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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당집(韶濩堂集) 김택영(金澤榮)생년1850년(철종 1)몰년1927년자우림(于霖)호창강(滄江), 소호당주인(韶濩堂主人), 운산소호당주인(雲山韶濩堂主人)본관화개(花開)특기사항황현(黃玹), 이건창(李建昌), 중국인(中國人) 장찰(張詧)ㆍ장건(張謇) 형제(兄弟) 등과 교유
韶濩堂集借樹亭雜收卷二 / 甲子文錄 / 修改二首
十二代祖花園處士府君墓表。此當在原集家述之首。盖本文屢經考修。至是始定也。
往韓光武帝丙子。吾開城族。得嶺南宗屬所傳先系先蹟。與之合譜。姑置吾花開貫。而從其貫晉陽。樹碑于府君墓。以紀其事。旣而知系蹟與貫之有悞。以告宗屬。宗屬然之。歸于吾族之舊貫。則府君之墓。法當改樹碑。爰謹書之曰。府君姓金氏。諱求智字忠汝。家開城而籍花開。其先盖少昊金天氏。至高麗時。有諱仁璜爲始祖。一傳諱秉洙。二傳諱泰文。三傳諱奎震。卽府君之高祖也。或曰。仁璜事高麗高宗,元宗。官至兵部尙書。及元宗之論崔瑀遷都功。圖形於功臣堂。以公甞與遷都之議。封花開君。秉洙官禮儀判書。泰文官侍郞。恭愍王甞語之曰。卿之金氏。
春則秋秋則春。盖戲花開也。奎震官軍器少監。曾祖諱勳。當韓之初。隱居尙志。自號梅軒。祖諱自新。考諱光植。人稱松岩處士。以上皆葬開城而墓失守矣。松岩府君生二子。長求義。其後徙嶺南。次卽府君。府君懷寶修節。不市於世。當時之人目之曰花園處士。花園卽男山也。及卒葬開城龍岫山艮坐之原。其妃不知何氏。子曰道以。孫曰碩龍。曾孫三人。曰錫周,應立,應吉。而錫周之玄孫。有曰行一者。英祖時以武用。由興德縣監。至煕川郡守。爲鄕間名宦。子孫之昌自此始。嗚呼。世遠籍缺。府君事行之傳者。不過乎鄕人所擡尊數字之名而已。然竊嘗深思而想像之。松岩府君及府君兩世。卽韓成宗中宗之時也。韓之
初載。開城之人。以高麗太學生之遺韻。不赴科擧。歷七十餘年。至成宗元年。出應科擧之令。則當此之時。開城之巷。無復有所謂處士之廬。而松岩府君獨以詩書簞瓢。自樂其窮。退然守靜於衆競之中。有以得處士之名。而府君又從而履其跡。使夫松岳之山碧瀾之水。增其蒼蒼泱泱之光氣。何其媺矣。是以輒論府君之名。而幷及于松岩府君。以明府君以高士察察之風。而兼孝子繼述之行者。不僅止於一美也。
翰墨林詩卷序 此當在原集序門辛酉年
南通三益鄕之富安鎭。有嗜詩士曰陳君元基伯鈞。自其曾大父翼雲翁。闢一園於所居之西。庋書籍築假山植花竹。名曰西
園。以爲子弟藏修游息之所。至是伯鈞列其景槩二十。各繫五言律詩一首。屬和於四方。詩旣成卷。乃取古人西園翰墨林之語。題之曰翰墨林詩卷。令其表弟梁慕僑代徵序於余。時則中國有南憂之始也。傍有客見其事而疑之曰。何哉陳君之急於詩而緩於世事也。夫今之日。豈言詩時哉。余笑而解之曰。陳君之事。未可以遽議也。吾聞陳君輕財重義。義之所急。擲千金如土。雖詩人乎遊。而當世急務之書。亦未嘗廢而不讀。是其中豈易測哉。且夫英雄與文章。皆天地之元氣也。故人苟能爲英爲雄於衆人之中。而撥亂世反之正。則其氣禀之淸明。如日如月。其於詩若文。不學而自然能之。上焉而如漢高明祖。下焉而如
皐夔伊傅管樂諸葛韓范之倫皆是。而文章與事業。未見其截然判爲二也。夫以僕之此論推之。今日雄駿卓犖而可弭國憂者。安知不在於此詩卷之中。而子不竢見其終。乃欲徑罪詩而病人乎。客曰。子之言。其古詩人忠厚之遺乎。遂次其言。書卷以歸之。
送李君 炳憲 奉聖像歸國序 當在原集序門癸亥年
咸陽李君炳憲。自號眞菴子者。儒林世家。少與同道賢士河叔亨,曺仲謹輩。相從講學。學勤無所施。年且老而國爲墟矣。見聖廟之祀之餒。憤憤曰。使聖廟復得馨香者。不在我哉。則腐其心弊其筆。盤詰其畫者久之。纔得一二。鬱鬱不堪。乃痛哭走渡渤
