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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으로 살리라(2)
2023년 1월 15일 / 시편 1:1-3
김석균 목사 작사∙작곡 나의 남은 생애는 / 1. 나의 남은 생애는 복음의 편지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섬김의 향유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주님의 기쁨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사랑의 샘물되어 살리라 일 년을 살 지 한 달을 살 지 모를 나의 남은 생애 주님이 주신 사랑 주님이 주신 은혜 빚을 갚으며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은혜의 통로되어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축복의 통로되어 살리라 2. 나의 남은 생애는 복 있는 사람으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순백의 영혼으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맡은 일 충성하며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행복한 전도자로 살리라 일 년을 살 지 한 달을 살 지 모를 나의 남은 생애 범사에 감사하며 쉼 없이 기도하며 주님 뜻대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정직한 예배자로 살리라 나의 남은 생애는 하늘에 속한 자로 살리라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이런 예화가 있다. 어떤 초등학교 교사가 하루는 시험 감독을 하다가 반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답안 하나를 못 쓰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다. 옆에 있는 아이는 썼는데 그 애는 못 썼다. 옆에 있는 아이가 발꿈치로 쿡 찌르면서 이거 보고 쓰라고 보여줬다. 그러니까 공부 잘하는 아이가 안 보려고 하고. 쿡 찔러도 안보겠다고. 계속 이렇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보고 썼다. ‘아이구. 저 놈이 시험에 빠졌구나!’ 선생님 마음이 안타까웠다. 시험이 끝나고 아이들이 시험 답안을 다 낼 때까지 그 애는 얼굴이 빨게가지고 앉아있다가 마지막에 답안지를 가지고 나오더니 울먹이며 말했다. ‘선생님! O점 주세요. 제가 하나 보고 썼어요.’ 선생님은 그 아이를 끌어안고 ‘네가 복 있다.’라며 울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 아닌지!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이분법 원리가 1-2절에서 발견된다.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데 반대는 복 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상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눌 때 남녀 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일 중요한 기준점은 바로 복이다. 하나님은 이 땅의 당신의 자녀들을 복 주시기를 원하신다. 기복주의 신앙은 잘못된 것이지만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은 상상 이상으로 많은 복에 대해 말씀하셨다.
더군다나 시편 1편을 시작할 때도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에서도 팔복의 귀한 메시지가 예수님의 입에서 나왔다. 그뿐 아니라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엄청난 말씀을 하셨다. 창세기 12:1-3은 본문을 읽는듯한 생각이 들 정도이다. 2-3절에서 ‘복’이란 말이 5번이나 나온다. ‘네게 복을 내려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무릇 땅 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창 12:1-3 /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셨다. ‘너는 어서 고향을 떠나거라. 한데 어울려 사는 네 친척과 네 집안사람들을 떠나 내가 가르쳐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네 후손이 엄청나게 불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또한 네게 복을 내려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이름을 날리게 하리라. 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을 전해 주는 사람이 될 것이다. 3) 네게 복 빌어 주는 사람에게 나는 복을 내리리라. 네게 저주를 퍼붓는 사람에게는 나 역시 저주를 퍼부으리라. 무릇 땅 위에 살고 있는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으리라.’
복을 제대로 몰라 복에 대한 정의를 잘못 내리고, 엉뚱한 복을 찾아가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고 믿을 때, 성도의 삶에 복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을 때 복은 성도의 삶에 열매로 주어질 것이다.
그런데 본문 1-2절에서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생각하기 쉬운 오해를 3가지를 먼저 밝혔다. 세상 사람이 볼 때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닌 예가 1절에 보면 3가지로 나온다.
1.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창 3:1-6 /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신 들짐승 가운데 가장 교활하고 약삭빠른 것이 뱀이었다. 그 뱀이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이것 보게나 그래 하나님이 정말 너희에게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 열매를 따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시던가?' 2) `아니야,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어떤 것이든 따먹어도 된다고 그러셨어.' 하고 그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3) `다만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셨지. 그 나무 열매는 만지지도 말라고 그러셨어. 만일 그랬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거야.'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말아. 그 열매를 따 먹는다 해도 절대로 죽지 않아. 5) 오히려 그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 눈이 밝아질 거야. 그렇게 되면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 일인 줄 분간할 수가 있게 되지. 다시 말하면 너희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이지. 하나님도 이걸 아시고 그 나무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거야.' 6) 여자가 그 나무를 쳐다보니 그렇게 근사하게 보일 수가 없었다. 또 그 열매도 어찌나 탐스럽게 열렸던지 먹음직스럽기까지 하였다. 그 열매를 따 먹으면 금방이라도 영리해질 것같이 보였다. 그래서 여자는 손을 내밀어 그 열매를 따 먹었다. 또 그 열매를 따서 자기와 한 몸이 된 남자에게도 주었다.
