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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천사(道川祠)
(1) 소재지 : 산북면 대하리
(2) 연 혁 : 영조조에 창건되어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 우곡 황상중(愚谷 黃尙中), 만은헌 신경(晩隱軒 申熲)을 봉향하였다.
황시간(黃時幹) : 자(字)는 공직(公直)이요 호는 칠봉(七峰)이며 관은 장수(長水)니 방촌(厖村) 희(喜)의 6세손(世孫)이다. 삼가현감(三嘉縣監)을 지냈으며 류서애(柳西崖), 정한강 문인(鄭寒岡 文人)으로 정우복(鄭愚伏), 전사서(全沙西), 이창석(李蒼石)과 도의로 교유하였는데, 세상에서는 상산사로(商山四老)라 칭하였다. 임진왜란을 당하여 왜적이 公을 헤치려고 칼을 내려 치려는 때에 公의 부인 권씨(權氏)가 몸으로 대신 칼을 받으니 피가 흘러 몸을 적셔도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서므로 왜적도 감동하여 버리고 갔다. 인조 갑자(甲子 1624) 이괄(李适)의 난에 어가(御駕)가 남행(南幸)할 때에 충의로 의병을 모아 행재소(幸在所)로 향하였다. 병신년(1656) 봄에 마을사람들과 대상보(大上洑)를 축조하였다.(商山誌)
황상중(黃尙中) : 자(字)는 계통(季通)이요, 호는 우곡(愚谷)이니 칠봉 황시간(七峰 黃時幹)의 손이다. 백원 신석번 문인(百源 申碩蕃門人)으로 여흥 민노봉(驪興 閔老峰) 형제와 교유하였다. 성균관 진사(成均館 進士)로 안동 류직(安東 柳稷) 등이 소두(疏頭)가 되어 율우(栗牛) 양현(兩賢)의 척향소(斥享疏)를 올리니, 여기에 대하여 가정(柯亭) 신석향(申碩享), 만은헌 신경(晩隱軒 申熲), 채하징(蔡河徵), 박회중(朴晦中) 등과 더불어 변무소(辯誣疏)를 올려 광정(匡正)하였다.(商山誌)
신 경(申 熲) : 자(字)는 회보(晦甫)요, 호는 만은헌(晩隱軒)이며, 관은 평산(平山)이니 문희공 인재선생(文僖公 寅齋先生)의 후이며, 좌랑 석무(佐郞 碩茂)의 아들로 광해 무오(光海 戊午 1618)에 출생하였다. 백부 백원공(百源公)에게서 수학하니 문예가 숙성(夙成)하여 노봉 민정중(老峰 閔鼎重)의 천(薦)으로 송라도 찰방(松羅道 察訪),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 단성현감(丹城縣監)을 역임했다. 특히 사문(斯文)을 보호하기 위하여 류직(柳稷) 등이 율우양현(栗牛兩賢)의 척향소(斥享疏)를 올려 윤준(尹준), 허적(許積)의 당료들이 전횡할 때에 우곡 황공(愚谷 黃公)과 만란을 무릅쓰고 그 변무(辯誣)에 나서서 성취시켰다. 숙종 정축(丁丑 1697)에 졸하였다.(商山誌, 咸昌誌)
嶠南誌 卷之九 咸昌郡 人物 (逸薦)(李朝)
申熲 碩蕃姪號晩隱沈潛性理薦除禁都享尙州道川祠
서애(西涯) 류성룡(柳成龍)과 한강(寒岡)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현감을 지낸 칠봉(七峯) 황시간(黃時幹, 1588~1642)이 35세때 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그래서 세거는 500년이상,고택을 지은것이 400년이상되었다고 하는군요.탱자나무도 400년이상...도천사 (道川詞)자리에 있는 반송(盤松)도 400년이상 되었다고 합니다...
문경 장수황씨종택 탱자나무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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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정(淨友亭) 편액(扁額) 사진 글씨 .펌
정우정(淨友亭) 扁額은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 460-6 장수황씨종택 사랑채(경북 문화재자료 제236호) 에 걸려 있었으나
2009년 1월 15 일 도난당한 현판이다.