海。至曲阜參聖祀。祀罷上泰山。山故多雲霧。鮮有見全面者。君乃仰而禱曰。倘山佑我聖祀。請屛雲以示之。遂躡梯漸上至絶頂。果如所禱而無有障翳。遂以洞覽全山而及于千萬里。旣歸。復腐其心弊其筆。盤詰其畫者有年。果得其十。於是復渡海至曲阜。乞聖像以歸。書余道其事如右。余爲之歎曰。壯矣哉。使天下之儒者皆若君。孰謂儒者迂闊荏弱不濟事哉。昔韓文公之之衡山也。遇雲霧。精禱以開之。及至潮州。用其精誠之餘力。爲文逐鰐。如驅羊豕。今君之精誠之效。與韓公一也。然而吾邦今日之事。尙有大於逐鰐者。不知君將繼而有爲。使我酌酒以竢之也耶。否也耶。因風以問之。
[주-D001] 二 : 三
차수정잡수 제2권 / 갑자문록(甲子文錄) / 수개 3수〔修改三首〕
12대조 화원 처사 부군 묘표 이 묘표는 마땅히 원집의 〈가술〉 첫머리에 있어야 한다. 대개 본문이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쳐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정본이 되었다.〔十二代祖花園處士府君墓表 此當在原集家述之首 蓋本文屢經考修 至是始定也〕
옛 조선 고종 병자년(1876)에 우리 개성(開城)의 종족이 영남의 종친이 전해오는 선계(先系)와 선적(先蹟)을 얻어서 이를 족보와 합하되 우선 종래의 우리 화개(花開) 본관을 놓아두고 영남의 본관 진양(晉陽)을 따라 부군의 묘에 비석을 세워 그 일을 기록하였다. 이윽고 선계와 선적과 본관에 착오가 있음을 알고 종친에게 고하자 종친이 그렇다고 여겨서 우리 종족의 옛 본관으로 되돌리니, 부군의 묘에는 법에 따라 마땅히 비석을 다시 세워야 하기 때문에 삼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부군의 성은 김씨(金氏), 휘는 구지(求智), 자는 충여(忠汝)이고 개성에 살면서 화개를 본관으로 한다. 그 선대는 대개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인데, 고려 때에 이르러 휘 인황(仁璜)이 그 시조이다. 1대를 내려와서는 휘가 병수(秉洙)이고, 2대를 내려와서는 휘가 태문(泰文)이고, 3대를 내려와서는 휘가 규진(奎震)인데 곧 부군의 고조이다. 혹 말하기를 “인황은 고려 고종과 원종을 섬겨 관직이 병부 상서에 이르고, 원종이 최우(崔瑀)가 천도(遷都)한 공을 논하여 공신당(功臣堂)에 그의 화상(畵像)을 그렸는데 공이 일찍이 천도의 의논에 참여한 것 때문에 화개군(花開君)에 봉하였다. 병수는 관직이 예의 판서이다. 태문은 관직이 시랑인데, 공민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경(卿)의 김씨는 봄이면 가을이고 가을이면 봄이로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본관 화개(花開)를 두고 희롱한 것이다. 규진은 관직이 군기소감(軍器少監)이다.”라고 한다. 증조의 휘는 훈(勳)이니 조선 개국 초에 은거하여 뜻을 높이 가져서 자호를 매헌(梅軒)이라고 하였다. 조부의 휘는 자신(自新)이다. 부친의 휘는 광식(光植)이니 사람들이 송암(松巖) 처사라고 일컬었다. 이상은 모두 개성에 안장하였으나 묘는 전하지 않는다. 송암 부군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구의(求義)이니 그 후에 영남으로 옮겨가고, 차남이 곧 부군이다. 부군은 내면에 훌륭한 재능을 품고 절의를 닦아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당시 사람들이 화원(花園) 처사라고 불렀으니, 화원은 곧 개성의 남산(男山)이다. 돌아가신 뒤에 개성 용수산(龍岫山) 간좌 등성이에 안장하였다.
