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시장
충청도 땅에서의 첫 번째 순교자
?〜1793, 세례명 베드로, 홍주에서 옥사
원시장(베드로)은 충청도 홍주(洪州) 땅의 부유한 양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시장' 은 그의 관명(冠名)이다. 고향은 '윽전리’ 라고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어느 마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다만. 그의 성격이 사납고 야성적이어서 별명이 호랑이였다고 한다.
수천년 동안 목숨을 보전해주는 약을 가지고 있소
그는 쉰다섯 살이 되던 1788년 혹은 1789년 무렵.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게 되었다. 사촌 형인 원시보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게 된 원시장은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이것이 바로 진리’ 라는 생각을 가졌고, 즉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직 세례는 받지 못하였다.
예비 신자가 된 순간부터 원시장은 천주교 교리를 양약(良藥)으로 생각하였고, 좀 더 일찍 그 약을 먹지 못한 지난날의 헛된 세월을 한탄하였다. 그리고는 이 진리를 좀 더 올바르게 깨우치고 실천하려는 마음을 품고, 어느 날 갑자기 가족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집을 떠났다. "나는 50년 이상을 무익하게 살아왔다. 내가 돌아오면 내가 떠난 까닭을 알게 될 것이다. 아무 걱정들 말고 기다리지 마라.”
이후로 가족과 친지들은 1년 이상이나 아무런 소식도 들올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원시장이 나타나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지난 50여 년 동안 나는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나 지금은 수천 년 동안 목숨을 보전하게 해주는 약을 가지고 있소. 그것을 내일 설명해 주리다”
이튿날 워시장은 친척들을 모두 모아 놓고 이 세상의 시초와 마지막, 만물을 창조하고 보존하시는 하느님의 존재, 원죄와 강생, 하느님의 계명, 천당과 지옥 등 지난 1년 동안 스스로 깨우친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기를 “자, 이것이 착한 뜻을 가진 사람 누구나가 영원히 사는 방법이오. 여러분은 모두 내 말을 내 유언으로 알고 나처럼 천주교를 신봉하시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날부터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원시장의 말보다는 그가 보여 준 착한 모범 때문이었고, 그가 스스로 거둔 승리였다.
주변 사람들은 특히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믿지 않는 이들에게 권유하는 열성에 감탄하였다. 원시장은 30가구 이상을 입교시켰는데, 그의 열성은 비신자들 앞에서까지 항상 천주교의 규칙을 지킬 정도로 대단하였다.
당시 홍주 일대에는 이미 천주교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으므로 관가에서도 항상 이 지역을 주시하고 있었다. 특히 원시장과 그의 사촌인 원시보는 열렬한 신자로 인근에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던 중 1791년에 신해 박해가 일어나자 홍주 목사는 곧바로 포졸들을 풀었고, 포졸들은 먼저 원시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때 원시보는 친구들로부터 포졸들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다른 곳으로 피신한 상태였다. 윽전리에 온 포졸들은 원시장을 붙잡고 "자네 사촌이 어디로 갔는지 빨리 대라’며 채근하였다. 이에 그가 “죽기가 무서워서 숨었소. 그가 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오”라고 대답하자, 포졸들은 원시보 대신 원시 장을 홍주 관아로 끌고 갔다.
그곳 영장(營將)은 그에게 천주교 신자인가를 묻고는 “다시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하느님을 배반하라. 그러면 나는 사또께 그 모든 소문이 순전히 모함이었다고 보고하겠다. 그러면 너는 곧 풀려 날게야”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을 배반할 수 없었던 원시장은 결국 옥에 갇혔고. 그 후에도 계속 배교 하라는 독촉을 받았다.