장수황씨 사정공파 종택은 장수 황씨 15대조인 황시간이 35세 때 이 집에서 거주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세운 시기를
18세기경으로 추정한다. 사랑채와 안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는 이 집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고,
안채의 구성에 몇가지 특성이 남아 있어 이 지방 민가 연구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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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俗白綠色曲
구봉령(具鳳齡) 1526년(중종 21)~1586년(선조 19)
栢潭集 續集 卷一 / 五言古詩 / 淨友亭次李叔獻 【珥】 韻
茅簷絶蕭灑,揷在蓮莖碧。
倚來骨已醒,頓覺身超俗。
香風掃纖塵,灝露吹衣白。
懷哉栗谷人,獨踏雲橋綠。
我來却後時,恨未同物色。
中宵夢巴山,耿耿勞心曲。
백담집 속집 제1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정우정에서 이숙헌 이 의 시에 차운하다〔淨友亭次李叔獻 珥 韻〕
띠 처마 매우 정갈한데 / 茅簷絶蕭灑
푸른 물에 연 줄기 꽂혀있네 / 揷在蓮莖碧
올라보니 정신이 번쩍 들어 / 倚來骨已醒
문득 속세 초탈함을 알겠네 / 頓覺身超俗
향긋한 바람 작은 티끌 쓸어가고 / 香風掃纖塵
맑은 이슬 흰 옷에 불어오네 / 灝露吹衣白
그리워라 율곡에 사는 사람 / 懷哉栗谷人
홀로 푸른 구름다리를 지나네 / 獨踏雲橋綠
내 훗날에야 오게 되었으니 / 我來却後時
경치 같지 않아 한스럽다네 / 恨未同物色
한밤중에 파산을 꿈꾸다가 / 中宵夢巴山
잊지 못해 마음이 수고롭네 / 耿耿勞心曲
[주-D001] 정우정(淨友亭) :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 있는 정자로, 칠봉(七峰) 황시간(黃時幹)이 고향에 돌아와 연꽃을 벗 삼아 정우(淨友)라 이름하였다.[주-D002] 이숙헌(李叔獻) : 이이(李珥, 1536~1584)로, 숙헌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주-D003] 파산을 꿈꾸다가 : 당(唐)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야우기북(夜雨寄北)〉 시에 “어찌하면 함께 서창의 촛불을 자르면서, 문득 파산의 밤비 내리던 때를 얘기해 볼꼬.〔何當共翦西窓燭, 却話巴山夜雨時.〕”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전하여 정의(情誼)가 두터운 친구를 그리는 뜻으로 쓰인다.
ⓒ 한국국학진흥원 | 김우동 (역) | 2015
이구(李榘) 1613년(광해군 5)~1654년(효종 5)
活齋先生文集卷之七 / 行狀 / 通訓大夫行刑曹正郞長水黃公行狀草記
黃時榦 1558 1642 黃廷榦 長水 公直 七峯, 道川
公姓黃氏諱廷榦。後改時榦。字公直號七峯。又號道川。系出長水。國朝名相翼成公諱喜之七世孫也。翼成之子曰保身。漢城少尹。少尹之子曰敬兄。司憲府監察。監察之子曰諱珽修義副尉副司正。於公爲高祖也。曾祖諱士雄通政大夫三陟大都護府使。祖諱伯倫通仕郞敬陵參奉。考諱贇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妣慶州金氏。監察大鍾之女。以嘉靖戊午十二月初八日庚戌。生公於尙州山陽之里第。自幼眉目明秀。容止端正。不類凡兒。丁卯始出就外傅。仍拜河師傅沆。講受小學。持身務益端謹。長少咸服焉。庚辰始摳衣于西厓先生之門。先生深愛之。一時同遊有如鄭愚伏李蒼石諸賢。資益實多。庚寅正月丁內艱。葬于聞慶之虎溪。守廬塋下。往來展省于嚴廷。還執饋奠。哀毁備至。三年之內。足不及中門。人不見其齒。顚伏草土。仍得濕痺之症。艱治獲痊。壬辰遭兵。奉親入山谷。被土賊猝至劫財。執公將害之。梃刃亂下。賴內子權氏翼蔽公以當之。血流滿地。旣絶而幸甦。賊亦棄去。公遂得免焉。癸巳轉入小白山中。遭外憂。冬返葬于山陽之故山。時方搶攘。饑病荐臻。生理絶無。而公東西句貸。百方措置。以供祭祀。情禮俱盡。賊退後始還鄕里。庚子西厓先生去國南歸。公源源往來河上。被提撕益切。嘗論安貧守道之義。有一服淸凉散之誨焉。乙巳中進士。己未新卜龍宮命枝山。移奉兩親合窆。庚申(1620,광해군12)於道川所居。池蒔蓮。縛一小亭。名以
