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任天常(一七五四:英祖三十~一八二二:純祖二十二) 編纂
海東名臣誌狀輯略 卷三 / 五賢 / [小序]
旅軒張顯光曰: “皇明啓文明之運, 我朝鮮列聖, 應運繼作, 積德隆化。 於是乎眞儒輩出, 道學有傳, 而寒暄金先生實爲之倡, 同時輔仁, 則有若一蠧鄭先生; 晩年傳道, 則有若靜菴趙先生。 厥後接武而起者, 平實有如李晦齋先生, 精純有如李退溪先生, 俱百世之師。 五先生竝從享文廟, 是謂東方五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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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直弼 | 1776 | 1852 | 洪兢弼 | 南陽 | 伯應, 伯臨 | 梅山, 鷺湖 | 文敬 |
매산집 제36권 / 묘갈명(墓碣銘) / 가암 최군 묘갈명 병서○기유년 〔可庵崔君墓碣銘 幷序○己酉〕
| 崔濟默 | 1797 | 1847 | 朔寧 | 可言 | 可庵 |
강재(剛齋) 송 문간공(宋文簡公)이 오촌(鰲村)에서 도를 강학하니, 최제묵(崔濟默) 군이 책 바구니를 메고 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강재 선생께서 최군에게 가슴속에 보존한 것을 묻고는 경탄하여 말하기를 “최군은 바로 창을 잡고 내 방으로 쳐들어온 자이다.”라고 하고, 경전(經傳)의 명리(名理)와 학문하는 요체를 가르치자, 군은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며 힘을 다해 공부하였다. 선생은 군을 매우 중하게 기대하여 영남의 선비들에게 “최모(崔某)의 학식이 넓으니,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을 그에게 물어보라.”라고 말하곤 하였다.
군은 스승의 상에 3개월 동안 복을 입고 나서 말하기를 “몸에 복을 입는 것이 심상(心喪)을 하여 자신의 정(情)을 다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심상의 예절을 다하였다.
평소에 말하기를 “우암 어른은 주자 뒤에 한 분이시니, 불행히도 오랑캐에게 복수하고 설욕하려던 계책을 이루지 못했으나, 하늘과 땅 사이에 하루도 이런 의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주자와 우암이 전수한 ‘직(直)’ 한 글자를 취하여, 자리 오른쪽에 걸어두고 늘 돌아보았으니, 여기에서 군이 훌륭한 군이 된 이유를 알 수 있다.
군은 자가 가언(可言)이니, 배우는 자들이 가암 처사(可庵處士)라고 칭하였다. 선계(先系)가 삭녕(朔寧)에서 나왔으니,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휘 천로(天老)를 시조로 삼는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복린(卜麟)이 대사간을 지냈으며, 그 아드님 휘 도원(道源)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지평에 제수되었고, 휘 발(潑)과 휘 진녕(振寧)에 이르러 두 대가 모두 참봉을 지냈으며, 참봉의 아드님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 두남(斗南)이 효행으로 세상에 알려져서 부역을 면제 받았다. 증손 휘 언겸(彦謙)은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일찍이 글을 올려서 우암 송 선생의 억울함을 신구(伸救)하였고 또 우암과 동춘당 두 선생을 문묘에 종향(從享)할 것을 청하였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이시다. 이분이 동중추(同中樞) 휘 창욱(昌郁)과 통덕랑 휘 창의(昌義)의 두 아드님을 두었으니, 창의는 형님 창욱의 아들 통덕랑 휘 상규(尙奎)를 후사로 삼았다. 상규가 또 아들이 없어서 형 휘 상원(尙元)의 아들 휘 광형(光馨)을 후사로 삼았다. 광형이 진주 하씨(晉州河氏) 호(浩)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군을 낳았다.
군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지혜로워서 증선지(曾先之)의 《십팔사략(十八史略)》을 배우자마자 잘못된 글자를 구별하니, 통덕공이 반드시 가문을 창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칭찬하였다. 나이 열 살이 되어 스승에게 나아가 공부하게 되자 뜻을 돈독히 하여 학업에 힘썼다. 선유(先儒)들의 글을 보기 좋아하였는데, 장자(長者)께서 시문(時文 과거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문체의 글)에 방해된다고 하여 금하였으나, 그만두지 않았다.
