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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약근만은 청춘이다
이 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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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을 쌌다.
누가?
바로 내가!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똥을 싼 것이다. 결론은 그것이다.
*
청춘이라 불리는 시기가 있다.
생로병사에 있어서 그 참신한 시기는 누구나 심신이 건강하고 두려울 것 없이 화려하게 거쳐 간다. 정확히 몇 살부터 몇 살까지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가슴이 저릿하게 미어지고 아득히 그리운 시기다.
지천명이 넘어서면 지나간 청춘, 그 시기를 한번 결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아니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 또래의 다른 친구들은 아직 자신이 청춘이라 생각하는데 혹, 똥이나 흘리고 다니는 나만 그런지도 모른다.
오늘따라 내가 살아온 청춘에 점수를 매기고 싶다. 이런 심리는 죽을 때가 되어 삶을 결산할 때 하는 짓이지 싶은데, 초저녁 불상사로 인하여 잠은 오지 않고 그 자괴감과 괄약근이 힘이 있던 그 시절이 하염없이 그립고, 살아온 날의 점수를 매기고 싶은 감정이 심도를 더해가고 있다. 내가 후하게 주는 점수와 타인이 객관적으로 매기는 점수에 분명 차이가 있을 게다. 그러나 누구에게 내 청춘을 채점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관적으로 파악하고 가늠하는 수밖에는.
밤은 깊어 가는데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똥싼바지를 깔끔히 처리하고 샤워를 하고 들어와 앉았으나 몸과 마음이 영 개운치가 않고 어딘가 모르게 찜찜해서 다시 욕실로 들어가 구석구석 씻고 들어와 스탠드를 켜고 담배를 물었다. 그 불상사에 집착하지 않으려 머리맡 탁자에 쌓인 책을 집히는 대로 뒤적였지만 글씨나 문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초저녁에 저지른 똥 사태에 대해서 생각이 기울어지고 있다. 이러다가 더 추한 꼴을 보이지 말고 지금 죽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가 살아온 청춘에 점수를 매기고 싶었던 게다. 아내는 일찌감치 딸애 방에서 자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변해버린 내 신체구조와 배변습관에 대해 아내에게 말을 해버리고 자문을 구하고 싶지만 자고 있으니 고백하고 상의하기가 곤란하고 아무리 아내지만 가릴 게 있는 법이다.
똥이나 싸는 남편!
아내의 목소리가 귀전에 맴도는 것 같다. 생각만 해도 치욕적이다.
겨우 오십 줄에 들어섰는데........ 벌써 이러면 곤란한데....... 고심하다가 불쑥 내가 거쳐 온 청춘에 대해서 점수를 매기고 싶은,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지고 싶은 충동이 불쑥 일었다. 일테면, 살아온 시간의 충실도를 평가하고 싶은 것이고 앞으로 남은 삶에 대한 건강걱정이 있기에 이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담배를 물고서 방바닥에 손가락으로 하릴없이 청춘 결산서라고 끼적여 보았지만 그런 것을 계산하는 계산기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극히 주관적이지만 속셈으로 계산하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면서 남은 생의 삶의 질에 대해서도 짚어보아야 한다. 남은 생은 양이 아니라 질이 관건이다. 똥을 질질 흘리며 생을 연명하는, 그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삶의 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과감히 생의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과감하게 지껄이면 오십이 넘어섰으니 지금 죽어도 호상이다.
서랍에는 다량의 수면제와 혈압강하제가 들어있다.
까짓 것!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다. 밤새 안녕하기에는.
정말이지 지금 심정으로는 밤새 안녕하고 싶다. 아내나, 아직은 어디에서 자라고 있는지 모르는 미래의 며느리에게 오늘처럼 추한 꼴은 보이기 싫다. 그렇다. 절대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어디서나 대충 듣고 헛되이 흘려버리던 상투적인 말, 건강이 제일이다! 라는 말이 실감하며 앉은 채로 항문의 괄약근에 힘을 주었다가 풀었다 하며 항문 운동을 몇 번 했다. 운동으로 다스려보아야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거듭 다짐했다. 가능할까? 자신이 없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욕이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아라.’ 는 말이 아닌가. 이러다가 정말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사는 게 아닌가? 옹골찬 한숨이 또 나왔다.
이 나이에 내 항문이 이렇게 된 문제는 무엇인가?