凈友(淨友)。識愛蓮也。左右圖書。日吟哦其間。時與鄕邦諸老。往來遊息。人皆仰其風流。騷人韻客題詩稱道者累十百篇。辛酉秋。欲遊楓岳。行到原城疾作。只覽雉岳而返。甲子春聞适變。參糾義旅。將奔問之際。以首台完平薦除東氷庫別提。遂就職。乙丑七月。陞尙瑞院副直長。丙寅正月。陞廣興倉主簿。丁卯正月扈駕入江都。三月以分司官還都下。五月拜司憲府監察。六月移拜刑曹佐郞。十二月陞本曹正郞。治獄執讞。務從平恕。戊辰正月。除三嘉縣監。三月赴任。政尙慈惠。扶植學校。整飭士習。己巳罷歸家居。優遊數歲。自有樂地。於儒宮士林之事。尤悉心力。多所經紀。有時出入鄕社。逍遙山水。蒼顔白髮。望之若神仙焉。丙子避地于呂泉地。丁丑夏返居。而知舊殆盡。時事大謬。公常忽忽不樂。仰屋長嘯而已。秋患痺衰謝侵尋。無復昔時氣力。而奉先之誠。猶不少怠。雖隆冬必沐浴致齋。辛巳秋患疝氣。冬患痺泄。壬午春寢疾。以三月二十二日庚寅。終于後寢。前一夕遍與一家親屬訣。了了不亂。且曰死生已定。又何關念。且戒子孫曰勿以惡小而爲之。此語當爲爾等戒。別囑孫李榘曰喪事一從禮文。亟命製幅巾之類。以是年九月十五日壬午。葬于本州鳳棲山西幕谷里坐卯原。享年八十五。淑人安東權氏太師幸之後。義興縣令檥之孫。宣務郞審辨之女。淑德烈行。允合於君子。嘉靖甲寅生。先公三年下世。至是移祔于公之左。同穴也。生一男曰煋。三女。長適別提李嵂。次正郞李光洽。次縣監南斗老。側室有一子曰熠。煋娶正宋光啓女無子。以堂兄之子尙中爲後。別提有子曰英哲。正郞有子曰榘。女適縣監李馨植。曾孫幼且鮮。姑不悉焉。公資禀旣異。而又有師友之淵源。孝友篤至。操履貞方。文辭簡當。議論端重。氣度之溫雅。風神之淸朗。固皆足以爲士類之望。而可以有用於當世。位不稱德。施不滿志。豈非所謂天也耶。嗚呼。公平生言行之懿。其詳宜不止此。且非不肖如孫者所敢容易說盡。而只恐人事推遷。或至於泯沒而無傳。爲後昆無涯之慟。玆敢畧叙其世系年月始終梗槩如右。冀或因此稍求完備。將以板控於當世文德之君子。庶幾得其一言之惠。賁表幽道。以小伸追慕惻怛之私云爾。戊子七月日。外孫完山李榘謹叙。
1 정우정(淨友亭) 경북 문경시 산북면 대하리에 있는 정자로, 칠봉(七峰) 황시간(黃時幹)이 고향에 돌아와 연꽃을 벗 삼아 정우(淨友)라 이름하였다. 백담집(栢潭集)
2 활재(活齋) …… 했다 이구(李榘, 1613~1654)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었던 황시간(黃時幹)의 외손(外孫)이며, 목재의 부친인 홍호(洪鎬)와 교유하였다. 장현광의 성리설을 비판하였으며, 상주(尙州)의 근암서원(近岩書院)에 배향되었다. 인용문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목재집》 권4 〈답이대방구(答李大方榘)〉 참고. 목재집(木齋集)
문경장수황씨종택
경북 문경시 산북면 금천로 671
(우) 36908(지번) 산북면 대하리 4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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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時榦 1558 1642 黃廷榦 長水 公直 七峯, 道川
蔡河徵 1619 1687 仁川 羲瑞 翠巖
송근수(宋近洙) 1818년(순조 18)~1902년(고종 39)
立齋集 卷十八 / 行狀 / 翠巖蔡公 河徵 行狀
채하징(蔡河徵)이 …… 갔으니 채하징이 송시열이 귀양간 지 4년 되던 해인 1678년(숙종4) 상소하여 송시열을 신구(伸救)하다가 이동형(李東亨)과 함께 함경도 경흥부(慶興府)로 유배되었다.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했으나 기년설을 내세운 남인에게 패배하여 실각했다. 이듬해 앞서의 1차 예송 때 예를 그르쳤다 하여 송시열이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숙종실록》 4년 7월 2일 기사에, 경상도 생원 채하징 등이 상소한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에, 1차 예송인 기해년(1659)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일어난 예송에서 기복설(朞服說)을 주장하여 관철시킨 송시열의 예론을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문집으로 《취암유집(翠巖遺集)》이 있다. 강한집(江漢集)
송자대전 제4권 / 시(詩) ○ 칠언 율시(七言律詩) / 북쪽 변방에 귀양 간 두 사람을 생각하다.
