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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문학3 (2015.12.7.월요일)
(로마의 역사)로물루스(군주제)에서 -> 공화정 -> 5현제 ->혼란기
(공화정 -> 5현제 사이의 삼두정치)오늘 우리가 다룰 시기는 카이사르(1차 삼두정치)가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고 부르투스 또한 아우구스투스(2차 삼두정치)에 의해서 죽고 공화정에서 5현제로 넘어가는 시기를 한 번 살펴보겠다. 호라티우스 또한 부르투스의 편에 서서 장군으로 까지 갔지만 결국 부르투스가 죽고 도망갔다가 문학으로 자리를 회복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르투스가 카이사르가 죽였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부르투스에게 가서 합세하는데, 그에게 플라톤의 냄새가 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냄새는 나지 않는다.(클레식의 창조자였다.) 그는 서정시와 풍자시, 그리고 서간문을 남겼는데, 오늘 볼 것은 서간문이다.
퀸트스 호라티우스 프라쿠스 생애(B.C. 65~8)
그의 <송가>와 운문 <서간집>에 가장 자주 나오는 주제는 사랑과 우정, 철학 및 시론이다(아우구스투스 시대). 호라티우스는 아마 이탈리아 중부 산악지방에 사는 사벨리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노예였지만, 호라티우스가 태어나기 전에 자유를 얻어 경매인의 조수가 되었다. 그는 또한 토지를 조금 갖고 있었고, 아들을 로마로 데려가 같은 사벨리인인 유명한 오르빌리우스(호라티우스의 말에 따르면 체벌의 신봉자)의 학교에서 가장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할 만한 여유도 있었다. BC 46년경 호라티우스는 아테네로 가서, 아카데미에서 이루어지는 강연을 들었다. BC 44년 3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아테네를 포함한 제국의 동부지역은 일시적으로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카이사르의 동지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및 젊은 옥타비아누스(뒤의 아우구스투스 황제)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유언장에서 외종손자인 옥타비아누스를 개인 상속자로 지명했다.
호라티우스는 브루투스의 군대에 들어가 ‘군대 호민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것은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의 아들에게는 이례적인 명예였다.
BC 42년 11월 필리피에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토벌하기 위한 전투가 2차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호라티우스와 그의 동료 호민관들은 계급이 그들보다 높은 장교가 없었기 때문에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연합군단 가운데 하나를 맡아 지휘했다. 브루투스와 카시우스가 참패를 당하고 전사한 뒤, 호라티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지배하는 이탈리아로 달아났지만, 베누시아에 있는 아버지의 농장은 제대 군인들에게 정착지를 제공하기 위해 몰수되니 상태였다.
그러나 호라티우스는 로마로, BC 39년에 일반 사명령이 내리기 전후에 금고 서기 자리를 얻었다. 36명의 금고 서기는 비록 하급직이지만 매우 중요한 자리였다. BC 38년 초 그는 가이우스 마이케나스를 소개받았는데, 마이케나스는 이탈리아 중부의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문인이자 옥타비아누스의 정치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호라티우스를 그와 친한 작가들의 명단에 올려놓았다. 오래지 않아 호라티우스는 마이케나스를 통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 무렵 호라티우스는 <풍자시> 제1권을 쓰고 있었다. 6보격의 운문으로 씌어진 이 10편의 시는 BC 35년에 발표되었다. 그리스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풍자시>에서, 호라티우스는 공직생활을 단호히 거부하고 평온함을 통해 지혜를 얻고자 했다.
그는 여기서 윤리 문제(재산과 지위를 얻기 위한 경쟁, 극단적 행위의 어리석음, 서로 관용을 베푸는 것의 바람직함, 야망의 해악)를 논하고 있다. 또한 그는 17편의 <서정시>도 쓰고 있었다. 이 작품은 격한 어조의 조롱을 보여주며, 예로부터 인신공격과 조롱에 사용된 운율을 채택했지만, 호라티우스는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악습을 공격하고 있다. 이 시의 어투는 필리피 전투 이후 그가 느끼고 있던 불안한 기분을 반영한다.