한번은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로 갔는데, 당시 재신(宰臣)이 군을 만나보고자 하자, 군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과장(科場)에 임하여 현달한 관원을 방문하는 자는 선비가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그 지기(志氣)가 이처럼 강직하였다. 남성시(南省試)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는데, 선비들의 풍습이 도리에 어긋난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이러고도 진취(進取)를 바랄 수 있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군은 책상을 마주하고 단정히 앉아 고개 숙여 독서하고 우러러 사색하여 모든 이수(理藪 이치의 총체(總體))의 정밀하고 심오한 것과 윤상(倫常)에 있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에 대해 마음으로 이해하고 직접 증험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도가 있는 분에게 나아가 질정하고 주자에게 절충(折衷)하였다.
배우는 자들이 혼륜(混淪 혼연(渾然)하여 분변하지 않음)을 좋아하고 분석하기를 싫어하는 것을 염려하여 말하기를 “의리에는 간가(間架 짜임새)와 조리(條理)가 있으니, 만약 변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학문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집안을 예(禮)로 다스렸는데, 주자의 《가례(家禮)》를 위주로 하면서도 또한 도식(圖式)과 예절이 있어서 집안의 가르침을 갖출 수 있게 하였다. 천성이 효성스러워서 조부모와 부모가 대질(大耋 80세)이 되도록 병이 없었는데, 군은 조부모와 어버이에 대해 물질적인 봉양뿐 아니라 그 뜻도 봉양해서 그 즐거움이 매우 화락하였다. 일찍이 할머니를 모실 적에 젖을 빨면서 어린아이의 장난을 하여 기쁘게 해드리니, 이 소식이 집안과 이웃 간에 전해져 내려오며 칭송되고 있다.
상을 당하자 거상(居喪)에 예(禮)를 다하여 몸을 훼손하여 병이 위독해졌는데, 금계(襟溪) 이봉수(李鳳秀) 공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우(士友)들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학문에 대해 물으려는 뜻을 가졌으나 묻지 못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절필(絶筆)이 되었다. 정미년(1847, 헌종13) 4월 22일에 별세하니, 출생한 정사년(1797, 정조21)과 햇수를 따져보면 51년이 되는데, 이날은 통덕공의 연사(練祀)를 지낸 지 겨우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원근(遠近)의 사우들이 모두 조문하여 곡소리가 골목에 이어졌는데, 현(縣)의 동쪽 성자동(聖子洞) 미좌(未坐)의 언덕에 장례하였다.
배위 해주 정씨(海州鄭氏)는 교선(敎善)의 따님으로 충의공(忠毅公) 문부(文孚)의 후손인데, 남편을 섬김에 어긋남이 없었다.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요절해서 아우 현묵(現默)의 아들 효숙(孝淑)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고, 딸이 네 명인데 정규원(鄭奎元), 권의정(權宜井), 정환수(鄭煥壽)에게 출가하였고 한 명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군은 자질이 돈후(敦厚)하고 재주가 영특하였으며 뜻이 바르고 식견이 통달하였고 윤리에 돈독하였다. 단(壇)을 설치하여 묘소가 사라진 선조들을 제사하고 비석을 세워서 민멸된 선조의 공렬을 밝혔으며, 문헌(文獻)을 수집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사적을 드러내었다. 백부모를 섬기고 형제들을 대함에 각각 그 도리를 다하였으며, 서숙(庶叔)의 아들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읜 것을 가엾게 여겨 은혜를 베풀어 더욱 잘 보살펴서 믿고 감동하게 하였다.
소원한 친족에까지 은혜가 미쳤는데 지극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친척 중 수십 가(家)가 공에게 의지하여 밥을 지어 먹었으며, 어린아이들을 경계해서 함부로 한 생명도 죽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와 같이 그 은혜가 미물에까지 미쳤다. 검소한 옷차림을 숭상해서, 집식구가 서양에서 들여 온 베로 옷을 만들고자 하니, 군이 책망하기를 “서양 사람들은 부모도 없고 군주도 없는데, 어찌 그 베로 옷을 해 입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군은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영남과 호남에서 경치가 아름다운 곳을 골라 초연(超然)히 진세(塵世)를 벗어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일찍이 선영 아래에 와룡암(臥龍庵)을 짓고 말하기를 “세속과 화합하지 못하고 또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장차 가업을 아우에게 맡기고 나는 책을 안고 학문에 전념한 채로 여생을 마치겠다.”라고 하였는데, 미처 이 뜻을 이루기 전에 갑자기 별세하였으니, 애석하다. 《질의록(質疑錄)》과 《사서의의(四書疑義)》, 《여계(女戒)》와 기타 시문(詩文)과 잡저(雜著) 등을 저술하였는데, 원고가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아! 군은 남쪽 지방에서 분연(奮然)히 몸을 일으켜서, 스스로 스승을 얻어 바로 ‘도를 독실하게 믿고 배우기를 좋아하며 죽음으로써 지키면서도 도를 잘하는 것〔篤信好學 守死善道〕’을 자신의 소원으로 세웠었는데, 불행히 단명하여 자신의 뜻과 사업을 다 채우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우리들이 슬퍼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것이다.