악인의 꾀를 좇아 행복하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복을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복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일본 하네다 공항 근처에 조그마한 일본 교회가 하나 있는데 올림픽 경기를 앞두고 도로 계획상 땅을 싼값에 팔게 되었는데 그것을 교회가 샀다. 그런데 다음 해 일본 정부는 도로를 다시 정리하면서 그 땅을 비싼 돈을 주고 사 갔다. 그래서 교회가 돈을 많이 벌게 되었다. 그러자 제직회에서 “이렇게 큰돈을 벌었으니 이 돈으로 교회당을 짓자”라고 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믿음 좋은 집사가 “목사님, 우리가 거저 받은 돈 가지고 교회당을 지으면 우리 주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이 돈은 거저 받았으니 자선기관에 줍시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우리가 땀을 흘린 정성으로 지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에 동의했다. 거저 받으려고 하는 일확천금의 허영이 마귀의 심리이다. 공무원들이 거저 주는 돈 받는 것이 뇌물이요, 거저 주는 팁을 받으려는 것이 유혹이요, 남의 것을 거저 가지려는 것이 도적이요, 강도이다. 이것이 다 사단이 준 시험이다. 절박한 순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당연하나 항상 거저 받으려는 기도는 위험하다.
달콤한 유혹 / 마귀들이 사람을 파멸시킬 방법을 의논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 줍시다.” “사람들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해 줍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해 줍시다.” 여러 가지 방법이 나왔으나 마귀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한 마귀가 새로운 의견을 냈다. “우리 모두 세상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다가 말합시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원자라고 말해 줍시다. 그리고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자라고 말해 줍시다. 그러나 구원받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합시다.” 결국 이 의견이 채택되었다고 한다.
오래전, 미국 뉴욕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항해하던 증기선 센트럴 아메리카호에 물이 새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근처를 지나던 배가 구조 신호를 받고 달려왔다. 그런데 센트럴 아메리카호의 선장은 구조선 선장에게 물이 새고 있지만 내일 아침까지는 괜찮을 것 같으니 날이 샐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간청했다. 밤중에 승객들을 구조선으로 옮겨 실을 때의 혼잡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구조선 선장은 승객을 빨리 옮겨 태워야 한다고 재차 요구했으나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립시다”라는 대답을 되풀이하였다. 그런데 센트럴 아메리카호는 내일을 보지 못했다. 한 시간 후에 갑자기 불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물속으로 침몰하여 승객 모두는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다. 구원받기를 뒤로 미룬 비극이었다. 사람들에게 뒤로 미루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확실한 내일은 없다. 지금만이 나의 시간이다. 내일로 미루는 것은 마귀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다. 자신 있게 내일이 나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시간을 주신 하나님만이 내일을 보장해 주실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기회이다.
꿀과 파리 / 이솝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창고에 꿀이 흘려 있었다. 이 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와 핥아먹었다. 그런데 꿀맛이 어찌나 좋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그만 날개며 발이 꿀이 묻게 되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물질에 정신이 팔려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가 세상에는 많이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만이 아니라 믿는 자들도 여기에 나오는 파리들처럼 세상의 쾌락과 물질에 빠져 그들의 인생을 망치는 자들이 많다 주님 오심이 가까운 이때 우리 자신들을 점검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히 12:15-17 / 여러분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서로 힘쓰십시오. 여러분 사이에 독초가 생겨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 뿌리에서 나온 싹은 고통의 원인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칩니다. 16) 누구도 성적 범죄에 빠져들거나 에서가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무관심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먹었습니다. 17) 나중에 가서 에서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권리를 되찾으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일을 기억하고 언제나 조심하십시오.