청춘을 생각하고 점수를 매기던 나는 불쑥 꽉 죄고 있어야 할 괄약근이 밀고 나오는 배설물을 감당하지 못하고 썩은 새끼줄이 터지듯이 툭 풀어져 맥을 못 추는 원인을 짚어보기 시작했다.
직업병이다. 항문과 괄약근을 이렇게 만든 것은 분명 혹독하게 치른 젊은 날의 열악한 환경속의 일 때문이다. 그렇게 일을 했음으로 인해 살아오면서 치루라는 항문질환으로 수술을 한 번해서 괄약근을 부분적으로 잘라냈고 치질 수술을 두 번 하면서 항문을 손상시켰다. 치질 수술은 별 것 아닌데 치루라는 고약한 병의 시술은 괄약근을 크게 잘라냈다.
나는 중기 기사 출신이다. 혹독하게 가난했던 시절 대학 일 학년을 다니다가 휴학하고 간, 군에서 우연히 받은 주특기로 지금까지 중기로 연명하고 있다. 주특기가 육군 보직번호 1647번 공병대 포클레인 조종이었다. 나는 제대하고 복학하지 않고 그 주특기, 1647을 바로 직업으로 택했다. 그 때 중기 기사는 대학을 나와서 받는 초임의 두 배에 가까웠다. 그 점이 나를 현혹시켰다. 따라지 지방대학을 나와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고 집안 형편을 생각하여 바로 포클레인 레버를 잡은 것이다. 그 당시, 그러니까 80년대에는 포클레인에 에어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지금이야 민노총에서, 건설기계노조에서 발광하여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공간에서 하루 여덟 시간 근무를 관철시켰지만 내가 중기를 직접 운전 당시에는 언감생심, 아침 일곱 시에 일을 시작하여 해가 빠져야 일이 끝이 난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 일하는 시간이 주는 반면 여름에는 그야말로 용광로 같은 유리 상자에 속에서 하염없이 길고 긴 하루를 갇혀있어야 한다.
언젠가 올림픽을 앞두고 썸머타임이라는 걸 시행한 적이 있다. 세계인이 오면 편리하도록 한다고 시간을 한 시간 앞으로 당겨 베이징 시간과 같이 맞춘 것이다. 그러니 일곱 시라고 해도 아침 여섯 시부터 일을 하는 셈이 되어버렸다. 그 때를 생각하면 혀가 내둘린다. 그 땐 정말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계산하니 그 해 여름, 점심시간을 빼고 하루에 열여섯 시간을 뜨거운 중장비운전석에서 엉덩이를 깔아뭉개야 했다. 그 때 내 엉덩이는 견디지 못하고 신체부위로서 대접받지 못함에 화를 내고 급기야 발병하기 시작했다. 날씨도 더운데 중기의 유압유가 달아서 올라오는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뽀송뽀송해야 마땅할 엉덩이가 짓물러 까지고 팬티가 땀에 절어 쩍쩍 달라붙곤 하던 것이 항문질환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그 때는 일을 마치면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다. 현장을 따라 객지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기사들이 승용차를 끌고 다니던 시대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 정도 거리면 출퇴근을 하며 매일 집에서 샤워를 하며 혹사시킨 엉덩이를 달래겠지만 당시 시대의 환경은 열악했다. 그렇다고 샤워장이 있는 여관에서 지내는 게 아니었다. 시골마을 이장이나 새마을 지도자 댁에서 기숙하며 지내다 보니 몸에 쉰내가 나지만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면 또 수고했다고, 내일은 더 잘해달라고 접대로 받는 술이 항문을 더 망가트리고 있었던 게다. 지금처럼 위생적인 비데 같은 것은 있을 리가 없고 엉덩이를 씻기는 고사하고 세수만하고 일을 마치면 밤마다 술을 마셨다.
고진감래! 그렇게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똥이나 흘리며 다니는 인간으로 퇴락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엉덩이가 짓물러 터져서 가끔 팬티에 피가 묻어야 팬티를 갈아입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근무 환경이 열악했다. 그 때 어떻게 하던 관리를 잘했어야 했는데.......
오십 줄에 들어서서 느낀 것은 후회는 언제해도 늦은 거다.