몇 달째 장마로 흙탕물 가득하니 / 淫潦連月淥盈溝
백로와 원앙 좋아하는 시절이로다 / 蜀玉鴛鴦得意秋
세상의 잡소리 끊임없이 들려오고 / 世上喧啾來不盡
천애의 가는 세월 멈추기 어려워라 / 天涯歲月去難留
울 너머 새 초빈 아침마다 곡성이고 / 隔籬新殯朝朝哭
섬돌 옆에 생강 싹 날마다 돋아나네 / 傍砌生薑日日抽
멀리 북녘에 갇힌 채씨 이씨 생각하니 / 遙憶北荒囚蔡李
찬 바람 눈보라에 옷이라도 받았는지 / 獰飆吹雪授衣不
[주-D001] 귀양 간 두 사람 : 채하징(蔡河徵)과 이동형(李東亨)을 말한다. 우암이 귀양 간 지 4년 되던 무오년(戊午年) 7월에 상소하여 변무하다가 모두 육진(六鎭)으로 유배되었다. 《宋子大全隨箚 卷4》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성우 (역)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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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집 제11권 / 묘표(墓表) / 우곡 황공 묘표〔愚谷黃公墓表〕 *黃尙中
옛적에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두 분 선생을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요청했는데도 오랫동안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현종 계묘년(1663, 현종4)에 진사 황상중(黃尙中)이 상소를 올려 거듭 요청하였는데 말이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였으며 선정(先正 송시열)을 배척하고 모욕한 자를 임금의 총명을 가린다고 하였다. 공은 영남사람인데 당인(黨人)의 질시를 매우 받아 거의 거주지에서 편안히 살 수 없었는데도 공은 태연하게 여기며 마음에 두지 않았다. 숙종 을묘년(1675, 숙종1)에 윤휴와 허목이 예론(禮論)을 빙자하여 사화(士禍)를 조성해서 우암(尤庵) 송문정공(宋文正公)을 장기(長鬐)로 유배 보냈다. 무오년(1678, 숙종4)에 영남 사람 이재헌(李在憲)이 윤휴, 허목의 지시를 따라서 〈고묘소(告廟疏)〉를 올리자, 공이 취암(翠巖) 채하징(蔡河徵)과 같이 힘을 다해 변론하였고 시를 지어 유배 가는 채공을 전송하였으나 애석히 여기고 위로하는 말이 없었다. 공이 현인을 존경하고 덕 있는 이를 숭상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나온 것이지만 수양을 많이 하고 지조를 지키는 것이 확고한 것을 또한 알 수 있다.
