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양명 44살,「주영(周瑩)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써준 글(贈周瑩歸省序)」
--- 왕양명 40대 초반의 정좌(靜坐), 성의(誠意), 입지(立志) 수양공부
2018년 11월 16일
* 왕양명이 44살(1515) 음력 6월에 절강성 남쪽지역 금화부 영강현(金華府 永康縣)에 찾아온 학생 주영(周瑩)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면서 써준 글이 있습니다. 사실상 왕양명은 학생 주영을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에 받아주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왕양명이 주영을 되돌려 보낸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바로 주영이 먼저 배웠던 응량에게 다시 찾아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왕양명이 응량을 그만큼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강성 남쪽지역에서 양명학 전파에 응량의 학술적 지위가 낮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양명은 처음부터 응량을 높이 평가하고 기대가 높았으나 응량이 고향에 돌아간 뒤에는 왕양명에게 서신을 자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은 황관에게 자주 서신을 보내서 응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왕양명은 39살 북경에 온 뒤에 정좌공부를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듬해(1511) 2월에 응량이 찾아와서 배운 것은 정좌공부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양명이 정좌공부를 41살(1512)에는 성의(誠意)공부, 이듬해(1513)에는 입지(立志)공부라고 이름을 바꾸어서 가르쳤습니다. 왕양명이 44살(1515) 음력 6월에 학생 주영을 돌려보내면서 가르친 입지(立志)공부는 사실상 응량이 왕양명 40살(1511)에 배웠던 것과 같은 수양공부입니다. 그래서 왕양명이 학생 주영에게 고향에 돌아가서 응량을 다시 찾아가서 배우라고 일렀던 것입니다.
응량에 관하여 살펴보면, 왕양명이 39살(1510)에 북경에서 담약수(湛若水, 1466-1560)와 황관을 만나 셋이 함께 공부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황관(黃綰, 1477-1551, 字宗賢、叔賢,號久庵、石龍,浙江省 黃岩縣)은 저권(儲巏, 1457-1513, 字靜夫, 號柴墟, 直隸省 泰州縣)의 소개를 받아 왕양명을 찾아왔고 왕양명은 황관을 담약수에게 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함께 공부하자고 다짐한 것입니다. 세 사람의 학술적 관계를 보면, 왕양명과 담약수의 관계 또한 담약수와 황관의 관계는 서로 평대하는 벗이고, 왕양명과 황관은 처음에는 벗이었으나 황종희(1610-1695)에 따르면 황관이 왕양명 51살(1522)부터 제자로서 왕양명을 모셨다고 합니다.
응량(應良, 1480-1549, 字元忠,別號南洲,浙江省 仙居縣)이 이듬해(1511) 2월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습니다. 황관이 같은 고향 출신의 응량을 데리고 왕양명을 찾아와서 마음의 본체를 깨달으라는 정명도의 식인(識仁)공부를 물었습니다. 왕양명은 거울의 더러운 때를 벗겨내듯이(刮磨明鏡) 정좌하여 마음을 가리는 때를 벗겨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응량이 왕양명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응량은 이듬해(1512) 2월에 아버지를 모시겠다는 핑계를 대고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응량은 담약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여행하고 수양공부에 관하여 물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서 12년 동안 왕양명의 정좌공부를 고향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전수하였습니다. 황관은 같은 해(1512) 겨울에 아프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황관과 응량 두 사람은 절강성 남쪽지역에서 양명학을 전파한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그런데 황종희(黃宗羲, 1610-1695)의 『명유학안(明儒學案)』에는 황관 한 사람만 써넣었고 응량에 관한 자료가 없었는지 또는 몰랐는지 써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절강성 남쪽지역의 양명학 전파를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응량에 관한 자료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이 써준 응량의 아버지 응창(應昌)의 묘지명(「封翰林編修前分宜縣典史應翁墓志銘」)이 현재 추수익 문집에 남아있는데, 응량의 묘지명은 소장지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최근에 몇몇 중국학자들이 응량에 관하여 관심을 갖기 시작한 뒤에 2015년에 응량의 묘지명(「應方伯良墓志」)을 『(光緒)仙居縣志』(1894年編)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응량의 문집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깊은 연구를 할 수 없습니다.
왕양명과 황관의 관계를 비롯하여 왕양명과 응량의 관계 또는 왕양명과 주영의 관계를 보아, 왕양명의 40대 초반에 여전히 정좌공부를 가르쳤고 또한 정좌공부를 성의(誠意)공부 또는 입지(立志)공부로 이름을 바꾸어 가르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수양공부가 절강성 남쪽지역에 전파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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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양명 44살,「주영(周瑩)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써준 글(贈周瑩歸省序)」
『王陽明全集』,卷七
절강성 영강현(永康縣) 출신의 주영(周瑩, 字德純)이 일찍이 응량(應良, 字元忠 또는 原忠)에게 배웠는데도 다시 왕양명 선생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구하였다.
왕양명 묻기를 “자네는 응량이 있는 곳에서 왔느냐?”
주영 대답하길 “그렇습니다.”
왕양명 묻기를 “응량 선생이 무엇을 자네에게 가르쳤느냐?”
주영 대답하길 “다른 말씀은 없으시고 날마다 성현이 되고 세속에 빠지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지금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가 일찍이 왕양명 선생에게 배운 것인데, 자네는 나를 믿지 않으니 직접 왕양명 선생에게 찾아가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입니다.”
왕양명 묻기를 “자네가 찾아와서 봤으면서도 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이 있느냐?”
주영 대답하길 “믿습니다.”
왕양명 묻기를 “믿으면서도 다시 나를 만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주영 대답하길 “아직 성현이 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왕양명 말하길 “자네는 벌써 방법을 배웠으니까 더 이상 나한테 배울 것이 없다.”