그 때 그렇게 항문이 숨을 쉴 틈을 주지 않고 엉덩이를 혹사시키고 나니 언제부터인가 항문 주위가 가렵고 종기 같은 것이 돋기 시작했다. 그래도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그냥 땀 때문에 나는 종기 정도로 생각했다. 그것이 항문 옆 괄약근을 뚫고 다른 배변의 통로를 만드는 치루라는 병의 시초라는 걸 꿈에도 몰랐다. 잔뜩 부풀었을 때 휴지로 짜서 피를 빼고, 고름을 짜고 나면 며칠은 괜찮았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있으면 그 자리에 또 종기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또 터트리고 휴지로 처리하고 짬이 나면 씻곤 했다. 그게 치루라는 병명의 고약한 두더지가 항문 옆 괄약근에 굴을 뚫고 있는 것이라는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했다.
그 해 여름, 그렇게 엉덩이를 혹사시키고 가을이 되니 그 종기를 매일 짜야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때서야 단순한 종기가 아니고 치질이 이런 것인가? 하며 병원을 찾았다. 진단결과 동네병원 원장은 치루라고 했다.
치루?
처음 듣는 병명이다. 자세히 들어보니 그냥 방치할 병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사흘 동안 일을 쉬기로 하고 수술을 결정했다. 치루 수술은 두더지가 구멍을 내기 시작하는 그 주위의 괄약근을 도려내고 꿰매는 게 아니라 저절로 살이 살아서 구멍이 메워지도록 꾸준히 소독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술하고 사흘 만에 일을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건강보다 일이 더 중했고 비교적 묵직한 수술인데 간단한 시술로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수술 후 관리를 방만하게 했다.
다시 던져둔 책을 뒤적였다.
이곳저곳 뒤적였지만 글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 사유는 자꾸 괄약근으로 기울어지며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똥을 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잠을 잘 일이 아니다.
오늘은 저녁을 먹고 나니 별일이 없었다. 심심한데 산책이나 하고 와야겠다고 맘을 먹고 집을 나섰다. 나서면서 돌아오는 길에 똥을 싸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트레이닝으로 갈아입으니 산책을 나가는 줄 알고 영악한 삐삐 녀석이 따라 나서려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가끔 데리고 저녁 산책으로 바람을 쏘여주는 버릇이 들어서 내가 트레이닝으로 갈아입으면 눈치 빠른 애완견 삐삐가 더 난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애완견을 데리고 동네 공원에 산책을 나섰다. 삐삐는 말티즈 종의 암컷인데 귀와 꼬리에 초록색으로 염색을 해서 데리고 나가면 공원의 아이들 시선을 사로잡는다. 녀석은 그 재미에 잔뜩 길이 들어있다. 동네 중앙에 있는 공원은 집에서 걸어서 십오 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는데 저녁이면 산책 나온 사람들이 엄청 몰리는 곳이다. 물론 그 공원에도 청기와를 얹어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깔끔한 화장실이 있다. 삐삐를 데리고 공원을 두 바퀴 돌고 운동 삼아 철봉을 스무 개 할 동안 나의 대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지극히 평화로운 상태였다. 그러니 화장실은 눈에 들어올 리 만무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에 생겼다.
농협마트 앞을 지나면 거의 반 쯤 온 셈이다. 농협마트 앞을 지나오는데 삐삐 녀석이 낑낑거렸다. 뭔가 수상해서 짧게 쥐고 있던 줄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더니 인도 가로수 아래에 똥을 한 토막 누어버린 것이었다. 이 녀석이 누어버린 똥을 그대로 방치하면 문화 시민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옆에 지나가는 아주머니가 그 광경을 보지 않았다면 솔직히 그대로 방치하고 집으로 와버렸을지도 모른다. 지나가던 아주머니 가라사대 ‘똥도 예쁘게 누네!’ 이 한 마디가 나를 그냥 갈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휴지가 없었다. 운동복 주머니에는 담배와 휴대폰뿐이었다. 마트 옆 공터를 두리번거리며 굴러다니던 빵 봉지인 비닐 하나를 주워서 삐삐의 배설물을 싸서 마트에서 내어놓은 커다란 쓰레기봉투에 처리를 했다. 삐삐의 배설물은 단단하며 말랑말랑하고 따스했다.
배설물을 처리하며 삐삐에게 한 마디 했다.
-똥을 아무데서나 싸면 어떻게 해!
그 말을 뱉는 순간 갑자기 이런 데서 똥이 마려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과 동시에 배변감이 괄약근에 신호를 보낸 것이다. 갑자기 화장실이 미치도록 그립기 시작했다.
몹시 다급하게 그리운 화장실!