BC 30년대 중엽에 그는 마이케나스에게서 사비니 구릉지대에 있는 안락한 집과 농장(로마에서 북동쪽으로 35km 떨어진 리첸차에 있는 언덕일 가능성이 많음)을 받았다. 이것이 선물인지 빌린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 집과 농장은 평생 동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그리스 북서쪽의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무찌른 뒤(BC 31), BC 30~29년에 호라티우스는 <서정시>와 8편의 시로 이루어진 <풍자시> 제2권을 발표했다. BC 27년에 승리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확고한 지위를 굳히자, 호라티우스는 <송가>로 방향을 바꾸어 BC 23년에 88편의 짧은 시로 이루어진 3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그가 작가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활발하게 시를 쓴 시기는 이때였다. 호라티우스는 <송가>에서 그리스 초기 서정 시인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했지만, 낱말을 섬세하고 절제 있게 구사하는 독특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랑과 포도주, 자연(거의 낭만적으로), 친구와 중용(그가 좋아하는 주제였음)을 노래했다. <송가>의 일부는 마이케나스나 아우구스투스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아우구스투스가 다시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던 고대 로마의 미덕을 찬양했지만, 그를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그 자신이었고, 송가를 하나의 주제나 분위기에만 한정하지는 않았다. 아우구스투스는 호라티우스에게 개인비서 자리를 제의했지만, 그는 건강이 나쁘다는 핑계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거절을 괘씸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들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처음 3권의 <송가>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호라티우스가 그런 시를 더 이상 쓰지 않을 작정이었음을 암시한다(그는 BC 23년에 시를 발표한 뒤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했을 것임). 그의 서간체 시집(BC 20~19년에 발표한 제2권으로 <풍자시>를 좀 더 성숙하고 심오하게 변형한 문학적 ‘편지들’)에 실린 마지막 시는 ‘천박한’ 서정시를 버리고 좀 더 교훈적인 종류의 운문을 택하겠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그는 풍자시에서 서정시로 바뀌는데, 그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닌 그리스로부터 가져와 전통주의 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의 양식을 가져와 넘어선 고전주의가 되어 클레식 적인 것을 창조한 것이다.)
그 직후에 그는 3편의 서간체 시(첫 번째 책에 실린 어떤 서간체 시보다 훨씬 긴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창작 활동에 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호라티우스는 모든 풍자적 요소를 버리고 부드럽게 비꼬면서도 분별 있는 태도를 취했지만, 중용을 찬양하는 진부한 말도 그의 손이 닿으면 결코 따분하지 않다. 그중 2편은 2번째 책으로 묶여 나왔고, 3번째 서간시인 <피소 삼부자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후세 사람들이 <시론>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마지막 3편의 서간시는 느슨하고 대화적인 형식 속에 문학비평을 싣고 있는데, 특히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호라티우스가 왜 서정시를 버리고 철학을 선택했는가를 설명해준다. 훌륭한 시는 즐거울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어야 한다고 호라티우스는 생각했다. 좋은 글의 비밀은 지혜(‘미덕’이라는 뜻을 함축)이다. 시인은 자신의 가장 좋은 점을 아낌없이 주기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필요가 있다.
<플로루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BC 19년에, <시론>(이 책은 젊은 시인들에게 지침이 될 30여 개의 격언으로 이루어져 있음)은 BC 19~18년경에, 제1권의 마지막 서간체 시는 BC 17~15년에 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다. 유명한 이 마지막 시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쳐진 것이다. 아우구스투스가 호라티우스에게 보낸 편지도 오늘날 남아 잇슨ㄴ데, 여기서 황제는 그때까지 그런 현정을 받지 못했음을 탄식하고 있다.
이 마지막 서간체 시에서 호라티우스는 로마 초기의 문학적 배경에 비추어 당시의 시가 가진 장점을 역설하고 있지만, 이것은 분명 호라티우스 자신의 방법론을 옹호한 것이다. 이 무렵 호라티우스는 사실상 계관시인의 지위에 올라 있었고, BC 17년에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의 정권과 지난해에 자창한 도덕 개혁을 종교적으로 엄숙하게 승인할 목적으로 ‘100년째’라고 부르는 고대 축제를 되살리자, 로라티우스는 이 축제를 위해 <세기의 찬가>를 지었다.
이 무렵 호라티우스는 서정시 형식으로 돌아가 있었기 때문에 이 찬가는 서정시 운율로 씌어졌다. 이어서 그는 15편의 송가로 이루어진 <송가집>을 완성했는데, 이 시들은 대부분 이전의 송가들보다 진지한(그리스 정치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 시들 가운데 마지막 송가는 BC 13년에 씌어졌다. 지난 몇 년 동안 아우구스투스의 참모 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마이케나스가 BC 8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요구한 것 가운데 하나는 “저를 기억하시듯 호라티우스를 기억해주십시오”였다.