군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였고, 나 또한 군이 천성적으로 호기(豪氣)를 타고 태어나 기개가 탁월하여 큰 임무를 맡을 만함을 사랑하였다. 이에 변치 않는 깊은 교우로 서로 의탁함에, 내가 죽으면 군에게 묘문을 부탁하는 누를 끼칠 것이라고 여겼는데, 나로 하여금 죽지 않고 끝없는 애통을 안게 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군의 아우 현묵(現默)이, 남이목(南履穆)과 조규(趙
) 두 고사(高士)가 지은 공의 행장(行狀)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비석에 새길 글을 부탁하였다. 두 분 현자는 구차히 남을 칭찬하는 분이 아니니 그 말이 의당 믿을 만하다. 더구나 군과 나의 깊은 교분이 행장의 글 밖에 있음에랴.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명문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아름다운 한 선비가 있었으니 / 有美一士
기운이 호방하고 재주가 뛰어났네 / 氣豪才良
붙잡아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랐고 / 不扶而直
바람이 없어도 높이 날았네 / 無風而翔
학문에 근본을 두었으니 / 本之問學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 / 何用不臧
돈독하게 효도하고 공경하며 / 篤于孝悌
친척에 은혜 베풀었으며 / 惠于宗族
집안을 엄숙히 다스려 / 肅于家室
법도를 그대로 좇았네 / 準以矩矱
집을 나가지 않고 나라의 가르침을 이루어서 / 不出成敎
고향에까지 미쳤네 / 施及鄕陌
만일 장수(長壽)를 누렸다면 / 苟其永年
재능을 활짝 펴서 / 用克展拓
그 발걸음이 / 庶幾步趨
오현의 아름다운 자취 따를 수 있었을 터인데 / 五賢徽躅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었으니 / 有始无終
하늘을 보니 아득하기만 하네 / 視天茫茫
울창한 이강에 / 有鬱尼岡
그윽한 무덤이 고요하네 / 有侐幽堂
가을 측백나무가 죽지 않으니 / 秋栢不死
지사가 잠든 곳이네 / 志士攸藏
이에 불후를 도모하여 / 載圖不朽
돌에 새겨 밝게 글을 게시하네 / 昭揭石章
남쪽 지방의 기강(紀綱)이 되어 / 用紀南國
무궁한 후세에 길이 전하리라 / 永垂无疆
[주-D001] 강재(剛齋) 송 문간공(宋文簡公) : 송치규(宋穉圭, 1759~1838)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기옥(奇玉), 호는 강재, 시호는 문간이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이다. 유일(遺逸)로 여러 번 벼슬에 천거되었으나 평생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72세가 되던 1830년(순조30)에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아 세손의 시강원 찬선(侍講院贊善)으로 나아가 대사헌 및 이조 참판을 역임하였다.[주-D002] 창을 …… 쳐들어온 : 원문은 ‘조과입실(操戈入室)’로 제자의 뛰어남을 감탄하는 말이다. 한(漢)나라 때 임성(任城) 하휴(何休)가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지었는데, 정현(鄭玄)이 이 책들에 대해 반박하는 저술을 내놓자, 하휴가 읽어 보고 탄식하기를 “정강성(鄭康成)이 나의 실(室)에 들어와 나의 창을 잡고 나를 치는구나.[康成入吾室, 操吾矛, 以伐我乎!]” 하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後漢書 卷35 鄭玄列傳》[주-D003] 남성시(南省試) : 조선 시대 예조(禮曹)가 주관해서 치르는 회시(會試)로, 남성은 예조의 별칭이다. 회시는 초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다시 보이는 과거 시험으로 복시(覆試)라고도 한다. 소과인 생원ㆍ진사시의 경우 회시에 합격하여야 생원ㆍ진사가 되었고, 문ㆍ무과의 경우 회시에 합격하면 급제가 되어 등수를 정하는 최종 시험인 전시에 나아갔다.[주-D004] 어버이에 …… 봉양해서 : 어버이에게 의복이나 음식 등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모의 뜻을 잘 받들어 섬기는 봉양을 하였다는 말이다. 