화장실이 절실했다. 신호를 건너서 삼 분정도 가다가 골목으로 접어들면 바로 집인데 집에는 그리운 화장실이 있지만 집까지 괄약근이 버텨줄지 걱정이었다. 하필이면 횡단보도 신호에 걸렸다. 농협마트가 문을 열고 있었지만 삐삐 때문에 마트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차량이 많아 무단 횡단할 처지가 못 되었다. 속수무책, 방법이 없다. 다리를 꼬고 괄약근을 힘껏 여미며 신호를 기다려 파란불이 터지자 빠른 걸음으로 삐삐를 끌고 걸었다. 그럴 때는 뛸 수가 없는 법이다. 뛰면 괄약근의 힘이 풀어지기 때문이다. 괄약근을 여미며 총총 걸음걸이로 급하게 삐삐를 이끌고 집 앞까지 왔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대문을 여는 순간 결국 괄약근이 견디지 못하고 풀어져버린 것이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지 그 다음은 말하기가 민망하고 말하기 싫다. 엉덩이의 곡선을 따라 허벅지 뒤에까지 내려오는 이물감!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
현관으로 들어오니 아내는 제 방에 있었고 아들 녀석은 제방에서 컴퓨터게임에 빠져 있었다. 기다리는 이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도둑고양이처럼 욕실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으나 더 볼일을 보지 못했다. 결국 다 싸버린 것이다. 일어서 변기의 물을 내리고 윗도리만 벗고 실례를 한 트레이닝을 입은 채로 고무줄을 당겨 샤워기를 엉덩이부위에 들이댔다. 바짓가랑이를 빠져나와 욕실의 수채로 들어가는 이물질을 보며 자괴감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낭패감을 토해내고 그 낭패감마저도 샤워기에서 세차고 뿜어내는 물로 수채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옷을 벗고 ‘똥싼바지’ 를 깔끔하게 씻어 세탁기에 넣고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들어와 앉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냄새가 몸에 밴 것 같아 다시 욕실로 들어가 사워를 한 번 더 했지만 찜찜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샤워를 두 번이나 했지만 기분은 영 개운치를 못하다. 문제는 배변에 예고가 없다는 것이다. 대장이 신호를 보내고 한 삼십 분 정도는 여유를 주어야 신체 구조의 도리가 아닌가. 하지만 내 대장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릴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변의를 느끼면 바로 화장실로 가야한다. 남들처럼 느긋하게 기다릴 수가 없다는 점이다. 변의를 느끼면 급하다. 그렇다고 규칙적인 것도 아니다. 설사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하루에 화장실에 일곱 번이나 여덟 번 가는 날도 있다. 생각하니 그것이 문제다. 어디를 가던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찾아두고 볼일이나 여행을 하게 된다. 버스보다는 화장실이 있는 기차나 비행기가 맘이 편하다. 그게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화장실이 없는 곳이면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남들은 화장실에 몇 번 가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누구에게 물어볼까? 누구에겐가 물어봐야 속이 풀릴 것 같다. 휴대폰을 집어 단축으로 된 번호를 검토했다. 쭉 훑어 내려가다가 천수를 찍었다.
그렇다. 녀석이 가장 건강하고 만만했다.
천수라면 아직 자지 않고 책을 읽고 있거나 어쩌면 도서관에서 당직을 서고 있을 것이다. 나는 천수의 단축번호를 눌렀다.
열한 시가 넘었는데 벨이 두 번 울리자 바로 천수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날아왔다.
-형?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지금 뭐하냐?
-도서관에 있다가 막 퇴근하는 중이에요.
-관장님이 퇴근을 그렇게 하면 직원들은 어떻게 하냐?
-교대 근무니까 할 수 없어요. 근데 이 시간에 웬 일시우? 소주 마시자고 전화한 건 아닐 테고?
-너 하루에 화장실 몇 번가냐?
-참 뜬금없네. 진짜 형답다. 그걸 세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소변 말고 큰일로 몇 번 가냐구?
-하루에 한번 가지 몇 번이나 가요?
-알았다.
그리고는 전화를 끊었다.
-하루에 한 번 화장실 가는구나. 그게 정상인데.......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천수였다.
-왜?
-형! 무슨 일 있어요? 뜬금없이 전화해서 똥을 몇 번 누느냐고 물어보고 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나는 화장실을 하루에 일고여덟 번 간단 말이다.
-형? 과민성대장증상 아니에요? 병원에 한 번 가보지.