그러나 그 후 1 ~2개월 뒤 호라티우스도 아우구스투스를 상속자로 지명한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에스퀼리누스 언덕에 있는 마이케나스의 무덤 근처에 묻혔다. 인생의 후반기에 호라티우스는 늘 로마에서 봄을 보냈고 다른 때도 잠깐씩 로마에 와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는 로마에 집을 한 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이따금 남쪽 바닷가에서 겨울을 보냈고, 여름과 가을에는 대부분 사비니의 농장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로마 동쪽에 있는 티부르(티볼리)나 프라이네스테(팔레스트리나)에서 지내기도 했다.
짧은 <호라티우스 전기>는 아우구스투스가 그에게 보낸 익살스러운 편지를 인용하고 있는데, 이 편지를 보면 시인은 키가 작고 뚱뚱했던 것 같다. 호라티우스 자신도 키가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가 44세 때 자신을 묘사한 것에 따르면, 그는 일찍 백발이 되었고, 햇빛을 좋아했으며 성미가 급해서 걸핏하면 화를 내지만 금방 화를 푸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호라티우스의 <시학>
호라티우스의 <시학>의 원래 제목은 <피소 3부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호라티우스가 본보기로 삼았다는 네옵톨레모스의 <시학>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타고난 재능과 숙련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시의 핵심은 사상인가 형식인가, 시의 목적은 교훈인가 쾌감인가 하는 문제들을 다루었다고 한다. 호라티우스 역시 이런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고, 또 언어의 조탁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때 네옵톨레모스를 통하여 알렉산드레이아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호라티우스의 <시학>은 자신의 경험과 당시의 라틴문학을 토대로 하여 젊은 시인들을 위한 작시기법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1~37행, 시는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라야 한다.
환상처럼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표상들만 조작해냄으로써 머리와 발이 하나의 통일된 형상을 이루지 못한 시작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폭소를 금할 수 없게 한다. 화가와 시인들은 무엇이든지 시도할 수 있지만 단일성과 통일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 시인들은 대개 올바른 것의 겉모양만 보고 거기에 현혹되고 마는데, 간결함을 추구하다 보면 모호해지고 유려함을 찾다보면 부 자연스러워지고, 너무 소심하게 감정의 비약을 피하다보면 땅바닥 위를 기는 꼴이 된다. 예술 감각이 결여된 경우에는 과오를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실수의 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38~44행, 그러기 위해선 능력에 맞는 소재를 택해야 한다. 능력에 맞는 소재를 택한 시인은 조사와 언어의 배열 때문에 곤란을 당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소재를 선택해야 하는데, 그러면 조사(단어, 문맥 배열)와 언어의 명쾌한 배열 때문에 곤란을 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명쾌한 배열의 장점과 매력은 지금 이 순간 꼭 필요한 말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뒤로 미루어 지금은 말하지 않는데 있다.
45~72행, 훌륭한 조사가 되려면 말을 잘 선택해야 한다.
시를 쓰는 작가는 언어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하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다. 지치 있는 결합을 통하여 일상어에 새로운 맛을 준다면 매우 세련된 인상을 줄 것이다. 현제적 감각에 맞는 단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시인의 권리이다.
73~88행, 내용에 따라 운율도 달라져야 한다.
서로 다른 한 쌍의 운율은 먼저 만가에 다음은 신에게 소원이 성취되었음을 알리는 감사문에 그 형식을 부여했다. 얌부스는(신에게 바친 기원문)그 운각으로 자신의 분노를 무장했으며, 그 후 희극과 비극에서 대화에 적합하며 군중의 소음을 압도하고 사건 진행에 활기를 주기 때문에 이 운각을 받아들였다. 무사여신은 뤼라의 현으로 신들과 영웅들, 승리한 권투가와 우승한 경마말, 젊은이들의 사랑과 근심을 쫓아주는 술을 노래하게 했다.
앞서 말한 형식과 색조는 그때그때의 소재에 따라 결정되는 것을 말한다.
89~118행, 대사는 작품 내용과 화자의 성격에 적합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는 아름답고 감미로워야 하지만 또한 청중을 감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시는 물론 아름답고 감미로워야 하지만 무엇보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아름다움은 시인, 노래 부르는 사람에 의해서 경험되어야 한다.(작가는 정직해져야 한다. 그래서 자신에 경험된 것에서만 나와야 한다.)
자연은 그때그때의 경험에 따라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는 것이다. 자연은 즐겁게 해주기도 하고, 격동시키기도 하고, 무거운 금심으로 의기소침하게 하기도 하고, 불안으로 마음을 조이게도 한다. 그런 연후에 영혼의 감동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데 이때 혀가 통역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때 화자의 말이 그의 체험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관중석의 사람들은 교양의 유무를 막론하고 폭소를 터뜨릴 것이다.