그 비(妃)는 무슨 성인지 알지 못한다.
아들은 도이(道以)이고, 손자는 석룡(碩龍)이고, 증손은 세 사람인데 석주(錫周)ㆍ응립(應立)ㆍ응길(應吉)이다. 석주의 현손 가운데 행일(行一)이 있는데 영조 때 무과로 등용되어 흥덕(興德) 현감을 거쳐 희천(煕川) 군수에 이르러 고을의 명환(名宦)이 되었으니 자손이 창성한 것은 이로부터 비롯하였다.
아, 세대가 멀고 문적이 잔결하니 부군의 사행이 전하는 것으로는 고을 사람들이 받들어 높이는 ‘화원 처사’라는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깊이 생각하고 상상해보건대, 송암 부군과 화원 부군의 시대는 곧 조선 성종과 중종 때였다. 조선 초기에 개성 사람들은 고려 태학생의 유운(遺韻) 때문에 과거에 나가지 못했는데, 70년 남짓한 세월이 지나 성종 원년에 이르러 과거에 응시하라는 어명을 내니, 이때에 개성 거리에는 다시 이른바 과거에 나가지 않는 처사의 집이 없었다. 그러나 송암 부군은 유독 시서와 가난한 생활로 그 궁함을 스스로 즐기고 많은 사람들이 명리를 다투는 가운데서 겸손하게 고요함을 지켜서 처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화원 부군이 또 이어서 그 자취를 따라 송악(松嶽)의 산과 벽란도(碧瀾渡)의 물로 하여금 그 푸르고 무한한 광기(光氣)를 더하게 하였으니,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러한 까닭으로 문득 부군의 이름을 논하면서 송암 부군에게도 아울러 미쳐서, 부군이 고사(高士)의 청결한 풍모에다 효자(孝子)가 선대의 뜻과 일을 잘 계승한 행실을 겸비한 것이 겨우 한 가지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음을 밝힌다.
한묵림시권서 이 서문은 마땅히 원집 서에 있어야 한다. 신유년(1921)〔翰墨林詩卷序 此當在原集序門辛酉年〕
남통(南通) 삼익향(三益鄕)의 부안진(富安鎭)에 시를 좋아하는 선비가 있으니 진원기(陳元基) 백균(伯鈞) 군이다. 그 증조부 익운(翼雲) 옹 때부터, 사는 곳 서쪽에 한 정원을 만들어 서적을 비치하고 가산(假山)을 축조하고 화죽(花竹)을 심어 이름을 ‘서원(西園)’이라 하여, 자제들이 기거하고 수양하며 놀고 쉬는 장소로 삼았다. 이 즈음에 이르러 백균이 그곳의 경관 20가지를 열거하여 각기 5언 율시 한 수를 붙이고 사방에 화답을 부탁하였다.
