궁하면 좀(蠢)을 쫓고, 문장의 글귀만 아로새기며
벼슬길이 뜨이면 붕새처럼 날개치고 표범처럼 변한다.
그 나라는 우리 조성의 정삭을 받들고, 향시(鄕試)는 자, 오, 묘, 유(酉) 년에 행하고, 회시(會試)와 전시(殿試)는 진, 술,
축, 미(未)년에 행한다.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교모하게 기술을 익힌다.
관청은 옛 것을 본따 봉급은 전(田)을 주는 것으로 하며,
형벌은 궁형을 행하지 않고 도둑은 책망하고 가르치게 한다.
내시와 환관(閹宦)도 모두 궁형을 당한 것도 아니고, 오직 어릴 때에 다쳤거나 병을 앓았던 자를 데려다 하였기 때문에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도둑은 가벼이 용서하지 않았다. 이 일을 서너 명의 통사에게 물어보았더니 하는 말이 모두 들어맞았다.
한결같이 곡식이나 베로 무역을 하되, 그 쌓아둔 것에 따라 부자로 여기고,
금이나 은을 사용하는 것은 모두 다 금하였으므로, 치수(錙銖:하찮은 득실)라도 또한 죄를 따졌다.
민간에서는 분문(分文)의 금과 은이라도 간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곡식이나 베를 가진 부자가 된다.
그들은 무역, 교역을 한결같이 이것으로 한다. 그 나라에 탐욕스런 관리가 적은 이 때문이다.
전답의 세금은 결(結)로 무(畝)를 대신하였는데, 소로 4일 동안 가는 것은 4말(斗)의 조(租)를 내며,
한 마리의 소가 힘을 다해서 4일 동안 가는 땅이 결이 된다.
선비를 양성함에 종류를 나누어 인원을 정하는데 2재(상재와 하재)에 기숙하는 자는 두 끼니 이상의 밥을 먹어야만 한다.
성균관에는 항상 5백 명을 양성하는데, 3년마다 명경으로써 뽑은 자를 생원이라 하고, 시부(詩賦)로 뽑은 자를 진사라
하며, 또 남, 중, 동, 서의 4학에서 오른 자를 승학(乘學)이라 한다. 4학에서 북쪽을 피하여 감히 이름을 붙이지 못한 것은
조정을 높이는 것이다. 생원과 진사로 전시(殿試)에 합격한 자를 일러 식년이라고 하는데, 곧 벼슬을 하고,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성균관에서 양선된다. 식년은 3년마다 있는데, 33명만 뽑는다.
벼슬이 3품이 아니면 비단으로 몸을 꾸밀 수 없으며,
낮은 벼슬아치는 대개 명주, 베를 입고, 모시는 입지 않는데, 그 질푸른 빛의 베옷도 또한 항상 입지는 않고 연회 때나
이용한다.
백성이 한 가게(廛)를 받으면 벼나 삼은 곧 모두 움을 파고 넣어둔다.
그 갈무리하는 법도 역시 요나라 사람들이 하는 것과 같다.
그 가장 말할 만한 것은, 나라에 여든 살 먹은 노인이 있으면 남녀 모두에게 잔치를 베풀어 그 은혜를 깊게 해주며,
매년 늦가을에 왕은 여든 살 먹은 노인에게 궁전에서 잔치를 베풀고, 왕비는 여든 살 먹은 부인에게 궁궐에서 잔치를
베풀어준다.
아들에게는 3년상이 있어, 비록 노복이라로 행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효를 이루게 한다.
나라의 풍속에 상례는 반드시 3년 동안 지내고, 또 묘살이를 숭상한다. 노복에게는 백일의 상을 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관례지만, 3년상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또한 그 청을 들어준다.
왕도(王都)에는 귀후서(歸厚署)를 설치하고, 관곽을 저장하여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며,
그 나라의 관곽(棺槨)은 소나무를 많이 쓴다. 그러나 오는 길에 보니 적당한 재목감이 적은 듯하였다. 그러므로 왕도에
귀후서를 두어 편리하도록 한 것이다.
향음에서는 술잔 나누는 예를 엄격히 지키고 두변(豆邊)은 질서있게 하여 시끄럽지 않도록 경계한다.
예는 중화와 같으나, 오직 조정이란 두 자를 고치어 국가로 했다.
혼인은 조심스레 중매하고 재초(再醮)해서 난 자식은 비록 많이 배워도 사류에 끼이지 못하며,
풍속은 재가를 부끄럽게 여겨 재가해서 낳은 자식 및 행실이 좋지 못한 부녀의 자식은, 모두 사류에 드는 일이나 벼슬에
오르는 일(仕版)이 허락되지 않는다.
문제(門弟)에는 잠영(簪纓)을 가장 중히 여기고 대대로 양반에 속한 사람이라도 혹 떳떳지 못한 일을 하면 그에게 모두들
예모(禮貌)을 행하지 않는다.
조상 때부터 일지기 문무의 벼슬을 겸한 사람을 양반이라고 부른다. 양반의 자제에게는 다만 독서만 허락되고 기예를
익히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혹 행실이 착하지 않으면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비난한다.
집에는 도박 기구를 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바둑이나 쌍륙 따위는 민간자제들에게 익히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제사는 곧 모두 가묘를 세우는데, 대부는 3대까지 제사를 지내고, 선비와 서민(士庶)들은 조고(祖考)에 그친다.
이것은 모두 기자로부터 그 풍습이 전해 내려온 것이고, 또한 중국에서 하는 것을 보고 본받은 것이다.
이상은 모두 관반사 이조판서 허종이 갖추어온 [풍속첩]에 보인다.
3.
대개 성곽을 쌓음에 모두 높은 산을 베고 있다.
가금 언덕이나 산기슭으로 나와, 또한 구불구불 둘려 있는 것이 보인다.
큰 것은 날아갈 듯 치첩이 솟아 있고,
작은 것도 우뚝하고 표관(豹關)이 웅장하다.
대개 의순(義順)에서 선천을 지나려면,
의순은 관의 이름으로 압록강 동쪽 기슭에 있는데, 강은 중국과 조선의 경계이다. 선천은 군의 이름으로 의주 동쪽에
있다.
그 사이에 비록 용호
산 이름으로 용천군의 진산이다.
웅골
산 이름으로 철산군의 진산이다.
따위의 높은 산이 있다고 하지만 오직 곽산이 더욱 높이 하늘에 솟아 있으며,
곽산은 군의 이름이며, 그 성은 꼭대기에 있는데, 지서에서 능한성(凌漢城)이라고 이름하였다.
또 신안에서
관의 이름으로 정주에 있는데, 그 앞에는 누각이 있다.
대정을 지나려면
강 이름으로 박천군에 있다. 즉 옛날 주몽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이곳에 이르렀을 때, 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준
곳이다. 또 박천강이라고도 부른다.
비록 천마
산 이름으로 정주의 진산이다.
봉두와 같은 높은 산이 있다고 하지만
봉두는 곧 가산군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으로 가면 오직 가산령이 가장 높다. 그 꼭대기에 효성, 망해란 곳이 있는데,
모두 중국의 사신들이 지나는 곳이다. 안주성은 아래로 살수를 내려다보고, 위에는 백상루가 있는데, 즉 수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또 청천강이라고도 하는데, 성 안에는 안홍관이 있다.
군은 숙천이요, 읍은 순안인데 지세가 모두 돌이 없고, 누는 숙녕이요,
숙녕관 앞에 누각이 있다.
관은 안정인데 지세가 조금 넓다.
관의 이름으로 순안현에 속해 있다.
4.
오로지 저 서경만은 땅이 가장 평평하고 넓다.
지세를 따라 이름을 지어, 평양이라 하였다.
이에 나라를 세웠을 때에 이미 물가에 유성(維城)을 높이 쌓았는데,
얼마를 지내다 또 가까운 북쪽 산의 험한 곳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졌을 때에도 이미 있었다. 고구려에 이르러서 또 그것이 험한 곳에 있지
않음을 흠으로 여겨 다시 그 성 북쪽에 한 성을 증축하였는데, 동으로는 대동강을 내려다보고 북으로는 금수산에 접하였다.
기자 이후 동한시대에 이르러, 준(準)이란 사람이 연나라 사람 위만에 쫓기어, 마한 땅에 도읍을 옮겼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없다.
5.
나머지 여러 고을은 흙이 대개 마르고 붉다.
가끔 누른 흙이 있으나, 또한 모래와 돌이 섞이었다.
오직 이 성 가까이는, 그 흙이 차지다.
밭도랑과 봇도랑의 형상이 남아 있고,
옛 성안에 기자가 구획한 정정형의 제도가 아직 남아 있는데, 곧은 길 같은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벼와 삼과 콩과 보리를 심기에 알맞다.
6.
그 풀은 무성하고, 그 나무는 키가 크다.
여기에 이르니 중국의 것과 같이 높은 버드나무가 있었다.
잎에는 매미가 울고 있고, 풀은 빼어나고 무성하다.
금봉은 멀리 우뚝한 용산에 접하고,
용산은 구룡산 또는 노양산이라고 하는데, 금수산 북쪽 10리에 있고 산꼭대기에는 99개의 연못이 있다.