-과민성대장증상?
-스트레스 많이 받으면 그런 증상이 온대요.
-그런가? 암튼 알았다. 나 급하게 화장실 가야하니까 끊는다.
천수와의 통화는 그렇게 끝냈다. 과민성대장증상이라? 들어본 병명이다. 나는 화장실 대신 거실로 나가 딸애가 쓰던 컴퓨터를 켜고 과민성대장증상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참 여러 가지 글과 댓글이 달려있었다. 찬찬히 읽어보았다.
과민성 대장증상이란 ......... 그런 병이다.
병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나에게 오는 증상과 유사하다. 그렇다면 오늘 저녁에 벌어진 사태도 과민성대장증상의 일종이다. 이건 마음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얘기인데 그게 잘 안 된다. 꼭 어디 출타하려면 화장실은 먼저 가야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외출하거나 낯선 곳에 가면 화장실이 어디 있나 먼저 찾는 것도 기록되어 있다. 스폰서 링크로 여러 곳의 한의원들이 올라와 있는데 모두가 서울에 있는 것들이다. 올라온 글들을 읽다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다. 그런 증상을 앓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똥을 싼 실례를 낱낱이 구체적으로 올린 글들도 있었다. 그런 글을 읽어보니 나와 흡사한 경우다. 그런데 나는 괄약근이 약해 그 정도가 심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컴퓨터를 끄고 내 방으로 와서 과민성대장증상에 대해서 과민하게 생각했다.
이 증상에 대해 어떻게 하지 않고는 살지 못할 것 같다. 너무 과민하게 생각하느라 새벽 세 시가 넘어서 잠깐 자고 다섯 시가 좀 못 되어서 일어났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그 꿈도 온통 똥칠이다. 일테면, 과민성 수면이었다. 일어나는 기분은 허탈했다. 일어나자 바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번 더 했다. 개운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잠이 모자라 눈이 따갑고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수면부족이었다. 그러나 더 자려고 다시 누웠지만 온통 똥 생각뿐이고 잠은 올 것 같지 않았다. 이 자체가 과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씻고 거실로 아내 방으로 돌아다니며 새벽의 집안을 부산스럽게 만들던 내가 내 방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자 뭔가 수상했는지 아내가 내 방의 문을 열어보며 슬며시 잠이 덜 깬 푸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어디 아파요?
나는 아내의 푸석한 얼굴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아내는 평소와 다른 내 태도에 무슨 낌새를 챘는지 의아해 하며 윗목에 들어와 앉았다.
-무슨 걱정이 있어요?
조금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할지 논리적으로 정리가 되지 않았다. 하긴 논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똥을 쌌는데 논리가 어디 있겠는가?
-무슨 일인데?
내가 약점을 보이면 아내는 무조건 반말이다. 그게 아내의 평생 고치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이다. 조급해하는 아내에게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죽을 때가 된 거 같아.
-밑도 끝도 없이 무슨 말이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어제 저녁 삐삐를 데리고 나간 일부터 대문을 열며 벌어진 사태, 욕실에서의 일을 구체적으로 천천히 풀어놓았다.
-그러니까 의사 말을 들었어야지. 좌욕하고 치료를 계속하라는데 한 번 가고는 안가더니....... 그 때 알아봤지.
서너 달 전에 치질 수술을 한 번 더 했다. 간단한 수술이었다. 지난여름에 몽골에 나갔을 적에 고비사막을 관통하는 도로현장의 일을 대충 끝내고 고비사막을 짚으로 돌아다니며 아내에게 초원구경을 시켜주었다. 나는 고비사막을 업무상 스무 번이 넘게 갔지만 아내와 동행하기는 처음이었다. 호기심이 많은 아내를 태우고 유목민들의 게르에 가서 아이락이라 불리는 말의 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 우리나라의 막걸리와 비슷한데 맛이 조금 시큼한 마유주와 현지 언어로 티메니 수우 라고 불리는 낙타 젖을 얻어먹었다. 그것도 아내에게 호기를 부린다고 주는 대로 한 사발을 원 샷으로 마시고는 돌아다니다가 설사를 시작했다. 평생 처음으로 마셔보는 낙타 젖을 생으로 큰 사발로 한 사발을 마셨으니 민감한 대장이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차에는 휴지가 없었다. 오 분을 달리다가 차를 세우고 설사를 하고 보드라운 초원의 풀로 뒤처리를 했다. 열 번이 넘게 오 분 간격으로 설사를 하며 그 보드라운 풀로 뒤처리를 했는데 나중에 들은 매니저의 말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그 보드라운 풀이 양이나 말, 낙타조차도 먹지 않는 독초였던 것이다. 결과는 탈장이 아니지만 항문이 주먹만 하게 부어 있었다. 그 부기는 쉬 가라앉질 않고 사흘이 넘게 갔다. 주먹만 한 부기가 항문에 붙어 있으니 바르게 앉을 수도, 잠을 제대로 누워 잘 수가 없었다.