주영이 깜짝 놀라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하길 “선생님께서 응량 선생님의 벗(故는 故友를 말하는데, 왕양명의 자료에는 응량이 왕양명을 스승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영의 말을 보면 응량이 왕양명을 스승으로 모셨다기 보다는 벗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으로서 제가 평생 지킬 수 있는 가르침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왕양명 대답하길 “자네는 벌써 받았으니까 더 이상 나에게 나한테 배울 것이 없습니다.”
주영이 깜짝 놀라 일어나서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더니 말하길 “저는 어리석어서 지금 말씀해주신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를 놀리지 마시고 제가 평생 지킬 수 있는 가르침(卒賜之教)을 주시길 바랍니다.”
왕양명 묻기를 “자네가 절강성 태주부(台州府) 영강현에서 남경까지 왔는데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주영 대답하길 “천리를 넘습니다.”
왕양명 묻기를 “멀구나. 배도 탔느냐?”
주영 대답하길 “배도 타고 내려서 다시 걸어왔습니다.”
왕양명 묻기를 “힘들었겠구나. 지금 음력 6월인데 더웠겠구나?”
주영 대답하길 “오는 길에 더위가 아주 심하였습니다.”
왕양명 묻기를 “오는 길이 많이 어려웠구나. 오면서 먹을 쌀도 갖고 종복도 데리고 왔느냐?”
주영 대답하길 “오는 길에 종복이 병이 나서 그를 보내고 쌀도 팔고 혼자 걸어왔습니다.”
왕양명 대답하길 “오는 길이 아주 많이 어려웠구나.”
왕양명이 묻기를 “자네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멀고 힘들었는데, 정말로 어려웠다면 왜 그냥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찾아와야만 하였느냐? 누가 찾아가라고 시킨 사람이 있었느냐?”
주영 대답하길 “제가 선생님 문하에 오기까지 힘들고 어려웠으나 실제로는 즐거웠습니다. 어찌 멀고 힘들다고 되돌아가겠습니까? 또한 남이 시켜서 왔겠습니까?”
왕양명 대답하길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까 ‘자네는 벌써 방법을 배웠다.’고 말한 것이다. 자네의 뜻이 나의 문하에 오겠다고 결심하였으니까 끝내 나의 문하에 왔고 남들이 시켜서 온 것도 아니다. 자네가 성현이 되는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성현이 되지 못하겠느냐? 남에게 의지하여야겠느냐? 자네는 배도 타고 내려서 걸어오면서 종복도 보내고 가져온 쌀도 팔고 무더운 날씨에도 걸어왔다. 그런데 나한테 배우려는 방법이 더 있겠느냐?”
주영이 기뻐서 일어나 절을 올리며 말하길 “이 말씀이야말로 선생님께서 저에게 가르쳐주신 방법입니다. 제가 이 방법으로 여기까지 오는 것을 실천하였으면서도 선생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가 선생님 말씀을 듣고 이해하였기에 기쁩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왕양명이 대답하길 “자네는 돌을 뜨겁게 달궈서 석회를 만드는 것을 보지 못하였느냐? 돌이 충분히 달궈진 뒤에야 석회가 되고 석회에 물을 뿌리면 굳는다. 자네는 고향에 돌아가서 응양에게 가서 배우면 달궈질 것이다. 나는 앞으로 물을 한 통(一擔 또는 一石) 준비하였다가 자네가 다시 찾아오면 뿌려주겠다.”
왕양명,「贈周瑩歸省序」,『王陽明全集』,卷七
永康周瑩德純嘗學於應子元忠,既乃復見陽明子而請益。
陽明子曰:“子從應子之所來乎?”
曰:“然。”
“應子則何以教子?”
曰:“無他言也,惟日誨之以希聖希賢之學,毋溺於流俗。且曰‘斯吾所嘗就正於陽明子者也。子而不吾信,則盍親往焉?’瑩是以不遠千里而來謁。”
曰:“子之來也,猶有所未信乎?”
曰:“信之。”
曰:“信之而又來,何也?”
曰:“未得其方也。”
陽明子曰:“子既得其方矣。無所事於吾。”
周生悚然有間,曰:“先生以應子之故,望卒賜之教。”
陽明子曰:“子既得之矣。無所事於吾。”
周生悚然而起,茫然有間,曰:“瑩愚,不得其方。先生毋乃以瑩爲戲,幸卒賜之教!”
陽明子曰:“子之自永康而來也,程幾何?”
曰:“千里而遙。”
曰:“遠矣。從舟乎?”
曰:“從舟,而又登陸也。”
曰:“勞矣。當茲六月,亦暑乎?”
曰:“途之暑特甚也。”
曰:“難矣。具資糧,從童仆乎?”
曰:“中途而仆病,乃舍貸而行。”
曰:“茲益難矣。”
曰:“子之來既遠且勞,其難若此也,何不遂返而必來乎?將亦無有強子者乎?”
曰:“瑩至於夫子之門,勞苦艱難,誠樂之。寧以是而遂返,又俟乎人之強之也乎?”
曰:“斯吾之所謂子之既得其方也。子之志,欲至於吾門也,則遂至於吾門,無假於人。子而志於聖賢之學,有不至於聖賢者乎?而假於人乎?子之舍舟從陸,捐仆貸糧,冒毒暑而來也,則又安所從受之方也?”
生躍然起拜曰:“茲乃命之方也已!抑瑩由於其方,而迷於其說,必俟夫子之言而後躍如也,則何居?”
陽明子曰:“子未睹乎爇石以求灰者乎?火力具足矣,乃得水而遂化。子歸,就應子而足其火力焉,吾將儲擔石之水,以俟子之再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