부벽루는 밑으로 도도한 패수를 굽어본다.
대동강은 곧 옛날의 패수이다.
기린은 석굴에 남아 있고,
기린굴은 부벽부 아래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명왕이 기린마를 타고 이 굴로 들어왔다가, 땅 속에서 조천석 위로
나와 승천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말 발자국이 남아 있다.
낙타와 양은 산허리에 반쯤 버려져 있다.
옛날의 돌말과 구리낙타가 모두 가시덤불 속에 있다.
궁궐은 옛터만 남아 있고, 소나무는 외나무다리인 양 누워 있다.
지난 일을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슬퍼하노니, 햇빛이 마침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7.
공자묘의 뜰에 세운 형상은 모두 면류관과 상(裳)을 갖추었다.
또한 청금(靑衿)도 있어, 길가에 나란히 늘어섰다.
부드러운 비단으로 된 머리띠와, 띠는 바람에 나부끼고 날린다.
가죽으로 만든 신은, 밑이 뾰족하고 모가 났다.
문안할 때는 몸을 굽히고, 앞에 나아갈 때는 종종걸음을 한다.
생도들은 모두 부드러운 비단 건(巾)을 썼고, 푸른 비단 적삼에 띠 하나를 늘어뜨렸다. 발에는 코가 뾰족하고 밑바닥은
가죽으로 만든 신을 신었고, 버선도 신었다.
8.
동쪽에는 기자의 사당이 있는데, 예에 맞게 나무 신주를 두었다.
그곳에 쓰기를, “조선 후대 시조”라고 하였다.
대개 단군을 높이는 것은 그 나라를 세우고 땅을 연 사람이기 때문이니, 마땅히 기자로 그 대를 잇고 왕통을 전하였다고
여긴 것이다.
단군은 요임금 갑진년에 여기에 나라를 세웠다가, 뒤에 구월산에 들어갔는데, 생애를 끝마친 때는 알 수 없다.
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사당을 세우고 제사지내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지금 그 사당은 기자의
사당 동쪽에 있는데, 그곳의 나무 신주에는 “조선시조단군위”라고 쓰여 있었다.
산소는 토산에 있는데, 유성(維城)의 서북쪽(건방)이다.
기자묘는 성의 서북쪽 토산에 있는데, 성에서 반 리도 안 되지만, 산세는 매우 높다.
두 늙은이(翁仲)이 있는데, 당나라 때 사람 같은 복장을 하였다.
얼룩얼룩 이끼가 끼어 있어, 마치 비단 무늬옷을 입은 것과 같다.
좌우에는 꿇어앉아 젖을 먹이는 석양(石羊)이 벌려 있고, 비갈(碑碣)은 머리를 쳐든 귀부 위에 있다.
둥근 정자를 지어 절하는 자리를 만들었고, 뜰의 가장자리는 다듬지 않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이것이 보본(報本)의 뜻은 융성하지만, 물건을 갖추는 예의로서는 소홀한 것이다.
9.
대동강을 건너서면 산은 차츰 높아지고, 생양(生陽-관의 이름)에
다다르면 길은 다시 우회한다.
소나무 그늘에 버려진 영루(營壘)는 울퉁불퉁 옛 무덤 같고,
전하기를, “당나라 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만든 영루이다.”라고 하는데, 울퉁불퉁 크고 작은 것이 질서가 없다.
너무도 기주(冀州)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있다. 내가 처음 기주에 갔을 때 이를 의심하여 어떤 늙은 군인에게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당나라 왕이 동쪽을 칠 때 양식의 무더기라고 속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그 밑에는 흙을
쌓고 그 위를 쌀로 덮었는데, 마치 모두 단도제(檀道濟)가 모래를 말에 담아 작전을 세웠던 일과 같은 것이다. 생각건대,
이 땅의 영류도 또한 이런 종류일 것이다.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파도는 크고 넓음을 알겠다.
땅은 황해도에 속했는데, 그 북쪽은 모두 산이요, 그 남쪽은 바다에 닿아 있다.
성불(成佛-고개 이름)의 웅장한 관문에는, 버린 돌이 층층이 쌓였다.
북으로는 자비(慈悲-고개 이름)에 접하고,
남으로는 발해(渤澥)에 다다랐다.
앞서 원나라에서는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우리 명나라 때에 이르러 안과 밖의 구별이 없음을 보였다.
성불령은 북으로는 산을 베고, 남으로는 바다를 베고 있다. 산꼭대기에서 바라보면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다. 어떤 관문
어귀에 옛날에 무너진 벽돌담 성(甃城)의 네모난 돌 두어 무더기가 있었다. 어떤 통사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그 북쪽은 곧
자비령으로 원나라 때에 이르러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는데, 이것이 곧 관문의 입구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그렇다면
압록강에서 동으로 평양에 이르기까지 모두 내지(중국 땅)가 될 것이니, 조선이 통치하는 8도 가운데 한 도를 떼어내고도
남는 것이다. 우리 성조(명태조)는 모두 그것으로 경계를 삼았으니, 마땅히 공손히 예를 행하여 옛날과 다른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고개는 황주에 속해 있다.
10.
연진(延津-강 이름), 검수(劍水-館의 이름), 봉산(鳳山-고을 이름), 용천(龍泉-관의 이름).
환취(環翠)는 날아갈 듯 아름답고,
환취는 누대 이름으로 봉산주 관내에 있다.
총수(葱秀)는 구름이 이어졌다.
산은 벽처럼 우뚝 솟아 물가에 임하였는데, 옛 이름은 총수(聰秀)이다. 나는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일찍이 가문을
지은 적이 있다.
보산(寶山)에는 서기(瑞氣)가 날아오르고,
금암(金巖)에는 시내가 통과한다.
보산, 금암은 다 관의 이름으로서 평산부에 속해 있다.
성거(聖居), 송악, 천마(天摩), 박연
성거, 송악, 천마는 모두 산 이름이고, 박연은 폭포 이름이다. 송악이 곧 그 진산이고, 성거와 천마는 동북쪽에서 뻗어
나와 다섯 봉우리가 있으나, 모두 벽공에 꽂힌 듯 솟아 있다. 그 가운데 세 보웅리가 더욱 높고 좌우의 두 봉우리는 조금
물러나 낮으니, 마치 시자(侍子)의 모습과 같다. 항상 안개와 구름에 돌려 있어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내 일찍 시를 지은
일이 있다.
개성에 이르러 머무니, 유도(留都)가 이곳에 있다.
위봉루의 남은 터가 있어 북쪽 기슭에 버려졌고,
위봉은 누대의 이름으로 왕건이 살던 집의 앞문이다.
반룡의 옛 언덕이 있어 동쪽의 밭두덕에 솟았네.
동쪽에 능묘가 있는데, 곧 지금 국왕 이씨의 선롱(先朧)이다.
신령스런 못에는 신물(神物)이 숨어 있고, 긴 내에는 폭포가 걸려 있네.
산꼭대기에 용추폭포가 있다. 전하기를, “왕씨가 여기에 도읍했을 때 가뭄을 만나, 왕이 친히 가서 기도했으나 응함이
없었다. 도술자가 용에게 임금의 뜻을 알리니, 물에서 나와 뵈었다. 왕은 지팡이로 용을 때려 비늘 몇 개를 떨어뜨렸다.
지금도 비늘이 국고 안에 수장되어 있다.”고 한다. 통사 이의(李義)가 개성 사람으로 일찍이 나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또 왕에게 아뢰어 비늘을 내어다 내게 보여주려 하였으나, 나는 쓸데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그만 두게 하였다.
여염은 만 정(井)이고, 곡물은 백 전(纏)이다.
관서에서는 또한 관리들의 높고 낮음을 한정하고,
묘학(문묘와 태학)에서는 또한 성현의 상을 엄하게 설치하였다.
지금의 군학(郡學)은 곧 왕씨 때의 성균관이다. 성현은 모두 소상(塑像)으로 평양과 같다. 그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건물은 곧 왕씨 때의 태평관으로, 다른 관보다 유독 뛰어나고 웅장하다.
미나리는 반수(泮水)에서 향기를 보내고,
운초(芸草)는 묵은 책의 좀을 물리친다.
봄바람에 술집 깃발이 나부끼고, 달밤에 음악소리 들린다.
그 민물(民物)은 풍성하여 실로 다른 고을에 비길 것이 아니요,
풍기(風氣)는 밀집하니 또한 서경에 견줄 바가 아니다.
대개 왕씨가 여기에서 왕 노릇한 지가 4백 년이 넘었는데, 요(瑤-공양왕)에 이르러 혼미하여 비로소 임시로 나라 일을
이씨에게 맡기었으니, 고려라고 이름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것으로부터 이미 서너 개의 성이 바뀌었는데, 단(旦-이성계)이
나라를 얻자 다시 옛날 이름을 처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본조 홍무 25년에 고려 국왕 왕요가 혼미하여, 사람을 많이 죽여서 민심을 잃자 나라 사람들은 모두 문하시랑 이성계를
추대하여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게 하고, 나라의 지밀직지사 조반을 보내와서 명을 청하였다. 뒤에 이성계는 “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또 나라의 이름도 바꾸어 임금께 청하였다. 우리 임금은 이르기를, “동이의 이름 가운데 오직 조선이 가장 좋고 또
가장 오래된 것이다“라고 하고, 조선이라 고치도록 하였다. 명을 받은 뒤에 마침내 지금의 한성부로 천도하였는데,
개성은 이로부터 유도가 되었다고 한다.