시가 이미 많이 모여 책권(冊卷)을 이루자, 고인의 ‘서원한묵림(西園翰墨林)’이라는 시어(詩語)를 취하여 제목을 《한묵림시권(翰墨林詩卷)》이라 하고, 그 표제(表弟) 양모교(梁慕僑)를 시켜서 나에게 대신 서문을 부탁했는데, 때는 중국 남쪽 지방에 우환이 있던 초기였다. 곁에 어떤 사람이 그 일을 보고 의심스럽게 여겨 말하기를, “어찌 된 것인가? 진군(陳君)이 시를 짓는 일에만 급급하고 세상사에 등한함이여! 오늘의 시국이 어찌 시를 말할 때이겠는가.”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다음과 같이 해명하였다.
진군의 일은 성급하게 의논할 것이 아니다. 내가 듣건대, 진군은 재물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여 의리가 급한 바에는 천금을 쾌척하기를 마치 흙덩이를 내던지듯 아끼지 않았고, 비록 시인으로 놀더라도 당세의 급선무가 되는 서적을 또한 폐하고 읽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에 그 마음을 어찌 쉽게 헤아리겠는가. 그리고 또 영웅과 문장은 모두 천지의 원기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만일 많은 사람 가운데 능히 영웅이 되어 혼란한 세상을 다스려 바른 데로 되돌릴 수 있다면 그 기품(氣禀)의 청명함은 일월과 같으니, 시문에는 배우지 않고도 자연히 능할 것이다. 위로는 한(漢)나라 고조 명(明)나라 태조 같은 이와 아래로는 고요(皐陶)ㆍ기(夔)ㆍ이윤(伊尹)ㆍ부열(傅說)ㆍ관중(管仲)ㆍ악의(樂毅)ㆍ제갈량(諸葛亮)ㆍ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 같은 무리들이 모두 이러한 경우이니, 문장과 사업이 자른 듯이 갈라져 두 가지가 된 것을 보지 못한다.
나의 이 논의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날 영웅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국가의 우환을 그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찌 이 시권(詩卷) 가운데 있지 않겠는가. 그러하거늘 그대는 그 결과를 보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 성급하게 시를 단죄하고 사람을 부족하게 여기고자 하는가?
그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은 옛 시인의 충후함이 지금에 전하는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 말을 차례대로 적어 책머리에 써서 돌려보낸다.
이군 병헌 이 공자의 초상을 받들고 귀국하는 것을 보내는 서 이 서문은 마땅히 원집 서에 있어야 한다. 계해년(1923)〔送李君 炳憲 奉聖像歸國序 當在原集序門癸亥年〕
1922 | 임술 | ― | ― | 73 | 「韶濩堂三集」, 「合刊韶濩堂集」, 「合刊韶濩堂集補遺」가 간행되다.김택영 |
진암자(眞菴子)라고 자호한 함양(咸陽)의 이병헌(李炳憲) 군은 유림 세가(世家)의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같은 도의 어진 선비 하숙형(河叔亨)ㆍ조중근(曺仲謹) 등과 함께 서로 따르며 강학했는데, 부지런히 강학하였으나 시행한 것은 없었고 만년에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공자의 사당에 제사를 드릴 수 없는 형편을 보고는 분개하여 말하기를, “공자의 사당에 다시 제사를 드릴 수 있게 하는 일이 나에게 달려 있지 않겠는가.”라고 하고는, 애태우며 붓이 닳도록 오랫동안 그 계획을 자세히 강구하여 겨우 한두 가지 방법을 얻었으나 가슴이 답답하여 견디지 못해 통곡하고 달려가 발해(渤海)를 건너 곡부(曲阜)에 이르러 공자 사당에 참배하였다. 참배를 마치고는 태산에 올랐는데, 태산은 본디 운무가 많아 전체의 면목을 본 사람이 드물었다. 군은 이에 우러러 기도하기를 “혹시 태산의 신령께서 우리 공자의 제사를 도와주시려거든, 청컨대 구름을 걷어 보여주소서.”라고 하였다. 드디어 사다리를 밟고 점점 올라 정상에 이르니 과연 기도한 대로 가리는 운무가 없어서 마침내 산 전체를 다 보게 되었는데 천만 리나 되었다.
