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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2010년 9월 8일 / 삼일예배 / 마가복음 15:1-15
■ 미국의 ‘유로 마드리아’라는 이름의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오하이오 주립대학 의학과를 다니며 미인대회까지 나간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녀에게 프러포즈를 했습니다. 그 남자는 호텔 옆 구석진 조그만 사무실에서 사업을 하는, 가진 것도 없고, 대학도 졸업 못하고, 몸도 바짝 마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프러포즈를 받고 “도대체 당신 같은 남자가 나를 어떻게 보고 프러포즈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퇴짜 맞은 이 남자는 40세가 되기 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줄 아십니까? 마이크로소프사의 빌 게이츠입니다. 반면에 빌 게이츠가 프러포즈한 그 여자는 어느 요트업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한 후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계최고의 부자의 아내가 될 수 있었지만,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아마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입니다.
▶ 이처럼 인생은 선택은 중요합니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운명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인생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오랜 전에 이런 광고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금성 TV 광고였던 것 같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가전제품은 거의 10년 이상은 씁니다. TV나 세탁기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을 한 번 사면, 가정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거의 10년 이상은 쓰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제품 하나를 사더라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선택해야 할 기회가 자주 주어집니다. 친구 선택, 학교 선택, 가구 선택, 자동차 선택, 주거지 선택, 직장 선택, 더 나아가 배우자 선택 등 선택해야 할 때를 수시로 만납니다. 그리고 한 번의 선택이 우리 인생의 20년을 아니 40년, 50년을 좌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한번 선택을 잘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에 보면, 10년이 아니라, 100년, 1,000년 아니 앞으로 세상 끝 날까지 영원토록 후회할 선택을 한 한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원래 그는 5대 총독으로 주후 26년~36년까지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두매 지역을 통치한 인물입니다. 헤롯 대왕의 아들 아켈라오가 이 지역을 통치하는 데 실패하자, 로마가 직접 통치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는 팔레스틴의 최고 실권자, 최고 판결자, 최고 결정권자였습니다. 이렇게 그에게는 매우 중대한 직책과 책임이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가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인들을 강하게 억압하는 정책을 수행하는 동시에, 로마제국의 방침에 반대하는 열심당원을 색출하여 처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유대의 총독으로 있을 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이 시간 본디오 빌라도의 잘못된 선택을 교훈 삼아, 우리가 어떻게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1절 /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
여기 ‘공회’란 요즘으로 말하면 국회의사당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산헤드린(Sanhedrin)을 의미합니다. 로마제국은 자신들이 정복한 지역 주민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고 세금을 잘 내면,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결정하면 대부분은 그대로 집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형만큼은 달랐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사형을 판결한다 할지라도, 최종 결정권은 로마 총독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의 사형을 결정하였음에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최종결정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남겨준 것입니다. 빌라도는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원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것이 당시 유대교 지도자인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당국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인 문제로는 예수님을 사형시킬만한 죄목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고소한대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질문하며 확인을 하자,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는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예수님을 고발했지만 예수님은 어떠한 대답도 어떠한 변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으시다는 것을 직감하고 변호의 기회를 주기 위해 “아무 대답도 없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것으로 너를 고발하는가 보라(4절).”라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여전히 침묵하셨습니다.
이제 공은 빌라도에게 넘어갔습니다. 빌라도의 손에 예수님을 사형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형시키지 않을 것인가가 달려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체포된 자 중에 바라바라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7절에서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단순한 좀도둑이나 강도가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실패한 중죄인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월절과 같은 명절 때 죄수 하나를 석방해주는 관습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예수님을 풀어주고 바라바를 사형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 대신 중죄인인 바라바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그는 잘못된 선택으로 말미암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빌라도가 바라바 대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막았을까요? 그가 무슨 이유로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요?
1. 사람들의 여론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사람들의 여론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15절 /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가 누구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습니까?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이나 기준에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여론을 따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여론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던 빌라도와 같은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다른 사람을 어느 정도까지는 의식케 됩니다. 그런데 정작 의식해야 할 하나님보다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구약시대 사울 왕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관심은 사람들의 평판이나, 인정, 인기에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좋은 것은 남기고 가치 없는 것들만 진멸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야훼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야훼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자, 사울은 사무엘의 겉옷이 찢어질 때까지 붙잡고 애원을 합니다.
삼상 15:30 / 내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야훼께 경배하게 하소서.
무슨 말입니까? 요즘 학생들의 표현으로 말하면 ‘나를 백성들 앞에서 쪽 팔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가 지금 이렇게 매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제발 내 신하들 앞과 백성들 앞에서는 나를 좀 높여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는 순간에도 그의 1차적인 관심은 백성들 앞에서의 체면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버리실지라도, 그는 백성들만의 인기만은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사람들의 여론을 더 의식했습니다. 사울 왕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포퓰리즘(populism)’, 즉 ‘인기영합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에도 사울 왕처럼 사람들의 여론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임에도, ‘포퓰리즘(populism)’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신경 쓰기보다 사람들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 어느 식당 뒤에 개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개들은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고 나서 음식 찌꺼기를 던져주면 그것을 가지고 음식 맛이 어떤지 평가하곤 했습니다. 그 때부터 그 요리사는 날마다 개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며 개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 요리사는 쫓겨났습니다. 요리사는 손님들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했었는데 개들에만 신경을 썼던 것입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평가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눈을 두려워하십시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을 의식하는 삶을 사십니다. 사람들의 여론에 따라 흔들이는 삶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준에 따라 사는 우리 모두가 되십시다.
2. 출세에 대한 과도한 욕심 때문에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출세에 대한 과도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유대인들에게 넘겨주고 바라바를 살려 준 것은 출세 때문이었습니다.