그러나 여전히 배교를 거절하자 홍주 영장은 그를 목사 앞으로 끌고 갔다. 이때 목사는 또다시 같은 질문을 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계속되는 거절에 화가 난 목사는 형리들에게 주리를 틀라고 명하고. 이어 치도곤(治盜棍) 70
도를 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원시장은 이 모든 것을 견디면서 하느님과 부모님께 대한 사람의 본분을 설명한 뒤, 비신자들이 행하는 미신 행위의 허망함과 참된 도리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옥으로 끌려갔다. 얼마가 지난 뒤 목사와 영장은 다시 원시장을 끌고 오도록 한 다음 예전과 같이 질문하였으나,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는 다시 주리를 틀리고 이전보다도 더 혹독하게 치도곤을 맞았다. 살점이 너덜거리고, 두 어깨뼈는 부러졌으며, 등뼈는 으스러져 허옇게 드러났다. 이렇게 참혹한 상태로 원시장은 옥으로 다시 끌려갔다.
이러한 고통에도 그의 얼굴에는 만족과 기쁨의 빛이 넘쳤고, 옥졸과 아전뿐만 아니라 포졸들에게도 교리를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신자 하나가 그를 보기 위해 옥으로 찾아왔는데, 이때 원시장은 그로부터 '베드로’ 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그때까지 예비 신자였었다.
저놈은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
수개월이 지나자 홍주 목사는 모든 것을 단념하였다. 누구든지 형벌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인데, 원시장만은 오히려 믿음이 강해져 신앙을 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믿음은 형벌을 집행하는 형리들과 옥졸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모든 관리에게 두려움을 줄 정도였다.
목사는 그동안 공주에 있는 충청 감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년 말에는 감사로부터 원시장을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세 번째 문초 때에는 어마어마한 형벌 도구들을 준비하였고, 겁을 주려는 속셈에서 주위에 수많은 포졸들까지 세워 놓았다. 목사는 다시 한번 그에게 말하였다.
“네 목숨을 구해 주려는 마음에서,그리고 네 마음을 좋은 길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모든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네가 아무 말도 듣지 아니하고 죽기를 고집스럽게 원하므로 나는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그랬더니 너를 쳐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배교하지 않으면 죽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라.”
하루 종일 고문이 계속되었지만, 원시장은 이를 용감하게 견디었다. 이제 그의 몸은 하도 으스러져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고문이 끝났을 때는 옥졸들이 그를 둘러 업고서야 겨우 감옥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손으로 음식을 넣어 주어도 삼키지 못할 정도였다.
마침내 홍주 목사는 마지막으로 혈육의 정에 호소해 보기로 하였는데, 그를 끊임없이 찾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시장은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니 제 마음이 크게 움직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친히 저를 부르시는데, 어찌 그분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그들은 형리들을 시켜 사형수에게 관례로 주는 음식을 주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죽임으로써 이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하였다. 형리들은,이전보다 더 미친 듯이 매질을 하였으나 죽지 않자, 오히려 포졸과 형리들이 기진맥진하여 서로 말하기를 "이놈의 죄인은 매를 맞는 것을 느끼지 못하니 어떻게 끝장을 내면 좋겠소" 하였다.
원시장은 어렴풋이 그들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매를 맞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여기에 오셔서 저를 직접 굳세게 해주십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미친 듯이 “저놈은 틀림없이 귀신을 부리는 놈이다”라고 소리치면서 더 세게 매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매질만으로는 원시장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한 목사는, 마침내 그를 결박한 뒤 물을 부어 추운 한밤중에 내놓아 얼려 죽이라고 명령하였다. 이내 굵은 밧줄에 묶여진 원시장의 몸에 물이 뿌려졌다. 밤이 되자 그가 덮어쓴 물은 얼음으로 변하여 온몸이 얼음 덩어 리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만을 생각 하였다.
그런 다음 원시장은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하느님께 목 숨을` 바쳤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둔 것은 닭이 두 번째 쾌를 칠 무렵이었으니, 때는 1792년 12월 17일(양 1793년 1월 28일)로, 그의 나이 예순한 살이었다.
충청도 땅에서 탄생한 첫 번째 순교자의 모습은 바로 이러하였다. 그러나 그의 용감한 순교는 여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충청도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어 더 많은 순교자의 피가 그 위에 물들여질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