2.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죄인들이 서는 길은 굉장히 넓은 길이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고 하셨다.
눅 18:22-25 /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다가 네 재물을 쌓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23) 그 사람은 이 말씀을 듣자 침울한 표정으로 가버렸다.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이다. 24) 예수께서는 그가 가는 것을 지켜보시다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매우 어렵다. 25)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는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죄인들을 본받지 않고’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NIV 성경에서는 ‘stand in the way of sinners’라고 되어 있다. ‘악인들의 꾀’는 꼭 악인에 의해서 넘어지는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악인이 되어 스스로의 꾀에 넘어지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죄악 중에 하나는 하나님 없이 자신이 판단하고, 자신이 결정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성공의 공식이 있다. 한국 같으면 OO대학을 나오고 OO기업에 취직하면 성공한 것이라는 나름대로 정의가 있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자녀를 가르친다. 그런데 죄인의 길에 서 있다 보면 마냥 행복한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 길은 결코 행복한 길이 되지 않는다.
중국의 문인이자 법학자인 오경웅이 쓴 『시편 사색』이라는 책이 있다. 그는 시편 1편을 묵상하면서 ‘의인과 악인’을 동양의 ‘군자와 소인’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했다.
“군자는 하늘을 닮고자 하나, 소인은 제 주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무리를 좇는다. 진리의 길을 외면하는 무도한 자들은 늘 무리를 짓고 저들끼리 쑥덕이며 자신들의 의를 생산해낸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악을 꾀하는 소인배일 뿐이다. 군자가 그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기 위함이다. 군자가 저어하는 바는 남의 평가가 아니다.”
이 책을 보면서 동양적 사고에서 시편 1편을 가장 잘 이해하고 표현해 낸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말을 듣고, 무엇에 신경 쓰는가? 이것이 복 있는 삶을 살지 말지 갈림길에 서게 한다.
홍관수 선생이 쓴 『나는 착한 아내가 싫다』라는 책에서 ‘자기 꾀에 넘어간 환자’라는 글을 썼는데, 꼭 악인의 길을 가는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다. 조금 소개한다.
진료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환자를 보게 된다. 그런데 진료실에서 유난히 꾀를 부리는 환자가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의사에게 정보를 주지 않는 환자다. 이 의사가 용한 의사인지 돌팔이인지 알아보기 위해 정보를 주지 않는다. 증세를 잘 알아맞히면 용한 의사고 그렇지 않으면 돌팔이라고 생각한다. 증세를 불어보면 ‘진찰해보면 다 아는 거 아닙니까?’ 한다. 진찰 중에서 중요한 진찰이 문진이다. 의사에게 정확하고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으면 환자가 손해다. 나도 가끔은 하나님을 테스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만약에 하나님이 계시고 전지전능하시다면 내가 고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시겠지’ 라고.
두 번째 유형은 주로 당뇨병 환자의 경우다. 평상시에는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병원에 오는 날은 조심해서 조금만 먹고 온다. 혹시 혈당이 높게 나오면 의사한테 야단맞을까 적게 먹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환자도 알아낼 수 있는 검사방법이 있다. 설령 그런 검사를 안 해도 손해는 환자가 보는 거다. 나도 그렇다. 평상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주일날이 다가오면 은근히 조심스러워진다. 하나님께서 모르고 넘어가시면 좋겠는데 하고.
세 번째 유형은 자기가 진단을 내리고 치료 방법까지 정하고 오는 경우다. 간혹 의사도 이런 유도에 넘어갈 수가 있다. 그래서 오진 상태로 잘못된 치료를 받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이런 일이 없겠지만 간혹 내 방법대로 하나님께서 해주시길 강하게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네 번째 유형은 병이 있는데도 병원에 안 오다가 보호자에게 끌려오는 경우다. ‘병원에 가면 틀림없이 진단이 나올 텐데, 그리고 불치병인지 모를 텐데, 아예 모르고 있으면 맘이나 편하지.’하고 병원에 안 오다가 치료시기를 놓치는 경우다. 내 주변에도 이런 사람이 많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교회에 갈 수 없다는 거다. 교회에 가면 자기 죄성이 다 드러나고 결국 죄인이 되고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기도 어려울 텐데 그냥 이대로 살다가 다행히 하나님이 안 계시면 좋은 거지 하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알면서도 죄 짓고 난 후 차라리 하나님이 안 계시면 좋을 텐데’라고 ….