이 내용은 《맹자》 〈이루 상(離婁上)〉 ‘양지장(養志章)’에 자세히 보인다.[주-D005] 금계(襟溪) 이봉수(李鳳秀) : 1778~1852.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자강(子岡), 호는 금계이다. 임로(任魯), 오희상(吳熙常) 등에게 수학하였다. 세마(洗馬)와 의령 현감 등의 벼슬을 지냈다. 뒤에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과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주-D006] 집을 …… 이루어서 : 원문의 ‘불출성교(不出成敎)’는 대학 전(傳) 9장의 “군자는 집을 나가지 않고 나라에 가르침을 이룬다.[君子, 不出家而成敎於國.]”라는 구절을 줄여 쓴 것이다.[주-D007]
오현(五賢) : 노론 쪽에서 일컫는 다섯 분의 유현(儒賢)으로,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성공(文成公) 율곡(栗谷) 이이(李珥),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정공(文正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이른다. 전재(全齋) 임헌회(任憲晦)는 이 다섯 분의 말씀을 모은 《오현수언(五賢粹言)》을 편찬하였다. 남인을 주축으로 한 영남에서는 오현으로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헌공(文獻公)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정공(文正公)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문순공(文純公)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꼽는다. 1610년(광해군2)에 이 다섯 분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는바, 보통 ‘영남 오현(嶺南五賢)’이라고 칭하나, 정암은 영남 출신이 아니고 다만 한훤당에게 수학하였을 뿐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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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영남 오현(嶺南五賢)’이라고 칭하나ㅡ>보통 ‘동방 오현(東方五賢)’이라고 칭하나
*광해군 때 일거에 문묘종사된 5선생을 보통 동방오현이라고 하였고, 간혹 동국오현이라고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동방오현이라고 한다. 영남오현이라는 성어는 고전종합디비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시대 한번도 쓰지 않은 용어인데 어찌 보통 칭한다고 할 수 있나.
간송집(澗松集) 조임도(趙任道)생년1585년(선조 18)몰년1664년
澗松先生續集卷之四 / 祝文○祭文 / 巨濟鄕校東西廡奉安五賢時告大聖文
吾東方五賢從祀之擧。已有成命於萬曆庚戌。上自國學。下至八路州府郡縣鄕校。在在擧行。
동계집(桐溪集) 정온(鄭蘊)생년1569년(선조 2)몰년1641년(인조 19)
桐溪先生文集年譜 / [附錄] / 文簡公桐溪先生年譜
乃欲編晦庵以後諸儒及東方五賢切近之言。爲續近思錄。病未克就。
桐溪先先文集卷之四 / 墓碣 / 長水縣監鄭公墓碣銘 幷序
世稱一蠹先生。乃東國五賢之一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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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21권 / 서(書) / 최가언 제묵 에게 답함 계묘년 1월 〔答崔可言 濟默○癸卯元月〕
보내주신 편지에서 출처(出處)에 대해 운운하신 말씀은 그 정성스러운 뜻을 모두 받들어 알겠습니다. 그러나 고인(古人)이 이른바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義)가 없다.’는 것은 녹사(祿仕)를 가지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와 같은 자가 입은 은혜로운 명은 만만 천한 분수에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만일 정숙자(程叔子 이천 정이)의 역량이 없다면 어찌 감히 무릅쓰고 응할 수 있겠습니까.
