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현-윤기-시종-기와 지로 내려오는 오성군파(예판공파+문정공파) 족보를 고찰한다. 그 이전에 한 마디, 우리는 안우장군이 직계이든 방계이든 탐진안씨의 후손임은 분명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생리적 불일치
안우 사망 1362년 (1305년 출생), 안우 아들 현은 1350년 출생. 기는 1380년 생. 지는 1384년 생이다.
안우 아들 현은 늦둥이로 태어났다. 1362년 안우가 피살될 때 '저자에 벌거벗고 뛰어 놀던 겨우 십여세 아이'가 현이다.
현(1350년 생)과 기(1380년 생)의 출생년 차이가 30년 밖에 나지 않는데 그 사이에 윤기·사종·기와 지 3 대가 태어난다. 10년마다 한 명씩 (30년에 세명) 태어나는 꼴로 누가 봐도 이해가 안된다. 이로 인하여 끊임없는 질문이 올라오고 있있다.
탐진안씨 족사를 공부한 종원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고 종중에서도 뚜렷한 해결책이 없으니 그냥 덮고 가자고 한다. 물론 족보가 다 그런거다하고 넘어 갈 수도 있지만 우선 왜 그렇게 되었는지 공부부터 해보자. 이게 궁금하지 않으면 학자가 아니다.
오성군파의 중심: 예문관대제학 안지
오성군파의 중심에는 예문관대제학 안지가 있다. 안지는 조선왕조실록에 50년간 그 기록이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안우를 집대성한 책 <고은선생문집>이나 <고은 안지선생 실기>에 안지에 대한 수 많은 기록이 있지만 그 기록에 안우는 없다
특히 고려사 개찬에도 10년간 관여했고 고려사 안우열전을 지은 정인지와는 막역한 사이이다. 하지만 안지의 그 어느 기록에도 안우에 대한 기록은 없다. 아시다 시피 안지는 고려사 개찬이 잘못되어 세종30년에 해임까지 된다.
안우의 사망이 1362년이고 안지는 1384년 출생이니 안지가 안우에 대해 들어 보지 않았을리가 없지 않은가?
씨족원류
조중운의 씨족원류를 살펴 보고 족보를 살펴보면 그 답이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안씨는 탐진현의 토성(土姓)이다. 고려시대에는 탐진현은 장흥부의 속현이고 속현의 실질 호족은 향리이다. 고려시대는 지방 분권시대이다. 토성이라 함은 향리를 배출한 토배기 성씨이다. 이들은 과거도 볼 수있고 중앙정부의 관료나 군인으로도 나아갈 수 있었다. 토성을 가진 자들은 지방의 안정된 새력이라고 보면 된다. 종종 호족이라고 불리어 지기도 한다.
안우와 안지는 탐진에 거주하는 다수의 안씨 중에 특출나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어찌 혼자 태어나 혼자 잘나서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있겠는가? 안우는 고려말 오성군을 봉군 받은 대장군이 되고 안지는 조선초 예문관대제학이된다. 안우와 안지는 탐진에서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동향의 안씨 출신으로 느슨한 인척관계로 추정한다.
안우를 시조 선정
그러다가 1742년 족보 제작 시에 먼저 안기파(예판공파)에서 안우 장군을 시조로 모시게 된다. 1777년 안지파)(문정공파)도 이에 합류한다.
족보 서문에 보면 시조는 탐진인 중에서 당대에 이름을 날리신 분을 선정한다고 적혀있다. 그래서 고려말 명장 안우를 모시게 되었다고 1777년과 1845년과 족보 서문에 기록되어 있다. 안우 장군의 직계가 아닌 방계이지만 안우장군의 시조로 선택하였고 그 이유를 분명하게 기술한 건 잘한 일이라 생각된다.
(1777년 족보 서문)
옛적 고려 공민왕 때 우리 시조 평장공(平章公)께서 홍건적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오성군(鼇城君)에 봉작되었으니 오성은 탐진(耽津)고을의 이름이니 탐진으로 성관(姓貫)을 삼음이 이에 비롯되어 판서공(判書公), 우상공(右相公), 찬성공(贊成公) 등 일문(一門)에서 삼세(三世)에 관작이 융성하여 사서(史書)에 올랐으니 자손으로써 군소리가 필요 없으리라.
(1845년 족보 서문)
우리 나라의 안씨는 순흥에서 줄기가 나와 종족이 크게 번창하고 이름난 관작과 큰 인물이 간간이 배출되어서 그 지손(支孫)으로 관향을 삶은 것이 여러 집인데, 우리 탐진(耽津)집은 오성군(鰲城君) 휘 우(祐)로써 시조를 삼았다. 그 이상은 보첩에 전하지 않으나 다른 안씨의 족보에 기록이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바, 이것이 아니면 거의 잃었으리라.
삼가 예문(禮文)을 살펴보건대, 별자(別子)로 시조를 삼거나, 또는 공덕(公德)이 있는 이로 시조를 삼는 것은 이는 백대(百代)의 공통된 상식인바, 아래로 사대부(士大夫)에 이르기까지 그 뜻은 다름이 없다. 오성군께서 난리를 평정하여 국가를 평안히 함으로써 그 공적이 백성에게 끼치어 탐진군으로 봉작(封爵)을 받은 명조가 되었으니, 진실로 일가 백세의 시조로써 옛 보첩에 단연 오성군으로부터 시작한 것을, 개저 누군들 달리 평론하겠는가?
그림으로 보는 오성군파 선계도
아래는 그림은 탐진안씨 오성군파의 선계도를 그림으로 쉽게 나타내었다. 중간 그림에서는 1742년 족보가 발간되면서 윤기를 현의 아들로 배치하면서 크게 생리적 불일치가 생겼음을 보여준다. 맨 오른쪽 그림에는 이 생리적 불일치를 해소하는 그림이다. 윤기를 안우의 아들로 배치하면 간단히 풀린다. 이는 원래 안우장군을 시조로 모신 취지와 잘 부합한다.
참고로 안우에게는 사위가 있으며 사위 황보림은 1333년 생이다. 그러므로, 1330년 출생의 윤기를 우의 아들로 적합하다. 비록 방계이기는 하나 하나의 피사 흐른고 있다는 의미이므로 더 좋은 구조라고 생각된다. 1355년 생 사종은 손자로 적합하고 1380년 생의 기와 1384년 생의 지는 증손자로 아주 적합하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고 이사실은 분명히 명기하면 된다.
생리적으로 만 본디면 윤기는 결코 현의 아들이 될 수는 없지만 오성군 우의 아들은 얼마던지 가능하고 시비가 걸릴 일은 업다. 이 경우 윤기는 현의 형님으로 교통 정리된다.
그러면 현의 후손은 누구인가?
현의 후손은 탐진 안씨 중에 어딘가에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그리고 조중운의 씨족원류에는 전공총랑 안덕린파가 있는데 현재 이 파는 무슨 연유인지 탐진안씨에서 사라졌다. 앞으로 어느 누가 현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나타날 지 궁금하긴 하다.
-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수고 하십니다 탐진안가 족보 안우장군 후손 3대에 대하여 항상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글로 완전히 해소 되었습니다.
탐진안씨는 순흥안가 아니다고 주장하고 안원린은 탐진군파 시조 아니라고 생각하며 고려사를 통해서 탐진안가 시조 안우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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