공의 자는 계통(季通), 호는 우곡(愚谷),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신라에서 시중(侍中)을 지낸 경(瓊)이 시조이다. 익성공(翼成公) 휘(諱) 희(喜)가 우리 세종(世宗)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어서, 나라의 재상으로는 으뜸이라고 칭찬받았으니 공의 9대조이다. 고조 백륜(伯倫)은 참봉으로 증(贈) 참의(參議)이며, 증조 빈(贇)은 참봉으로 증(贈) 참판(參判)이며, 조부 시간(時榦)은 정랑(正郞)으로 호가 칠봉(七峯)이다. 부친 성(煋)은 별제(別提)로 덕을 쌓았으나 쓰이지 못하였으며, 본관이 야로(冶罏)인 도사(都事) 송광계(宋光啓)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자식이 없어 공을 후사로 삼았다. 정랑의 아우인 감찰(監察) 정준(廷俊)의 손자이고, 학생 규(煃)의 아들이며, 선성(宣城) 이원(李瑗)의 외손이다. 만력 기미년(1619, 광해군11)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영민하고 총기가 있었으며, 성장해서는 백원(百源) 신석번(申碩蕃) 문하에서 공부하여 일찌감치 문장으로 명성을 떨쳐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형제가 모두 기꺼이 공과 함께 교우를 맺었다.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겼으며, 병구완을 할 때는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고 대변을 맛보고서 병세가 덜하고 심한 것을 살폈다. 돌아가시자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상사와 제사를 예법에 맞게 하였다. 큰형이 일찍 죽자 여러 조카들을 자기 자식처럼 길렀고, 작은형을 섬길 때는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으며 이런 마음을 미루어 돈독하고 화목한 정의(情誼)를 극진히 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대신(大臣)이 독실한 학문과 굳은 절개가 있다고 하여 조정에 아홉 번 천거를 하였지만 끝내 빛을 보지 못했으니 식자들이 안타까워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 8월 29일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작고하였다. 단암(丹巖) 민진원(閔鎭遠)이 공을 위해 상례(喪禮)를 맡아 처리하고서 고향으로 관을 돌려보냈다. 이듬해 정월에 부인 안동 권씨 묘에 합장하였는데, 용궁(龍宮) 천덕산(天德山) 해좌(亥坐) 언덕이다. 부인 권씨의 부친은 상의(尙義)인데, 부인은 부덕(婦德)이 있었다. 장남은 여익(汝翼)이다. 차남 명익(命翼)은 후사가 없다. 진사 성구징(成久徵), 문도현(文道顯), 이광정(李光井)은 사위이다. 손자는 수담(壽聃), 수망(壽望), 수석(壽石)이 있으며, 손녀들은 각각 권희운(權希運)과 이윤복(李允馥)에게 시집갔다. 수연(壽衍)과 신사수(申思遂)에게 시집간 손녀는 서출이다. 증손, 현손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찾아와 글을 청한 사람은 6대손 수묵(守默)인데 그의 형 지묵(智默)과 함께 모두 진사시에 합격했다고 한다. 나는 실로 글재주가 없고 또 병으로 정신이 대단히 혼미한데 어떻게 공의 아름다운 공적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살펴보건대, 공의 친구 만은(晩隱) 신경(申熲)은 “타고난 바탕이 온순하여 아첨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마음이 즐겁고 편안하여 꾸밈이 없었다.”라는 말로 공을 칭찬하였는데 사람들이 사사로이 아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공이 처신한 것을 대개 생각할 수 있다. 계묘년(1663, 현종4), 무오년(1678, 숙종4)에 수립한 탁월한 행적은 참으로 이해화복(利害禍福)에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주견을 가진 사람이라야만 이와 같지 않겠는가. 나의 선자(先子 송시열)의 《송자대전》에는 ‘양간인(兩間人)’ 세 자로 공을 평가하였는데, 들은 자가 사실을 잘못 파악한 것임을 결단코 알겠다. 감히 참람함도 잊은 채 특별히 써서 후인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한다.
