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2대 ∙ 정조]
완벽한 호랑이
백성들과 소통하기 위해 힘쓴 임금
생애 ∙ 1752~1800년
재위기간 ∙ 1776~1800년
휘 ∙ 이산
묘호 ∙ 정종
출생과 즉위 ∙ 조선 21대 임금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사도세자이다.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으며 왕위에 오른다.
가족관계 ∙ 왕비 : 1명, 후궁 : 4명, 자녀: 2남 2녀
정조는 영조의 손자이며,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사도세자를 죽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한 세력은 노론이다.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정조의 나이는 11세였다. 후에 정조가 왕이 되는 것이 노론에게는 불안했다. 그래서 노론은 정조를 모함하고 비방한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신분으로 죽일 수 없기 때문에 서인으로 폐한 뒤 역적으로 몰아 뒤주에서 죽인다. 자연히 정조는 역적의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왕이 될 자격도 박탈되어 궁궐에서 내쫓긴다. 그러나 영조는 왕위계승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2달 만에 다시 정조를 불러들인다.
영조는 정조를 매우 총애했다. 정조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했고 공부도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치색도 일절 드러내지 않고 학문에만 열심히 임했다. 이렇게 성장하는 정조를 보며 노론들은 불안해져 갔다. 그래서 정조를 암살할 계획까지 꾸민다. 정조가 공부에만 열중한 것은 성격이기도 했지만 스스로의 생존 전략이기도 했다. 정조는 동궁 수업을 받으면서 10년 동안 아버지에 대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왕이 된 날 정조는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치 세력은 그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던 벽파와 안타깝게 여겼던 시파로 나뉘어 졌다. 노론은 대부분 벽파였고, 남인세력은 시파였다. 그러나 정조는 이 두 세력을 고루 등용했다. 또한 왕이 되자마자 궐 안에 규장각을 설치한다. 규장각은 왕립 도서관으로 정조는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 당파와 관계없이 유능한 학자들을 모아 공부하도록 한 것이다. 또한 문신들 중에서 37세 이하의 사람들을 모아 재교육을 시켰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서얼도 등용했다.
정조는 무예실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지고 신하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자신만의 군대인 장용영을 설치한다. 또한 정조는 글쓰기를 매우 좋아해서 매일 일기를 썼다고 전해진다. 정조는 신하들과 자주 대화를 하며 다양한 주제로 토론한다. 또한 지방을 순행하며 백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한다. 정조는 임금이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 꽹과리를 치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을 통해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조선 시대에는 상인을 크게 시전상인과 난전상인으로 나누었다. 시전상인은 국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었다. 대신 군대를 면제해주고 주요 상권의 점포와 판매 독점권을 얻게 해주었다. 반면, 난전상인은 무허가로 상업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난전상인들이 장사가 더 잘되기 시작한다. 시전은 물건 값이 비싸기 때문이었다. 이에 시전 상인들은 난전상인들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얻는다. 그런데 시전상인들은 난전상인들의 물건을 깨고 폭행까지 일삼는다. 또한 시전상인은 서인 노론 벽파의 정치 자금을 대고 있었다. 금난전권을 유지하기 위해 뇌물을 바친 것이다. 이에 정조는 시전상인의 품목 중 6가지만 제외하고 모든 상인의 금난전권을 폐지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1791년의 신해통공이다.
정조의 가장 큰 업적은 수원 화성이라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더 좋은 것으로 옮기고 싶어했다. 이때 주목받은 곳이 바로 수원이다. 그런데 묘소를 수원으로 옮기자마자 좋은 일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조의 후궁이 입덧을 하기 시작한다. 정조는 당시까지 후계자가 없었다. 그래서 이는 궁의 경사였다. 이 아이는 정조의 뒤를 이을 순조이다. 그리고 정조는 묘를 이장하면서 화성을 쌓기 시작한다. 이 공사에는 많은 뛰어난 인물들이 참여했다. 정약용과 김홍도 등이 있었다. 또한 성을 쌓기 위해 무거운 돌을 옮기는 거중기가 등장한다. 정조는 화성을 쌓을 때 백성들에게 월급을 주면서 일을 지시한다. 이후 정조는 아들 순조가 15세가 되는 1804년에 왕위를 양위하고 수원에 오고자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로 인해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승하한다. 그런데 정조가 독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은 갑작스러운 병의 악화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감상문
정조는 조선의 역대 임금 들 중에서 글을 가장 많이 쓴 임금으로 알려져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일기를 매일 써 훗날 일성록을 만들 만큼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매우 좋아했다. 일성록은 나는 매일 반성한다라는 뜻으로 정조 자신의 반성문이다. 이 일성록은 2011년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하였다. 정조는 조선에서 임금이라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정조는 자신이 다스리던 시대가 조선의 르네상스기라는 평을 듣는 만큼 백성들이 살기 좋았다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부족하다는 자세를 가졌다. 보통은 자만에 빠지기 쉽지만 말이다. 사람은 살면서 늘 옳은 일만 할 수 없다. 설사 자신이 옳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옳지 않은 경우도 많다. ‘옳음’의 기준은 서로에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의 행동을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가장 좋은 행동은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다. 매일 일기를 쓰면 자신의 행동을 기록하며 나의 행동이 무엇이 잘못되었었는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결국 독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일기를 초등학교 때까지는 숙제로 내주며 중학교 이후에는 학생들이 자의로 쓰지도 않고 학교에서 숙제로 내주지도 않는 것이다. 숙제로 내주더라도 미뤄쓰거나 대충 쓰는 것이 태반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에는 사람과 사람간에 다툼이 많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일기를 쓰는 것이 완벽한 행동이라는 것은 아니다. ‘저 사람은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모두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각자의 생각과 관점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