고비사막 중간에 매니저의 배려로 마련된 우리 내외의 게르에서 즐거워야할 밤은 티메니 수우 한사발로 인하여 엉망이 되었다. 몽골 고원 해발 천칠백 미터가 넘는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북두칠성 바로 끝자락을 잡고 평생 기억에 남을 애정행각을 꿈꾸었으나 웬걸, 티메니 수우 한 사발로 인하여 즐거워야할 아내와의 고비의 밤은 더듬으면 고통스런 추억으로 기억에 각인되어 있다.
부기가 빠지니 항문에 문제가 생겼다. 그 이전에 조금 있었으나 전혀 문제를 일으키지 않던 치질 기운이 그것을 기화로 변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은근히 나쁠 만큼 혈변으로 변했다. 아내는 그 치욕적인 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귀국 후에 아내의 차에 실려가 바로 치질 수술을 받았다. 수술을 받고 관리를 철저히 하고 좌욕을 자주 하라는 의사의 말은 귓전으로 흘리고 사흘이 안 되어 출혈이 멎자 접대를 빙자한 음주가무로 뽀송뽀송해야할 항문을 고름이 나오도록 홀대했었다. 아내는 그걸 물고 늘어졌다.
-옛날이야기는 그만하고 이제부터 어쩌지?
푸석한 얼굴로 석연찮은 표정을 짓는 아내에게 물었다.
-어쩌긴 뭘 어째? 기저귀차고 다녀야지. 볼만 하겠네.
-남의 일이라고 그 따위로 말하는 거야?!
좀 큰소리로 아내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농담을 할 사항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약부터 오른 것이다.
-참말로....... 똥 싼 놈이 성낸다더니....... 딱 맞는 말이네!
아내의 표현대로라면 나는 똥 싼 놈이다. 그런가? 짚어보고 화를 낼 여유도 없이 방문을 소리가 나도록 닫고 나가 버렸다. 꼴은 우습게 되었지만 마당발인 아내는 미덥다. 온 동네에 수소문해서 민간처방으로 좋다는 약을 구할 것이 틀림없다. 병은 한 가지라도 약은 백 가지라고 하지 않았던가. 근데 저 마당발 여편네가 똥을 싼 사람이 바로 나라고 직설적으로 떠벌리고 다니면 어쩌지? 한참 궁리해보니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제 남편의 일이라고하면 제 얼굴에도 똥칠하는 거니까 아내의 오지랖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일단 아내에게 털어놓으니 속은 좀 후련하다.
아내가 너무 많은 약을 구해오면 그걸 다 어떻게 먹지? 그것도 고민이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거실로 나간 아내는 텔레비전을 켜놓고 주방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침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침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지만 그게 눈에 들어올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그냥 방바닥에 주저앉아 애꿎은 담배만 피우며 앞으로 이런 일이 잦으면 어떻게 하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새벽에 일치감치 면도를 하고 씻는 김에 샤워까지 했지만 몸 어디선가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는 고약한 기분이 참으로 고약하다.
-그 새벽담배 그만 좀 피울 수 없어요? 문을 닫고 피우든가....... 저러니 똥이나 싸지!
아내의 싸가지 없는 힐책이 거실을 통해 내 달팽이관을 훑고 지나갔다. 담배하고 똥하고 무슨 상관이람....... 말끝을 흘리며 담배를 꺼지 않고 창을 열고 방문을 닫았다. 괜히 얘기 했남? 똥을 싼 놈은 기가 팍 죽어 있었다.
강아지가 길에서 똥을 누는 걸 보고 별안간 변의를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마음의 문제다. 나는 내 배변 습관을 곰곰이 짚어 보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화장실에 간다. 묽은 변을 조금 본다. 그리고 씻고는 인터넷의 사이버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듣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또 변의를 느껴 화장실에 가서 설사를 조금 한다. 그리고는 아침을 먹고 나면 또 화장실에 간다. 그리고 현장을 나갈 때나 손님을 만나러 나갈 때는 꼭 화장실을 간다. 그게 하루에 서너 번이다. 내 배변 습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데........ 그래서 과민성이라고 하는가? 인터넷에 대장은 뇌의 지배를 받는 다고 했다.