119~152행, 소재는 창작일 수도 있고 전래된 것 일수도 있지만 후자의 경우가 더 안전하다. 독창성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있다. 호메로스의 본보기
소재를 택할 때는 전래의 것을 택하거나, 창작을 할 경우에는 내적인 조화를 꾀하도록 해야 한다.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새로운 소재를 제시하고 새로운 인물을 창작하고자 한다면 시종일관 자신에 충실해야 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것에 개성을 부여한다는 것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트로이아 전설권 중에서 한 가지 소재를 택하여 마치 알려진 적도 없고 이야기된 적도 없는 새로운 것을 처음으로 제시하는 양 무대 위에 올려놓는다면 그대는 보다 안전한 길을 걷는 셈이다.(그리스를 검증되었다고 생각하여 그리스 문학에서 가져온 것은 괜찮지만 다른 소재를 다룰 때는 굉장히 조심해서 다뤄야 하고, 그럼에도 성공할 가능성은 적다.)
소재가 만인의 공유물인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그대의 소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안이하게 처리하거나 통역관처럼 글자를 한 자 한자 그대로 옮긴다거나 모방자로서 궁지에 빠진 나머지 원전에 대한 외경심과 원전의 특이성으로 인하여 거기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153~178행, 드라마를 쓰려면 각 연령별로 그 특징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만일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며 박수를 청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관객들의 갈채를 바란다면 각 연령별로 그 특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연령에 따라 성격도 달라지기 마련이므로 각 연령별로 거기에 적합한 것을 부여해야 한다.
179~201행, 드라마에 있어서 몇 가지 주의사항, 특히 코로스에 관하여
사건은 무대 위에서 실연되거나 아니면 보고에 의하여 전달된다. 하지만 귀로 듣는 것은 믿음직한 눈으로 본 것이나 관객이 직접 목격한 것보다는 영혼에 깊은 감명을 주지 못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집안에서 진행되어야 할 것을 무대 위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은 목격자로 하여금 생생하게 보고토록 해야 한다.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자주 상연되자면 5막보다 짧아서도 안 되고 길어서도 안 된다. 사건의 갈등이 구원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 신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제4수의 배우는 침묵 지켜야지 대화에 끼어 들어서는 안 된다. 코로스는 배우와 같은 역할을 하되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코러스가 필요 없는 해설은 배우가 하되, 배우가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코러스가 맡기자.)
202~219행, 음악에 관한 주의사항
섬세하고 단순하고 구멍이 몇 개 안되던 당시의 피리는 코로스의 노래를 지원하고 반주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초만원을 이루지 않던 당시의 관중석을 위해서는 그 소리만으로도 아무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전쟁에 승리하여 국토를 확장하고 도시를 긴 성벽으로 둘러싸고 대낮부터 술에 취해 아무 제제도 받지 않고 극장에 드나들기 시작한 때부터는 운율과 음악의 엄격한 규율이 문란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피리 취주자는 이 존경할만한 예술에 불안과 사치를 가미한 다음 긴 의상을 질질 끌며 무대 위를 요란스레 왔다 갔다 하게 된 것이다.
220~250행, 비극과 희극의 중간인 사튀로스 극의 조사에 광한 주의 사항(희극)
항상 유쾌하고 제멋대로 농담을 늘어놓는 사튀로스들을 관객에게 소개하고 비극의 진지함을 유쾌한 노리로 전환하는데 있서도 절도를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위기의 순간의 위험히 도와졌던 신이 허공을 헤메거나 자주 나타나서는 안 될 것이다.
내가 만일 사튀로스 극을 쓴다면 나는 결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일상어만을 고르지 않고 누구나 알고 있는 상용어로 시를 쓸 것이다. 누구나 그따위 것이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갖겠지만 막상 시도하게 되면 아무리 담을 흘리며 애써도 헛수고가 되게끔 말이다. 문제는 말을 묶고 엮는 능력이며 이러한 능력만이 일상어에 품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스 비극은 대부분 3개의 비극과 1개의 사튀로스[희극]을 상영하지만 후자가 너무 화려하면 앞의 것들이 잊혀짐으로 잘 맞춰야 한다.)
251~274행, 로마의 비극 및 희극 시인들은 얌부스 운율을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다.
