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굴이 있는 율도(栗島)와 인근마을 대벽(大碧)과 소벽(小碧),
고순(古順), 서대(西大)
설천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나는 여고를 다닐 때까지 강진바다건너 창선면을 바라보면서 늘 궁금했다. ‘저곳에 사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살까?‘ 나고 자란 곳을 벗어나지 못 했던 어린 시절 바다 건너 창선도가 아주 먼 나라 같았다. 오늘은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설천면에서 보이는 율도와 소벽, 대벽, 고순, 서대이야기를 하려고 하니 옛 일들이 생각이 난다.
나이가 들어 결혼을 하고 남해에 정착하면서 승용차로 처음 둘러보았던 ‘창선면‘ 그 중에서도 설천면이 마주보이는 율도와 대벽, 소벽, 고순 서대 마을을 지나다닐 때는 감회가 새로웠다. 건너 마주보이는 곳이 설천인데 그곳에서 이곳 창선을 바라보면서 어린 날에는 아주 먼 딴 세상 같았는데 이렇게 쉬 올 수 있는 것을... 하는 마음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어떤 사물을 보고 어린 날의 인지와 어른 된 다음의 인지는 참으로 괴리감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른 되어 초등학교 교실에 가 보면
‘책상, 의자가 이렇게 작았나? 학교 운동장이 이렇게 작았나?’ 느끼는 것처럼 어린 날에는 강진바다 건너 아득히 먼 지역 같았던 창선면이 지금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드나들 수 있는 가까운 곳으로 다가 온 것이다.
창선면지에서 율도(栗島)마을을 읽어보거나 자료들을 찾아보다가 율도마을에 있는 성명사가 눈에 들어왔다. 율도마을은 밤 율(栗)에 섬 도(島)다.
율도마을에는 성명사가 있고 그 성명사에는 날마다 쌀이 나오는 성명굴이 있었다고 한다. 꼭 스님이 하루 먹을 수 있는 쌀이 날마다 나왔고 또 신도 분들이 기도를 하러 가면 그 신도 분들의 공양도 할 수 만큼의 딱 그 양만큼의 쌀이 나왔는데 어느 날 스님과 동자승이 날마다 하루치 양식만 나오는 것이 감질이 나기도 하고 한 번에 많은 양의 쌀을 얻고 싶어 그 쌀이 나오는 구멍을 나무작대기로 후볐더니 더 이상 쌀은 나오지 않고 물만 나왔다는 전설이 있는 성명굴이 있다.
원래 인간이란 무엇이든 만족하기 힘든 동물이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일이기 하지만 그냥 그날그날 나오는 쌀로 살았다면 날마다 식량걱정은 없었을 텐데 욕심이 과해서 다시는 쌀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으로 인해 큰일을 그르치기도 하는지라 비난 할 수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어떠했었던가?’ 나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사실 인간이 만족할 줄 안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런 율도마을이 있는 옆 대벽(大碧)마을은 한자가 크고 푸르다는 뜻이고 소벽(小壁)마을은 푸르고 작다는 뜻이다.
대벽해안가에는 푸른 바다에서 움직여야 할 큰 배 모양의 카페가 있다. 이건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생명이 있는 사물이든 생명이 없는 사물이든 자기가 있을 자리에 있어야 그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배는 바다에 있어야 물위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그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물론 건축은 창의와 새로운 시도와 그런 것들이 종합하여 예술이 되겠지만 말이다. 오히려 지역성을 살려서 마늘모양의 건축이었으면 어땠을까?
그리고 남해펜션들도 간혹 보면 버섯모양을 한 펜션들이 있는데 자연의 이치로 보면 버섯은 음지 식물이다. 햇볕에 나오면 말라 죽는 것이 버섯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시도 새로운 아이디어도 좋지만 그런 자연의 이치도 잘 접목하여 건축을 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또한 지역성을 생각해서 남해유자모양의 펜션이나 아님 햇볕에서 환 한 해바라기 모양의 펜션이라면 더 좋지 않을까?
살아보니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것이 가장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것도 다른 사람과는 영 다른 이미지로 성공하고 싶은 욕심에서 시도 된 건축설계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이 율도와 대벽, 소벽이 있는 해안은 마주보이는 설천면의 자연이 그림같이 아름다워 그런 배 모양의 카페에 관광객이 많이 찾을 것 같다.
고순은 상죽과 상신마을처럼 마을을 빛낸 사람들이 많다.
작은 마을에 인물이 많이 나서 그 지역 어르신들은 자랑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서대마을에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 사족을 달아 볼까 한다.
설천에 있는 ‘정든식당’ 안주인께서 친정이 서대마을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설천에서 미용실을 운영하던 시절 정든식당 사장님의 건물에 세 들어 살았는데 십년동안 전세금이든 달세이든 한 번도 집세를 인상한 적이 없었다. ‘나는 참 인덕이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데
특히 처음 세 들어 살았던 집 주인이 십년동안 단 한 번도 집세를 인상한 적도 없고 집주인으로 어떤 간섭이나 언짢은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세 들어 산다는 설움도 없이 그냥 내 집인 것처럼 편안하게 살았고 또 그 곳에서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었다. 간혹 서대마을을 지나갈 때면 ‘정든식당 여사장님 친정이라고 했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그분의 함박웃음이 기억나고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베풀며 살아야지 한다. 율도에 있는 성명굴에는 공부하던 사람들도 욕심에 그날그날의 복에 만족하지 못 하고 막대기로 구멍을 쑤셔 그 복이 달아나 버렸다는데 이익을 얻기 위해 영업을 하는 보통사람이 십년동안 처음 책정한 집세만으로 만족한 것을 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무엇이든 만족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주어지 것에 만족하는 삶을 산다면 언젠가 우리의 삶도 밤처럼 알차고 단단한 열매가 열리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