귀국한 뒤에는 다시 애를 태우고 붓이 닳도록 그 계획을 자세히 강구한 지 몇 년 만에 과연 온전한 방법을 얻었다. 이에 다시 발해를 건너 곡부에 이르러 공자의 화상을 구하여 돌아가서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일에 대해서 위와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를 위해 감탄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하도다! 가령 천하의 유자들이 모두 군과 같다면, 유자가 실정에 어둡고 뜻이 나약하여 일을 이룰 수 없다고 누가 말하겠는가. 옛날 한문공(韓文公)이 형산(衡山)에 갔을 때 운무(雲霧)를 만나 정성스럽게 기도하여 구름이 걷히게 하였고, 조주(潮州)에 이르러서는 정성의 여력으로 글을 지어 악어를 쫓아내기를 마치 양과 돼지를 몰아내는 것처럼 하였다. 지금 군의 정성의 효험이 한문공과 같다. 그러나 우리나라 오늘의 일은 오히려 악어를 쫓아내는 것보다 힘든 점이 있으니, 군은 장차 계속하여 큰일을 해내어 나로 하여금 술을 부어 기다리게 할 수 있겠는가, 없겠는가? 바람결에 물어보노라.
[주-D001] 진원기(陳元基) 백균(伯鈞) 군 : 원기는 자, 백균은 이름이다. 김택영이 진원기에게 준 시 〈진원기의 서원이십영 시권에 쓰다[題陳元基西園二十咏卷]〉가 《소호당시집》 권6에 보인다.[주-D002] 서원한묵림(西園翰墨林) : 당(唐)나라 장열(張說, 667~730)의 시 가운데 “동벽은 도서부이고, 서원은 한묵림일세.[東壁圖書府, 西園翰墨林.]”라고 한 구절이 있다. 《事文類聚新集 卷25 諸院部》 장열의 자는 도제(道濟)ㆍ열지(說之)이다. 연국공(燕國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로는 《장연공집(張燕公集)》이 있다.[주-D003] 고요(皐陶) : 요순(堯舜) 시대의 신하로서 법을 집행하는 사도(司徒)의 직책을 맡았다.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고요의 충언(忠言)이 실려 있다.[주-D004] 기(夔) : 요순(堯舜) 시대의 신하로서 음악을 가르치는 전악(典樂)의 직책을 맡았다.[주-D005] 이윤(伊尹) :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재상이다. 이름은 지(摯)이다. 유신(有莘) 들에서 농사를 짓다가 탕왕의 부름을 받고 나가 하(夏)나라의 무도한 걸(桀)을 치고 은나라 건국을 도왔다.[주-D006] 부열(傅說) : 은나라 고종(高宗)의 재상이다. 처음 부암(傅巖)에 숨어 살면서 담 쌓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고종의 꿈에 그 형상이 나타남으로 인하여 발탁되어 재상이 되었다. 《書經 說命》[주-D007] 관중(管仲)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 시호는 경(敬)이다. 환공(桓公)의 재상이 되어 40여 년 동안 정사를 도와 부국강병에 힘썼다. 《史記 管仲列傳》[주-D008] 악의(樂毅) : 전국 시대 연(燕)나라의 장수이다. 소왕(昭王) 때 상장군에 임명되어 한(韓), 위(魏), 조(趙), 연(燕)나라의 군대를 거느리고 제(齊)나라를 쳐서 70여 성을 빼앗아 창국군(昌國君)에 봉해졌다. 혜왕(惠王)이 즉위하여 제나라 전단(田單)의 반간계(反間計)에 빠져서 악의를 불러들이니, 악의가 조나라로 달아나 망저군(望諸君)에 봉해졌다. 《史記 樂毅列傳》[주-D009] 제갈량(諸葛亮) : 삼국 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이다. 자는 공명(孔明)이다. 남양(南陽)에서 몸소 농사를 짓다가 유비(劉備)에게 발탁되어 촉한의 부흥에 힘썼다. 유비가 죽은 뒤에 유조(遺詔)를 받들고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보필하였으며 위(魏)나라를 치기에 앞서 후주에게 〈출사표(出師表)〉를 올리고 출정하였다. 시호는 무후(武侯)이다. 《三國志 蜀書 諸葛亮傳》[주-D010] 한기(韓琦) : 1008~1075. 송(宋)나라 때의 명재상이다. 자는 치규(穉圭)이다. 