11.
임진강을 건너고, 파주에 이르렀다.
임진은 강 이름으로 장단부에 속해 있다.
멀리 한성을 바라보니, 아름다운 기운이 높이 오른다.
이에 벽제(관의 이름)를 지나, 홍제(누의 이름)에 오른다.
이곳이 왕경으로서 동쪽에 우뚝 솟았다.
높고 높은 삼각산으로 자리를 정하였고,
삼각산은 곧 왕경의 진산으로서 지세가 가장 높은데, 왕궁은 그 산허리에 있다. 그 산마루를 바라보니 높은 산들이
마치 톱니와 같다.
푸르고 푸른 수많은 소나무들로 덮였다.
북으로 천 길이나 되는 산으로 연결되었으니 어찌 천군(千軍)을 누르는데 그치랴.
서쪽으로 한 관문을 바라보니 그 길은 단지 말 한 필이 겨우 지나갈 만하다.
홍제루에서 부터 동쪽으로 반 리도 안 되는 곳에 천연적으로 된 관문이 있는데, 북으로는 삼각산에 접하고 남으로는
목면산에 접하였다. 가운데로 말 한 필이 자나는데, 더할 데 없이 험하다.
산이 성 밖을 둘러싸매 날아가는 봉(鳳)이 빛을 내듯 환히 빛나고,
동쪽으로 여러 산을 바라보면 모두 팔짱을 끼고 둘러싼 형세이다.
모래가 소나무 뿌리에 쌓여 있어 눈이 처음 갠 듯 희다.
삼각산에서부터 남산에 이르기까지 산 빛은 모두 희고 약간 붉어 바라보면 눈과 같다.
모화관(慕華館)은 남서쪽(坤方)의 산록에 세워졌고, 숭례문은 남쪽(離方)의 위치에 당하였다.
모화관은 성으로부터 8리쯤 떨어져 있는데, 가운데는 전이고 앞에는 문이다. 무릇 조서가 이르면 왕은 곧 나아가 길
왼쪽에서 맞이한다. 숭례문은 그 나라의 남문이다.
한편으로는 두루 묻고 살피는 사신이 쉬는 곳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글자와 수레바퀴를 쓰는 제후를 맞이하는 곳이다.
조서가 오면,
왕은 곧 곤면(袞冕)을 입고 교외에 나가 맞이하고,
신하는 곧 잠영(簪纓)을 차리고 고니처럼 공손히 모신다.
거리에는 모두 늙은이, 어린이들로 꽉 채워지고,
누대에는 모두 수놓은 비단옷이 입혀진다.
거리 사람들의 집에는 모두 임금이 내려진 예제(禮制)인 듯한 채색비단을 치고 그림을 건다.
음악소리는 느린 듯하면서 빠르고, 차린 음식은 빛나고 또한 곱다.
향나무(沈檀)는 새벽 해가 연기와 안개를 뿜는 것과 같고,
도리(桃李)는 동풍에 날리는 비단처럼 아름답다.
시끌벅적(騈闐) 수레와 말 소리가 울리고, 끝없이 어룡 유희가 나온다.
이하의 글에서는 백희(百戱)를 베풀어 조신을 맞이하는 광경을 말하였다.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신선이 사는 곳)의 바다 해를 안고,
광화문 밖에 동서로 두 자리의 오산(鰲山-산대)을 벌렸는데, 높이가 광화문과 같으며 극히 공교롭다.
원숭이는 새끼를 안고 무산협의 물을 마신다.
사람의 두 어깨에 두 어린 아이를 세우고 춤을 춘다.
근두(筋斗-땅재주 넘기, 곤두박질)를 뒤치매 상국(相國-절 이름)의 곰은 비교할 것도 없고,
긴 바람에 울거니 어찌 소금수레(鹽車)를 끄는 뛰어난 말(驥馬)이 있겠는가.
많은 줄을 따라 내리매 가볍기는 신선과 같고,
외나무다리를 밝으매 날뛰는 산 귀신인가 놀라며 본다.
사자와 코끼리를 장식한 것은 모두 벗긴 말가죽을 뒤집어쓴 것이고,
봉황새와 난새가 춤추는 것은 들쑥날쑥한 뀡 꼬리를 모은 것이다.
대개 황해도나 서경에서 솔무(率舞)를 베푸는 것을 두 번 보았지만,
모두 이처럼 좋고 아름답지 못하였다.
평양이나 황주에서도 모두 오산붕(鰲山棚-산대 공연장)을 시설하고, 백희를 베풀어 조신을 맞이하였지만,
유독 왕경의 것이 가장 뛰어났다.
12.
태평이라는 관(館)이 있고
숭례문안에 있는데, 그 가운데는 전(殿)이고, 앞은 중문(重門)이며, 뒤에는 누각이 있고 동서에 낭무(廊廡)가 있다.
중국사신(天使)를 기다리는 곳이다.
종고(鐘鼓)라는 다락이 있다.
성 안의 네거리에 있는데 매우 높고 크다.
서울 안에 우뚝 솟았고, 길가에 높고 높도다.
잔치하다가 쉬고, 즐기다가 또 논다.
와탑(臥榻)은 8면을 장막과 병풍으로 둘러치고,
나라 풍속에 그림을 거는 일이 적다. 무릇 공관(空館)의 네 벽에는 모두 병풍을 벌려놓고, 위에 산, 물, 대, 돌을
그리거나, 혹 초서를 썼는데, 높이는 2-3척이다. 와탑도 또한 그렇다.
성긴 주렴은 향구(香鉤)로 반쯤 걷어 올린다.
닭이 울면 문안 오는 사자(使者)를 기다리고,
매일 아침 일찍 왕은 그 나라의 재상 한 사람과 승지 한 사람을 보내어 문안한다.
말을 타고 나가면 길옆의 망아지가 운다.
왕의 명을 받드는 사람이 있어서 심부름을 해주고,
종이와 먹이 있어서 창수(倡酬-통역)하는 데에 이바지한다.
대개 임금을 공격함은 반드시 그 사신에게까지 미치므로,
예를 행함에 우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13.
궁실의 제도는 중국과 같아서,
그 바른 것은 모두 붉은 칠이고,
나라에 은과 구슬(銀珠)가 없으므로 붉은 칠로 대신한다. 오동나무 기름도 또한 없다.
그 덮은 것은 모두 수키와이다.
14.
조서(調書)가 전(殿)의 뜰에 이르며, 왕은 몸을 구부리어 낮추고,
세자와 왕을 모시는 신하들은, 좌우에서 보필한다.
헌현(軒懸-제후의 악기 편성법)을 계단(階墀)에 펼치고, 장막을 정원에 벌린다.
전의 앞에서 섬돌 안까지는 모두 흰 베장막을 치는데, 색은 흰 것을 숭상하기 때문이다.
의장은 간로(干鹵-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음악은 축어(祝敔-타악기의 하나)에서 시작하고 그친다.
호배(虎拜)와 숭호(嵩呼-천자를 위하여 만세를 부름)하며 함께 세 번 소리치고,
봉황춤과 짐승춤을 추자 문무 양반을 거느리고 나온다.
비록 음성은 통하지 않으나, 예의는 또한 취할 바가 있다.
예는 한결 같이 중화의 것에 따르니, 세 번 향을 올리고 고두(叩頭)를 세 번 더 하는데, 산호(山呼-숭호와 같은 말)할
때에는 곁에서 모시거나 호위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을 마주잡고 따라한다.
이에 동서로 늘어서서, 손과 주인을 나눈다.
조서의 내용을 알리고 난 뒤에 인례(引禮-의식을 집행하는 6품 관리)는 천사를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내려와 동쪽으로
장막에 이른다. 다음에 왕이 옷을 갑아입기를 기다려 천사를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전에 오르고, 왕을 인도하여 중간
계단에서 서쪽으로 전에 오른다. 천사는 동쪽에 있으면서 서쪽을 향하고 왕은 서쪽에 있으면서 동쪽으로 향하여 두 번
절하고 자리(포단(蒲團-푸들자리)를 정한다. 왕의 자리는 부사(副使)의 자리와 마주 대하되 반 자리 정도 조금 아래이다.
바야흐로 서로 절하고 예를 마친 뒤에는, 드디어 통역을 빌려 말을 전한다.
“대국의 울타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소국으로서 마땅한 것인데, 큰 은혜를 베풀어 욕되게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물방울이나
티끌과 같은 힘을 다한대도 보답할 수 없으니, 비록 죽은들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오직 날마다 ‘천보(天保)’란 시를
노래하고, 멀리서 해가 떠오르듯 건승하시기를 빌 뿐입니다. 비로소 ‘습상(隰桑)’이란 시에서 기뻐 맞이함을 읊고, 비로소
‘춘추’에 보이는 예의 순서를 말합니다. 생각건대, 여러 나라가 모두 황제의 사신을 앞세우는데, 더구나 맑고 빛나는 덕으로
날마다 당저(當宁-임금의 자리)를 가까이서 모시는 분이겠습니까.”