[주-D001] 황공 : 황상중(黃尙中, 1619~1680)으로,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계통(季通), 호는 우곡(愚谷)이다.[주-D002] 예론(禮論) : 2차 예송으로, 갑인예송(甲寅禮訟)이라고도 한다.[주-D003] 고묘소(告廟疏) : 송시열 등을 정계에서 축출한 일을 종묘(宗廟)에 고해야 한다면서 올린 상소를 말한다, 영남 사람 이재헌(李在憲)이 소두(疏頭)이다. 이 사건에 대해 “영남 사람 이재헌 등이 상소하여 선생을 얽어 무함하였는데, 가죄(加罪)하고 종묘에 고하자는 청이 있었다. 채하징(蔡河徵)은 영남 선비를 거느려 쟁변하고, 이동형(李東亨)은 상소를 올려 신변(伸辨)하다가 모두 육진(六鎭)에 귀양 갔다. 선생이 듣고 절구(絶句) 2수를 지었고, 뒤에 또 ‘새북의 두 귀양살이하는 사람을 생각한다.[憶塞北二謫]’는 시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宋子大全附錄 卷7 年譜》[주-D004]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 형제 : 민정중(1628~1692)과 그의 아우인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을 말한다.[주-D005] 양간인(兩間人) : 이쪽저쪽에 다리를 걸쳐 태도가 불분명하고 어정쩡한 사람을 말한다. 송시열이 황상중을 ‘양간인’으로 평가하였는데 들은 사람의 잘못이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宋子大全 卷79 與宋希張》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김정기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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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계(高仁繼) 1564년(명종 19)~1647년(인조 25)黃時榦 1558 1642 黃廷榦 長水 公直 七峯, 道川
黃公諱時榦字公直號七峯。系出長源。本朝翼成公喜之後。贈刑曹參判贇。乃其皇考也。公稟賦非常。氣度之端重。風神之秀拔。見外可知其中也。自少志學。知所先後。專心於家庭之行。絶意於紛華之慕。晨昏餘力。講習經史。立志之篤。迨將忘食。雖在羣居。不弛斂束。惰慢之氣。不見於辭色。儕輩亦敬愛之。不敢以戱狎相加。丁內艱廬墓三年。喪塟祭祀。一從禮制。顔色之戚。哭泣之哀。聞見悅服。詩文以靑蓮爲主。述作淸麗。恢然有能者氣。人皆傳誦。乙巳捷小科。問業於遠志師門。先生亦器重之。嘗偕入洛。臨還辭於先生。先生曰鄭正郞不爲挽君耶。盖愚伏時爲銓郞。先生示以汲引之意。而公不小掩留。旋卽下鄕。更化之後。完平李相公言於銓官。卽拜冰庫別坐。歷尙瑞直長廣興主簿。凡所踐履。咸有聲績。出爲司憲府監察。遷刑曹佐郞正郞。未久卽擬郞官。盖極望也。倦於卯申。求外補得三嘉縣監。施設得宜。民歌來暮。適値不悅者按道。諉以年衰見遞。物論惜之。公不以抱屈爲介。斂跡丘園。忘情魚鳥。日與二三同志。徜徉山水。名區勝地。無遠不屆。其在鄕黨。處事剛果。持論適中。人皆信服。不敢違越。儒宮鄕社。極力扶護。學徒之依歸。長老之遊息。咸得其所者。皆公之力也。惜乎天禍吾鄕。哲人遽萎。非但鄕塾之間。事無頭緖。長少乖角。善惡混淆。將使西河之美。轉爲互鄕之偸。而莫有能正之者。信乎耆哲存亡。有關於習尙之汚隆。有如是矣。可勝歎哉。公之孤煋。以不佞從遊分厚。固請一言。顧惟老惛忘失。不足以揄揚實德之萬一。而義不可以是爲辭。略誌所知者以歸之。