다섯 번째 유형은 건강한데도 큰 병이 있다고 여기며 불안한데도 병원에 가봤자 치료하지 못할 중병이니까 맘 편히 살다가 죽을 때 되면 콱 죽어버리자는 경우다. 미리 병원에 가서 진찰하고 이렇다 할 병이 없다고 판정받으면 얼마나 평안해지겠는가. 이런 사람도 많다. 죽으면 끝인데 하고 싶은 대로 살다가 때가 되어 죽으면 다 끝난다고 생각한다. 이런 환자들은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 이런 환자를 보는 의사의 마음은 답답하기 그지없는데, 이런 죄인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
죄를 짓는 사람 중에 공범이라는 개념이 있다. 공범이 많을수록 죄책감은 줄어든다. 혼자서 누군가 나쁜 짓을 해서 사람을 죽였다면 죄책감을 혼자서 받지만, 나치 전범이나 일본 전범들은 공범으로 전범이 된 사람들이다. 혼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서 지었기에 누가 누구 때문에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그러다 보면 죄책감을 나누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서 악한 일을 하면서도, 죄인의 길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이 행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3.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복 있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이 있는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다. 오만한 자를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을 조롱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오만한 자가 하는 행동은 그 어떤 것이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려는 생각들은 곧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근묵자흑 근주자적(近墨者黑 近朱者赤)’라는 속담처럼 우리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가야 한다. 마태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미혹할 때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시험을 이기셨다. 여호와의 지혜가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 제자의 길에 있을 때, 세상 성공의 길이 아니라도 더욱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장의 의자는 높은 의자이다. 세상은 그 사람이 앉아있는 의자의 높이를 보고 출세를 판정한다. 군대에서 직급이 높아갈수록 명령하면 듣는 사람이 늘어난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만한 자리에 앉으면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오만한 자들이 앉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겸손한 자리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과 마가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한껏 마음이 높아져 있었다. ‘예수님이 이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니, 자신들도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들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이 식사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셨다. 그날 발을 닦아 주신 사람 중에는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할 베드로도 있었고,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있었다. 예수님은 배신한 제자까지 섬기셨다. 그렇다고 하여 가룟 유다가 회개하고 돌이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뒤를 이어야 할 후일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마가복음 10:45에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오만한 자의 자리, 명령할 수 있는 자리가 높은 자리가 아니라 섬길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성경적인 행복의 기준이 된다.
이처럼 세상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을 거두어 내고, 누가 복 있는 삶인가에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때 2절이 등장한다.
시 1:2 / 얼마나 복되랴! 여호와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읽으며 늘 명상하는 이는.
소유나 건강, 자녀들의 진로의 문제가 행복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실 때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날마다 입술 속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율법의 길을 순종하며 걸어가는 사람임을 선포해주고 있다. 이왕 순종하며 걸어가야 할 길이라면 기쁨으로 걸어가자. 사도 바울도 이 길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걸어가지 않았는가.
요 15:7 /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안에 살며 내 말을 자발적으로 따르게 되거든(wish) 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을 구하라.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성경 전체는 사실 하나님을 믿고 복 받은 사람,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복 받은 것이 아니라 중간에 중요한 것이 들어간다. 예수 믿고 말씀에 순종할 때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비결들을 성경 몇 군데에서 찾아본다.
창 1:9-10 / 하나님께서 `하늘 아래 곧 땅 위에 있는 물은 한곳으로 모여 뭍이 드러나게 하여라.' 하고 명령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10)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광경을 보시고 무척 흐뭇해하셨다. 그렇게 보기 좋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뭍을 땅이라 이름 지으시고 한곳에 모여든 물을 바다라고 이름 지으셨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데, 하나님 쪽에서 액션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즉 하나님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행동이셨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피조물의 반응이 나타나는데, 9절에 보니 ‘그대로 되니라’ 다르게 이야기하면 순종이다. 말씀으로 소통하는 것이 하나님의 액션이라면 피조물의 반응은 순종으로 ‘그대로 되니라’라고 나온다. 그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은 10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무척 흐뭇해하셨다)’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고 피조물은 순종하는 존재라는 관계가 성립될 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더군다나 여섯째 날에 사람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셨다. 인간을 창조한 다음에 다른 피조물에게 보여주지 않는 하나님의 극찬이 이루어지게 된 비결은 사람을 흙으로 빚어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서 만들어낸 사람이 다른 피조물보다 아름답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을 비교하여 설명하신 말씀이 있다.