대변을 위해서 하루에 한 번 가는 정상이라고 인터넷에 나와 있던데....... 그렇다면 위장이나 대장이 아니라 뇌에 문제가 있다는 말인데.........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 씻었지만 방에 갇혀 똥의 지배를 과민하게 받고 있었다. 너무 과민해서 오늘 아침에는 화장실을 가지 않았고 날마다 듣는 인터넷의 사이버 법당에 들어가 예불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다. 똥을 싼 기분이 짓눌러 마음을 정화한다는 건 언감생심, 예불을 들어도 마음이 정화되기는커녕 더 약이 오를 것 같았다.
그 때 주장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침 드세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냥 방에서 눙치고 있었다. 아침? 아침이 뭐더라? 별로 생각이 없다.
대답이 없자 아내는 방문을 열고서 담배연기를 휘휘 내저으며 아침을 먹으라고 독촉했다.
-먹어봤자 그게 또 똥이 되고, 또 똥이나 쌀 텐데, 그걸 먹어서 뭐해?
-똥을 싸는 것이나 누는 것이나 마찬가지지 뭐, 안 먹는다고 똥을 안 싸남?
애꿎게 아내에게 단식으로 투쟁했지만 아내는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싸는 것이나 누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니? 나 지금 심각해. 농담할 기분이 아니야.
-아침을 자셔 봐요. 뭔가 방법이 있겠지. 그 나이에 기저귀차고 다니겠어요?
아내는 똥 싼 아이를 달래듯이 나를 달래고 있었다.
-위와 장에 이상이 없는데 만성 설사를 한다는 게 이상하네?
아내는 내가 밥을 먹는 동안 혼잣소리를 했다. 두어 달 전에 위와 대장을 내시경을 했다. 건강보험공단에서 나온 정기검진통지서를 들고 가깝고 만만한 병원에 가서 위와 대장 내시경을 했는데 나는 깨끗했고 오히려 아내가 대장에 용종 두 개를 잘라냈다. 똥을 싼다면 아내가 싸는 것이 마땅해야할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만성 설사를 하는 과민성이야.
나는 계란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그렇게 받아쳤다.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 대장증후군이다. 거기다가 괄약근이 약하니까 그런 사태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밥을 먹고 있었지만 이게 바로 똥을 만들 뿐이라는 생각이 압도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아침을 먹고도 방에 들어와 담배를 물고 똥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으나 기똥찬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조물주가 천지창조를 하고 인간을 만들 적에 항문에 밸브를 설치해서 똥을 누고 싶을 때 밸브를 열고 그렇지 않을 적에는 닫고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그 밸브가 바로 괄약근이라는 것에 생각을 미치자 조물주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바로 밸브가 제 기능을 못하게 만들었다는 낭패감을 느꼈다. 낭패감 끝에 얼른 떠오른 생각이 밸브를 고치면 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다 밸브를 고쳐야 한다.
-밸브를 고쳐야 한다.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밸브를 고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했다. 수도 배관공을 불러서 될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 부탁을 하지? 그 자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가는 이가 있었다. 바로 탑리의 시인이다. 탑을 소재로, 그의 말에 의하면 탑리의 오층석탑이 웅얼거리는 소리만 받아 적어도 시가 된다는 해괴한 소릴 지껄이는 그는 약사다. 해외 오지 여행을 같이 다녀오고, 시와 소설을 논하며, 논한다기보다는 마구잡이 악평을 하며 나와는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다. 그의 전화번호는 내 휴대폰 단축으로 입력이 되어 있다.
나는 담배를 끄고 바로 단축번호를 눌렀다.
-어라! 이게 누구지비? 해장부터 웬일이지비?
탑리 시인, 아니 동산약국의 K약사는 누구인지 대뜸 알아차리고 그렇게 응대했다.
-약국 문을 언제 여는교?
-벌써 문을 열었지비? 어디가 불편하신감? 목소리가 안 좋은데?