근정전에서 자리를 정한 뒤에 인삼탕 한 잔을 마시고, 왕은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가 통역 장유성(長有誠)과 이(李)
승지를 돌아보고, 말을 전하기를, “소국의 신하로서 조정을 높이 섬기는 것이 예에 마땅한 것인데, 칙서를 내려 이처럼
나를 격려하시니, 넓은 은혜에 갚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이 곧 대답하기를, “조정에서는 동국이 본래
부터 충성과 공경으로 받들기 때문에, 은전을 다른 나라와 같지 않게 봅니다.”라고 하였다. 또 손을 들어 이마에 대고
“보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연방하였다. 말을 마치자 한 사람을 배웅하기 우해 홍례문(弘禮門)까지 나와 가마를 탈 때까지
기다렸다가 물러갔다. 우리 두 사람이 태평관에 오니 여러 배신들이 차례로 인사를 했다. 이 일이 끝나자 왕이 따라와
잔치를 베풀고 관문 밖에서 기다리며 동쪽을 향해 서서 들어오지 아니하였다. 집사가 우리 두 사람에게 알리므로 나가
맞이하니, 읍하고 사양하면서 들어왔다. 뜰에 이르러 서로 읍하고 차례로 앉아 술잔을 들어 주고받았다. 술잔을 마시려고
하자 임금은 턱으로 두 통역을 시켜 말하기를, “시경에 습상(隰桑)이 언덕에 있으니 그 앞은 어디에 있는가, 이미 군자를
보았거니 그 즐거움이 어떠한고. 라고 하였소이다. 나는 두 번 대인을 뵈오매 마음속의 기쁨이 끝이 없소.”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도 그의 어짊을 칭찬하고, 또 역로에서 후하게 대접받은 것을 사례하였다. 곧 자리에 나아가 다시 주려고
하자 예로 사양하면서, 왕은 이내 말하기를, “춘추의 예에 왕인(王人)이 비록 미미하나 제후의 윗자리에 있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두 분 대인은 바로 어떤 지위입니까. 다 천자의 가까운 신하들로서 오늘 멀리 오셨거늘, 우리나라에서 감히 어찌
사양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또 미소를 지으면서 두 통역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가까운 신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지 못한다. 바로 황제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웃으면서 통역에게 대답하기를 “본래부터
왕이 글을 읽고 예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뵈오니 과연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왕은 또 손을 마주 잡고 “황공”,
“황공”이라고 연달아 일컬었다.
15.
문무(門廡)와 전정(殿庭)은 다 자리를 까는데,
손과 주인의 자리를 나누어 앉으면 겹으로 더 깐다.
저 자리의 등급은 용이 나란히 엎드려 비늘을 거두었고,
이 자리의 무늬는 봉이 쌍으로 날면서 날개를 편다.
자리 세 벌은 집사가 항상 말아가 가지고 있다가, 서로 절할 때 각각 펴서 놓는다.
16.
식기는 금, 은, 동, 자(瓷)를 섞어서 쓰고,
품물(品物)은 바다와 육지의 진기한 것이 고루 많다.
주인이 손에게 잔을 올릴 때에는 한결 같이 중화의 예(華禮)를 따르고,
손이 주인에게 수작할 때도 또한 연회의 예의를 쓴다.
밀이(蜜餌-꿀을 바른 경단)를 벌여놓을 때에는 그 수가 다섯 겹이요,
상에 차린 음식의 무더기를 재면 크기가 한 자 둘레이다.
그릇마다 모두 은과 동으로 난간을 만들어 푸른 구슬의 새끼줄로 엮었고,
그 위에는 모두 비단을 베어 꽃과 잎을 만들고 아롱진 봉의 깃으로 춤추게 한다.
그 차린 줄은 다섯 겹인데 모두 과실을 쓰지 않는다. 꿀을 밀가루에 반죽하여 모나고 둥글게 만들고 떡과 유전(油煎)을
정리하니, 높낮이가 영롱하게 첩첩이 쌓아올린 것이 높고 크기가 한 자쯤 된다. 다시 백은이나 백동으로 팔각의 난간을
두르고 푸른 구슬의 그물로 엮는다. 그 위에 푸른 비단을 베어 네 개의 화엽을 만들고, 또 붉은 비단을 베어 네 개의 화판을
만들며, 화판마다 백동으로 두르고 작은 못으로 엮으니, 중국의 진주화(眞珠花) 모양 같다. 그 꼭대기에 곧 구리선으로
다섯 빛깔의 채색 실을 얹어 나는 봉이나 공작이나 혹은 나는 신선을 만들었는데, 꼬리는 치켜 올리고 날개를 펴고 있으며
머리는 숙이고 손님을 향하였다. 절조(折俎-짐승의 고기를 익혀서 그릇에 담을 때 토막을 내어 담는 것)를 보낼 때 이르러
제거한다.
두변(豆邊)은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기 위하여 앞의 것은 크고 뒤의 것은 작은 것으로 차례를 삼고,
진열한 것은 예의에 맞도록 하기 위하여 겉의 것은 높고 안의 것은 낮은 것으로 차별을 낸다.
그 상은 일자로 가로로 진열하는데 상마다 다 그렇다.
효수(肴羞-반찬)에 섞어 삼식(糝食-米糕-쌀떡, 요화병?)를 만들고,
또한 중화의 쌍떡과 여귀 꽃 따위를 만든다.
혜해(醯醢-식초, 젓갈)를 섞어 장조림을 만든다.
술은 멥쌀로 빚는데,
수수쌀은 쓰지 않는다.
비록 청주(淸州)에 나가 종사(從事)하는 자(술이 좋다는 뜻)로도 거의 우열을 다툴 수가 없고
빛과 향기가 잔에 넘치며, 평원(平原)에 나가 있는 독우(督郵)(아주 나쁜 술이란 뜻)도 멀리서 감히 그 울타리조차 바라볼
수 없다.
술맛이 뛰어나 산동의 추로백(秋露白-중국의 명주)과 비슷한데, 빛과 향기도 또한 같다.
17.
상에는 일자로 벌여놓고 가운데는 비단으로 덮는다.
일자로 가로 벌여놓은 상은 오로지 가운데 한 상에는 붉은 비단으로 덮고, 위에 기름종이를 깔고 그 위에 그릇을
벌려놓는다.
좌우의 날개가 셋인데, 모두 희뢰(餼牢-희생 고기 음식)를 놓는다.
자리에 가까운 한 의자는 나아기기를 기다려 왕이 스스로 들고,
처음에 자리에 나아갈 때에는 의자를 상에서 세 자 쯤 떨어지게 놓여져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몰랐는데, 왕이 스스로
한 상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것이 스스로 공경하는 뜻을 나타내려고 그렇게 하였음을 알았다.
상에 가득한 여러 희생은 마땅히 벨 떼가 되면 신하가 반드시 친히 잡는다.
희생은 소, 양, 돼지, 거위의 네 품목이 있는데, 모두 익혔다. 최후의 상에는 곧 큰 만두 한 쟁반을 두었는데,
위는 은으로 덮개를 만들어서 덮었다. 대신이 칼을 잡고 들어와 그 희생을 베고 나면 그 큰 만두의 껍질을 쪼개는데,
속에는 조그마한 만두가 들어 있고 크기는 호두알 만하여 한 입에 먹을 만하다.
특별히 죽인 것을 보이기 위하여 희생은 모두 심장을 올리고,
살지고 만난 것을 가져다가 창자 세 개에 기름을 채웠다.
양의 등살 위에 양의 창자 세 개를 꿰고, 속은 구운 고기와 여러 가지 과실로 채운다.
속헌(續獻-첫잔 다름에 계속해서 손님에게 다음 잔을 드리는 것)은 동성(同姓)으로 군(君)에 봉한 사람이 먼저 하고,
그 동종(同宗) 가운데 어진 사람은 다 군에 봉하는데 모두 왕신(王臣)이라 일컫는다. 그 여러 신하 가운데 무공이 있는
자도 또한 군(君)에 봉하고, 문직으로서 공이 있는 자도 봉하는 것이 또한 그렇다.
다음에는 곧 정부와 육조에까지 미친다.
잔을 드릴 때 왕은 반드시 자리에 나와 드리는 사람이 오르고 내리면 왕은 모두 그를 따른다.
탕을 한 번 올릴 때에는 수가 반드시 다섯 사발이 되도록 하고,
왕이 스스로 올리지 않는다. 오직 이 예만은 중국과 같지 않다.
그릇을 포개어 쌓을 때에는 높이가 한 자를 넘지 않게 한다.
그 밥상이 매우 작은데, 굽고 지진 음식이 너무 많으면 포개어 쌓는다.
상이 다 용납하지 못하면 깔아놓은 자리에 거두고,
안주와 탕을 두 번 올리면 용납할 자리가 없으므로 상 위에 있는 것을 거둬 자리 사이의 땅에 놓는다.
