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천년의 숨은 보물들. 국립경주박물관
2015.2.28
석조 사자상
앞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형태를 확인하기 어렵지만 분황사탑이나
불국사 다보탑의 사자상처럼 어떠한 예배대상의 사방을 지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성덕대왕 신종(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은 원래 성덕대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봉덕사절에 있었는데
이 절이 폐허가 되면서 겅주읍성 남문 밖 옛 국립경주박물관을 거쳐 지금의 자리로 돌아왔다고 한다.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는 이 종은, 세계 어느 종과 비교하여도 뒤지지않을 정도의 음색을 갖고있다고 한다.
십이지상
신라 33대 성덕왕(702-787)의 능 주위에 둘러져 있던 것으로 12지중 원숭이상이다.
신라왕관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보 242호)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의 내용은 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죄를 지은 '거벌모라 남미지촌'의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배자들에게는
곤장 60대와 1백대씩 때릴 것을 판결한 것으로 되어있다.
포항 중성리 신라비(보물 1758호)
지증왕 2년(501)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지금까지 출토된 비석 중에서
가장 오래된 신라비석으로 알려진 포항 냉수리 비석보다 2년 앞선 가장 오랜된 비석이다.
내용은 재물과 관련된 소송의 평결을 담고 있는데, 과거 모단벌의 재물을 다른 사람이 뺏았던 것을
진상을 조사하여 원 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향후 재론을 못하도록 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차돈 순교비
경주 소금강산 백률사에서 출토된 것으로 헌덕왕(재위 809-826) 때 왕의 공적을 새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석의 한 면에는 이차돈의 순교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였고,
나머지 다섯면에는 정간을 치고 3㎝ 크기의 글자를 새겨넣었다.
용얼굴무늬기와
금강역사상
아래 두 구의 금강역사는 본래 분황사 동쪽 도로 건너편 구황동에 있던 것을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금강역사는 불교가 성립된 이후 부처와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신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꼭 쌍으로 만들어져 있다. 금강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왼쪽은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의 금강역사는
입을 다물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부처와 그 말씀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현으로 보인다.
금강역사머리
일제강점기 석굴암에서 수습한 것으로, 뒤통수가 편평하여 배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전실 금강역사상 이전의 미완성품으로 추정되며, 원래 4개의 금강역사상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신장상문비석
경주 서악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돌문으로, 문에는 천정과 바닥에 결합될 수 있도록 돌출부가 만들어져 있다.
앞 뒤 면에 신장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머리 뒤에 두광이 있고 하체에는 군의를 입고 있다.
손에는 긴 금강저를 들고 있고 손목과 발목에는 장식이 있으며 연꽃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당당하고 위엄있는 신장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오리모양 토기
오리 형태를 본 딴 상형 토기로 부리와 눈 등 머리의 표현은 사실적인데 비해 속이 빈 몸통부분은
전반적으로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등에는 원통형의 주입구가 있고 꼬리부분은 뚫려있다.
진한과 변한지역인 영남지방에서 대개 한쌍으로 출토되었다. 일산생활용이 아닌 장례와 관련된
껴묻거리로써 죽은이의 영혼이 승천하는 것을 돕기 위해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망새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것으로 흔히 '처마'라고 하는데, '처마'라는 용어는 그모양이 올빼미 머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으로, 마루 끝에 장식하는 기와를 부르는 말로는 역시 '망새'가 더 적합해 보인다.
목조건물의 가장 무서운 적은 '불'인데 화재의 예방을 위해 옛사람들은 불의 상징물을 건물에 두었는데
이 상징물 중 하나가 바로 '용'이다. 용을 옛적에는' 미르'라 불렀는데 미르는 '물'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용마루 끝 가장 높은 곳에 달린 이 기와는 '화마'를 막는 능력을 가진 용의 상징물이었다.
황룡사 강당터 근처에서 발견된 것으로 높이가 182 ㎝에 이른다. 크기가 매우 커서 제작과정에
어려움이 있어서인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 뒤 면에 연꽃 무늬와 얼굴 무늬를 별도 제작하여
부착햇는데 얼굴 무늬에 수염을 새긴 것도 있어 남녀를 구별한 것으로 보인다.
반가사유상
커다란 돌 하나로 조각한 반가사유상인데, 머리와 두 팔이 깨어져 남아있지 않지만 남은 높이로 보아
건장한 성인 남자의 신체에 가깝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을 왼 무릎위에 올리고 벗은 윗몸에 목걸이를 하고 있다.
아랫몸에 걸친 치마자락은 서로 겹치어 주름지고 끝자락에서 물결을 이룬다.
발가락과 발톱까지 나타낸 왼발은 연꽃을 딛고 있다. 연꽃이 막 피어올라 부처의 발을 받치고 있는듯 하다.
경북 봉화에서 출토된 반가사유상에 비해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신라 특유의 고줄한 멋이 살아있다.
석등
원래는 경주읍성터에 있었던 것인데 1975년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로 옮겨왔다.
높이가 거의 6 미터에 이르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석등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것으로 전북 남원의 실상사 앞에도 있는데 실상사 석등은 앞에 돌계단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석등 앞에도 돌계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8년 경주 교동에 살던 최대식 선생이
기증한 것으로 원래 있었던 곳을 알 수가 없는 점이 못내 아쉽다.
석조
장방형 또는 원형의 돌로, 내부를 파내어 절 등에서 물을 담는 용도로 썼던 것이다.
이 석조에는 많은 글들이 새겨져 있는데, 석조 위 부분에 경주부윤(지금의 시장) 이필영(1573-1645)이
조선 인조(1623-1649) 16년에 이 석조를 신라 최초의 절인 흥륜사에서 경주읍성 안의 금학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 있고, 반대편에는 이교방이 이 석조를 보고 지은 칠언절구의 시가 있으며, 측면에는
"석조 안의 물에 비친 하늘"이라는 뜻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교방의 시를 한글로 번역해 보면
"어느 때 선녀가 머리를 감았던가, 머리 감던 사람은 가고 연꽃만 피었네
오래된 석분에는 공연한 향기 가득하구나." 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삼층석탑(높이 2.2 미터)
신라의 다른 석탑들에비해 크기가 작고 각 층마다 지붕들이 각각 하나의 통들로 이뤄져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맨 아래 기단부와 꼭대기 장식부분은 현재 없어진 상태로
원래 놓여있던 남산 삼릉계 부근에는 최근에 복원이 이뤄진 석조불좌상(보물 제666호)이 자리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