행 13:21-22 / 이때 백성들이 왕을 세워 주실 것을 요구하자 하나님께서는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그들의 왕으로 세우셔서 40년 동안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22) 그리고 그를 물러나게 하신 뒤에는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그가 내 뜻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하고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나누어질 대화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유일한 존재로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께서 대화를 하시면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연 만물은 사실은 순종하는 존재가 아니라 복종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하고 있기에 인격을 가진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가르치면서 따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인생들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책임이다. 그런 인격적인 존재, 로봇으로 만들어 놓지 않으시고, 살아 움직이고 생각하며 알아서 순종하는 존재를 만들어 놓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 심히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인생들이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삶, 다르게 이야기하면 복 받는 삶을 살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정확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덮어놓고 믿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다. 성경을 펼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묵상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 1:7-9 / 힘을 내거라. 마음을 굳세게 먹고 내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가르침을 꼭 지키거라. 그대로 실천하여라.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우습게 여겨서도 안 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라. 내 말을 그대로 따르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모든 일이 잘 풀려나가고 잘되리라. 8) 이러한 가르침이 적혀 있는 이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끊임없이 외워라. 그 가르침을 놓고 낮이든 밤이든 늘 명상하여라. 가르침을 끊임없이 곱씹어 보아라.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다 지키고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 말씀대로 따라 살아라. 그리하면 네 앞길이 평탄하리라. 모든 일이 잘 풀려서 안 되는 일이 없으리라. 9) 내가 네게 분명히 말해 둔다만 힘을 내어라. 흔들리지 말아라. 마음을 굳게 먹어라.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아라.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놀라지도 말아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창세기에서는 ‘복’이라는 단어 대신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단어가 나왔다면, 시편 1편에서는 ‘복’이라는 단어 대신에 ‘형통’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8절은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 40년을 살아오면서 모세에게 인도함을 받아서 가나안 땅 직전까지 오게 되었다. 그 리더십을 여호수아가 물려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지금까지 40년간 모세의 비서였다. 비서는 최고 리더의 고민을 같이하는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은 리더가 얼마나 힘든지를 모른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리더가 얼마나 떨리는지 모른다. 40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고 모세를 욕하고 험담하는 광경을 여호수아는 앞에서 직접 보고 알고 있었다. 그 리더십의 자리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모세만큼 탁월한 능력을 갖추지 못한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서 리더십의 자리에 선다는 것이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여호수아 1:6부터 보면 ‘강하고 담대하라’에서 시작해서 계속 담대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성경에서 담대하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 옆에는 두려워 떨고 있는 여호수아가 있었다. 여호수아가 얼마나 두렵고 떨고 있으면 하나님이 구절구절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말씀을 주셨을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능력이 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이 8절의 말씀이다. 율법의 책을 입에서 떠나지 말고 밤낮으로 묵상하고, 기록된 대로 지키고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꾸불꾸불한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고, 형통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도 마가의 다락방에서 마지막 권면을 하시며 제자들에게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6:33 / 내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일러두는 것은 너희가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서 너희는 많은 시련과 슬픔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하였다.
왕상 2:1-3 / 다윗이 죽을 날이 가까운 줄을 알게 되자, 자기의 아들 솔로몬에게 이와 같이 유언하였다. 2) ‘나는 이제 내 삶을 다 살고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게 되었다. 이제 너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대장부가 되도록 힘쓰거라. 3) 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항상 노력하여라. 모세의 책에 기록된 그분의 모든 계명과 지시대로 살아라. 그러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잘될 것이다.’