이것은 곧 그 나라 풍속이 그렇다.
고기를 배불리 먹고 나면 채소를 올린다.
종관(從官)들은 다 안팎에 늘어서서 모시고 있고,
집사자는 모두 나아가고 물러남에 머리를 조아린다.
내시와 통역들은 그 주위에 엎드려 있다.
내시는 모두 오사모(烏紗帽), 흑각대(黑角帶)를 하고 부복하여 왕이 앉은 자리의 다리를 받들고 있으며, 통사,
승지는 좌우에 부복하여 전하는 말을 기다린다. 우리 두 사람의 자리 뒤에도 통사가 또한 부복하고 있는데 다만 내시는 없다.
대개 세 번의 잔치는 태평관에서 하는데 그 예는 모두 같고 문채는 감한 것이 없고,
한 번의 잔치는 인정전에서 하는데 정성은 더욱 지극하고 힘은 더욱 드는 것이다.
태평관의 처음 잔치는 하마연(下馬燕)이고, 두 번째 잔치는 정연(正燕)이며, 세 번째 잔치는 상마연(上馬燕)이다.
인정전의 잔치는 곧 사연(私燕)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 예가 마땅하지 못한 것 같아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태평관과
모화관의 두 관은 그 제도가 모두 전(殿)인데, 오로지 천조(天詔)를 맞이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며, 일이 없을 때에는 반드시
먼저 관문 밖의 작은 전에서 기다린 뒤에라야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로소 반드시 고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18.
내가일을 마치고 동쪽에서 돌아오려고, 수레를 빨리 재촉할 때이다.
왕이 먼저 모화관에 나와, 잔치를 베풀고 기다렸다.
말은 더욱 친절하되 싫증을 내지 않고, 예는 더욱 부지런히 하되 게으르지 않았다.
천작(天爵)을 닦는다는 말에 감사하기 그지없고, 좋은 말을 두 번이나 하는데 감사하였다.
귀중한 『맹자』의 천작이란 말을 외우기가지 하면서 우리들을 다 어질다고 하였으며,
또 안자(晏子)가 준 말을 인용하면서 스스로 그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뜻은 대개 우리들에게 시구를 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아깝게도 우리들이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날 왕은 우리 두 사람이 여러 번 그 선물을 물리치므로, 통역을 빌려 뜻을 말하였다. “우리 선대로부터 천사(天使)가
멀리서 오시면 대개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뜻을 전했는데, 지금 두 분 대인들이 이처럼 하는 것을 보니, 나는 황공하여
다시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내가 듣건대 옛날 사람이 말하여 다‘어진 사람은 남에게 말을 주고 어질지 아니한
사람은 남에게 금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지금 말로서 하지 못하고 한갓 보잘것없는 물건으로 더럽혔으니, 마음속에
매우 황공합니다. 나는 또 일찍이 『맹자』말에, ‘옛날 사람은 그 천작을 닦음으로서 인작이 따른다.’라는 말이 있음을
기억하는데, 두 분 대인들은 진실로 천작을 닦은 분이니, 이번에 (우리들은) 반드시 특별한 은혜 다 입은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내가 말을 주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우리 두 사람 역시 ‘왕이 우리를 덕으로 사랑하는데 감사한다.’는 말로
대답하였다. 우리가 술을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을 때 통역을 시켜 말하여 , ‘이 한 잔을 다 마시십시오. 이튿날이면 대개
천연(天淵)의 거리(멀리 떨어져 있다는 의미)에 떨어져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통역이 ‘천연(天淵)을 천원(天遠)’이라고
잘못 전하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어음(語音)을 알아듣고 뜻을 펴서 말하여 주니, 왕이 웃었다. 곧 전송하면서 문을 나와
또 술을 내어 권하고 다시 ‘원별천리(遠別千里)’라고 말하였다. 통역은 또 ‘원별을 영결(永訣)’이라고 잘못 전하였다.
대개 장유성은 화언(華言)은 잘하지만 글을 읽은 것이 적고, 이 승지는 글을 많이 읽었지만 화언에 익지 못했기 때문에, 매양
그 말을 전하는 것을 보면 땀을 빼면서도 오히려 통하지 못하니, 자못 우스웠다. 이날 밤에 벽제관에서 자면서
허이조(許夷曹)가 “왕이 시 짓기를 좋아한다.”고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그 뜻을 깨달았다.
19.
산천과 도리(道理)는 한 달 동안 지났고, 풍물과 인정은 닷새 만에 얻은 것이다.
비록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자못 기억나는 것은 있다.
20.
성균(成均), 국학(國學)은 산을 지고 물가에 있는데,
앞뒤에는 전당(殿堂)이요, 좌우에는 뜰이 있다.
성전(聖殿)은 앞에 있고 명륜당은 뒤에 있으며, 사학(四學)은 동서로 나뉘어 있다.
관직으로는 대, 소 사성(司成)이 있고, 생도에는 상, 하 기재(寄齋)가 있다.
생원과 진사가 거처하는 곳을 상재(上齋)라 하고, 승학(升學)이 거처하는 곳을 하재(下齋)라 한다. 생원은 3년마다
경전에 밝은 이를 뽑고 진사는 시부에 밝은 이를 뽑고, 승학은 민간의 준수한 이를 뽑는데, 또 기재라고 부른다.
서경도 견줄 수 없고, 개성도 짝을 할 수 없다.
제사에 소상(塑像)을 두지 않아 더럽히고 어지럽히지 않으며,
생도는 공부가 나아감이 있어야 친구를 삼는다.
21.
경기 안의 경치로는 한강이 제일이다.
누대는 높아 구름을 막고, 물은 푸르러 거울처럼 비춘다.
나루로는 양화도가 있는데, 물산이 또한 번성하다.
팔도에서 운반해온 식량을 모으고, 나라의 금령(襟領-옷깃, 중요한 곳이란 의미)이 된다.
가장 높은 정장에서 긴 물가를 굽어보면, 백제국의 옛 국경이 닿아 있다.
나는 일찍이 여기서 배를 띄우고 말을 타고 하루를 논 적이 있는데,
저들 또한 그 때의 즐거웠던 일과 기쁜 마음은 백 년 만에 맛보는 경사라고 스스로 축하하였다.
22.
트인 길과 통한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고,
잘라낸 듯한 처마에 우뚝 빛나는 집이다.
모든 집은 높은 담이 있어서 바람과 불을 막고,
방마다 북쪽 창을 뚫어 더위를 피한다.
그 밖은 모두 관에서 나누어 주므로 빈부 때문에 제도를 바꿀 수 없고,
그 안은 곧 자기들이 얻은 것이므로 오로지 그 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꾸민다.
그 통한 거리 양쪽은 모두 관청인데, 기와를 덮었다. 그것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나누어주었으므로, 그 바깥 모습만
보아서는 누가 가난하고 부자인지 분별할 수 없고, 안으로 들어가 그 방과 집을 보아야 비로소 같지 않은 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23.
관부(官府)의 집도 제도 또한 다르지 않다.
모두 당침(堂寢 : 마루와 침실)이 있고, 모두 염우(廉隅-모서리, 바른 품성과 행위)를 갖추었다.
누각은 난간을 날개처럼 내고, 들보에는 주유(侏儒-동자기둥)을 얹었다.
관사(館舍)와 전사(傳舍)의 벽 사이에는 다 수묵으로 그린 변변찮은 그림을 바르고,
문과 등창이 합쳐지는 곳에는 모두 태극무늬를 그렸다.
이것은 반드시 모두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단지 본 것에 의거하여 바로 쓴 것이다.
24.
가난한 집의 벽은 대로 엮되, 새끼줄로 얽어 튼튼하게 하고,
그 위는 띠풀로 엮었으며, 그 구멍은 진흙덩이로 막았다.
그 벽은 잡목 따위를 가져다 바로 세운 뒤, 엮지 않고 새끼로 맨다. 새끼로 맨 곳은 마치 그물의 눈과 같은데,
한 개의 눈마다 하나의 진흙덩이로 막았다. 서울의 작은 골목은 이와 같고, 길가에서 본 것은 완전히 진흙으로 발랐다.
가시나무가 처마 끝까지 나온 집도 있고, 건물이 겨우 둥근 상만한 집도 있다.
이것을 봉황에 비유하면 비록 천 길의 높이를 날기에는 부족하지만,
뱁새에 비하면 가지 하나에 의탁하여 편안히 사는 것과 같다.
부잣집은 모두 동기와로서 무서(廡序:곁채)가 동서로 뻗은 것은
마룻대(棟)가 도리어 남북으로 솟아나왔는데,
모두 흙으로 바르고 당침이 앞뒤에 있는 것은 등(脊)이 도루어 중간보다 낮다.
당침은 한 간인데, 무서가 도리어 세 간이다.
문은 모두 동쪽 서(序)의 마룻대를 돌았기 때문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되 반드시 바로 걸아야 당침으로 갈 수 있고,
그 문은 비록 남향이지만 가운데부터 열리지 않는다. 모두 동쪽 무(廡)의 마룻대로 나아가 남으로 향해 여는 것은,
그 터가 높은 것이 많기 때문이다. 사다리로 올라가더라도 그 동서로 향한 것은 그와 같다.