당시에 범중엄(范仲淹, 989~1052)과 명망을 나란히 하였고,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지고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자세한 행적은 《송사》 〈한기열전(韓琦列傳)〉에 보인다.[주-D011] 범중엄(范仲淹) : 989~1052. 송(宋)나라 때의 명재상이다. 자는 희문(希文),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가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고 말하였다. 자세한 행적은 《송사》 〈범중엄열전(范仲淹列傳)〉에 보인다.[주-D012]
진암자(眞菴子) : 이병헌(李炳憲, 1870~1940)으로,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자명(子明), 호는 진암ㆍ백운산인(白雲山人)이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인이다. 중국의 강유위(康有爲, 1858~1927)를 계승하여 금문경학(今文經學) 연구에 전력함으로써 우리나라 금문경학과 공양학(公羊學)의 독보적 인물이 되었으며, 유교개혁사상가ㆍ공자교운동가ㆍ금문경학자로 활동하였다. 저서로는 《진암전서(眞菴典書)》가 있다.
고종 | 42 | 1905 | 을사 | 光武 | 9 | 56 | 봄, 중국 망명을 결심하고 張謇에게 편지를 보내다. ○ 여름, 學部 編輯委員을 겸직하다. ○ 「동사집략」을 증보하여 「歷史輯略」을 간행하다. ○ 9월, 사직서를 내고 三室 扶安林氏와 딸을 데리고 仁川港을 통해 중국 上海로 망명하다. 장찰, 장건 형제의 도움으로 通州의 翰墨林書局에서 책을 校閱하며 衣食을 해결하다. |
1922 | 임술 | ― | ― | 73 | 「韶濩堂三集」, 「合刊韶濩堂集」, 「合刊韶濩堂集補遺」가 간행되다. |
[주-D013] 하숙형(河叔亨) : 하겸진(河謙鎭, 1870~1946)으로,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숙형, 호는 회봉(晦峯)ㆍ외재(畏齋)이다. 경상남도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士谷里)에서 살았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회봉선생유서(晦峯先生遺書)》, 《주자어류절요(朱子語類節要)》, 《도문작해(陶文酌海)》, 《명사강목(明史綱目)》, 《동시화(東詩話)》, 《동유학안(東儒學案)》이 있다.[주-D014] 조중근(曺仲謹) : 조긍섭(曺兢燮, 1873~1933)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근, 호는 심재(深齋)ㆍ암서(巖西)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심재집》, 《암서집》이 있다.[주-D015] 옛날 …… 하였고 : 당(唐)나라 문인 한유(韓愈, 768~824)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부임하던 중 형산(衡山) 남악묘(南嶽廟)에 들렀을 때, 마침 가을장마가 들어 음산한 기운이 잔뜩 꼈으므로 마음을 가다듬어 기도를 드리자 구름이 걷히고 날이 말끔하게 갰다고 한다. 《韓昌黎集 卷3 謁衡嶽廟遂宿嶽寺題門樓》 《古文眞寶後集 卷8潮州韓文公墓碑 註》[주-D016] 조주(潮州)에 …… 쫓아내기를 : 한유가 조주 자사(潮州刺史)로 부임했을 때, 그곳 악계(惡溪)에는 악어가 살고 있어 가축과 농산물을 수시로 나와 먹어치워서 백성들이 살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에 한유가 〈악어문(鰐魚文)〉을 지어 악계에 던졌는데, 그날 저녁에 바로 악계에 폭풍이 불고 천둥이 치더니, 수일 후에는 그곳의 물이 다 말라서 악어가 온데간데없어 이로부터 악어의 해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古文眞寶後集 卷3 鰐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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