담장을 넘어 피하고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진실로 중도(中道)에 부족한 일이지만, 정(情)이 곤궁하고 형세가 절박한 뒤에야 비로소 이것이 지나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D001] 최가언(崔可言) : 최제묵(崔濟默, 1797~1847)으로,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가언, 호는 가암(可菴)이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문인으로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 전력하였다.[주-D002] 고인(古人)이 …… 뿐입니다 : 원문의 ‘불사무의(不仕無義)’는 원래 자로(子路)가 지팡이로 대바구니를 멘 장인(丈人)에게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가 없으니, 장유의 예절을 폐할 수 없는데 군신의 의를 어찌 폐할 수 있겠는가.[不仕無義, 長幼之節不可廢也, 君臣之義, 如之何其廢之.]”라고 한 말인데, 홍직필이 녹사를 말한 것이라고 한 것은 미상이다. 최제묵이 보낸 편지의 어떤 구절이 있어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인다.[주-D003] 담장을 …… 것 : 벼슬을 사양함을 뜻하는 구절이다. 맹자가 “옛적에 신하가 되지 않았으면 군주를 만나보지 않았다. 단간목은 담장을 넘어 피하였고, 설류는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 너무 심하다. 만나보려는 정성이 절박하면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古者, 不爲臣, 不見. 段干木踰垣而辟之, 泄柳閉門而不內, 是皆已甚. 迫斯可以見矣.]”라고 말한 데서 온 말이다. 《孟子 滕文公下》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김창효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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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穉圭 | 1759 | 1838 | 恩津 | 奇玉 | 剛齋 | 文簡 |
강재집 제9권 / 묘표(墓表) / 지평 최공 묘표〔持平崔公墓表〕
최제묵(崔濟默)은 나에게 배운 사람이다. 하루는 자기 조상의 묘지(墓誌) 한 통을 가지고 와 나에게 보여주면서 “나의 13대 묘소에 표석이 있는데 새겨져 있는 것은 지문(誌文)입니다. 세대가 너무 멀어 그 까닭을 알 수 없으나 지금으로부터 4백여 년이 되어 자획이 마모되어 거의 판독할 수 없습니다. 여러 후손들이 함께 논의해서 고치기로 하였습니다. 지문은 도자기로 구워 묻고, 표석의 전면에는 의당 관례에 따라 큰 글씨로 쓰고 깊이 새기기로 하였지만 또한 여러 행 음기(陰記)도 없어서는 안 되므로 참고가 될 만한 글을 뒤져보았으나 지문 이외에는 달리 없습니다. 한 마디 말씀을 내려주시어 빛내주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었으며 또 글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문을 살펴보건대 다음과 같다.
공의 휘는 도원(道源), 자는 호연(浩然), 선계는 삭녕(朔寧)에서 나왔으며 고려 평장사 유가(瑜價)가 그 시조이다. 고조 휘 연함(珚含)은 경전 부사(慶殿副使)를 지냈다. 증조 휘 시옥(時玉)은 사헌 규정(司憲糾正)을 지냈고, 조부 휘 수명(守明)은 사설서 영(司設署令)을 지냈다. 아버지 복린(卜麟)은 좌사간(左司諫)을 지냈으며, 어머니 사천 강씨(泗川姜氏)는 전객 영(典客令) 휘 득봉(得封)의 따님인데 홍무 6년 계축년(1373, 공민왕22)에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이른 나이에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감찰을 두 번 하고, 호조 좌랑과 형조 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발탁되었고, 네 번이나 고을 수령이 되어 가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있었다.
기해년(1419, 세종 원년)에 함안 군사(咸安郡事)로 임명되었고, 경자년(1420, 세종2)에 벼슬을 그만두고 진양(晉陽 진주)으로 돌아와 양친을 효성으로 봉양하고 그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다. 신해년(1431, 세종13)에 모친 강씨 상을 당해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살면서 상기(喪期)를 마쳤으며, 부친 사간공이 작고하였을 때도 또한 똑같이 하였다. 정통 6년 신유년(1441, 세종23) 10월 4일에 작고하였으니 향년 69세이다.
배위 서흥 김씨(瑞興金氏)는 정순대부(正順大夫)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휘 선보(善保)의 따님이다. 경신년(1440, 세종22)에 작고하여 진주성 동쪽 돗골〔猪洞〕 선학재〔仙鶴峙〕 계좌(癸坐) 언덕에 안장하였다가, 공이 죽자 바로 합장하였다.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경부(景溥)는 생원으로 용인 교도(龍仁敎導)를 지냈으며, 차남 경연(景淵)은 부사정(副司正)을 지냈으며, 삼남 경천(景泉) 또한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사남 경시(景時)는 하양 현감(河陽縣監)을 지냈으며, 딸은 직제학 변효문(卞孝文)과 녹사 곽비(郭庇)에게 시집갔다.