땅은 모두 낮고 축축한 것이 걱정되기 때문에 널빤지를 깔아서 막고 만일 부좌(趺坐-책상다리로 앉음)하려면 띠풀을
깔아야 한다.
풍속이 땅에 자리를 깔고 앉는다. 사람들은 하나의 네모지 포단(蒲團)을 만들거나, 베나 비단으로 하나의 큰 베개를
만들고, 그 속에 풀을 채워 넣어 앉는 사람들이 기댈 안석으로 쓴다. 관부에서는 만화좌(滿花坐)를 쌌는데, 행차할 때에는
사람이 지고 나른다.
알 수 없는 일은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고,
말을 부리는 사람은 많고, 소를 부리는 사람은 또한 적다.
목축에는 전혀 염소를 볼 수 없다.
생선을 먹으려면 산이나 바다에 통발을 치고, 나물을 먹으려면 강이나 바다에 나가 캔다.
평안도에서 황해도에 이르러 두 도에서 본 것이 모두 이와 같다.
시골 사람으로 늙을 때까지 한번도 돼지고기 맛을 보지 못한 사람도 있고,
우연히 잔치에서 베푸는 것을 먹게 되면 곧 꿈속에서 채소밭을 밟는 사람도 있다. (처음 먹었다는 의미)
관부라야 양이나 돼지가 있는데, 향음례(鄕飮禮) 때에 간혹 쓴다.
가난한 사람은 죽으면 대개 산마루에 장사지내고,
귀한 사람은 곧 들 언덕에 묘 자리를 잡는다.
평안, 황해로부터 오면서 산꼭대기를 바라보면, 성가퀴처럼 벌여 있는 것이 모두 무덤이었다. 귀한 사람은 지형을
선택하고 또 화표(華表)와 석양(石羊) 따위가 있다. 그러나 비를 세운 것은 볼 수 없다.
이것은 다 특별한 지방의 다른 풍속으로, 굳이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논할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총환(總環)을 드러내어 귀천을 분별한다.
.
그 나라에서는 머리를 싸매는 망건은 모두 말총으로 만든다. 환(環)으로서 품급을 정하는데, 1품은 옥이고,
2품은 금이고, 3품 이하는 은이고, 서인은 뼈, 뿔, 구리, 조개껍질 따위이다.
아기는 태어날 때의 머리털을 그대로 남겨, 선후를 구별할 수 없다.
겨우 3, 4세 때에 머리털을 벌써 어깨에 드리운 자도 있으며,
나이 6, 7세 때는 뿔 모양으로 상투를 묶는 자도 있다.
머리털을 남겨놓은 것을 헤아리건대 진실로 부모에게 받은 몸이 중한 때문이요,
그것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은 갓을 쓰는 것이 모두 앞쪽인 때문이다.
25.
백성들은 초모(草帽:파랭이 같은 풀 모자, 초립)를 쓰는데,
턱에는 구슬을 드리운다.
꼭대기는 둥글거나 모나며, 빛은 모두 검다.
천한 삶은 곧 네 앞의 푸른 적삼을 입고 정수리에는 새 깃을 꽂으며,
보통 사람은 여러 겹의 삼베 옷을 입고 걸을 때에는 긴 옷자락을 끈다.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길에서 재갈을 물리고,
부딪히는 것을 방지하려 뜰 끝에서 지팡이를 끈다.
천한 사람의 네 잎 적삼은 오직 평안, 황해 두 도만 이와 같다. 경기도는 그렇지 않다. 지팡이를 그는 사람은 모두
키 큰 사람을 뽑은 것이니, 큰 모자를 쓰고 누른 베옷을 입고, 둥근 것에는 노끈을 달았는데, 다만 정수리에 새 깃을 꽂지
않았다.
신은 가죽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흙이 다니더라도 상관이 없고,
버선은 바지에 묶여져 있어 물을 건너더라도 구애받지 않는다.
옷은 흰데 굵은 베옷이 많고, 치마는 펄렁거리는데 주름도 또한 성글다.
등에 짐을 지고 구부리고 가는 것은 거북이 볕을 쬐는 것 같고,
그 풍속에 남자들은 모두 짐을 등에 진다.
어른의 명이 있을 때 구부리고 나가는 것은 오리가 걷는 것과 같다.
그 풍속에 사람을 보면 구부리는 것으로 공경을 표하고, 부르는 명이 있으면 또한 구부리고 달려가서 대답한다.
사람은 반드시 스물네 명이 한 가마를 메는데, 가다가 삼십 리도 못 가서 또 백 사람이나 바꾼다.
무거운 것은 대개 어깨에 질 수 없으므로, 마땅히 이렇게 하여 손으로 붙들어야 한다.
한 가마의 앞뒤에 전부 스물네 명을 쓰고, 곁에서 붙드는 사람이 또 밖에 있다. 그 가마는 중국의 교의(交椅)와 같은데
다리가 짧고, 좌우에 두 개의 긴 가마채를 끼운 것도 또한 중국의 제도와 한가지이다. 자리 밑에는 하나의 횡목(橫木)을
설치하고, 그 양쪽 끝이 나왔다. 길이는 예닐곱 척이오, 앞뒤에 또 두 개의 횡목을 설치하였는데, 길이는 자리 밑의 횡목과
같다. 들려고 할 때에는 붉은 무명으로 횡목의 양쪽 끝에 붙들어 매고 사람은 다만 무명을 어깨에 걸고 손으로 들고 간다.
또 가마 중간에는 뒤에서 앞으로 긴 무명 두 폭을 곧바로 베풀어 사람의 양쪽 어깨에 나누어서 건다. 마치 말 멍에에
가로지른 나무 모양과 같은데, 한 쪽으로만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그 나머지는 십여 명을 시켜 앞에서 끌게 한다.
26.
여자들의 귀밑털은 귀를 덮어, 귀걸이가 보이지 않고,
머리에는 백권(白圈)을 써서, 바로 눈썹을 내리누른다.
개경부에서 왕경(王京)으로 오는 길가에 보이는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부하고 귀한 여자는 얼굴을 검은 비단으로 가리고,
부하고 귀한 집 부인들은 머리에 한 광(匡)을 썼다. 큰 모자와 같은데, 채양에 검은 비단을 드리워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가렸을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을 피한다. 서울에서도 이렇다.
빈천한 사람은 장딴지를 흰 치마로 가리지 못한다.
지위가 있고 존귀하여야 가마를 타고 출입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없으면 아무리 부자라도 다만 약마(約馬)를 타는 것만 허락한다.
두 구절은 허이조가 준 풍속첩 가운데에 있다.
버선과 신은 베와 가죽인데 발은 풀어놓고 묶지 않았고,
신은 천한 사람은 소 가죽이고, 귀한 사람은 사슴 가죽이라 하고, 버선은 베를 많이 쓴다고 하는데,
서너 명 통사의 말이 모두 똑같다.
옷은 베나 비단인데 소매는 넓으나 길지 않다.
윗도리는 모두 무릎을 내려오고, 아랫도리는 다 마루까지 늘어졌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볼 때에는 꿇어앉는 것으로 예의를 삼고,
천한 사람이 짐이 있을 때에는 머리로 이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스스로 본 바를 간단히 말할 것이니,
그 보지 못한 것은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시내에서 남자와 같이 목욕하고,
역에서 일하는 사람은 모두 과부라고 한다.
처음에 전해들었을 때에는 매우 놀랐지만, 지금은 이미 고친 줄을 알았다.
어찌 성스런 교화에 젖어서,
한광(漢廣)을 건널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나라에 사신으로 가기 전에 모두 전하기를, “그 풍속에 과부들이 관과 역에서 일을 본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더러움을 미워하였는데, 가서 보니 무릇 와서 일을 보는 사람은 모두 그 고을 관리요, 아낙은 역 밖의 별실에서
밥짓는 일을 맡았다. 서로 전하기를, “이 풍속은 경태(景泰:명나라 대종의 연호, 1450〜1456) 때에 그 국왕 유(세조)가
즉위한 이후에 변하였다.”고 하였는데, 요동의 부총병 한빈(韓斌)의 말이다. 시내에서 남녀가 같이 목욕한다는 사실도,
구지(舊志)에 나오지만 이것 또한 지금은 변하였다.
27.
날 짐승으로는 꿩, 비둘기, 참새, 메추리가 많고,
들짐승으로는 고라니, 사슴, 노루, 포(麅-큰사슴)가 많다.
포는 노루와 같은데, 뿔이 하나이고, 그 고기는 매우 맛있다. 산에서는 포가 나지 않는다.
해산물로는 곤포(昆布-다시마), 해의(海衣-김), 여방(蠣房-굴), 대합조개요,
곤포는 종려나무 잎과 같은데 녹색이요, 김은 자채(紫寀)와 같은데 크다.
생선으로는 금문(錦紋), 이항(飴項-열목어), 중진(重唇-중순어), 팔초(八稍-문어)이다.