요 19:10절에서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하신 것처럼 그는 분명히 권세자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는 그런 막강한 권세의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는 하는 예수냐?(마27:17)”라고 유대인들에게 질문하기까지 하였지만 예수님 대신 중죄인인 바라바를 선택했습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판결을 내린다면, 민란이 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12 /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 이처럼 빌라도에게는 출세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보다 총독의 자리가 더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출세를 위해 발버둥을 쳤던 그가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의 말년의 인생이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여러 역사기록에 의하면 그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는 이유로 주후 36년에 로마로 소환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정치적인 생명이 끝났다고 판단한 그는 자살을 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그의 이름이 그리스도인들의 입에 부끄러운 이름으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벽기도회 때, 매주일 주일예배 때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그의 이름이 꼭 언급됩니다.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 그런데 빌라도와 달리, 출세를 위해서가 아닌 섬기기 위해서 사신 분이 계십니다.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 있는 푸른 십자가. 한국의 작은 예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님이 그 주인공이십니다. 그 분은 191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 의사 얼굴 한번 못보고 죽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소외된 이웃들과 고통을 함께 나눈 진정한 의미의 봉사의 삶을 살다 간 ‘참의사’였습니다. 돈과 사욕을 멀리한 채, 말년에는 원장으로 재직하던 부산 복음병원 10층의 24평 남짓한 옥탑방에 거주하면서, 북에 두고 온 아내와 자녀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안고 45년을 홀로 지내셨습니다. 정부에서 1985년에 이산가족 상봉 방북을 주선했을 때 그 분이 거절하셨는데, 나만 홀로 특혜를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들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서울의대의 전신인 경성의대를 수석 졸업한 후, 국내 최초로 간 절제수술을 성공시킨 당대 최고의 외과 의사였습니다. 의료보험제도가 없었던 시절, 그 분은 부산에서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설립하여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의 치료의 길을 열어주었는데, 이것이 효시가 되어 오늘날 전국민의료보험 시대가 열리는 큰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로 인해 부산시민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막사이사이상 사회봉사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고 많은 상금을 받으셨는데, 상금전액을 청십자 의료조합에 기부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박사님은 가난한 환자에게 당신의 월급봉투를 털어내어 퇴원을 시켜 주는 바람에 항상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로는 치료비가 없어 퇴원 못하는 환자를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 주어 도망시킨 일화들은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이기도 했던 장 박사님을 가리켜 춘원은 ‘당신은 성자 아니면 바보요’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장 박사님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의사로 기억되기보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에 안장된 비문에는 ‘주님을 섬기다 가신 분이 여기 잠들다“’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는 학벌만능주의의, 미모지상주의, 성공지상주의, 물질만능주의의, 출세지상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자신은 물론이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은연중 돈이 많고 출세하는 것이 성공적인 삶인 것처럼 가르치며 기대합니다. 경쟁심과 이기심만 불러일으키며, 나만 잘되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출세가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출세하지 말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왕이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출세해야 합니다. 낮은 자리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지시를 따르는 사람보다 지시하는 사람이 복음을 증거 할 때 더 효과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출세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출세지상주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출세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서슴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빌라도처럼 출세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부리기보다 장기려 박사님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에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양심의 소리를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심령 속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는 마치 비행기의 블랙박스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비행기의 블랙박스는 어지간한 고열에도 끄떡없이 견딜 수 있고, 바다 속에 빠져도 물이 스며들지 않고, 어느 기간 동안 자체에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비행기가 사고가 나면 이 블랙박스를 회수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조사해보면 비행기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는지, 누가 잘못했는지, 비행기가 추락한 이유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 안에 양심이라는 블랙박스를 두셨습니다. 이 양심 블랙박스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습니다.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려고 하면 신호음이 울립니다. 또한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나면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우리 마음속에서 양심이 소리를 칩니다. 그 소리를 듣고 돌이키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14절 상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이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잘못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10절을 봅니다. “이는 그가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러라.”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시기심 때문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7:19에서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아내로부터 예수님이 옳은 사람 즉 죄가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내어 주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빌라도처럼 양심이 소리를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야,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야, 지금은 기도할 때인데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구나! ◯◯◯집사야, 아직도 옛날 습관을 끊지 못하고 있구나?” 등으로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양심이 블랙박스로부터 울리는 신호를 듣고 돌이키면 복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박스로부터 울리는 신호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우리는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결국은 큰 해를 당하게 됩니다.
왜 사람들이 죄를 짓는 줄 아십니까? 마땅히 들어야 할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고, 듣지 말아야 할 유혹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전과자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교도소에서 나올 때는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지!”라고 결심을 했지만, “이번에 한탕만 하고 손 씻자!”는 동료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람들이 불륜에 빠지고 가정이 파괴되는 이유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유혹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혹의 소리는 무시하고 양심의 소리를 들읍시다.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놓치는 가시떨기와 같은 마음 밭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좋은 땅과 같은 마음 밭을 소유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우리 선택에 따라 달라집니다. 선택을 잘하면 성공과 행복이 뒤따르지만, 선택을 잘못하면 실패와 불행이 따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는 선택을 함으로 그도 죽고 그의 후손인 모든 인류에게도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롯은 요단 동편 물이 넉넉한 땅을 선택하였다가 나중에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당할 때, 재산과 사위를 다 잃어버리고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홀아비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팥죽 한 그릇을 선택하였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할 장자의 축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빌라도는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선택함으로 말미암아, 그 선택에 따른 벌을 이미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고, 세상 끝날까지 계속해서 그의 이름은 저주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이처럼 선택은 자유지만, 우리는 그 선택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빌라도와 같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되지 말고, 선택을 잘 하는 사람들이 되십시다. 아무리 손해를 본다 해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아무리 어려워진다 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여 그 선택에 따른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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