아, 공은 고려말 상례의 기강이 무너진 뒤에 앞뒤로 부모상을 당했으나 시묘살이 하면서 상기를 마쳤으니 어쩌면 포은 정선생이 행한 일을 흠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새로운 교화가 막 융성하기 시작하고 옛 풍속이 점점 변화더라도 참으로 공처럼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또 과거 급제를 거치지 않고서도 대간직으로 발탁되어 승진하였으니, 공의 청렴한 절조와 높은 명망이 참으로 그 당시에 존중 받았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시대가 멀어 풍모와 운치를 증명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다만 공의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고 더욱 번창하여 학문과 행실로 선대의 아름다움을 계승하였으니 공이 후손을 보살펴준 덕이 여기서 더욱 징험이 된다. 이에 명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과거는 이미 4백여 년 흘러갔음이여 / 過去旣四百年餘兮
미래는 또 천 년 만 년 가리라 / 來者又千秋萬世
지문을 묻고 또 표석을 세웠음이여 / 旣埋誌而又樹表兮
남긴 은덕은 후손에게 징험이 되리라 / 餘庥可徵於來裔
초동과 목동은 조심하여 밟지 말라 / 樵兒牧豎愼勿蹂躙兮
이곳은 대간을 지낸 고인의 영혼이 잠든 곳이라네 / 是故臺端衣履之瘞
[주-D001] 최공 : 최도원(崔道源, 1373~1441)으로,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호연(浩然)이다. 사헌부 지평, 함안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퇴임한 후에는 부모를 극진히 섬겼다.[주-D002] 최제묵(崔濟默) : 1797~1847. 본관은 삭녕, 자는 가언(可言), 호는 가암(可菴)이다.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의 제자이다. 저서로 《사서의의(四書疑義)》가 있다.[주-D003] 묘지(墓誌) : 죽은 사람의 성명, 생몰년, 행적, 무덤의 소재 등을 적은 글을 말한다. 옥이나 돌에 새기기도 하고 자기로 굽기도 한다. 나중에 무덤의 형태가 바뀌더라도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있도록 매장할 때 넣어주는 것이 보통이다. 광지(壙誌)라고도 한다.[주-D004] 지문(誌文) : 바로 앞의 묘지(墓誌)를 말한다.[주-D005] 함안 군사(咸安郡事) : 함안 군수. 군사는 고려와 조선 초기에 지방 행정 구역의 하나인 군(郡)의 장관을 말한다. 판군사(判郡事), 지군사(知郡事)라고도 하는데 후대의 군수(郡守)와 같다.[주-D006] 새로운 교화가 : 조선 왕조가 개국한 것을 말한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임재완 (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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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재집(溫裕齋集) 윤종섭(尹鍾燮)생년1791년(정조 15)몰년1870년(고종 7)자양백(陽伯)호온유재(溫裕齋)본관파평(坡平)특기사항오희상(吳熙常), 홍직필(洪直弼)의 문인. 조병덕(趙秉悳), 홍일순(洪一純) 등과 교유
溫裕齋集卷之一 / 詩 / 十月。上海藏申公 錫愚 嶺伯之行。
嶠南曾是五贒鄕。盖謂山高水且長。三國衣冠回善俗。一邦旌纛耀恩光。陽生大嶺梅花白。風入東城楊柳黃。遙望雲天征鴈失。先翁阡事漸蒼茫。請先人墓道於申公故末句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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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집(博泉集) 이옥(李沃)생년1641년(인조 19)몰년1698년(숙종 24)자문약(文若)호북애(北厓), 박천(博泉)본관연안(延安)특기사항이민구(李敏求)의 문인. 이현석(李玄錫), 채팽윤(蔡彭胤) 등과 교유
遂下泊于道南書院。院妥麗朝之圃隱先生,我朝之寒暄,一蠧,晦齋,退溪四先生之靈。以蘇齋,西厓,愚伏三先生適焉。而如靜菴趙先生配文廟列五賢。同也不與。以杖屨之遊衣履之葬。在京不在南也。其廟堂廡翼。槩視泮宮之制。而祀典功令。愚蒼二公之講定于河上。命之曰道南。 朝家之所賜。時節官致香祝。祀物亦朝令。彬彬章甫之喟然嘆興者。實關閩之比。非稷下敢擬也。余不持明衣。未敢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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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嶺五賢 若宋六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