단음절 다음에 오는 장음절은 얌부르라고 불리는데 그것은 빠른 윤각이다. 그러므로 얌부스 시행은 첫 운각에서부터 마지막 운각에 이르기까지 형태가 동일한 여섯 개의 박자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절운율이란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얌부스는 아키우스의 유명한 삼절운율에서는 그 본연의 모습을 그리 자주 드러내는 편이 아니며 엔니우스가 바윗돌처럼 무거운 시구를 무대 위에 내던지는 데 대해서는 그가 신중을 기하지 않고 너무 서둘러 작시했거나 아니면 예술 법칙을 몰랐던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비평가라고 해서 누구나 다 규칙에 어긋나는 시구를 알아보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대들은 그리스인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아 밤낮으로 손에 들고 읽어야 한다.
274~294행, 그리스의 본보기와 로마, 언어의 조탁에 관하여
로마 시인들은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시도해 보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리스인들의 발자취를 떠나 사극과 희극에서 로마 고유의 소재를 취급함으로써 적잖은 명성을 얻었다. 따라서 그대들은 오랜 시간을 두고 꼼꼼히 손질하면서 열 번씩 음미해보지 않은 시를 물리치기 바란다.
295~308행, 그릇된 천재론의 해악, 시인의 임무
데모크리토스는 천재가 수고스런 예술작업보다 더 많은 행운을 약속해 준다고 믿고는 건전한 시인들을 헬리콘에서 추방하려 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손톱과 수염을 깎지 않고 한적한 곳을 찾아다니며 미나리아재비로 세 번씩 치료해도 고칠 후 없는 정신병을 앓음으로써 시인으로서의 그들의 가치와 명성은 확고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훌륭한 시를 쓰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베지 못할망정 쇠를 예리하게 해주는 숫돌의 역할을 하고 싶다. 나 자신은 이렇다 할 만 한 것을 쓸 능력이 없으므로 시인의 과업과 의무, 즉 작시의 원천은 무엇이며 시인을 키워주고 형성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시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해서는 안 될 일은 무엇인가, 진정한 예술이 인도하는 곳은 어디이며 과오가 인도하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다.
309~322행, 작시의 근본은 분별력이다. 내용이 풍부한 훌륭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철학과 도덕론을 공부해야 한다.
올바른 작시의 원리와 근원은 분별력이다. 이를테면 소크라테스에 관한 저술들은 시의 소재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즉 심사숙고된 소재에는 언어가 저절로 따르게 될 것이다. 현명한 모방자로서 참된 생활과 활동의 본보기를 눈여겨보며 거기에서 생생한 음성을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심어한 사상과 탁월한 성격을 제시하는 작품은 설사 유아한 맛이 없고 그 언어가 무게와 예술성을 결여하고 있다 하더라도 듣기는 좋으니 내용이 공허한 시구보다 청중을 더 즐겁게 해주고 매혹하는 법이다.
323~332행,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성격차이
무사 여신은 그리스인들에게 창조적 재능과 유창한 표현력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들의 유일한 욕망은 명예욕이지만 로마의 소년들은 끊임없는 분수 계산을 통해서 아스를 셈하는 법을 배우 고 있다. 따라서 녹이 구리를 갉아먹듯 이러한 금전욕이 영혼을 갉아먹는다면 삼나무 기름을 먹인 다음 삼나무 상자 안에 넣어 길이길이 보존할 만한 휼륭한 시가 나오기를 우리가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333~345행, 시의 모적은 교훈과 쾌감을 주는데 있다.
시인은 이익을 주려하거나 또는 쾌감을 주려하거나 또는 쾌감과 인생에 유익한 것을 동시에 주려한다. 그러나 교훈은 간결하고 정확해야 하고, 쾌감을 주기 위한 창작물은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까워야 한다. 그러므로 유익한 것에 달콤한 것을 가미하여 쾌감과 교훈을 동시에 주는 작가는 만인의 갈채를 받게 될 것이다.(그러나 그 쾌감은 사실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347~360행, 용서할 수 있는 과오와 용서할 수 없는 과오
작품이 전체적으로 보아 성공적인 경우 나는 흔히 있을 수 있는 부주의에서 발생했거나 또는 인간의 주의력으로서는 예방할 수 없었던 사소한 결함에 대해서는 화내지 않는다. 그러나 사자생(받아 적는 사람)처럼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똑같은 과오를 거듭할 때 그는 용서받을 수 없다.
361~365행, 시와 그림의 비교
시는 그림과 같다. 어떤 것은 가가이서 볼 때 더 감동적이고 어떤 것은 멀리서 볼 때 그렇다. 어떤 것은 어두운 장소를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것은 비평가의 형안을 두려워하지 않고 밝은 장소에서 관람되기를 원한다. 어떤 것은 한번만 보아도 마음에 들지만 어떤 것은 열 번을 거듭 보아야 마음에 든다.