성경에 나와 있는 형통이라는 단어를 다 찾아보니 항상 형통이 등장할 때마다 말씀을 지키라는 명령이 나온다. 형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윗은 절대로 필요한 사람이었다. 다윗의 리더십은 너무나 탁월하고 완벽했다. 그런 다윗도 죽는 날이 임박해지고 있었다. 그때 아들 솔로몬을 불러서 명령, 즉 유언을 하였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어떤 유언을 하는가? ‘너는 행정을 잘하라, 군사력을 키우라, 누구를 숙청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겸손하게 자신이 이제 가게 되었으니 자신이 없더라도 너는 대장부가 되라’라고 말하고 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열왕기 2:3에서도 여호수아 1:8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결국 말씀을 알고 그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인생길을 인도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말씀이 성경에 참으로 많다.
계 1:3 / 만일 여러분이 이 예언을 교회에서 낭독한다면 여러분은 주께서 주시는 특별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또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 예언이 실현될 때가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시 1:2 / 얼마나 복되랴! 여호와의 가르침을 기뻐하고 그 가르침을 밤낮으로 읽으며 늘 명상하는 이는.
이어서 나오는 말씀도 요셉이나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창 49:22-26 / 요셉아, 너는 물가에서 뛰노는 들나귀 같아 샘가 덮은 무성한 나무같이 싱싱하여라. 그 가지 무성하여 담 밖까지 뻗었구나. 23) 원수들 맹렬히 덤벼들지만 화살통 메고 화살을 쏘아대며 득달같이 달려들지만 24) 요셉의 활이 도리어 더 꿋꿋하고 그 팔의 힘 오히려 더 든든하여라. 전능하신 하나님 야곱의 엘 샤다이가 도와주셔서 이스라엘의 지키시는 이, 목자께서 도와주셔서 든든하여라. 걱정 없어라. 25) 그를 도우시는 이, 네 아비의 하나님이시라. 네게 복내리시는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 엘 샤다이시어라. 위에서 비처럼 복을 쏟아 부으시리라. 땅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물처럼 복을 솟구치게 하리라. 가축떼 부쩍부쩍 불어나게 하시리라. 자식들 무럭무럭 자라게 하시리라. 한없이, 헤아릴 수 없이 불어나게 하시리라. 26) 저 산을 보아라. 태고적부터 굳건히 서 있는 저 산을 보아라. 구름까지 솟아 맞닿는 저 산을 보아라. 네가 받을 복이 이보다도 더 많으리라. 이 아비가 받은 복, 그 복을 네가 물려받을 것이기 때문이라. 요셉아, 너는 네 형제들 가운데에서 훨씬 더 뛰어나리라.
시 1:3 / 이런 이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하리라.
다시 시편 1편으로 돌아가자. ‘묵상하는 사람이 어떤 삶을 사는가’가 3절에 나와 있다. 복이라는 단어가 형통이라는 단어와 교차적으로 계속해서 쓰이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나무라면, 허허벌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냇가에 심겨 있는 나무라면 다른 데 있는 나무는 다 메말라도 시냇가에 옆에 심어진 나무는 시내로부터 물을 끌어 올리고, 땅에서부터 영양분을 끌어 올린다. 그리고 봄이 되면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기 시작한다. 새로운 잎사귀와 꽃들이 만발하고,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다시 열매가 맺히는 것이 주목해야 할 형통의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면 형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는 것으로 형통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통은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잘되어서 열매가 맺히고 꽃이 피어지는 것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고 선한 영향력이 있는 것을 말한다.
나무가 과실이 많아지고 잎사귀가 많아지면 누가 행복한가! 나무 자체가 행복한가! 보기에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면 나무의 주인인 농부의 마음을 기쁘게 한다. 그리고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늘에 쉴 수가 있다. 짐승들은 나무에다 둥지를 틀 수 있어 좋은 것이다. 성경적인 형통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형통의 열매를 나만 다 먹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형통과 축복의 통로가 되어 나를 통해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는 것임을 3절이 말씀해주고 있다.
시 1:3 이런 이는 시냇가에 옮겨 심은 나무 같아서 철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나날이 푸르리니 하는 일마다 끊임없이 번창하리라.
창 49:22-26 / 요셉아, 너는 물가에서 뛰노는 들나귀 같아 샘가 덮은 무성한 나무같이 싱싱하여라. 그 가지 무성하여 담 밖까지 뻗었구나.
행 1:8 / 그러나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는 권능을 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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