탑리 시인은 목소리만 듣고도 감을 잡고 있었다. 탑리 시인은 약국에서 자는 날이 더 많다. 집이 있는 대구에서 출퇴근을 하지 않고 약국 이 층 다락방에서 책을 읽고 시를 쓰는 날이 많다. 그 곳이 가끔은 우리들의 술판이 벌어지는 자리가 되기도 하지만 엄연히 탑리 시인의 작업실이다. 아마 지난밤에도 그곳에서 시를 품고 다락방에서 묵은 모양이다.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아침은 자셨어요?
-먹었지비. 근데? 이른 아침에 무슨 일이지비?
내가 뜸을 들이자 낌새를 챈 탑리 시인의 독촉이 날아왔다.
-아무 얘기나 해도 괜찮지비.
그 말을 기화로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을 침울한 목소리로 수화기에 뱉어 넣었다. 항상 그와의 통화에서 유쾌하게 떠들어대던 내가 우울한 목소리를 뱉자 그때만큼은 탑리 시인도 약사의 입장으로 바뀌어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내용은 여차여차 해서 여차여차 했다. 어제 저녁을 일과 수술을 했던, 똥 냄새가 풍기는 이야기를 빼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 순간 얼마나 리얼하게 얘기 했는지 그 고약한 냄새가 수화기를 통해 탑리 시인에게 전달되었을 것 같았다.
-괄약근이 약해서 그런 일이 생긴다? 이상하네. 언제 시간되면 약국에 한번 와 봐! 아무래도 과민성대장 증후군이지 싶은데........
탑리 시인은 자신 없는 소리로 말꼬리를 사리고 있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에는 약이 있는교?
-기똥차게 잘 듣는 약이 있지.
-그래요? 지금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탑리 시인 말대로 언제 시간이 되도록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옷을 챙겨 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나 불안하다. 아침에 변에 대해 고민하느라 변을 못 본 것이다. 언제 또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가서 대장 속의 묽은 변을 조금 짜냈다.
탑리까지는 국도로 한 시간이 조금 못 걸린다.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과속페달을 줄기차게 밟았다. 약국으로는 이른 시간에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섰다. 탑리 시인은 빈 약국에 앉아서 시집을 뒤적이고 있었다. 아직 보조 약사가 나오지 않은 모양이다.
-어지간히 급했구만, 노인용 기저귀를 줄까?
-농담할 상황이 아닙니더.
-아까 전화로 제대로 못 들었어. 좀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나는 전화했을 때와 별반 다른 소리가 아닌 구린내가 잔뜩 묻은 말을 다시 해야만 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고개를 갸웃하던 탑리 시인은 슬며시 일어서더니 서랍에서 비닐로 된 일회용 장갑을 한 장 꺼내서 끼며 조제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약국에는 여러 번 와 보았지만 조제실은 처음이었다. 조제실에는 손을 씻는 작은 세면대가 있었다. 그곳에 팔을 기대고 엎드리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했다.
-바지와 팬티는 내리고 엎드려야지.
조제실이 진료실로 변하는 말이었다. 좀 그렇지만 시키는 대로 바지와 팬티를 내리고 항문을 한껏 뒤로 빼고 엎드렸다.
탑리 시인은 비닐장갑을 낀 손가락하나를 아프지 않게 항문으로 밀어 넣었다. 괄약근에 손가락을 끼워 넣은 기분은 고약했다.
-약사가 진료까지 하는 겁니까?
-때에 따라서는, 특별한 경우에만......... 헛소리 그만하고 똥을 멈추듯이 괄약근을 조아봐. 힘껏!
나는 괄약근을 조았다.
-힘껏!
힘껏 조았다.
-자! 풀고 다시 조아봐!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대여섯 번을 그렇게 하던 탑리 시인, 아니 약사가 들으라는 소리로 말했다.
-괄약근만은 청춘이네!
-괄약근 탓이 아니란 말입니까?
탑리 시인은 비닐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에 넣으며 말했다.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변을 묽게 자주 보는 거야. 변을 보면 변이 물 위에 뜨지?
-족집게네. 네! 맞아요.
나는 팬티와 바지를 추스르며 대답했다.
-쓸데없이 스트레스 그만 좀 받고. 이 약을 먹어 봐. 두 달 분이야. 영양분이 장에서 제대로 섭취를 못하고 변으로 다 빠져나가니까, 몸이 그 모양이지. 괄약근만은 청춘이야.
나는 계산대에 올려놓은 두 통의 약을 보며 구세주를 만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괄약근만은 청춘이다. 괄약근만은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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