噫公志大而時乖。才高而命舛。以如是抱負而不得大有所試。則識者所歎咜。而至其年逾八耋。有子有女。家足身康。好德考命。凡所安享。裕有箕疇之嚮用。則彼時命之嗇。尙於公何恨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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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익재(黃翼再) 1682년(숙종 8)~1747년(영조 23)
白下先生文集卷之五 / 序 / 七峯詩集序
吾宗大學士江漢公誌其叔祖文。以爲吾先重德行。文章則柳村,畜翁始之。自此繼而起者多彬彬焉。二公著述。經燹不大傳。而具眼者猶尙云爾。則此信筆也。盖有德行則文章著於外。有文章則德行蘊於中。德行文章。豈可二以視哉。中仁以後。吾宗文章。踔厲如芝川公之主盟文昌。潤色經𧗱者。固勿論。其餘鷺汀,獨石,塘村。吾先祖槃澗公曁年少妙能詩如滄海璧月主人公。魚鱗匝襲而起。渢渢然穿天心而動月脅。奎壁文朙之運。有若全萃于吾宗。吾鄕之七峯先生卽其一也。自幼聰穎絶異。藻思超逸。及長。試於有司。輒居前列。與鄭文莊公相甲乙。當時已以黃詩鄭賦齊名。以若才調。以若抱負。若可以平步取卿相者。而凌兢不遇。乃與愚蒼兩先生。執贄請益于西厓柳先生。得聞爲己之學。日就洙泗洛閩之書。靡所不淹貫融洽。而篤彜倫敦孝弟。日可見之行。固已贒於人遠甚矣。以親老在堂。黽勉應擧。而外內輕重之分。已定于中。於進取不汲汲也。隱約婆娑於箕山𤃡水之間。日與鄕隣幾箇強輔。磨礲道義。末乃卒業于寒岡鄭先生之門。則知益廣而行益篤。發於文辭者。藹然仁義之言也。孚尹旁達。儼然成商山四德之一。而無愧漫浪學士之銘。則先生之履歷地位。豈尋常文苑之哲匠而已哉。年高德卲。望實俱隆。完平元老。擧遺逸超擬六品。金淸陰,李東隱諸相公。皆有國士之遇。存問過從。詩牘不絶者。有以也。公富有著述。而全帙漂於水不傳。收拾只若干卷耳。行文僅二首。五七古律絶合之爲幾百首。讀龍蛇亂後之作。則杜草堂之北征忠義。秋色爭高。讀思親戀家之作。則李令伯之陳情惻怛。不涕非人。讀道學先輩輓詩之作。則黃太史之光凮霽月。善形容氣像。雖其腔調格力有遜於滄江八月之濤。劒閣萬重之雲。而忠厚揖遜。老鍊雅馴。句句是眞。言言是實。太不類湘江鼓瑟之虛聲幻影。而純然是德行之所流出也。彼世之竭精神殫氣力於風雲月露之形。而組織以爲工者。雖多亦奚以爲。愚然後始信德行文章元非二道。蘊於中則必著於外。形於外者。必由乎中。吾宗先輩之傑然有名稱者。均之皆德行之文章。而至於公。尤徵其信然矣。公之文流落在人間者。雖曰泰山毫芒。而九苞一羽。猶可以想像其覽德之輝。備珍之彩。此亦足不朽公於千載之下。何必多乎哉。公之雲孫寢郞守默。要余釐正。散逸盤礴。旬日於先生凈友古亭。此則固所不辭。而至於弁卷之請則非其人也。世自有位與文可以傳信於今與後者。顧弊弊何敢當。第念晦庵夫子之於朱弁。非強近之孫行。而親之也故稱叔祖。其所以親之者。以其有表異之節故也。公於吾先祖。爲疏昆弟。而有表異之文與行。則晦翁親親之例。有不可辭也。遂書此而歸之。以塞寢郞君之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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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時榦 詩 硏究
황만기 우리한문학회 20111230 비치일 : 20171120
자료이용장소 : 디지털열람실
원문이용방법 : [국립중앙도서관]-무료
표제/저자사항 黃時榦 詩 硏究 = study on the life of Hwang Si-gan and his poetry / 황만기 [1971-] [1971-]
발행사항 경산 : 우리한문학회, 2011
형태사항 전자자료(Application)PDF35 p.