366~390행, 시에는 범용이 용납되지 않는다.
어떤 영역에서는 범용이 용납된다. 그러나 시에서는 범용이 용납되지 않는다.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391~407행, 시의 가치와 가능
테마이의 건설자인 암피온은 뤼라 소리로 바위를 움직여 그것을 감미로운 노래로 자기가 원하는 장소로 인도했는데, 그것이 공동재산을 사유재산, 신성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죄를 방지하고, 서판에 법률을 새겨 넣은 지혜의 시초였다. 그리하여 신과 같은 가인들과 시에 명예와 영광이 주어졌던 것이다. 노래는 신탁을 고지하고 삶의 길을 가르쳐주었을 뿐 아니라 왕의 총애를 받게 해주었고 기나긴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을 위하여 축제극을 창안해 냈다.
408~418행, 재능과 숙련
훌륭한 시를 만드는 것은 타고난 재능이냐 아니면 숙련이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하지만 나로서는 풍부한 광맥이 결여된 노력이나 가꾸지 않은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양자는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서로 제휴한다고 본다.
419~452행, 올바른 비판과 그릇된 비판
시를 누구에게 선물을 주려고 한다면 그가 환희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에는 내놓지 마라. 마치 장례식 때 돈 받고 고가는 자들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자들보다 더 애절한 말을 하고 더 슬픈 표정을 지듯이 마음속으로 조소하는 자일수록 진심으로 찬양하는 자보다 더 감격한 체하는 법이다.
정직하고 유능한 비평가라면 비예술적인 시구는 지적하고 딱딱한 것은 나무라고 무미건조한 것은 새까만 횡선을 치고 지나친 장식은 잘라내고 어두운 것은 밝게 하고 모호한 것은 분명하게 하고 고칠 것은 고치도록 할 것이다.
453~476행, 광기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시인의 추악한 모습
현명한 사람은 광기에 사로잡힌 시인(자기 언어, 문맥에 사로잡혀 해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달아난다. 아이들만이 야유하며 멋모르고 따라다닐 뿐이다. 그는 유식한 사람일 쫓아 버리고, 붙잡는 날에는 꼭 붙들어놓고 자신의 시를 낭송함으로써 지루해 죽게 만든다.
(호라티우스는 플라톤과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았는데, 플라톤의 입장에서 플라톤은 시학을 멀리했지만 그는 스토아학파의 입장을 가지고 그리스에서 가져 오지만 비도덕적인 것을 잣대-위에서 말한 것-를 가지고 뛰어 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로마의 말을 가지고 도덕적이게 하겠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시는 –이데아의 모상인 감각 세계와 그것의 모상인 예술, 시-3차 모상이기 때문에 진리에 멀고 그렇기에 이것을 많이 할수록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하여 멀리하였지만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비극과 시를 보며 인간을 이해하고 한계성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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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티우스(기원전 65년 아풀리엔의 베누시아 출생, 기원후 8년 로마에서 사망)
1. 예술 이론
호라티우스는 예술의 문제를 언제나 실천적으로, 즉 예술가의 문제로서 파악한다. 따라서 그는 예술에 접근할 때, 이론적인 것도 이론적이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기교적이다.(실천적이다.) 예술을 다뤘던 성찰들은 그의 저작 많은 곳에서 조금 간결한 형태로 삽입돼 있다.
거기서 그는 연관을 구성하며 성찰들을 수행했고, 그것들을 문학적인 서간문으로 구성했다. 호라티우스에게 문학의 아름다움은 한마디로 모순적인 관점들을 지향한 영구적인 균형을 실현하는 것이다.(그는 시론에서 양 극단의 물음을 묻지만 중용을 지키라고 하고 이것을 직접 생애로 실천한다. 즉 모랄의 시작인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것을 완전히 베끼는 것이 아닌, 로마의 것을 만드는 시기에 꽃을 활짝 피웠다.)
1) 문학의 사례
호라티우스는 문학을 사례로 삼아 자신의 테제를 펼쳐낸다. 호라티우스가 천착한 문제는, 문학 생산의 난점을 설명하는 것과 (그것에 대응해) 문학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을 확립하는 것이다. 운문으로 작성해 칼푸르니우스 피소Calpurnius Piso에게 보낸 글인 <편지묶음>에서 그는 이 문제들을 다룬다.
어떤 작품은, 예술가가 (단순하고 자명해 보이는) 근본 원칙을 준수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엄수하기란 쉽지 않다. 소재의 선택은 고유한 능력에 따라 조화를 이루어야 하며, 작품의 개별 부분은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따라야 한다. 즉 하나의 극단에 빠지지 않으려다 다른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작품은 통일적이고 단일할뿐더러 내부적으로 조화롭고 그럴듯해야 한다.