금문은 붕어와 비슷한데 몸이 둥글고, 이항은 피라미와 같은데 마른 것밖에 볼 수 없다. 왕이 사람을 보내어
뇌례(牢禮-희생을 갖추어 손님을 먹이는 예)를 행하고, 길의 중간에 연회를 베풀었는데, 모두 그곳에 있었다.
중순은 중국의 눈 붉은 고기(적안어)와 같은데, 입술은 말코와 같고 살은 매우 맛나며 그 새끼는 석수어(황화어) 같은데
살고 또 많다. 팔초는 또 절강(浙江)의 망조(望潮-망조어)인데 맛은 그다지 좋지 못하고 길이나 4〜5척이나 한다.
잉어와 즉어(鯽魚-붕어)는 내와 못에 따라 대거 서식하고,
청천, 대정(大定), 임진, 한강의 여러 물에 다 있는데, 즉어는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것도 있다.
관작(鸛雀-기러기처럼 생겼음. 황새와 참새?)은 정원에서도 그 둥우리를 자주 본다.
합 같은 결명(決明)은 그 맛이 해산물에서 제일 좋고,
석결명(石決明)은 약에 넣는 것이다. 그 살이 밖으로는 껍질에 붙고 속은 돌에 붙었는데, 다른 이름으로는
복어(鰒魚-전복)라고도 한다. 껍질은 가장자리를 따라 구멍이 있는데 바다 가운데에서 난다.
주먹 같은 자궐(紫蕨-고사리)은 그 맛이 산나물 중에서 제일 낫다.
고사리에는 푸른 빛과 자줏빛 두 가지 색이 있는데, 중국에서 나는 것과 같다. 원주민들은 잘 캘 줄 모른다. 대개 그것을
캘 때에는 반드시 송곳으로 땅을 파서 흙을 버리고, 그 뿌리를 베어야 한다. 내가 허이조에게 그 캐는 법을 가르쳐주었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28.
시내나 육지에서 나는 기이한 물건을 말하자면 난초 언덕에서 향기를 피우는 것은,
곧 필관(筆管-멸), 산장(酸漿-꽈리),
필관은 싹은 먹는데, 맛이 미끈하고 달다. 그 잎은 알 수 없는데, 혹은 황정(黃精:둥글레)의 싹이라고 한다. 산장의 잎은
뾰족하고 줄기는 푸르거나 붉으며 맛은 달고 시다.
자근(紫芹-미나리), 백호(白蒿-물쑥)
왕도와 개성 사람들 집의 작은 못에는 모두 미나리를 심는다.
수료(水蓼-물여뀌)의 싹, 당귀(當歸)의 싹, 소나무 껍질의 떡, 산삼의 떡이 있다.
소나무는 겉껍질을 벗겨내어 그 속의 희고 부드러운 것을 가져다가 멥쌀을 섞어 찧어 떡을 만든다. 산삼이란 약에 쓰는
것이 아니다. 그 길이는 손가락만한데 모양은 무와 같다. 요인(遼人)들은 이것을 산무우라 하는데, 또한 멥쌀을 섞어
구워서 떡을 만든다. 3월 3일에는 그 연한 쑥잎을 뜯어다가 거기에 멥쌀가루를 섞어 쪄서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쑥떡이라고 한다. 그 멥쌀은 빛이 희고 맛은 향기롭다.
모두 상에 차릴 만하여, 모두 술안주로 쓴다.
과일로는 배, 밤, 대추, 감, 개암, 송화, 살구, 복숭아, 홍귤(柑), 귤, 매실, 오얏, 석류, 포도가 있다.
배, 대추, 개암이 가장 많아서 어디 가나 있고, 홍귤과 귤은 전라도에서 난다.
가죽으로는 범, 표범, 고라니, 사슴, 여우, 담비, 들고양이, 돈피가 있다.
원주민들은 담비를 돈피라 하고, 들고양이의 가죽은 알지 못한다.
그것들을 가지고 무늬자리, 겹갖옷, 화살통, 활집 등을 만든다.
29.
꽃으로는 장미, 철쭉, 작약, 모란, 차꽃, 정향(丁香), 작미(雀眉), 산반(山礬)이 있다.
바야흐로 때는 2월 중순으로, 앵두꽃은 활짝 피었고,
늦봄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오얏꽃은 쇠잔했다.
내가 3월 18일에 그 나라에서 길을 떠날 때에 당리화(棠梨花-팔배나무 꽃)가 거의 다 떨어졌느데, 또 며칠을 걸어
압록강을 지난 뒤에 비로소 처음 피는 것을 보았다. 대개 그 나라는 동남족 지역에 가까울수록 따뜻하기 때문이다.
풀은 무성하고 우거진 것이 많고, 나무는 둥글고 꾸불꾸불한 것이 많다.
산에 모래와 돌이 많기 때문이다.
30.
늙은 소나무는 단단하기가 전나무와 같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가져다 등불 기름을 만들려고 하나 송진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 재질이 가장 단단한 누른 빛 나는 소나무는 전나무와 같으나 기름이 적고 어디를 가나 있다.
그 향기로운 꽃은 한번 봄을 지내면 모두 따고, 맺은 열매는 이듬해라야 비로소 먹는다.
소나무에는 두 종류가 있다. 열매를 맺는 것은 껍질이 그다지 거칠지 않고 가지와 잎은 위로 치켜 솟았으며, 그 열매는
반드시 이듬해에 딸 수 있다. 경기도에 이르면 비로소 있다.
작은 것은 모두 시내의 다리를 만들고, 큰 것은 묘당(廟堂)의 기둥이 된다.
대개 길에 물이 있는 곳은 모두 소나무를 베어다가 다리를 놓고, 그 가지를 깍아서는 난간을 만들며, 잎을 가지고서는
좌우의 흙을 막는다. 보산관(寶山館)의 한 시내는 저탄(猪灘-돼지여울)이라 하는데, 넓이는 20여 길이나 되지만,
역시 소나무로 다리를 놓는다. 들보나 마룻대를 만들 때에는 곧은 것을 얻기가 어려워 만일 누대의 기둥으로 쓰려면
아래위 2단으로 각각 해야 한다.
이것은 종류가 같지 않으므로, 그것을 씀에는 각각 알맞은 데가 있는 것이다.
31.
다섯 가지 금(금, 은, 구리, 철, 주석)은 나는 곳을 자세히 모르나 가장 많은 것은 구리쇠이며,
땅에서 나는 구리쇠가 가장 굳고 또 빛이 붉다. 밥그릇과 수저는 다 이것으로 만든다. 즉 중국에서 이른 고려동(高麗銅)이
그것이다.
다섯 가지 빛깔(청, 적, 백, 흑, 황)은 각각 그 쓰이는 바를 따르는데 금하는 것은 붉은 빛이다.
왕이 입는 옷이 붉기 때문에 그것을 금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맛(신맛, 쓴맛, 매운맛, 짠맛, 단맛)은 곧 초와 장이 많고,
다섯 가지 음(궁, 상, 각, 치(徵), 우)는 곧 음운을 통할 수 없다.
그 나라의 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글을 읽으면 평성이 거성과 같다. 예컨대, 성(星)을 성(聖)이라 하고, 연(烟)을
연(燕)이라 하는 따위인데, 평상시 쓰는 말은 여진(女眞)과 비슷한 데가 많다. 심지어 한 글자를 3∼4자로 지어서 부르는
것도 있다. 예컨대 팔(八)을 ‘야득이불(也得理不)’이라 하는 따위가 이것이다. 한 글자를 두 자로 만들어서 부르는 것은
더욱 많은데, 부(父)를 아필(阿必) 이라 하고, 모(母)를 액미(額㜷)라고 하는 따위이다.
『일통지(一統志-명일통지)』에서 말한 것은 여우 꼬리로 만든 붓이요,
『일통지』에서 소산(所産)으로 낭미로 만든 붓을 실었는데, 그 대롱은 작기가 화살 같고, 수염 길이는 한 치 남짓하며
붓끝은 뾰족하면서 둥글다고 하였다.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황서(黃鼠-족제지)의 털로 만든 것이요, 여우꼬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무인이 숭상하는 것은 벚나무 껍질로 만든 활이다.
활은 중국의 제도에 비하면 조금 짧다. 그러나 화살은 매우 잘 나간다.
베는 삼으로 짜는데 모시로 짠다고 한 것은 대개 잘못 전해들은 데서 나왔고,
종이는 닥으로 만드는데 고치로 만든다고 여긴 것은 공교하게 다듬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그 나라에서 나는 종이는 고치로 만든 것이라고 전하였지만, 지금 와서 비로소 닥나무로 만드는 줄을 알았다.
다만 그 만든 솜씨가 교묘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불로 시험해보려고 그런 주을 알았었다.
베의 촘촘한 것은 세밀하기가 명주와 같고,
종이의 귀한 것은 통처럼 말아 들보에 묶어놓았다.
기름을 먹이면 비를 막을 수 있고,
그 두꺼운 종이는 네 폭으로 한 장을 하는 것도 있고, 여덢 폭으로 한 장을 하는 것도 있는데, 통틀어서 유석(油席)이라
하며, 그들 스스로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폭을 잇대면 바람을 막을 수 있다.
가는 곳마다 흰 베로 장막을 만들었는데, 육지로 다닐 때는 말에 싣고 따른다.