주기사항 반년간
언어: 영어 요약 있음
서지: 참고문헌: p. 297
수록자료: 漢文學報 第25輯 p. 265-299 ISSN 1229-4136 KSE200400922
표준번호/부호 ISSN 1229-4136 UCI G701:A-00092615330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법-> 810.5
주제명 생애[生涯] 시평(예술)[詩評]
Ⅰ. 머리말
Ⅱ. 생애와 교유관계
Ⅲ. 시세계
1) 安貧守道의 삶
2) 戰亂의 哀恨
3) 首丘初心의 鄕愁
4) 田園의 興趣
Ⅳ. 맺음말
황시간에 대한 연구는 아직 학계에 소개된 바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의 그의 생애와 교유관계, 그리고 시에 대한 일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황시간은 상주(현 문경) 출신의 인물로, 방村 黃喜의 7세손이다. 장수황씨가 상주 대도리에 정착한 이후 황시간에 이르러 굳건한 자리매김을 한다. 특히 그는 시에 일장을 보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우복 정경세의 부와 함께 ``黃詩鄭賦``라 병칭되었다. 또한 그는 蒼石 李埈, 愚伏 鄭經世, 沙西 全湜과 함께 商山四老로 일컬어졌다. 이 외에 교유한 인물로는 月澗 李□, 月峯 高仁繼, 泰村 高尙顔 등이 있다. 황시간은 전원적, 은일적 삶을 추구한 인물이다. 비록 67세의 만년에 벼슬길에 올라 형조정랑의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으나, 이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번 쯤 조정에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쳐보려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지, 삶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삼가현감을 마지막으로 5년간의 벼슬살이를 마감하고 결국 전원의 보금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그의 족적을 바탕으로 본고에서는 그의 시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부귀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면서 만족할 줄 아는 安貧守道의 삶을 추적해 보았다. 둘째, 그는 역사의 최대 혼란기였던 壬亂과 丙亂을 모두 체험하였다. 이때의 애한을 사실적이며 생동감 있게 그리고 있다. 셋째, 황시간은 벼슬에 대한 갈망이 내재된 그였기에 추천의 의한 벼슬을 마다하지 않고 벼슬길에 올랐다. 그러나 5년간의 관직생활에서의 지향점이자 목표는 고향으로의 회귀였다. 이때의 심정을 노래한 작품을 중심으로 규명해 보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전원으로 돌아온 이후에 새롭게 맛보는 흥취를 추적해 보았다.The study on Hwang Si-gan has not been reported to the academia yet. Thus, this paper introduces his life, and companionship, also a part of his poems. Hwang Si-gan was from Sangju (present Mungyeong), and was the seventh generation of Hwang Hui(黃喜), whose honored name is Bang Chon (방村). Since after Jangsu Hwang`s clan settled down in Daedor-ri, Sangju, the clan members firmly positioned at the town by the time of Hwang Si-gan. In particular, he showed his talent in writing poems, and the people in those days classed him with Jeong Gyeong-se, also known as his pen name, Ubok, as two greatest poets: Hwang had a distinguished talent in writing poems and Jeong in writing rhythm prose(黃詩鄭賦, pronounced "Hwangsi, Jeongbu"). Also, Hwang Si-gan was called a member of ``Sangsan Sano`` (商山四老, Four sages in the Mountain, Sangsan) together with Lee Jun(李埈), also known as pen name, Changseok(蒼石); Jeong Gyeong-se (鄭經世), aka Ubok(愚伏); and Jeon Sik (全湜), aka Saseo (沙西). In addition to them, he used to associate with Lee Jeon (李□), aka Wolgan(月澗); Go In-gye (高仁繼), aka Wolbong (月峯), and Go Sang-an(高尙顔), aka Taechon (泰村). Hwang Si-gan was a person who pursued pastoral and secluded life. Even though he entered the government service in his later years, at the age of 67, and promoted to Hyeongjo Jeongnang (刑曹 正郞, a section chief of the Ministry of Punishments), his career in the government post merely resulted from a scholar`s desire to join the conference in the royal court to follow his political ideals, which was usually grown from the classical scholars in those days, his government position was not the ultimate goal of his life. So, he ended his career as government official for five years by quitting the magistrate post of Samga county in the last place, and, eventually, he returned to his home where he could enjoy his pastoral life. Based on his traces as such, this paper investigated his poems by dividing it largely into four categories. First, the paper traced such lifestyle as; not seeking the wealth and honors, but live at your ease even under the state of being poor knowing how to satisfy yourself, in short, Anbinsudo(安貧守道, in literal sense, satisfying with what you have and keeping focused on the righteous path) Second, he had experienced both Japanese invasion of 1592 and the Manchu war of 1636, so then he depicted such hard life in his poems, joy and sorrow, during the years of war in a realistic and vivid manner. Third, Hwang Si-gan had a desire to serve as a government official, so that he entered the government service following the recommendation. Meanwhile, however, the point of his public service career for five years and the goal thereof was returning home. This paper studied his works with a focus on the poems that expressed his feeling and heart in those moments. Lastly, the paper analyzed his life after returning hometown, which he was yearning for even in his dreams, through his poetic piec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