덧붙여, 호라티우스가 연극을 사례로 들어 적격의 원칙을 설명한다. 시인은 어떠한 척도가 적격한지, 어떠한 희극 양식이 적격한지, 어떠한 비극이 적격한지 깨달아야 하고, 장르 안에서 행위 상황에 따라서, 행위자의 연령과 성격에 따라서 구별해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소재를 다룰 때는 독창적인데 대중의 기대와 습관을 고려해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문학적인 자유는 작품에 내재적인 이유를 통해서 통제될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과 대중의 능력에 의해서 통제된다. 결국 시의 규범은 행위 및 인격의 개연성의 기준과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고, 그때마다의 상황들에 따라 규정 가능한 것이다. 적격은 또한 도덕적인 예의범절을 지속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예술 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대중의 우연한 취미가 아니라, 희랍에서 전면적으로 인정받는 수행·업적과의 비교다. 희랍의 작품은 완전성이 형식적으로 가능한지, 더불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일러준다. <피소 3부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라티우스는 희랍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그들의 사례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창한다. 그래야만 품격이 획득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양식적인 모방함은 단순히 복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범과 경쟁하려는 것, 즉 뛰어넘으려는 것이란 사실을 명백히 한다.
2) 시인의 소명
예술의 문제와 더불어, 예술가의 문제가 호라티우스에게 제기된다. 관련해 호라티우스는 경박하게 문학에 접근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전문성이 별반 필요 없다고 보는 것을 경계한다. 글쓰기는 위험이 따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문적으로 하거나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재능과 정신의 도취 두 가지 만으로는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예술을 이해하고 사유를 명료하게 하는 것이 뒤따라야 하며, 시인은 무엇보다 계속된 연습, 고단한 손질, 강건한 비판이 필요하다. 전문성의 필요성 외에도, 문학의 사회적인 기능에 다른 시인의 고구한 도덕적인 책임이 상기된다. 시인은 청년과 입법자와 뮤즈를 받드는 사제의 교육자다. 뿐만 인가 그는 감시자이자 신드로가 신도를 잇는 매개자이기도 한다.
3) 존재의 미학
<율리우스 플로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라티우스는 예술이 성과를 내기 위한 조건을 반성한다. 호라티우스는 이제 서정시를 후학에게 넘기는 대신에 참된 삶의 박자와 선율을 학습하고자 한다. <서간집>에서 이미 그랬던 것처럼, 이 책에서도 삶의 형식의 윤곽이 묘사된다. 즉 삶의 태도의 양식화로서, 자신의 삶을 일정한 미적인 가치를 담지하고 일정한 양식 기준과 일치하는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려는 시도인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생각하는 기준이란, 문학예술은 물론이요 삶의 예술에서 힘들게 관철돼야할 적격한 중용이다.
4) 맥락
호라티우스가 그때마다 작성한 편지는 로마 문학에 특유한 문제뿐만 아니라, 로마 예술에 일반적 상활까지 기록한다. 즉 탁월한 희랍 전통에 직면해 로마만의 개성에 따라 탐색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 고전시대가 성공적으로 열렸다. 그때의 독창성은 호라티우스 자체에서 관찰되는 것처럼, 새로운 사유와 동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유할뿐더러 자유로운 재조합에 잇는 것이다. 호라티우스가 플라톤의 대화편을 근거로 삼는 시인을 원천으로 인정하는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1)을 몰랐던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는 행위구조를 연극의 문제로 설정하지 않는다. 그것 대신에 양식적인 적합을 중시한다. 형식을 엄격히 손질한다는 방침 또한 헬레니즘 적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시인이 걸었던 길을 따랐던 셈이다.