32.
그리고 이른바 남자의 건책(巾幘)은 당나라와 같은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다.
과하마(果下馬)도 키가 세 척 되는 것이 없다.
『문헌통고(文獻通考)』에 이르기를, “그 나라 사람들은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남자의 건은 당나라와 같다.”
지금 남자들은 모두 대모(大帽)를 쓰고, 오직 왕도에서 가마를 메는 자들만은 육각으로 된 검은 비단의 부드러운 건을 쓴다.
육각에는 다 흰솜공을 붙였다. 깃이 둥근 자색 비단의 옷을 입었는데, 발에는 뾰족한 코의 가죽신을 신었다.
마치 당마(唐馬)를 탄 해관(奚官)을 그려놓은 것과 같다. 생각건대 그때의 옷은 모두 이와 같았기 때문에 당나라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 또 『일통지』에 “백제에서 과하마가 나는데 그 키는 석 자로서 과실나무 밑에서 탈 수 있다.”고 하였다.
백제의 국경은 바로 지금 양화도의 남쪽 언덕에 있었으니, 왕경에서 20〜30리 밖에 안된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오래 전부터 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그 나라 길에서 보이는 짐 실은 말이 비록 석 자에서 그치지는 않지마는 중국
말에 비하면 조금 작다. 생각건대, 그 종류일 것이다. 우선 기록하고 다음날을 기다린다.
오직 오엽(五葉)의 인삼과 만화석(滿花席)이 있을 뿐이다.
오엽의 인삼이란 즉 『본초(本草)』에서 말한 신라 인삼이다. 만화석은 그 빛이 누르고, 또 부드러워 아무리 접어도
꺾어지지 않아서 소주(蘇州)의 것에 비하면 훨씬 좋다.
해마다 궁궐에 공물로 바치고, 때로는 상국에 이바지한다. 120년 이래로 중국에서 물품을 자주 그리고 많이 내려준 것이
비록 천자의 베풀어주심이라고 말하지만, 또 공물이 끊이지 않음에 말미암은 것이다.
33.
이 육의(六義-風, 雅, 頌, 賦, 比, 興-시경의 6가지 글에 대한 분류)에 부(賦)가 있는데,
오직 바로 진술함을 취한 것이다.
겨우 달포를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그 진상을 다 알았겠는가.
하물며 나의 말선(襪綫-버선의 실 끝. 재주가 작다는 의미)의 얕은 재주가,
넓은 바다의 조그만 고기에 다르지 않음이랴.
그러나 이제 붓끝의 조화를 잘 부려,
육합(六合-천지와 동서남북 사방)의 동춘(同春)을 그려본다.
감히 보고 들은 것을 과히 속이지 않았다면,
거의 자순(諮詢-두루 묻고 묻는다)에 부끄럽지 않을까 한다.
조선부후서(朝鮮賦後序) 1
천자(명나라 효종)께서 제위(帝位)에 오르신 지 이태 마인 기유년(1489년)에 천하가 크게 흥기하는 시기를 맞았다.
나는 주제넘게도 남경(南京)에 나가서, 조정에서 기예 있는 사람을 뽑기 위한 장옥(場屋-과거시험장)을 열었을 때에 그것에
응하였다. 그때 우춘방 우서자 겸 한림원 시강이신 규봉(圭峰) 동(董) 선생과 태자찬선 이신 동백(東柏) 장(張) 선생이
실로 명을 받들어 그 일을 처리하고, 공적인 업무 나머지 시간에 좌우의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청하여 들었다.
그러더니 규봉 선생이 어느 날 아침 이 책을 내어놓고 말하기를, “이것은 작년 봄에 조선에 사신으로 갔을 때, 여가에
얻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그것을 받아 여러 날 크게 소리내어 읽은 뒤에, 조선은 옛날 기자의 후예라고 가만히
생각하였다. 지금 이 책에 실려 있는 의관(衣冠), 문물의 제도와 친소(親疎), 귀천(貴賤)의 체제는 분명히 중화의
풍도(風度)가 있었고, 왕실을 높이는 전칙(典則)은 옛 것에 비추어볼 때 크게 변한 점이 있기는 하지만, 천년 동안의
유풍(遺風)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또 삼대(三代:하, 은, 주)에는 사장(詞章)이 없었고, 부학(賦學)은 굴원(屈原)과
송옥(宋玉)에게서 싹터 가의(賈誼)와 사마상여(司馬相如)에게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가의는 비분(悲憤)하는 말이 많고,
사마상여의 「장양(長楊)」, 「우렵(羽獵)」과 같은 여러 작품은 또한 과장된 것이 많으니, 이 책처럼 온후하고 모범이
되어 「빈풍(豳風-시경의 편목)」을 돕고, 『이아(爾雅)』에 보탬이 되는 것을 구하려 해도 없다. 대개 자진자(子眞子)의
말고 섭무공(涉無公)의 의논이 같지 안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만 하도다. 지금부터는 후대에 전해질 글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이 판각되어 후대에 전해져 중국의 선비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기를 바란다. 즉 천하가 통일되어 백여 년 동안
중국과 조선(華夷)가 하나가 됨으로써 황제의 교화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란 사실 말이다. 선생이 마음을 다하여 왕실을
위하고, 지도처럼 자세히 사물과 정황을 풀이하고 열거한 정성으로 말미암아 이 책은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할 것이다.
홍치 경술년 구월 구일 길안부 태화현 유학훈도 거인 계림 왕정(王政)이 쓰다.
조선부후서(朝鮮賦後序) 2
진산(晉山) 재상 소언겸(蘇彦謙:1486〜1562)이 호남에 나가 안찰(按擦)할 때에 나에게 한 편의 책을 보여주며 말하기를,
“학사 동월(董越)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이것을 지었는데 세상에 전한다. 나는 늘 그 책이 널리 전해지지
못함을 근심하였는데, 하루는 우연히 유관지(柳灌之:1484〜1545)의 임소(任所)에서 그것을 얻었다. 물러나 읽어보니,
우리나라의 풍토, 문물을 기록한 내용이 비록 하나도 틀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가 중국에서 충심을 다하고
중국이 우리나라를 우대한 뜻은 볼 수 있다. 하물려 문장(文辭)이 아름답고 곧은 것이 풍아(風雅)의 경지에 나아가 천년
뒤에까지 사람드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내 나에게 부탁하여 나무에 새겨 대방군
(帶方郡-남원의 옛 이름)의 서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가정(嘉靖) 신묘년(1531) 봄에 영순 태두남(太斗南:1486〜1537)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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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부 란?
명나라 사신 동월이 1488년 조선에 사신으로 왔다가 명나라로 돌아가, 자신이 15일 동안 본 조선의 풍토를 보고 부(賦)로서
읊고, 그에 대해 주석까지 달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사고전서에도 포함되었지만, 무엇보다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잘
알려진 책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책은 고려시대를 알 수 있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버금갈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 초기 풍습, 지리, 산물, 외교관계, 건축, 식품, 의복, 도시 등등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조선부에 대한 책을 구하기가 어렵고, 인터넷 상에서도 구하기가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이 책을 번역한 책이
시중에서 구하기 어려운 실정임을 감안하여, 카페지기가 최근에 윤호진 옮김, [조선부], 까치, 1994년. 책을 도서관에서
구하여 읽으면서, 한글 문서로 타이프를 쳐서 번역본을 올리게 되었다. 조선부의 번역은 기본적으로 윤호진 선생님의
번역본을 거의 99%로 그대로 옮겼고, 간혹 윤호진 선생님이 쓴 주석을 참고하여, 부가 설명을 몇 개 넣거나, 몇몇 단어를
조금 바꾼 정도다.
카페지기는 조선시대 가구에 대해서 조사를 하던 중에, 조선부를 도서관에서 빌리게 되었는데, 이 책의 가치에 비해
너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에 놀라서 타이핑을 하게 된 것이다.
첨가한 3 종류의 문서는 하나는 원문을 pdf 파일로 된 것을 구해서, 원문을 카메라로 잘라서 번역본에 올려놓은 것이기
때문에, 절의 구분과 원문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원문과 번역본을 비교할 때는 도움이 될 것이다.
조선 초기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때 도움이 되는 자료이므로, 널리 활용하기 바란다.
다만, 번역본에는 윤호진 선생님이 쓴 주석은 옮기지 않았으며, 조선부의 해제 역시 옮기지 않았다. 그것은 책을 다
옮기는 것이 결코 옳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본만 타이핑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게 하도록 만든 것은
윤선생님도 좋은 의미라고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조선부에 대해서 더 공부할 사람은 반드시 윤호진 선생님의 책을
구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김용만)
첫댓글 본시 안에있는 사람은 안을 보지 못하듯이 조선밖 중국에서 조선 상황을 더 정확하게 꿴듯합니다. 이런 기록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
유교를 신봉하는 나라 중 조선은 유독 살던 지역을 벗어나질 못하게 규제하여 허가 된 사람이외에는 사실 땅에 사람을 묶어놓는 봉건제도라 할 수 있습니다.그러니 내나라 안 여러곳의 물정이 어두울 수 밖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