5) 이론적 수용
고대의 다른 저자들과 달리 호라티우스는 결코 잊히지 않았고, 비교적 끊임없이 수용됐다. 하지만 반짝이는 문장이기도 한 공식을 인용할 생각으로 개별 공식들을 골라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시학>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피소 3부자에게 보낸 편지>는 (편지의 성격은 간과된 채로) 시인의 교본으로 읽혔다. 호라티우스의 권고는, 단지 사례만 제시할 때조차, 이미 고대는 물론이요 중세에 이르기까지 일반적인 규범으로 간주됐다. 단테가 말했던 것처럼, 호라티우스는 ‘우리의 대가’로 간주된다. 이런 식의 수용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러 단단하게 강화됐고 근대 초기의 고전주의에서 장점을 이루었다. 장르의 근본 명제, 모범의 모방, 젖격의 원칙, 신의 이중적인 작용 목적은 누가 뭐래도 고전주의의 해심적인 교리였다. 하지만 피소에게 보낸 편지의 다채로운 의미에 풍자적인 성격은 교범으로 적합한지 계속해서 의심을 받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괴테가 그것을 표명했다. 헤겔이 보기에 호라티우스는 미학 없이 예술을 관찰한 사례로 이바지했을 뿐이다. 세세한 교훈이 있을지는 몰라도, 경험적으로 너무 편협한 기초에 근거하며 구체화할 때 필요한 일반적인 학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라티우스의 문학에 대한 주장들은 여러 석학들에 의해 비평, 찬양되며 현재까지도 수용되고 있다.
그리스 소재에 로마적인 양식
여기에는 체계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무엇이 없는데, 이것이 과연 교본일 수 있느냐고 괴태가 묻고 교본의 자리에서 밀려나지만 아직까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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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책의 첫머리에서 포이에시스는 그 종류를 통틀어 모두 미메시스(모방)라고 하였다. 이 점은 플라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진실에서 멀어져가는 외관물(外觀勿)이라 하여 댄스와 음악과 같은 화사한 것이나 서사시나 비극 등 시작품은 덕의 형성을 해치는 것이라 하여 이상 국가 건설의 교육 계획에서 배제하였다. 아울러 사회나 인생에 쓸모가 있다고 하는 변호가 잇으면 그것을 용인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플라톤의 말을 받아들여 특히 비극의 본질을 규명하면서 시작(詩作)이 인생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해답하여 하였다. 이 목적에는 그는 리듬이나 멜로디 등, 시의 형식면에는 그다지 깊이 들어가지 않고 실질적인 면인 모방과 효과를 주로 논하였으며 특히 작품으로서의 시보다도 시의 제작 내지는 기술의 규명에 힘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에 있어서 본성적인 모방을 시작의 영역에서 발전적·단계적으로 추구하고, 드라마적인 모방을 와선한 최고 단계로 포착하여, 성실하고 고귀한 즉 선량한 행위의 모방인 비극이야말로 진정 그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비극은 상당한 길이로써 완결된 중대 행위의 모방이다. 그 가운데에는 리듬과 음악적인 언어가 있으며, 등장인물은 연민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행위의 카타르시스를 성취하는 것이다. 가령 문벌의 사나이인 오이디푸스 왕 등의 육친 살해, 기타 욕되고 무서운 행위는 무지에서 오는 실책으로 일어나는 것으로서 그 때문에 부당한 불행 속으로 빠져 가련한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지를 인지하는 행위 가운데 이미 오욕의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적 약점이라는 점에서 비극적 영웅에 대하여 관람하는 사람 편에 공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한 비극의 구성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아름다움이어서 그 속에서의 연민과 공포의 감정도 쾌감으로서 이미 정화되어 있다. 요컨대 비극 속의 행위를 보고 얻을 수 있는 전화는 지적 정화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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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문
시학이 글인 만큼 호라티우스는 글쓰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언급했다. 글엔 통일성이 있어야 하며 감정엔 균형과 하이라이트, 그리고 결말, 너무 복잡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아야 든다는 등에 대해서 말이다. 시학의 저자 호라티우스는 플라톤의 사상을 따라갔지만 진리에 멀다는 이유로 시학을 멀리한 플라톤과는 달리 시를 강조했다. 그러며 그의 책은 후대까지도 교과서처럼 쓰였는데, 괴테가 호라티우스에게 나름대로의 체계가 없다고 지적하기 전까지 말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제까지 비평과 찬사를 받고 있는 시학의 주요사상은 모순적인 관점들을 지향한 영구적인 균형을 실현하는 것인데, 오늘 강의를 들으면서 이러하지 못한 나의 글쓰기의 많은 코멘트를 받았다. 아직도 ‘얕은 지식으로 그럴싸하게 짜지은 자기만족의 글’이라는 평가가 귓가에 멤도는 것 같다. 정곡을 찔려 가슴 아팠던 당시와는 달리 나는 그런 코멘트를 아주 고맙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첫째, 선생님이 그 만큼 시간을 투자하여 나의 글을 보셨다는 것이고 둘째, 나를 사랑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나는 뱅뱅 꼬는 나의 글쓰기를 내려놓고 좀 더 간단하고 명료하게 쓰고 싶고 호라티우스의 시학같이 책을 스스로 나를 빗대 보는 거울삼으며 나를 돌아보고 변화시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